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 라이벌
“으으으으으. 아이고, 죽겠다.”
송석현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시간은 오전 11시.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거실로 나가니 어머니가 삼계탕을 끓이고 있었다.
“복날도 지났는데 웬 삼계탕이야?”
“몸보신해야지. 너 요새 컨디션이 뚝 떨어진 거 같더라.”
“오늘은 괜찮아. 이제야 좀 컨디션이 회복되는 거 같아.”
“그래? 그러면 다행이지. 자 자. 씻고 와. 얼른 밥 먹자.”
두 모자는 삼계탕으로 점심 식사를 마쳤다.
송석현은 식사를 마친 후 바로 옷을 챙겨 입었다.
“벌써 나가게?”
“어제 잠을 일찍 자느라 제대로 뭐 한 게 없어. 가서 몸도 좀 풀고 준비도 하고 해야지.”
“이런 날은 더 쉬고 가. 체력 관리가 가장 중요해.”
“이제는 괜찮습니다, 괜찮아. 역시 잠이 보약이야. 자니까 풀리네.”
집으로 나서던 송석현이 허벅지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안 쓰던 근육을 써서 그런가. 아우, 오래가네.”
* * *
울브스와의 2차전.
송석현은 포수가 아닌 지명타자로 나섰다.
덕분에 유선호가 지명타자에서 좌익수로 밀려났다.
선발투수로 내정된 이창훈은 경기 시작도 전에 끙끙 앓는 소리를 해 댔다.
“큰일이다, 큰일이야. 좌익수 플라이가 뜨면 대형 사고 각인데.”
이창훈이 걱정한 건 수비 실책이었지만 경기가 시작되자 그건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1회 말 고트의 수비.
울브스의 1번 타자 김하균이 포수를 가릴 만큼 타석에 바짝 붙어서 서 있었다.
“너 뭐 하냐?”
서일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김하균에게 물었다.
김하균은 서일혁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이거 너무 붙은 거 아닙니까?”
서일혁이 심판에게 어필했지만 심판은 고개를 저었다.
“몸이 나온 거 아니잖아.”
“하지만 이 정도면 거의 나온 거나 다름없는데요.”
그제야 김하균이 말했다.
“이 정도는 고트도 어제 한 건데요?”
김하균의 말에 서일혁도 시원스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심판은 두 사람이 입씨름하기 전에 먼저 나섰다.
“경기 속행하자.”
심판의 중재하에 경기가 속행됐다.
이창훈은 초구부터 바깥쪽 빠른 공 두 개를 던지며 스트라이크존을 확인했다.
결과는 투 볼.
“후우.”
이창훈이 경기 시작부터 로진백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심판의 존이 타이트하네요.”
“이기영 심판의 존이 원래 타이트합니다. 양 팀 배터리는 이를 염두에 두고 경기를 진행해야 합니다.”
투 볼 상황.
이창훈이 바깥쪽으로 들어가다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던졌다.
-볼.
타자는 공을 치지 않고 기다렸다.
이창훈이 눈썹을 위로 올린 채 한숨을 한번 푹 쉬었다.
“김하균 선수가 오늘은 스윙에 신중하네요.”
“김하균 선수의 출루율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닙니다. 공을 맞추는 재주가 좋다 보니 참을성이 적은 탓인데, 오늘은 존을 타이트하게 맞춰 놓고 타격하는 거 같습니다.”
“벌써 스리 볼입니다. 발 빠른 김하균 선수를 내보내면 골치 아플 거 같은데요.”
“일단 과감하게 들어가는 게 좋습니다. 김하균 선수가 펀치력이 좋은 선수는 아니거든요.”
포수의 사인은 커브.
느린 공으로 타이밍을 뺏는 게 목적이었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
탕!
“좌익수! 좌익수~ 앞에 안타! 김하균 선수가 깔끔하게 안타를 신고합니다.”
“보통 바뀐 야수한테 공이 가는데 오늘은 교체로 나온 유선호 선수 바로 앞으로 공이 가네요.”
“다른 선수였다면 슬라이딩으로 잡아 볼 만했을 텐데 유선호 선수는 안전하게 갑니다.”
“어쩔 수 없죠. 유선호 선수의 수비를 생각하면 최대한 깊게 수비 위치를 잡아 놓고 뒤로 넘어가는 공만 주의하는 게 좋습니다.”
김하균은 1루에 서자마자 리드를 넓혔다.
이창훈이 빠르게 견제하자 선 채로 귀루.
김하균은 리드를 야금야금 넓혔다가 줄이면서 이창훈의 신경을 긁었다.
포수 서일혁이 투수 이창훈에게 주자 신경 쓰지 말고 타자에게 집중하란 사인을 보냈다.
올브스의 2번 타자 정수영은 3할 타자.
타자로서의 능력은 김하균보다 더 좋은 선수였다.
