엉망진창
송석현이 친 공은 낮고 빨랐다.
공은 울브스의 유격수 이용철에게 날아갔다.
이용철은 공을 잡기 위해 자리에서 기다리기보단 앞으로 달려 나갔다.
비가 와서 미끄러운 날씨에는 바운드가 빠르고 불규칙하다.
공이 빠른 만큼 공을 막기만 해도 이닝 종료인 상황.
회전을 잔뜩 머금은 공이 그라운드에 닿는 순간 ‘퍽!’ 소리가 울렸다.
“컥!”
이용철은 문자 그대로 대자로 쓰러졌다.
2루로 뛰던 김인환과 1루로 뛰던 송석현은 베이스를 밟은 후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확인했다.
“의료진! 의료진 불러!”
“구급차! 구급차 어딨어!”
울브스의 내야수들이 쓰러진 이용철에게 달려왔다.
이용철의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켰다.
“아, 이게 무슨 일이죠? 이용철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쓰러져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느린 화면이 나오고 있는데요. 이용철 선수가 불규칙 바운드에 얼굴을 맞은 거 같습니다. 그것도 얼굴 정중앙 코하고 광대, 입술 이 부근을 맞은 거 같은데……. 일단 피가 기도로 넘어가지 않게 응급처치가 필요한 거 같습니다.”
“이거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용철 선수는 수비를 잘하는 선순데 바운드가 예상외로 너무 높게 튀어 올랐네요.”
“저기 보시면 그라운드의 잔디와 흙의 경계가 보이실 겁니다. 첫 바운드가 어디로 떨어지느냐, 이걸로 내야수들은 바운드를 예측하고 움직이는데 하필 공이 정확히 경계에 들어갔어요. 본인은 그라운드의 잔디 부근에 맞춰서 바운드를 예측한 거 같은데 살짝 둔덕이 올라온 부근에 맞으면서 공이 확 튀어 오른 거 같습니다. 송석현 선수의 타구도 워낙 강하고 회전도 많아서 예상보다 더 강하게 튀어 올랐구요.”
“이용철 선수의 부상이 심각해 보이는데요……. 괜찮을까요?”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저 정도로 다쳤다면 올 시즌은 이미 아웃입니다. 빨라도 내년 시즌 중반은 지나서 복귀할 거로 보이네요. 피가, 어우…… 저 정도로 흘렸으면 정말 큰 부상이거든요.”
잠실 구장이 숙연해졌다.
구급차가 바로 그라운드에 들어와 이용철을 실어 갔다.
잠실 구장 관리 팀이 그라운드의 피를 닦아 내고 내야를 정돈했다.
한 팀의 선수가 크게 다쳤다.
하필 잠실 라이벌 대결에서 벌어진 일이다.
얼마 전에는 벤치 클리어링까지 나왔던 상황이었던 만큼 혹 일이 커질까 걱정한 심판은 분위기가 정리되기도 전에 경기를 재개시켰다.
“유격수에는 송지훈 선수가 나옵니다. 멀티 내야 백업 선수죠. 경험도 풍부하고 유격수, 2루수, 1루, 3루 모든 내야를 맡을 수 있는 선숩니다.”
“오랫동안 울브스의 내야를 책임져 온 베테랑 선숩니다. 이용철 선수의 빈자리를 잘 메워 줄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마운드에는 마크 로저.
10분 넘게 경기가 중단된 여파는 선발투수에겐 뚜렷하게 나타났다.
선발투수가 가장 힘들어하는 이닝은 1회.
심판의 스트라이크존에 적응해야 하고, 상대 타자에 맞춰 자신의 컨디션도 조절해야 한다.
기껏 맞춰 놨던 영점이 흔들린 타이밍에 유선호가 타석에 들어섰다.
팡!
팡!
연달아 높게 들어가는 공.
투 볼이 나오자 로저가 손을 한번 꽉 쥐었다 폈다.
로진을 손에 바른 후 로저가 택한 공은 커브.
