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봉의 이름으로
경기 시작에 맞춰 양 팀 선수들이 도열했다.
캐스터와 해설자는 양 팀의 라인업과 성적을 소개하면서 오늘 경기를 예측했다.
“아무래도 울브스가 더 유리할 수밖에 없어요. 고트가 현재 공동 1위긴 하지만 팀의 짜임새를 본다면 울브스가 더 낫다고 봅니다. 울브스가 고트보다 부족한 게 있다면 클린업이 조금 더 약하다, 이 정도인데 오늘은 송석현 선수까지 빠지지 않았습니까?”
“오버 트레이닝으로 인한 탈진이라죠.”
“어리다고 훈련 강도를 대책 없이 올리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아, 아무튼. 울브스의 별명이 기관총 사단 아니겠어요? 1번부터 9번까지 타율이 고릅니다. 일단 한번 타선이 터지면 기관총으로 난사하듯 상대를 묵사발로 만드는 게 울브스의 타선입니다. 이에 반해 고트는 타선에 기복이 있죠.”
“오늘 송석현 선수가 못 나오는 게 영향이 클까요?”
“크다고 봅니다. 송석현 선수의 우산 효과가 분명하거든요. 탈진 현상이라면 내일이나 모레에도 영향을 끼칠 텐데, 고트한테는 큰 악재예요.”
“그렇다면 오늘 경기, 키포인트를 뭐로 보시나요?”
“일단 선발은 양 팀 모두 괜찮습니다. 울브스의 로저나 고트의 멕킨지나 모두 수준급 용병이거든요. 양 팀 클린업은 송석현 선수가 빠지면서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테이블 세터의 활약이 중요할 거 같아요. 양 팀 테이블 세터 모두 3할을 치고 있고 둘 다 발이 빨라요. 하지만 장단점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고트의 이지성, 설진일 선수의 경우 타율, 출루율 모두 훌륭하지만 도루가 약합니다. 이지성 선수는 부상 이후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안 합니다. 설진일 선수도 도루는 곧잘 하지만 수준급이라고 보기엔 시도 횟수가 적습니다. 이에 반해 울브스의 김하균, 정수영의 경우 출루율은 고트보단 떨어지지만 공수주 삼박자가 균형이 잘 맞는 타잡니다. 도루도 잘하고 작전 수행 능력도 좋아요.”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해도 될까요? 출루율은 높지만 상대 투수를 압박하는 강도는 낮은 고트와, 출루율은 낮아도 상대 투수를 압박하는 강도가 높은 울브스.”
“네. 그렇게 요약하면 되겠네요.”
-플레이볼!
경기 시작과 함께 고트가 먼저 공격에 나섰다.
마운드에는 마크 로저.
우완 정통파 파워 피처로 울브스가 공들여 뽑은 용병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선호하는 큰 키에 빠른 공으로 찍어 누르는 유형의 선수.
삼진율도 높은 선수라 타자들이 여간 까다로워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보통 선수라면.
탁!
탁!
탁!
탁!
1회 초 고트의 리드오프 이지성의 공격.
1회 초인데도 마크 로저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벌써 11구째 승붑니다. 풀카운트 승부가 길어지네요.”
“로저 선수가 삼진을 잘 잡거든요? 그런데 이지성 선수가 볼, 스트라이크를 가리지 않고 웬만하면 쳐서 걷어 내고 있어요.”
포수가 로저에게 사인을 보냈다.
몸 쪽 높은 공.
장타력 없는 선수에겐 자신 있게 요구할 수 있는 코스였다.
로저도 사심을 가득 담에 몸 쪽으로 공을 붙였다.
팡!
-볼.
“볼넷. 볼넷입니다. 볼넷으로 걸어 나가네요.”
“이런 게 가장 허무하죠. 공 개수만 늘어나고 결국 출루를 내준 거거든요.”
로저는 글러브로 입을 가리고 욕을 뱉었다.
다음 타자는 설진일.
이지성이 도루를 위해 리드를 넓혔다.
설진일이 초구를 좋아한다는 건 야구장에 있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
포수는 투수에게 낮은 쪽으로 바운드되는 커브를 요구했다.
로저는 각도를 높여 커브를 아래로 꽂았다.
위아서 아래로 내리꽂는 커브.
포수가 미트를 아예 바닥에 대고 기다렸다.
탕!
