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나쁜 이웃
퍽!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타자의 머리를 맞췄다.
130km/h대의 커브.
헬멧에 제대로 맞은 공이 위로 통 튀었다.
설진일은 잠시 휘청거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곤 헬멧을 벗어던졌다.
“야!”
말릴 틈도 없었다.
설진일이 마운드로 달려가자 투수 수아레즈도 글러브를 벗었다.
“우우우우우우우!”
“잡아! 잡으라고!”
“투수 보호해! 수아레즈 뒤로 빼!”
“뭐 하냐! 빨리 안 나가?”
관중은 야유하고 양 팀 선수들은 득달같이 뛰어 나갔다.
코치들이 싸움을 말리기 위해 끼어들었으나 설진일과 수아레즈는 이미 서로 한 대씩 주고받은 상황이었다.
“떨어져! 떨어져!”
심판이 뒤에서 멀찌감치 서서 선수들을 만류해 봤지만 먹혀들 리 없었다.
양 팀 선수들은 설진일과 수아레즈를 떼어 놓았다.
“설진일. 설진일!”
심판이 설진일을 부르자 함성훈이 먼저 달려갔다.
함성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심판이 설진일을 가리켰다.
“퇴장!”
“심판!”
함성훈이 심판에게 따지려고 들자 배터리코치 김태우가 말렸다.
함성훈은 목소리를 높였다.
“투수는 퇴장이 아닌데 왜 타자만 퇴장입니까!”
“직구라면 모를까 변화구 빈볼은 퇴장 사항이 아닙니다. 하지만 타자가 먼저 물리력을 행사한 건 퇴장 사항이에요.”
“그냥 벤치 클리어링이잖아요! 그냥 넘어가면 되잖습니까!”
“명백하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이건 봐줄 수 없어요.”
“폭력이라뇨. 그냥 서로 멱살잡이한 건데.”
“멱살만 잡은 게 아니잖아요. 분명히 주먹을 쥐고 상대 투수를 가격했습니다. 이건 이견 없는 퇴장이에요.”
“하지만!”
배터리코치가 함성훈을 뒤로 끌었다.
“감독님, 아직 경기 남았습니다.”
배터리코치의 말에 함성훈은 숨을 한번 크게 삼켰다.
경기가 남아 있는 만큼 심판을 자극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여기서 일 키우면 출장 정지도 나올 수 있습니다.”
배터리코치의 첨언 한마디에 함성훈의 발걸음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벤치 클리어링의 결말은 설진일의 퇴장.
고트 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심판들이 귀를 막을 정도로 끊임없이 야유를 쏟아 냈다.
울브스 팬들도 이에 질세라 같이 목소리를 높이자 경기는 중단됐다.
10분이 흐르고 20분이 흘러서야 겨우 진정됐다.
심판들은 서로 모여서 머리를 맞댔다.
“존 너무 타이트하게 잡지 마. 경기 빨리 끝내자고. 어?”
“그래. 존 좀 넓게 잡자. 이러다 우리 여기 못 나가는 수가 있어.”
“알았어. 참고할게.”
설진일 대신 대수비를 주로 하는 장도철이 들어왔다.
장도철이 1루에 있는 상황에서 타자는 김인환.
설진일에게 한 대 얻어맞은 수아레즈의 한쪽 눈두덩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포수는 초구로 바깥쪽 빠른 공을 요구했다.
들어온 건 몸 쪽 깊숙하게 빠진 공.
타석 안까지 파고든 공에 김인환은 급하게 몸을 빼야 했다.
“우우우우우우!”
“야! 장난하냐!”
“때려치워! 때려치워 이 새끼들아!”
고트 팬들의 함성은 더 커졌다.
심판도 포수와 투수에게 주의를 줬다.
“수상한 짓 하면 나도 가만히 안 있어. 조심해.”
“네. 주의하겠습니다.”
신민호도 여기서 더 험악한 분위기로 간다면 일이 훨씬 더 커질 거란 생각에 안전하게 바깥쪽 볼 배합 사인을 냈다.
수아레즈의 바깥쪽 체인지업에 김인환이 못 참고 스윙.
배트 끝에 맞은 공은 느리게 유격수 쪽으로 흘렀다.
“유격수가 잡고 2루로! 2루에서 1루로! 어? 악송구에요! 공이 빠졌습니다! 김인환은 그대로 2루까지! 2루까지! 들어갑니다!”
“어……그런데 지금 정수영 선수가 못 일어나고 있는데요. 장도철 선수가 슬라이딩할 때 점프해서 피하려다 발이 좀 걸린 거 같습니다.”
“느린 화면으로 볼까요? 음. 아, 그러네요. 살짝 발이 걸렸네요. 큰 부상일까요?”
“오히려 어설프게 넘어지는 게 더 크게 다치거든요. 방금은 정수영이 선수가 낙법 치듯이 넘어져서 갈비뼈가 어떻게 되지 않는 이상 큰 부상은 아닐 거 같아요.”