포심 제구가 제대로 되질 않을 때 투수들은 변화구를 던지면서 감을 잡곤 한다.
특히 커브는 제구가 안 잡힐 때 투수들이 가장 애용하는 구질 중에 하나였다.
커브를 제대로 던지기 위해선 릴리스 포인트와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영점이 안 맞는 직구를 고집하는 것보다 영점이 안 맞는 직구를 보여 준 후 커브 하나를 섞는 게 카운트를 잡는 데도 유리한 만큼, 지금 이 타이밍에 커브를 택한 건 군더더기 없는 선택이었다.
다만 한 가지.
투수들이 영점을 잡을 때 변화구, 그것도 커브를 자주 선택한다는 건 투수들만 아는 노하우가 아니었다.
특히나 경험 많은 베테랑은 본능적으로든 경험적으로든 잘 알고 있었다.
탕!
유선호의 스윙엔 망설임이 없었다.
투 볼 노 스트라이크.
타자가 힘껏 방망이를 돌리기엔 더없이 좋은 카운트였다.
“큽니다! 커요! 큽니다! 담장 넘어가나요? 넘어갑니까? 넘어~갔습니다! 유선호의 스리런! 유선호가 1회부터 스리런을 터뜨립니다! 우측 담장을 넘겨 버리는 괴력포! 잠실의 담장은 유선호를 막지 못했습니다.”
“울브스는 속이 쓰리겠어요. 주전 유격수가 다친 것도 모자라서 1회 2아웃에 3점을 내줍니다.”
“리빙 레전드 유선호가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 줍니다.”
“유선호 선수가 KS포에 가려져서 그렇지 장타력도 충분하거든요. 시즌마다 20홈런 정도는 충분히 칠 수 있는 타잡니다.”
울브스 벤치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울브스의 장태섭 감독은 주먹을 꽉 쥔 채 천천히 자기 허벅지를 두드렸다.
로저는 다음 타자에게 볼넷, 다음 타자에겐 안타를 내주며 또 실점 위기에 몰렸다.
삼진으로 추가 실점을 막았지만 1회부터 일곱 명의 타자를 상대하며 진땀을 뺐다.
“자 자, 모여 봐.”
고트의 수비 코치 안영재가 선수들을 모아 놓고 얘기를 꺼냈다.
“아까 봐서 알겠지만 지금 잔디가 물을 먹어서 바운드가 빠를 거야. 내야는 좁히고 외야는 넓힌다. 내야는 다이렉트로 잡거나 쇼트바운드로 잡아. 외야는 다이렉트로 잡을 거 아니면 차라리 안타를 주더라도 바운드 길게 잡고. 알았어?”
“네!”
“흐름은 우리한테 넘어왔어. 욕심 부릴 거 없어. 줄 건 주고, 우리가 가져갈 것만 가져가자.”
고트의 선발투수 멕킨지가 마운드에 올랐다.
멕킨지는 첫 타자부터 삼진을 잡아내며 쾌조의 출발을 보였다.
문제는 2번 타자 정수영 타석에서 터졌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싱킹 패스트볼에 정수영의 배트가 나갔다.
정수영은 톱 핸드를 몸에 바짝 붙이면서 공을 억지로 퍼 올렸다.
“2루수~ 놓쳤습니다. 정동규 선수의 글러브를 넘어가는 공. 정수영 선수가 1루 베이스를 밟습니다.”
“방금은 정상 수비 범위였다면 충분히 아웃시킬 수 있는 공이었는데 너무 앞에 나와 있던 거 같네요. 멕킨지 선수가 땅볼 유도에 능한 만큼 내야 수비를 촘촘히 한 거 같은데, 고트 입장에서는 아쉽겠어요.”
발 빠른 주자 이후 나온 타자는 좌타자 정인하.
좌투수에겐 오히려 더 쉬운 상대였으나 정인하는 멕킨지의 초구를 우중간으로 보내며 1사 1, 3루를 만들었다.
