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 맛있는 복숭아
월요일 오전 서울역 앞.
청바지에 초록 셔츠, 검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비록 얼굴의 반절은 가렸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남자를 알아보곤 수군거렸다.
최근엔 뉴스에도 자주 얼굴을 비치는 남자, 송석현이었다.
“……아, 그래. 그러면 오늘 어렵겠네?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알았어.”
전화를 끊은 송석현은 하늘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멍하니 서 있는데 여대생 둘이 송석현에게 다가왔다.
“저기 혹시…….”
“네?”
“맞죠? 송석현. 저희 사진 같이 찍어 주실 수 있어요?”
송석현이 볼을 긁적거렸다.
“저 어떻게 알아보신 거예요?”
“에이, 딱 보면 알죠. 사진 찍어 주실 수 있죠?”
“네. 뭐, 같이 찍어요.”
여대생 둘이 송석현을 가운데에 두고 양옆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인파가 드나드는 서울역 앞 광장 앞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하나둘 인파가 더 몰렸다.
“고트 파이팅!”
“한국시리즈 우승! 고트, 고트 파이팅!”
“송석현! 송석현!”
팬심으로 달아오른 팬들과의 갑작스러운 팬미팅이 끝난 후, 송석현은 터덜터덜 힘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택시를 타기 위한 줄을 서서 핸드폰을 열자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우리 집으로 와. 두 분 다 저녁 늦게나 오신대.
그제야 송석현의 입가에 웃음이 조금 피어올랐다.
“헤헤.”
* * *
김나영의 집으로 간 송석현은 바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김나영은 그때까지 집을 치우고 있었다.
“나영아~.”
송석현이 달려가 김나영을 안자, 김나영이 송석현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애처럼 왜 이래?”
“이리 와 봐. 뽀뽀, 뽀뽀.”
“야아.”
“아무도 없는데 어때. 응?”
두 사람은 한참이나 입술을 떼지 못했다.
“서울역까지 갔다 오느라 힘들었지? 일단 앉아. 마실 거 줄게.”
“괜찮아. 그것보다 어머님, 아버님은 오늘 언제 오셔?”
“저녁은 먹고 오실 거 같아. 나보고 저녁 잘 챙겨 먹으라고 했거든.”
“음음, 그래…….”
“아무튼 미안. 오늘 약속까지 했는데.”
“아냐. 어쩔 수 없잖아. 갑자기 부모님 스케줄이 바뀐 건데.”
“내가 유도리 있게 잘 둘러서 말했어야 했는데 당황해서 말이야. 다른 친구랑 여행 간다고 했으면 그냥 넘어가셨을지도 모르는데.”
“아냐. 뭐…… 괜찮아. 어쩌다 보니 홈 데이트가 됐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김나영과 송석현이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김나영은 송석현에게 보리차 한 잔을 가져다주면서 물었다.
“우리 밥 시켜 먹을까? 아니면 내가 밥해 줄까?”
“음…… 네가 해 주는 밥 먹고 싶은데. 헤헤. 될까?”
“응, 그럼. 그런데 조금 기다려 돼. 밥을 안쳐야 하거든. 밥 안치는 동안 요리해 놓을 테니까 밥 같이 먹자.”
“그래, 좋아. 헤헤.”
송석현이 세상 행복한 미소를 보여 준 그때, 벨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 모두 그대로 굳었다.
김나영은 손으로 송석현의 신발을 가리켰다.
송석현은 자기도 모르게 신발을 챙겼다.
“내, 내 방으로 가. 일단 내 방으로.”
김나영의 손짓에 송석현이 김나영의 방에 들어갔다.
김나영은 그제야 목소리를 가다듬고 인터폰을 들었다.
“네에.”
-나영이니? 석현이 엄마야. 먹을거리 좀 가지고 왔는데 문 좀 열어 줄래?
“네? 네, 네. 네. 잠시만요.”
김나영은 인터폰을 끊자마자 자기 방문을 열었다.
“너희 어머니 오셨어.”
“응? 우리 엄마가?”
“어, 너 우리 집에 온다고 말 안 했지?”
“안 했지. 오늘 팀원들이랑 약속 있다고 하고 나온 건데.”
“알았어. 일단 너 여기 있어. 꼼짝하지 말고 여기 있어.”
김나영이 문을 열자 송석현의 어머니가 냄비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어머니, 어떻게 오셨어요?”