“쳤습니다! 우익수 앞 안타! 무사 1, 2루. 설진일 선수가 초구를 받아쳤습니다.”
“이야, 어떻게 저런 공을 치죠? 완전히 바운드성 커브였는데요.”
“설진일 선수의 안타로 무사 1, 2루. 고트가 찬스를 잡습니다.”
로저가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타자는 김인환.
김인환은 바깥쪽 체인지업을 건드려서 병살을 만들었다.
타격코치 강연태는 김인환을 붙잡고 핏대를 세웠다.
“강하게 쳐야지. 병살을 주더라도 강하게 치라고 했잖아. 오늘 왜 이래?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죄송합니다.”
“세게 쳐, 세게. 어설프게 치지 말란 말이야.”
2사 주자 3루.
아웃 카운트 하나만 남은 상황에서 유선호가 나왔다.
포수는 초구로 바깥쪽으로 하나 빼는 직구를 요구했다.
노림수가 좋은 타자이니만큼 신중하게 승부하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유선호는 이마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탕!
공을 치자 유선호가 배트를 던져 버렸다.
1루 방면으로 화려하게 날아가는 배트.
공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갔다.
“담장! 담장! 담장을! 넘어갔습니다! 유선호의 투런포! 유선호가 송석현 선수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채워 냅니다!”
“방금은 로저 선수의 공도 나쁘지 않았는데 유선호 선수가 워낙 잘 쳤습니다. 제대로 노리고 방망이를 돌렸어요.”
“2 : 0. 팽팽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1회부터 점수가 나옵니다.”
로저는 다음 타자를 삼진으로 잡았다.
벤치로 돌아온 로저는 글러브를 집어 던지곤 머리를 감쌌다.
1회 말.
고트의 투수는 멕킨지.
멕킨지는 공 다섯 개로 아웃 카운트 세 개를 만들었다.
“오늘 멕킨지의 공이 춤을 춥니다.”
“멕킨지 선수가 컨디션이 좋을 땐 정말 공의 무브먼트가 대단합니다. 제대로 오는 공이 하나도 없을 정도예요. 커터와 싱커, 서클 체인지업까지 좌우로 빠지는 각이 좋거든요. 일단 한번 말리면 헤어 나오기 힘듭니다.”
“울브스 선수들은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까요?”
“스윙을 짧고 강하게 올려 쳐야죠. 크게 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일단 안타를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로저는 1회 2실점 이후 2회, 3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 냈다.
울브스도 1, 2, 3회 무실점.
4회에도 양 팀 무실점이 나오자 함성훈 감독이 타격코치를 가까이 불렀다.
“하위 타순에서 오늘 출루 하나도 없어요. 아무래도 한번 변화가 필요할 거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로저 볼이 워낙 좋아서……. 일단 최대한 배트를 짧게 쥐고 공 하나만 노려 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포심 비율이 높아서 포심을 노리고 치면 좀 나아질 거 같습니다.”
“공을 노리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애초에 구위가 좋아서 노리고 쳐도 쉽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이렇게 합시다. 지성이처럼 가는 거예요.”
“지성이요? 하지만 지성이 커트 실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요.”
“지성이처럼은 못해도 비슷하게는 할 수 있죠. 타석에 바짝 붙어서 공 하나만 노리고 풀스윙으로 가는 거예요.”
“풀스윙이요? 지금도 안타가 안 나옵니다.”
“구위에 밀려서 안타가 안 나오는 거예요. 어차피 이렇게 계속 삼진을 주느니 큰 거 한 방 노리고 상대를 압박하는 게 더 낫다고 봐요.”
“음…… 알겠습니다. 그러면 애들한테 타석에 붙어서 풀스윙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아, 그러면 몸 쪽 공 대응이 어려울 텐데 어떡하죠?”
“그건 줘야죠. 다 노릴 순 없잖아요.”
5회 초 공격은 7번 타자 오진영.
오진영은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타석에 바짝 붙었다.
“그러다 맞어, 인마. 떨어져.”
포수가 경고했지만 오진영은 움직이지 않고 스트라이드를 더 벌렸다.
오진영의 자세에 투수도 미간을 찌푸렸다.
투수의 초구는 몸 쪽 빠른 공.
-볼.
로저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제2구, 3구도 몸 쪽 공이었지만 2-1.
오진영은 타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로저가 4구도 몸 쪽에 넣었지만 3-1.