“멕킨지 선수가 오늘 안타를 많이 맞네요. 땅볼이 나오지 않습니다.”
“울브스에서도 준비를 많이 한 거 같습니다. 지금 보면 다 퍼 올리는 스윙이거든요? 그렇다고 스윙을 크게 돌리지도 않습니다. 짧고 간결하게 퍼 올리는 스윙. 그라운드 볼 유도가 많은 투수에게 딱 맞는 처방입니다. 그동안에는 알고도 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감을 잡은 거 같아요.”
“멕킨지 선수의 장점이 그라운드 볼 아닙니까? 그라운드 볼이 막힌다면 상당히 곤란할 거 같은데요.”
“멕킨지 선수의 구종이 투심, 커터, 체인지업 이렇게 세 가집니다. 좋게 보면 공이 오는 코스가 비슷해서 정타를 때리기 어려운데 다른 측면으로 본다면 궤적만 조금 다를 뿐 타이밍이 비슷해서 타이밍 잡는 게 용이합니다.”
다음 타자는 4번 타자 강제관.
강제관이 나오자 울브스 팬들도 응원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제관, 제관 강제관 헤이! 강제관 헤이! 강제관 헤이!”
송석현은 숨을 한번 골랐다.
강제관마저 배트를 짧게 잡고 나왔다.
장타에 욕심을 부리기보단 정확하게 맞추겠다는 심산이다.
잘 보고, 잘 고르는 타자다.
장타 욕심마저 버린다면 3할은 우습게 칠 수 있는 타자를 어떻게 승부해야 할까.
멕킨지는 송석현을 보며 사인을 기다렸다.
송석현은 잠시의 망설임 끝에 초구부터 파격을 택했다.
“오케이, 오케이.”
멕킨지가 미간을 좁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멕킨지가 초구를 던지자 강제관이 움찔했다.
-스트라이크!
“초구, 몸 쪽에 공을 바짝 붙여 버립니다.”
“몸의 높은 쪽으로 꺾여 가는 커터였습니다. 상당히 위험한 공인데 과감하게 사용하네요.”
“강제관 선수도 초구로 저렇게 위험한 공이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거 같네요.”
강제관이 숨을 한번 골랐다.
맞을 땐 맞더라도 쉽게 가는 공을 주지 않겠다는 고트 배터리의 각오가 보인다.
타자 몸 쪽으로 꺾여 들어오는 변화구는 타자가 가장 치기 쉬운 공이다.
타자가 가장 어려워하는 공이 타자 바깥쪽으로 빠지는 변화구인 것과는 반대다.
멕킨지의 커터는 통상적인 변화구와 다른 만큼 몸 쪽 변화구라고 해도 쉬운 공은 아니지만 초구부터 대놓고 몸 쪽을 찔렀다.
어린 포수의 객기일까, 포부일까.
강제관은 스트라이드를 손가락 두 마디 정도를 줄여 타석에 섰다.
“제2구!”
멕킨지가 던진 공은 낮은 쪽으로 오는 커터.
강제관은 짧게 퍼 올리는 기분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탓!
퍽!
“아!”
강제관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놀란 관중, 콕 집어 얘기해 울브스의 팬들이 탄성을 질렀다.
“강제관 선수가 쓰러졌습니다. 파울볼이 강제관 선수의 종아리에 맞았어요.”
“아이고, 종아리는 손가락으로 눌러도 아픈 부위거든요. 하필 공이 그리로 가 버렸네요. 아, 오늘 울브스 안 풀립니다. 종아리에 맞았다면 저거 오래갑니다. 파워풀한 스윙이 어려울 거 같은데요.”
“강제관 선수가 제대로 서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통증이 크다는 얘기겠죠?”
“뼈에 안 맞은 건 다행입니다만…… 참, 안타깝습니다.”
울브스 장태섭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조한 얼굴로 강제관을 살피는 코치의 사인을 기다렸다.