“너희 엄마가 너 걱정된다고 해서 내가 점심 챙겨 주려고 왔지. 닭도리탕 했는데 너 닭도리탕 좋아하잖아. 그치?”
“네, 좋아하죠.”
“그래, 잘됐다. 그럼 이거 받아. 이거랑 같이 밥 먹어. 내가 너 우리 집에 부를까 했는데 너도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거 귀찮을 거 아니야. 이걸로 점심, 저녁 반찬 삼으면 딱 좋을 거 같아서 아줌마가 챙겨 왔어.”
김나영은 냄비를 받아 들곤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맛있게 먹고, 냄비는 나중에 너희 엄마한테 받으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 알았지?”
“네. 아, 어머님은 식사하셨어요?”
“응. 밥 아까 먹었지. 아줌마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 그래. 잘 챙겨 먹어라, 알았지?”
“네. 들어가세요, 어머님.”
송석현의 어머니가 간 후에야 김나영이 한숨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 냄비 뚜껑을 열자 수증기가 위로 후욱 올라왔다.
김나영은 닭도리탕 냄새를 맡고선 웃었다.
“맛있겠네.”
김나영은 밥을 푸고 닭도리탕과 반찬을 준비한 다음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 송석현이 한쪽 구석에서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어머니 가셨어. 나 먹으라고 닭도리탕 가져다주셨네.”
“아, 닭도리탕. 안 그래도 아침에 먹고 싶었는데 일찍 나오느라 못 먹었는데. 잘됐다. 밥 먹을까?”
김나영은 송석현이 읽고 있는 책을 살피다 얼굴이 빨개졌다.
낡은 초록색 표지는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책이었다.
“야! 너 그거 읽지 마!”
송석현은 김나영의 초등학교 일기를 들어 보였다.
“이거? 왜? 재밌는데?”
“야, 달라구!”
“웬만한 소설보다 재밌네. 우리 나영이가 나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나 봐. 흐흐. 재밌는 거 많네.”
“야아.”
김나영이 일기를 뺏으려 송석현에게 달려들었다.
송석현을 팔을 높이 들어 일기를 지켜 냈다.
“야! 빨리 내놔!”
“좀만 더 읽고. 너무 꿀잼이야.”
“내놓으라고!”
둘이서 그렇게 옥신각신하다 보니 어느덧 김나영이 송석현 품에 폭 안긴 자세가 됐다.
송석현은 김나영에게 일기를 건네주곤 안았다.
“귀엽기는.”
“야, 이런 거 읽지 마. 치사하게 일기를 읽냐?”
“알았어, 알았어. 앞으론 안 읽을게.”
송석현에게 안긴 김나영이 고개를 위로 들었다.
송석현은 위에서 김나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저 안고 있을 뿐이었는데 서로 마른침을 삼켰다.
두 사람은 입을 맞추며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침대에 쓰러졌다.
이제 막 밥솥에서 나와 열기를 폴폴 풍기던 밥이 찬밥이 되도록 두 사람은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 * *
끼이이익.
송석현은 저녁 늦게야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동생 송철현은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송석현의 어머니는 설핏 선잠을 자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송석현의 목소리에 송석현의 어머니가 잠에서 깼다.
송석현의 어머니는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이제 왔니?”
“응.”
“재밌게 놀았어?”
“응.”
송석현의 어머니는 송석현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었니? 피곤해 보이는데.”
“아니야. 괜찮아. 안 피곤해”
“그래? 오늘 너무 심하게 논 거 아니야?”
“응. 괜찮아.”
송석현은 화장실을 가려다 다리가 휙 풀려서 휘청거렸다.
놀란 어머니가 다가가려 하자 송석현이 손을 들어 말렸다.
“잠깐 미끄러워서 말이야. 괜찮아, 엄마.”
“그래? 정말 괜찮아?”
“응.”
송석현은 한참이나 샤워를 한 후 화장실에서 나왔다.
송석현의 어머니가 홍삼을 건넸지만 송석현은 고개를 저었다.
“내일 먹을게. 오늘은 피곤해서.”
“얼마나 놀았길래 그래? 알았어. 일찍 자.”
“응. 먼저 잡니다.”
송석현이 방으로 들어가자 송석현의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피곤한가?”
송석현의 어머니는 송석현이 먹지 않은 홍삼을 먹으며 TV를 봤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TV를 보고 있자니 송철현이 귀가했다.
