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200화 (200/201)

라이벌은 외나무다리에서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오늘, 다치지 말고 잘해라.”

“네, 네!”

송석현이 가방을 둘러멘 채 집을 나섰다.

긴 팔에 청바지.

깊게 눌러쓴 야구 모자.

가을 잠바는 없었었지만 거리에는 버버리코트를 입은 여자들이 하나둘 지나갔다.

점심시간 도착한 잠실 구장.

라커룸에 가자 이미 다른 선수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벌써 오셨어요?”

“오야. 왔나?”

“석현이 너도 일찍 왔네?”

“네. 오늘은 조금 더 일찍 왔죠.”

라커룸에 있는 선수들은 어림잡아도 열 명 내외.

송석현은 핸드폰을 꺼내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식사는 하셨어요? 너무 일찍 오신 거 아니에요?”

“지금 마, 밥이 넘어가나?”

유선호의 말에 김정률이 대꾸했다.

“조금 전까지 배고프다고 무한 리필 집 가자고 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어이, 김정률이. 니는 인마, 아 있는 데서 선배 기를 죽여서 되긋나?”

“그래서, 형. 밥 먹으러 안 갈 거야?”

“밥은 묵어야지.”

“그런데 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그냥 하는 말인지. 하이고, 참. 내가 농담도 허락 맡고 해야 카나?”

김정률이 허리를 풀면서 송석현에게 물었다.

“너는 밥 먹고 나왔어?”

“아뇨. 저도 나와서 먹으려고 그랬죠.”

“우리도 다 안 먹었거든. 어떡할까? 나가서 먹을까, 시켜 먹을까?”

송석현 대신 유선호가 대답했다.

“오늘 같은 날은 배달 음식 안 돼. 다 기름지잖아.”

“맨날 치킨, 피자, 짜장면 먹는 분이 왜 이러세요오?”

“그래도 오늘은 담백하게 한식으로 먹어야 탈이 없다. 무조건 안전하게. 어이?”

유선호가 선수들을 끌고 자신의 단골집으로 향했다.

단골집 앞에 선 선수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유선호를 쳐다봤다.

“한식 뷔페잖아요, 여긴.”

“그래. 이런 데가 최고다 아이가. 여서 비빔밥 해 묵으면 최고다, 최고.”

운동선수들이 뷔페집을 갔으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유선호는 가볍게 먹는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접시를 가득 채워 여섯 번을 비웠다.

송석현과 김정률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한 그릇을 천천히 비웠다.

“시간 빨리 간다, 그치?”

김정률의 물음에 송석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벌써 10월이라니. 시즌이 엄청 길었던 거 같은데 어느새 10월이네요.”

“너랑 만난 게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는데 곧 포시네.”

“아직 잔여 경기 남았잖아요. 3경기.”

김정률이 수저를 내려놨다.

“그러게. 하필 또 울브스냐. 아이고, 운도 더럽게 없지. 시즌 내내 우취(우천 취소의 줄임말. 비가 와서 야구 경기가 취소되는 일.)도 없이 달려왔는데 딱 남은 잔여경기 3경기가 울브스네.”

“울브스가 지금 웨일스랑 아주 난리 나지 않았어요?”

“울브스가 우리한테 3연패 당하고 웨일스가 스윕하면 순위가 바뀔걸. 나도 우리 팀이 아니라 자세히는 몰라. 하지만 확실한 건 울브스 애들 지금 독이 올라도 잔뜩 올랐다는 거야.”

“저번에 우리랑 별로 안 좋았잖아요. 벤클도 있었고.”

“그래서 진짜 조심해야 돼. 걔들이 일부러 벤클할 수도 있어.”

“왜요? 분위기 잡으려고요?”

“어쨌든 더 아쉬운 건 걔들이잖아.”

“우리라고 여유로운 건 아니잖아요. 페가수스랑 계속 1경기 찬데.”

“우린 1위냐, 2위냐 요거잖아. 울브스는 포시를 가느냐 마느냐라고. 우리야 2위를 해도 대선전이지만 걔들 이번에 포시 못 가면 대형 사고야, 대형사고. 감독이 갈리는 수준이 아니라 단장이랑 사장이 갈려도 할 말 없을걸.”

“네? 사장이 갈려요?”

“걔들은 10년 연속인가 포시 갔을걸. 지금도 기사가 빵빵 터지는데 포시 못 가 봐라. 볼만할 거다.”

“그 정도구나…….”

김정률이 팔짱을 꼈다.

“그래서 걱정이야. 얘들은 뒤로 밀리면 진짜 끝장이거든. 포시 탈락해 봐라. 애들 연봉도 칼삭 들어갈걸.”

“페가수스랑 안 붙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울브스가 더 골치 아프게 됐네요.”