정수영의 부상에 울브스 감독이 벌떡 일어섰다.
울브스 선수들이 우르르 정수영에게 몰리자 심판은 미리 경고를 줬다.
“이번에도 문제 일으키면 가차 없이 퇴장시킬 거야!”
정수영이 몸을 일으키면서 코치에게 괜찮다고 사인을 보냈다.
코치는 정수영의 몸을 확인하고 감독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우우우우우우.”
이번에 울브스 팬들이 먼저 야유를 보냈다.
심판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경기를 속행했다.
다음 타자는 4번 타자 송석현.
포수 신민호는 확실하게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김인환에 이어 송석현한테까지 몸 쪽 공이 간다면 진짜 벤치 클리어링이다.
지금은 도화선에 휘발유까지 잔뜩 적셔진 꼴이다.
불씨 하나만 튀어도 폭발 사고다.
그때 송석현이 반 발자국을 움직였다.
타석에 바짝 붙어 몸을 웅크려 수아레즈의 공을 기다렸다.
“…….”
신민호가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이를 본 캐스터도 탄성을 내뱉었다.
“몸 쪽 공을 던져 보라는 얘긴가요? 송석현 선수가 타석에 바짝 붙었습니다. 저 정도면 몸 쪽 공 스트라이크가 들어오는 공은 아예 못 치는 거 아닙니까?”
“송석현 선수가 꽤 강하게 나오네요. 저러면 몸 쪽 공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서 웬만큼 간 큰 투수가 아니라면 어렵죠.”
수아레즈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않았다.
포수 신민호는 계속 바깥쪽에 미트를 내밀었다.
수아레즈의 초구는 바깥쪽 빠른 공.
송석현은 공 하나를 지켜봤다.
-스트라이크!
“초구 스트라이크. 수아레즈 선수가 다시 영점을 잡았습니다.”
송석현은 배트를 어깨에 걸쳐 멘 채 숨을 골랐다.
존이 넓어졌다.
아까보다 공 하나는 더 빠지는 공인데 스트라이크.
영점을 조절한 건 수아레즈뿐만이 아니었다.
‘커브’
빠진 공이 스트라이크 콜을 받자 포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깥쪽 커브를 요구했다.
수아레즈가 던진 공이 아까보다 반개는 더 빠져서 들어왔다.
송석현의 허리가 돌면서 바텀 핸드가 일자로 쭉 뻗었다.
탕!
배트 끝에 걸린 공이 우익수 방면으로 날아가면서 바깥쪽으로, 바깥쪽으로 휘어졌다.
“높이 뜬 공! 우익수 잡습니까? 잡나요?”
회전을 잔뜩 먹은 공은 하늘 높은 곳에서 빠르게 아래로 내리꽂혔다.
강기수가 담장에 붙어 서서 타이밍에 맞춰 점프했다.
툭.
“넘어갔습니다! 송석현의 투런! 폴대를 벗어나지 않고 담장을 넘어갔어요! 홈런! 홈런입니다! 강기수 선수가 허망하게 담장을 바라보네요.”
“방금 공은 그냥 플라이라고 봤는데 정말 멀리 갔습니다. 잠실에서 저런 플라이가 홈런이 되나요? 저 정도로 회전을 먹으면 보통 우익수가 넉넉하게 잡는 아웃인데요.”
“해결사 송석현이 한 건 해 주네요. 어제의 휴식이 보약이 됐을까요?”
“이게 4번 타잔가요? 어수선한 팀 분위기를 한 방에 쇄신합니다.”
“수아레즈 선수가 잘 던진 커브였는데 여기서 홈런이 나왔습니다.”
“제가 보기엔 커브라서 홈런이 나온 거 같습니다. 직구가 역회전 볼이라면 커브는 앞으로 가는 회전, 그러니까 정회전 볼이거든요. 타자가 치는 공이 멀리 나가려면 공의 밑동을 쳐서 아래에서 투수 방향으로 공이 돌아야 하는데 커브의 회전이 딱 그렇단 말이죠. 그래서 커브는 세게 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방향만 잘 맞춰 주면 멀리 나가는 거예요.”
“아, 그런가요?”
송석현의 홈런에 수아레즈가 글러브로 입을 가리고 욕을 아낌없이 쏟아 냈다.
방금은 몸 쪽으로 공을 던졌어야 했다.
아무리 대단한 타자라도 저렇게 타석에 바짝 붙으면 제대로 공을 쳐 낼 수 없다.
바깥쪽을 기다리는 타자에게 바깥쪽 공을 던지니 타자는 이겨 놓고 시작하는 셈이다.
자신이 잘못 던졌다는 생각보다 포수가 지레 겁을 먹어 홈런을 맞았다는 생각에 열불이 치밀어 올랐다.
수아레즈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다음 타자 유선호를 맞았다.
수아레즈가 던진 초구는 그대로 유선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이 새끼가 진짜!”