송철현의 한쪽 손에는 검은 봉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송철현은 현관문에 놓인 신발을 보곤 어머니에게 물었다.
“형 벌써 왔어?”
“쉬이이. 형 벌써 잔다.”
“형이? 지금 이 시간에? 새벽에나 자는 사람이 웬일로.”
“그러게. 피곤한가 봐.”
“웬일이래. 오늘 뭐 하고 논 거야?”
“너희 형도 얼마나 피곤하겠니. 첫 시즌이잖아. 스트레스도 많고 힘들 거야. 이제 시즌 말미라서 더 힘들지 않겠어?”
“그렇기야 그렇지만……. 아, 엄마. 그리고 이거.”
송철현이 검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복숭아. 요새 철이 아니라서 구하기 힘들었어.”
“그래. 고맙다, 아들.”
“그런데 갑자기 복숭아는 왜 사 달라고 했어? 엄마 복숭아 잘 안 먹었잖아.”
송석현의 어머니는 복숭아를 씻으면서 대답했다.
“오늘 잠깐 잠이 들었는데 복숭아밭을 걷는 꿈을 꿨거든. 복숭아가 얼마나 크고 실하던지. 입맛만 다시고 못 먹고 깼잖아. 그래서 너한테 문자했지.”
“웬 복숭아 꿈이래?”
“엄마가 요새 과일을 너무 안 먹었나 봐. 전에는 슈퍼 하면서 철마다 과일 챙겨 먹었는데 요새는 제철 과일을 못 챙겨 먹어서 그런가.”
석현의 어머니가 복숭아를 잘라 접시에 담아 왔다.
“자, 먹어.”
“응, 잘 먹을게.”
두 사람은 복숭아를 하나씩 베어 물었다.
“철이 지나서 그런가 좀 그렇긴 하네.”
“다음엔 철에 맞춰서 먹자. 과일은 역시 제철 과일이 최곤가 봐.”
“석현이 잠깐 깨워서 복숭아 줄까 했는데 안 깨우길 잘했네.”
“참 별일이야. 형이 피곤할 때도 다 있네.”
“형도 지치지, 왜 안 지치겠니. 어디 4번 타자가 아무나 하는 자리니? 게다가 포순데. 포수가 4번 타자 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어.”
“엄마가 나보다 야구는 더 도사야. 더 잘 아네.”
“나이도 어리니까 다른 팀 선수들도 텃세 부리고 그랬을 거야. 그동안 많이 참아 왔겠지. 어딜 가나 텃세는 있어. 운동선수들이니 텃세가 오죽 심할까.”
“형한테 텃세 부릴 사람이 있을까?”
“왜 없어? 텃세는 어디나 있다니까.”
두 사람은 복숭아를 먹다가 이내 포크를 내려놓았다.
송석현의 어머니는 휴지로 입을 닦아 냈다.
“이건 정말 맛이 없다. 아들, 미안해. 너무 맛이 없다. 괜히 고생만 시켰네. 괜한 꿈을 꿨어.”
* * *
송석현이 일어난 건 다음날 점심이 가까웠을 때였다.
송석현의 어머니가 흔들어 깨울 정도로 송석현은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얘가 왜 이래? 12시간도 넘게 잤어. 이제 일어나.”
“어어어…… 알았어.”
송석현은 축 늘어지는 몸을 겨우 일으켰다.
핸드폰을 열어 김나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김나영은 바로 답장했다.
-나도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엄마가 나 몸살 걸렸다고 난리야.
-나도. 몸에 힘이 하나도 없네.
-괜찮아? 오늘 경기 뛸 수 있어?
-응. 뛰어야지.
-그러게 어제 좀…….
-미안……. 많이 힘들어?
-나야 쉬면되는데 네가 걱정이지.
-나도 운동장 가면 괜찮을 거야.
-오늘 잘해. 나 TV로 너 응원할게.
-응. 너도 오늘은 푹 쉬고.
-오늘만 쉬어서 될 거 아닌 거 같아. 얼차려 받은 거 같아. 일주일은 못 걸을 거 같아.
-……다음부턴 조금 자중할게.
-될까?
-……힘들겠지만 노력은 해 볼게
송석현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휘청 꺾였지만 책상을 잡아 넘어지진 않았다.
“아이고. 아이고, 죽겠다.”
송석현은 휘청거리는 다리를 끌고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