“걔들, 우리랑 3연전 하고 쭉 빠졌잖아. 그래서 우리를 원망하는 마음도 클 거라고. 어쨌든 사람은 잘 안 나가면 먼저 자기 잘못인지 살피진 않거든. 남 탓이 먼저야. 그러니 어쩌겠냐. 제일 만만한 우리를 콕 찍어서 아주 이를 박박 갈고 있겠지.”

송석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짜 벤클 각오해야겠네요.”

“빡쳐도 우린 최대한 싸움을 피해야 돼. 걔들은 쌈 엄청 걸어올 거야.”

“흠…… 원래 울브스랑 우리 사이 안 좋죠?”

“좋을 리가 있냐. 그리고 뭣보다 맨날 우리가 걔들보다 성적이 안 나왔잖아. 사실 열 받기야 우리가 더 열 받겠지만 걔들은 매번 우리한테 지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이기는 거라 지금 머리에 스팀이 팍팍 오르고 있을 거야. 이때 딱 우리랑 경기가 잡혔으니 화풀이 제대로지 뭐.”

송석현은 자리에 없는 김인환을 입에 올렸다.

“벤클 일어나면 인환이 형 뒤로 가는 게 최선이겠죠?”

“너 말고 다른 애들도 똑같은 생각하고 있을걸.”

유선호는 일곱 번째 접시를 들고 왔다.

잡채만 산처럼 쌓인 접시.

선수들이 놀리자 유선호가 볼멘소리를 해 댔다.

“이거 디저트야, 디저트. 이거 묵고 안 묵을 거라고.”

선수들이 크게 웃었다.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송석현이 김정률에게 물었다.

“선배님은 올해 식 올리시는 거예요?”

“어. 스캠 가기 전에 식 올려야지. 그래서 바쁘다, 바빠. 포시 끝나면 할 게 너무 많아. 야구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솔직히 결혼은 인륜지대사 아니냐. 신경 안 쓰인다고 하면 구라지.”

“보통은 다들 겨울에 결혼하죠, 스캠 가기 전에?”

“그치. 왜? 너도 결혼 각 재고 있냐?”

“아,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아, 그것보다 인환이 형은 요새 계속 출근이 늦네요.”

“들어 보니 아예 둘이서 살림을 차렸더라. 인환이가 한가연이네 집에서 출퇴근하잖냐.”

“형이요?”

“그래. 인환이보다 한가연이 더 매달리는 형국이라니까. 아주 인환이한테 쏙 빠졌어. 아나운서가 그러긴 쉽지 않은데.”

“소문도 있을 텐데……. 괜찮나요?”

“보통 이런 건 거의 99%가 결혼까지 염두에 뒀을 때 하는 일이긴 한데, 인환이는 애매하잖아. 내년에 아시안 게임에서 병역 해결 못하면 빼박 군댄데 지금 결혼을 하려나……. 한가연 하는 거 보면 정말 결혼까지 생각한 거 같기도 하고.”

“그럼 올해는 선배님이 하시고 내년에는 인환이 형이 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마도?”

“그렇구나…….”

송석현이 말을 흐리자 김정률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왜? 뭔데? 넌 내후년에 결혼하게?”

“아니에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짜식. 결혼을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저기 봐라, 저기. 어설프게 혼기 놓치면 골치 아파진다니까. 그래도 은퇴식에 내 새끼랑 그라운드도 밟고 해야지. 혼자서 뻘쭘하게 손만 흔들어 봐라. 가오가 안 살잖냐.”

김정률이 가리킨 곳엔 유선호가 밥그릇에 식혜를 떠다 먹고 있었다.

“저 양반은 눈이 너무 높다니까.”

식사를 마친 선수들은 다시 잠실구장으로 복귀했다.

송석현은 구장으로 들어가기 전 밖에서 김나영과 통화했다.

“어, 어. 알았어. 그래. 들어가.”

전화를 끊은 송석현이 다시 구장으로 들어가려는데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주차장 한편 으슥한 곳, 몸이 다부지게 생긴 중년 남자와 건장한 젊은 남자 둘이 서 있었다.

송석현이 서 있는 곳은 2층이었지만 두 사람의 대화 소리는 잘 들렸다.

두 사람은 무어라 서로 목소리를 높이더니 이내 자리를 떴다.

송석현은 잠시 자리에서 머물다 이내 떠났다.

* * *

2013년 10월 1일.

가을 점퍼가 야구장에 등장한다.

고트는 시즌 내내 우취도 없다시피 경기를 치른 탓에 잔여 경기는 3경기밖에 없었다.

힘이 빠진 후반기 잔여 경기는 부상이 속출하기 마련이다.

잔여 경기가 적다는 건 좋은 일이나 상대가 잠실 라이벌 울브스라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최근 벤치 클리어링까지 겪으며 서로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상황.