로저는 모자를 한번 벗고 로진백을 만졌다.
“역시…….”
함성훈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로저는 체인지업으로 풀카운트를 만든 후 바깥쪽 빠른 공을 결정구로 썼다.
탕!
오진영이 친 공은 그대로 우익 선상을 타고 흘렀다.
우익수가 공을 잡아서 던졌지만 2루까지 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효과가 좋은데요?”
고트의 강연태 타격코치가 활짝 웃었다.
함성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용병 애들이 한국 스트라이크존 적응에 가장 힘들어하는 게 바깥쪽이 아니라 몸 쪽이에요. 바깥쪽은 많이 던지다 보면 감이 잡히는데 한국은 몸 쪽 공 스트라이크존도 타이트해서 잘 안 던지거든요. 안 던지다 보니 더 감이 없죠. 외국 애들이라고 몸 쪽 공에 부담이 없는 건 아니에요.”
로저는 다음 타자 정동규에게 볼넷을 내줬다.
무사 1, 2루가 되자 포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운드로 올라갔다.
“자꾸 몸 쪽 공에 욕심 내지 마. 그냥 바깥쪽으로 승부해. 그래도 쟤들 못 쳐.”
“오케이, 오케이.”
“진짜야. 알았지? 캄다운, 캄다운. 진정하고 바깥쪽 승부하자. 9번 타자야. 힘으로 찍어 눌러.”
고트의 9번 타자는 유격수 정영수.
유격수로는 흠잡을 데 없었지만 타격은 2할 초중반을 오갔다.
타고난 운동신경과 달리 맞추는 데는 소질 없는 타자.
포수는 로저에게 초구 바깥쪽 포심을 요구했다.
“후.”
로저는 숨을 한번 고른 후 가장 빠른 공을 바깥쪽에 꽂았다.
동시에 정영수의 허리가 돌았다.
탕!
“좌중간! 좌중간! 좌중간을 꿰뚫는 안타! 정영수의 안타가 터집니다! 2루 주자는 홈까지, 1루 주자까지 홈으로 들어옵니다! 타자 주자는 2루에 안착합니다. 정영수의 2타점 적시타. 고트의 4-0 리듭니다.”
“이거 큽니다. 이거 커요. 2점 차와 4점 차의 심적 부담은 다르거든요.”
로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함성훈의 작전이 먹히기 시작하자 고트 선수들은 죄다 타석에 바짝 붙기 시작했다.
포수 신민호가 심판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이거 너무 붙는 거 아닙니까? 라인 건드린 거 같은데요.”
“안 건드렸어. 진행해.”
“이거 고의적으로 팔꿈치를 내밀 수 있습니다. 벌써 팔꿈치가 나와 있어요.”
“안 나왔어. 저 정도는 넘어가는 거잖아. 왜 이래, 진짜.”
로저는 원래 몸 쪽 공에 약한 투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고트가 집요하게 파고들자 마치 원래 몸 쪽 공을 못 던지는 투수처럼 몸 쪽 공을 부담스러워했다.
바깥쪽 빠른 공만으로도 고트의 타선을 윽박지르긴 충분했지만 멘탈이 흔들리자 제구력도 흔들렸다.
울브스는 결국 1점은 더 내준 후에야 선발투수를 내렸다.
“후, 반은 됐네.”
로저가 내려가자 함성훈이 그제야 조금 웃어 보였다.
로저는 A급 선발투수다.
고트의 하위 타선이 감당하긴 버거운 투수임은 분명하다.
그저 바깥쪽 공만 주구장창 던졌어도 퀄리티 스타트는 따 놓은 당상이었지만, 문제는 배터리의 호흡.
많은 용병 투수가 한국의 포수를 믿지 못하고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자존심이 센 로저는 몸 쪽 공을 주구장창 던지다 스스로 발이 꼬인 셈이다.
멕킨지는 5회도 못 채우고 강판한 로저와 달리 무려 8회까지 1실점으로 막아 냈다.
컨디션이 좋은 날 멕킨지의 패스트볼은 치는 족족 땅볼이었다.
결과는 6-2.
송석현은 핼쑥해진 얼굴로 벤치로 돌아오는 선수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달려라! 고트! 달려라! 고트! 워워워워워!”
“달려라! 고트! 달려라! 고트! 워워워워워!”
고트 팬들의 응원가가 잠실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