코치는 강제관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더니 손으로 엑스를 그렸다.
“……하.”
장태섭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몸을 떨었다.
주전 유격수, 3루수의 이탈.
종아리에 맞았다면 최소 일주일 이상 여파가 간다.
핫코너 3루 수비를 못하는 건 당연하고 타석에서도 지명타자로 서기 어렵다.
“고트 저 개……!”
욕이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품위를 생각해 꾹꾹 눌렀다.
코치는 강제관의 종아리에 연신 파스를 뿌렸다.
강제관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일으켜 주세요. 이번 타석 서겠습니다.”
“안 돼. 지금 뛰면 너 종아리 올라와. 종아리 올라오면 더 안 좋아지는 거 알잖아?”
“이번 타석만 서겠습니다. 코치님, 부탁드립니다.”
“이미 사인 보냈어. 너 교체해야 돼.”
“코치님, 부탁드립니다. 이번 타석이라도, 제발요.”
코치는 강제관의 종아리를 문질렀다.
강제관은 상체를 일으키곤 코치의 눈을 바라봤다.
“어차피 왼쪽 종아리예요. 이 정도면 타격할 수 있어요.”
“하, 알았다. 감독님한테 다시 사인 보내 볼게.”
강제관은 코치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제관이 식은땀을 닦아 내는 사이 코치가 벤치와 사인을 교환했다.
장태섭 감독은 이번 타석까진 서 보라고 사인을 보냈다.
잔여 경기 동안 강제관은 경기에 제대도 뛸 수 없다.
‘한 타석 정도는 맡겨도 되지 않을까?’라는 게 장태섭의 생각이었다.
“후우우.”
강제관이 숨을 고르며 타석으로 들어왔다.
송석현은 강제관의 엉덩이를 털어 주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후.”
홈에 앉은 송석현이 멕킨지에게 사인을 보냈다.
멕킨지가 던진 공은 바깥쪽으로 빠지는 투심.
강제관이 무릎을 꿇으면서 공을 쳤다.
공은 정타가 됐으나 힘은 없었다.
2루수 정동규가 공을 잡고 바로 1루로 토스.
병살이었다.
“더블플레이! 여기서 더블플레이가 나오네요. 오늘 울브스가 정말 안 풀립니다.”
“코스는 좋았는데 공이 뜨질 못했어요.”
강제관은 병살이 나오자 헛웃음을 터뜨렸다.
“야아, 너는 참…….”
강제관이 송석현을 보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우타자가 왼쪽 종아리에 부상을 입었다.
우타자에게 왼쪽 다리는 디딤발이다.
우타자는 왼 다리를 쭉 펴면서 스윙하는데 타자의 몸 쪽에서 먼 공이 온다면 부득이 몸의 중심을 바깥쪽으로 옮겨야 한다.
왼 다리가 축력만 받는다면 몸의 회전력을 골고루 나눠 받을 수 있지만 만약 여기에 횡력까지 받는다면 종아리에 더 많은 부하가 걸린다.
강제관이 바깥쪽 공을 치기 위해 무릎을 굽히는 순간 종아리 통증은 배로 늘었다.
강제관이 공에 제대로 힘을 싣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밸런스가 무너진 상태에서도 공을 퍼 올렸다는 건 강제관의 재능을 보여 주는 단면이었지만, 재능도 부상을 넘어설 순 없는 법이다.
투수가 몸 쪽으로 공을 던지기 미안해서 일부러 바깥쪽으로 던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송석현이 자신을 보고 사과하자 강제관은 노림수였다는 걸 확신했다.
“죄송합니다.”
“……후. 됐다.”
강제관은 절뚝거리면서 벤치로 돌아갔다.
속에서 열불이 치솟지만 어쩌랴. 이것도 승부의 일환인 것을.
“괜찮아?”
코치가 강제관의 종아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강제관은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어려울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에휴.”
강제관의 부상은 올 시즌 잠실 라이벌 매치의 상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