울브스는 포스트 시즌의 끄트머리를 잡은 채 필사적이었다.

울브스 팬들은 반드시 고트 3연전에서 위닝시리즈 이상을 바랬고, 고트 팬들은 부상 없이 1위 확정을 바랬다.

오후가 되자 잠실에는 고트와 울브스 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흥이 난 고트 팬들은 응원가를 부르고 웃음을 터뜨렸다.

울브스 팬들은 심각한 표정을 한 사람부터 야구를 즐기기 위한 팬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시끌벅적한 밖과 달리 잠실 그라운드에는 한파가 불어왔다.

벤치 클리어링 이후 냉랭한 두 팀은 서로 안부 인사마저 생략한 채 훈련에만 집중했다.

경기 시작이 다가오자 양 팀 선수들이 도열했다.

“어? 구름이 끼는데.”

“오늘 비 온다고 했나?”

“소나기 아냐? 비 온다고 못 들었는데.”

툭. 툭툭.

물방울이 그라운드로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드득 쏟아진 물방울에 야구팬들은 잠시 비를 피했다.

팬들은 우천 취소를 걱정했지만 소나기는 30분을 넘기지 않았다.

소나기는 짧았으나 강수량은 적지 않았다.

그라운드에는 물기가 가득했고 공기는 습했다.

“양 팀 준비해 주세요.”

경기 운영 위원과 심판은 경기 진행을 결정했다.

울브스의 선발투수 마크 로저는 하늘을 한번 바라보곤 마운드로 걸어갔다.

울브스 선수들도 말없이 그라운드에 나섰다.

심판의 콜과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플레이볼!

* * *

캐스터와 해설자는 잠시 떨어진 분위기를 올리기 위해 목소리 톤을 높였다.

“오늘 잠시 우천 취소를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경기가 속개됐습니다.”

“다행이네요. 오늘 우천 취소가 있었다면 울브스는 더블헤더까지 해야 하거든요. 고트야 잔여 경기가 몇 경기 안 남았지만 울브스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죠.”

“그라운드가 물기를 잔뜩 먹었습니다. 오늘 경기에 영향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바운드되는 공이 더 빠르고 날카롭게 튕길 겁니다. 수비가 조금 더 어려워질 거예요. 이런 날에는 바운드를 짧게 맞춰서 수비하는 게 좋습니다.”

울브스의 1선발 마크 로저는 시작부터 강속구로 타자를 윽박질렀다.

이지성이 친 공은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고 설진일은 초구를 잘 노렸지만 배트가 부러지면서 아웃됐다.

다음 타자는 김인환.

마크 로저는 초구부터 김인환의 몸에 공 하나를 붙였다.

“우우.”

깊게 들어온 공은 아니었지만 관중석에서 벌써 야유가 쏟아졌다.

마크 로저의 다음 공은 바깥쪽 체인지업.

김인환이 헛스윙했다.

1-1.

다음 공은 또 몸 쪽 깊은 공.

김인환은 인상을 확 썼다.

“아, 좀 깊네요.”

“그……을쎄요. 아무래도 비가 와서 공이 좀 미끄러워서 제구가 어려운 거 같습니다.”

김인환은 반 발 타석에서 물러섰다.

여기서 상대 도발에 넘어가 줄 필요는 없다.

급한 건 울브스다.

부상 없이, 1위만 확정하면 될 일이다.

팡!

-스트라이크!

바깥쪽을 타고 들어오는 빠른 공.

다음 공은 바깥쪽 커브.

김인환의 무릎이 꺾이면서 배트 끝으로 기어이 공을 퍼 올렸다.

힘없이 뜬 공은 2루수의 글러브를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안타! 안탑니다. 김인환의 기술적인 배팅이 눈부셨습니다.”

“로저의 바깥쪽 제구는 좋습니다. 괜찮아요. 저건 김인환 선수가 잘 친 거예요.”

“이제 타석에는 송석현 선수가 들어옵니다. 송석현 선수 앞에 주자가 있다는 건 주자가 1루에 있든 3루에 있든 언제나 타점 찬스라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잠실을 동네 야구장처럼 만드는 게 송석현 선수의 힘이죠. 정타로 맞으면 넘어갑니다.”

로저가 초구부터 몸 쪽 공 하나를 찔렀다.

송석현도 움찔할 정도로 깊은 공.

송석현은 타석에서 조금 물러섰다.

잃을 게 많은 놈이 더 조심할 뿐이다.

로저는 바로 바깥쪽으로 빠른 공을 찔렀다.

몸 쪽 공 이후 바깥쪽 빠른 공.

정석적인 조합이었으나 송석현의 배트가 남들보다 길다는 걸 투수들은 종종 잊곤 했다.

탁!

낮게 들어온 공이었다.

허리를 돌려 앞으로 밀어내자 공도 낮게 날았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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