팡!
팡!
바깥쪽으로 들어간 빠른 공 두 개는 볼.
이창훈이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몸 쪽 공 하나를 찔러야 할 타이밍이지만 이창훈은 망설였다.
서일혁은 몸 쪽 빠른 공을 찔러 넣으라면서 사인을 냈다.
타자 정수영은 타석에 바짝 붙어 있는 상황.
조금이라도 몸 쪽으로 더 붙는다면 몸에 맞을 가능성도 있었다.
‘믿고 던져.’
서일혁이 미트를 쭉 내밀었다.
이창훈이 던진 공은 서일혁의 미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타다다다다닥!
동시에 김하균이 2루로 뛰었다.
서일혁이 바로 공을 잡고 2루로 던졌지만 포구 위치가 좋지 않은 데다 김하균의 발도 빨랐다.
-세입!
“김하균의 2루 도루 성공. 김하균 선수가 2루 도루를 기어이 성공시킵니다.”
“방금은 정말 좋았죠? 몸 쪽으로 승부하러 들어가는 때를 노려서 도루를 했습니다.”
이창훈이 모자를 벗어 땀을 닦았다.
이창훈의 4구는 바깥쪽 체인지업.
타자가 우중간으로 밀어 친 공은 그대로 땅볼이 됐다.
“2루수! 빠졌습니다! 김하균 선수는 그대로 3루를 밟고 홈으로, 홈으로, 홈으로! 홈 승부! 세입! 세입입니다! 안타 두 개로 바로 1점을 따내는 울브스. 쉽게 1점을 올립니다.”
울브스의 3번 타자는 1루수 정인하.
이창훈은 정수영에게도 도루를 뺏긴 후 정인하에게 2루타를 내줬다.
“2-0. 오늘 이창훈 선수의 시작이 험난합니다.”
“김하균, 정수영 선수의 빠른 발이 2점의 원동력이라고 봅니다. 페가수스나 스콜피언에 가려져서 그렇지 울브스의 테이블 세터도 발 빠른 걸로는 뒤지지 않거든요.”
“송석현 선수가 있는 평소에는 도루할 엄두도 못 내던 선수들이 오늘은 제대로 활개를 치네요.”
함성훈 감독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배터리코치는 자신의 죄인 양 함성훈을 쳐다보지 못했다.
울브스의 4번 타자 강제관이 플라이로 아웃되며 한숨을 돌렸지만 연속 2안타로 3실점.
병살로 이닝을 마쳤으나 이창훈의 투구 수는 1회에만 서른두 개였다.
“하.”
벤치로 돌아온 이창훈이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포수 서일혁도 입술을 꾹 다물었다.
“울브스 애들이 당한 걸 그대로 갚아 주려나 봅니다.”
수비코치 안영재의 말에 함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훈이 구위가 무뎌진 건 이제 비밀도 아니에요. 바깥쪽 승부만 하는 투수를 상대로 타석에 바짝 붙어서 승부하는 건 상식 아닙니까. 오늘처럼 존까지 좁으면 답도 없죠. 후우.”
“저희도 시프트 가동시킬까요?”
“……그렇게 하시죠. 우리도 아예 몸 쪽 공을 버리고 바깥쪽으로만 승부하는 게 그나마 확률적으로 나을 거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함성훈이 눈으로 송석현을 찾았다.
서일혁은 공수 밸런스를 갖춘 포수지만 아무리 높게 쳐줘도 준수한 백업 포수다.
페가수스, 스콜피언, 울브스처럼 빠른 발과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테이블 세터들을 상대론 한 수 뒤처지는 건 기정사실이다.
송석현의 활약은 기꺼운 일이지만 송석현 외에 대안이 없다는 건 팀으로선 불행이다.
마음 같아선 당장 포수를 교체하고 싶지만, 포스트 시즌까지 생각한다면 올해 데뷔한 신인 포수에게 더 많은 휴식을 줘야 한다.
이번처럼 송석현이 포스트 시즌에도 퍼진다면…….
함성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이다.
2회 초.
고트는 송석현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팡!
-볼.
시작부터 몸 쪽에 바짝 붙이는 공.
송석현이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송석현 선수에게 과감하게 몸 쪽 공을 찌르네요.”
“수아레즈 선수가 공은 빠르지 않지만 공이 묵직하기로 소문나 있습니다. 몸 쪽 공이라고 만만하게 봤다간 밀리는 경우가 많아요.”
다음 공은 바깥쪽 커브, 볼.
3구는 아까보다 더 몸에 붙이는 빠른 공이었다.
-볼!
“…….”
송석현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수아레즈는 제구력이 좋은 투수다.
맞출 듯 맞추지 않는 아슬아슬한 몸 쪽 공은 실투라기보단 의도에 가까웠다.