유선호가 배트를 땅바닥에 집어 던지자 수아레즈도 글러브를 패대기쳤다.
포수 신민호가 얼른 일어나 유선호를 만류했다.
“형, 형, 형! 참아! 아니야. 고의 아니야.”
“놔라, 인마! 점마 저거, 고의로 던진 거 모리나?”
“아니야. 빠진 거야. 분명히 사인 바깥쪽에 냈는데 빠진 거라고.”
“놔! 안 놓나?”
송석현의 홈런으로 잠시 식었던 고트 선수들은 유선호의 빈볼에 더는 참지 못했다.
방금 전의 빈볼은 불난 데 기름 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려! 말려요!”
“야야야! 참아! 참으라고!”
“쟤 막아! 얼른!”
유선호가 포수에게 잡혀 있는 사이 수아레즈가 유선호에게 달려갔다
유선호는 자신을 맞힌 투수가 자신에게 달려오자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울브스 선수들이 수아레즈를 막아섰으나 수아레즈는 가운뎃손가락을 들면서 욕을 쏟아 냈다.
영어를 모르는 선수들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거친 욕설이었다.
“퇴장! 퇴장!”
심판은 끓어오르는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수아레즈를 퇴장시켰다.
선발투수의 퇴장에 울브스 벤치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감독까지 나와 심판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머리에 던진 공도 아닌데 다이렉트로 퇴장을 주는 경우가 어딨어요!”
“고의적으로 빈볼을 던지면 퇴장을 줄 수 있습니다!”
“고의가 아니잖아!”
“누가 봐도 고의잖습니까! 이번 이닝에 이게 몇 번이에요!”
“규정대로 해야지 고의라는 거 증명할 수 있어?”
“나가세요! 번복 없습니다. 계속 이러면 감독님도 퇴장이에요!”
“퇴장? 나 협박하는 거야?”
이번엔 울브스 감독과 심판이 붙었다.
울브스 팬들은 수아레즈의 퇴장에 야유는 물론 이물질까지 야구장에 집어 던졌다.
울브스 선수들까지 심판을 둘러싸자 심판들도 주심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왔다.
인파가 몰리자 주심은 인파에 떠밀려 뒤로, 뒤로 뒷걸음을 쳐야 했다.
몇 번이고 밀린 주심은 더는 참지 못했다.
“퇴장! 퇴장이에요! 감독도 퇴장! 빨리 그라운드에서 나가세요!”
울브스 감독까지 퇴장당하자 울브스 수석코치가 감독을 코치들에게 맡기고 심판에게 다가갔다.
“미안해요. 여기서 철수시킬 테니까 그만하죠. 네?”
“그래도 퇴장은 번복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더 소란을 피우면 나머지도 퇴장입니다!”
울브스 감독은 분을 삭이지 못했다.
씩씩거리면서 벤치 뒤로 감독이 나가 버리자 선수들도 하나둘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선발투수가 갑자기 내려가자 불펜 투수도 어깨를 달굴 시간도 없이 마운드에 올라와야 했다.
영점 조절이 안 된 투수는 볼넷을 연발.
주자가 쌓이자 안타 하나로 대량 득점이 터졌다.
울브스는 바로 또 투수 교체를 단행했으나 이미 넘어간 분위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야금야금 점수를 내주면서 조급해진 울브스 타자들은 인내심이 없어졌다.
무너진 선발을 대신해 올라온 이백찬은 빠른 승부로 카운트를 잡으며 5이닝 1실점 호투했다.
결과는 7-6.
고트의 신승(辛勝).
상대 감독의 퇴장, 선발투수의 퇴장에도 턱걸이로 이긴 셈이었다.
“후우우우. 운이 따르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경기가 끝나자 그제야 함성훈 감독이 미소를 보였다.
위닝시리즈.
고트의 단독 1위.
울브스는 단독 4위.
양 팀의 순위에 쐐기를 박는 경기였다.
감독과 선발투수의 퇴장 여파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울브스의 에이스 장계성과 최근 페이스를 다시 올린 한민석의 대결.
고트에게 이를 간 울브스의 장태섭 감독은 장계성이 송석현에게 솔로 홈런을 내주자 4회에 내리는 초강수를 뒀다.
이후 무려 불펜 투수 여섯 명을 내면서 3-2로 울브스가 승리했다.
고트는 스윕 대신 위닝시리즈에 그치며 페가수스와 다시 공동 1위.
하지만, 불펜을 끌어다 쓴 울브스는 5위 웨일스를 상대로 또 루징시리즈를 기록하면서 3위와 2경기 차로 벌어지며 자멸했다.
고트는 광주 불스에게 위닝시리즈를 거두면서 다시 단독 1위.
잠실 라이벌의 한 주간의 성적은 4승 2패와 2승 4패.
단독 1위와 단독 4위.
고트 팬들의 응원가가 좀체 줄어들지 않는 한 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