“수아레즈 선수가 결국 볼넷을 내주네요.”
“송석현 선수를 상대로 흔들렸어요. 계속 위험한 공이 갔거든요.”
1루로 간 송석현이 뚱한 표정으로 보호구를 벗어 코치에게 건넸다.
코치는 송석현의 마음을 아는지 엉덩이를 툭툭 쳤다.
탕!
송석현이 나가자마자 유선호가 초구 커브를 노려 쳤다.
빠르고 낮게 날아간 공은 2루수 글러브에 직격.
송석현이 재빨리 1루로 돌아가려 했으나 2루수 정수영의 반응이 더 빨랐다.
-아웃!
“병살! 고트가 여기서 병살을 치고 맙니다.”
“아쉬웠어요. 유선호 선수가 잘 노려 쳤는데 말이죠.”
“고트가 운이 안 따라 주네요.”
2회에도 고트는 무득점.
울브스는 2회 말에 솔로 홈런 하나를 포함해 2점.
어느덧 점수는 5-0이었다.
함성훈은 이창훈을 빼고 이백찬을 준비시켰다.
평소라면 싫은 소리 한 번은 했을 이창훈이지만 오늘만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좁은 스트라이크존, 심하다 싶을 만큼 타석에 바짝 붙는 타자들.
구위가 무뎌져 바깥쪽 승부밖에 하지 못하는 이창훈에겐 최악의 조합이었다.
4회 초 고트의 공격.
선두 타자 설진일은 타석에 바짝 붙어 섰다.
수아레즈는 이번에도 몸 쪽 깊은 공 하나를 초구부터 찔렀다.
팡!
-볼.
설진일은 바로 자기 몸을 가리켰다.
“옷에 맞은 거 같은데요.”
대답은 심판 대신 포수가 대신했다.
“안 맞았어.”
“맞는 소리가 났는데.”
“안 맞았다고. 심판도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난리야? 네가 심판이냐?”
설진일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어필도 못 하나.”
“뭐?”
포수 신민호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설진일은 무시했다.
심판도 설진일 대신 신민호에게 말했다.
“속행하자. 어?”
“……네.”
수아레즈의 2구는 바깥쪽 커브, 스트라이크.
3구는 바깥쪽 체인지업.
탕!
설진일이 바깥쪽 떨어지는 공을 치기 위해 두 팔을 쭉 내밀었다.
배트 끝에 맞은 공이 회전을 먹으면서 1루 울브스 벤치로 날아갔다.
동시에 설진일이 놓친 배트가 1루수 방향으로 날았다.
“피해! 피해!”
쾅!
공은 벤치의 벽을 때렸다.
배트는 1루수의 옆을 스쳤다.
설진일 자기 손을 한번 보더니 터벅터벅 걸어가 배트를 건네받았다.
“방금은 위험한 장면이 나왔네요.”
“이래서 야구장에선 긴장감을 풀면 안 됩니다. 파울볼이 어디로 갈지 아무도 모르거든요. 하물며 선수들한테도 갈 수 있습니다.”
“설진일 선수가 바깥쪽 공을 억지로 치려다 보니 이런 일이 발생해 버렸네요.”
설진일이 타석에 돌아오자 포수 신민호가 혀를 찼다.
“어이가 없네, 어이가. 왜? 그냥 투수한테 배트를 던지지 그랬냐.”
“무슨 말이세요? 배트를 놓친 겁니다.”
심판은 두 사람의 기류를 바꾸기 위해 헛기침했다.
“경기 집중하자. 나도 여차하면 바로 퇴장시킬 거야. 그러니 둘 다 조심해.”
수아레즈는 몸 쪽 빠른 공으로 삼진을 노렸지만 설진일은 몸 쪽 공을 잡아당겨 파울로 만들었다.
다음 공은 낮게 떨어지는 커브.
이번에도 설진일은 커트하면서 파울을 만들었다.
퍽!
설진일이 깎아 친 공이 포수 마스크에 맞았다.
신민호의 몸이 앞으로 꺾였다.
설진일은 신민호를 한 번 힐끔 보곤 타석에서 반걸음은 물러섰다.
“괜찮아?”
심판의 우려에 신민호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고개만 한 번 끄덕거리곤 다시 몸을 곧추세웠다.
“오늘 왜 이래. 누가 보면 일부러 맞히는 줄 알겠네.”
설진일이 들으라는 건지 혼자서 중얼거리는 건지 내뱉은 말에 신민호이 콧바람을 훅훅 내뱉었다.
마음 같아서는 몸 쪽 빠른 공으로 맞히고 싶었지만 빠른 공에 강한 설진일 아닌가.
다시 한번 아래로 떨어지는 커브를 요구했다.
그런데 포수는 미트로 아래를 가리켰지만 투수의 공은 떨어지지 않았다.
공을 보는 설진일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