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94화 (194/201)

1위는 나의 것 (8)

“마이 볼! 마이 볼!”

우익수 송재완이 소리쳤다.

공과의 거리는 최영석이 몇 발자국 더 가까웠지만 우익수는 앞으로 달리면서 잡을 수 있다.

최영석은 순간 송재완을 바라봤다.

공과 거리가 제법 멀다.

송재완의 걸음을 생각하면 아슬아슬하다.

내가 잡을까, 아니면 역시 순리대로 맡길까?

고민하는 사이 송재완이 몸을 날렸다.

촤아아악!

송재완의 몸을 날랬다.

최영석은 기우였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안심의 순간은 짧았다.

생각보다 날랜 송재완의 몸이 미끄러지면서 공은 글러브가 아닌 송재완의 팔뚝을 맞아 튕겨 나갔다.

“……에이 씨!”

최영석이 재빨리 몸을 날려 봤지만 송재완의 뒤로 흐른 공은 이미 한 번에 잡기엔 늦었다.

“우익수 놓쳤어요! 고트는 그사이에 3루 주자가 홈을 밟습니다! 4-0. 4-0으로 또 한 점을 앞서가는 고트! 행운의 안타로 또 한 점을 앞서갑니다.”

“송재완 선수의 슬라이딩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슬라이딩을 하면 위로 오는 공이 제대로 안 보이거든요. 그래서 공의 위치를 확실하게 잘 확인한 후에 마지막에 슬라이딩을 해야 하는데 너무 빨리 슬라이딩을 했어요. 마음이 급했습니다.”

“불운의 연속인가요. 에이스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연속 실점. 큰 한 방 없이 야금야금 점수를 내주고 있습니다.”

고트의 행운은 거기서 끝이었다.

불펜 에이스 조진호는 실력으로 추가 실점을 틀어막았다.

4-0.

큰 점수 차이는 아니지만 단번에 따라가긴 힘든 점수 차이.

포수 정용욱이 선수들을 모았다.

“아직 안 끝났어. 한 이닝에 한 점씩 따라간다. 두 점, 세 점 내면 더 좋고. 운이라는 거 왔다 갔다 하는 거 알지? 저쪽에서 운을 끌어다 썼으니 이제 우리 차례야. 집중하자, 집중.”

“네!”

5회 말.

페가수스는 물오른 한민석의 공을 공략하지 못했다.

고트도 6회에 추가 득점을 내지 못했다.

어느덧 6회 말.

고트의 마운드에는 한민석이 없었다.

5이닝 0실점을 한 투수 대신 서 있는 건 고진석,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스의 클로저를 맡았던 불펜 투수였다.

“고트도 승부수를 띄웁니다.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은 한민석 선수를 내리고 고진석 선수를 마운드에 올렸어요.”

“오늘 경기 잡고 공동 1위를 뺏겠다는 의지겠죠?”

“아, 지금 불펜을 보세요. 고트 불펜을 보십쇼. 정홍민 선수와 김정률 선수가 몸을 풀고 있습니다. 필승조 투수들을 아끼기로 유명한 고트에서 모든 필승조 투수들을 총동원하고 있어요.”

“단 한 점이라도 내준다면 바로 투수를 교체할 겁니다. 게다가 조합을 보세요. 우완 투수 고진석, 좌완 투수 정홍민, 언더 김정률. 투수가 바뀔 때마다 타자들이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우완, 좌완, 언더 이렇게 아예 유형까지 다르다면 타순 한 바퀴가 돌아도 적응하기 어려울 겁니다.”

페가수스 최성연 감독의 콧잔등이 일그러졌다.

5회 2사 만루 대량 득점 찬스에서 유선호에게 번트를 댄 이유.

“하…….”

최성연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짧았다.

고트는 당연히 불펜을 아끼는 팀이니까, 한민석이 잘 던지고 있으니까 하던 대로 할 거라 생각했다.

한민석이 6~7회쯤에 내려오고 불펜 투수 1, 2명이 막는 그림.

고트는 한 점을 더 주더라도 불펜 교체에는 인색하던 팀 아닌가.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하면 이게 당연한 일이다.

오늘 경기 한 번으로 1위의 향방이 바뀔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한 최선보다 고트는 더한 극약 처방을 내릴 수 있었다.

함성훈이 초보 감독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당연한 일을 간과했다.

단기전이라면 큰 거 한 방을 노리기보단 1점이라도 짜내는 게 맞았다.

-아웃!

-아웃!

-아웃!

“고진석 세 타자 연속 삼진! 고진석 선수의 포크볼이 오늘 빛을 발합니다.”

“고진석 선수의 포크볼이야 이미 정평이 나 있죠. 마무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확실한 결정구가 있어야 하거든요. 고진석 선수의 포크볼은 타순이 한 번 돌지 않는 이상 맞춰 내기 까다로워요.”

7회 초.

조진호는 고트의 타선을 세 타자 연속 범타로 잠재웠다.

문제는 페가수스의 타선도 깨어나질 못했다는 것이다.

7회 말 고진석이 2사에서 안타 하나를 내주자 투수가 바뀌었다.

바뀐 투수는 정홍민.

정홍민은 초구 하나로 플라이 아웃을 따냈다.

“이게 정홍민입니다. 우타자한테 약하다는 약점이 있지만 그 약하다는 우타자한테도 피안타율이 2할을 조금 넘습니다. 좌타자한테는 1할대구요. 높은 타점에서 내리꽂는 디셉션도 좋아서 여간해선 쉽게 당할 선수가 아니에요.”

8회 초.

페가수스는 고트의 클린업을 상대하기 위해 투수를 또 바꿨다.

바뀐 투수는 셋업맨 정광옥.

정광옥은 송석현에게 볼넷 하나를 내주고 단 한 점의 실점도 없이 막아 냈다.

이어지는 8회 말엔 페가수스가 출루를 단 한 명도 못 시키면서 페가수스 팬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페가수스도 포기하지 않았다.

마무리 오규옥을 올려 9회 초 고트의 타선을 꽁꽁 묶었다.

9회 말.

페가수스의 마지막 공격.

1번 타자 최영석이 2루타를 치면서 득점의 희망을 피워 올렸지만, 고트의 대응은 더 빨랐다.

“김정률 선수가 올라옵니다. 김정률 선수가 경기를 끝내러 나옵니다.”

“김정률 선수의 공은 우타자한테 아예 안 보인다고 할 정도로 극악의 상성을 자랑하거든요. 앞으로 나올 2, 3, 4, 5번 모두 우타잡니다.”

“그럼 대타를 써야 할까요?”

“하위 타선도 아니고 지금 페가수스에서 이 타자들보다 잘 칠 타자들도 없어요. 이대로 승부하는 게 맞긴 한데…….”

송석현이 김정률에게 사인을 보냈다.

싱커.

코스는 필요 없다.

낮은 쪽으로 오기만 하면 타자들이 알아서 자멸한다.

김정률이 초구가 벨트 높이로 오자 심창규가 스윙했다.

심창규의 스윙과 동시에 아래로 내려앉는 공.

심창규의 배트 끝에 맞은 공이 힘없이 떠서 1루수 글러브로 들어갔다.

-아웃!

김정률이 고개를 한 번 까닥했다.

“이 정도야 뭐.”

다음 타자 김한성은 초구 떠오르는 커브를 쳐서 플라이 아웃.

경기가 끝났다.

“와아아아!”

선수들은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소리 지르고 기뻐했다.

리그 1위.

선수도 팬들도 기뻐했지만 가장 기뻐한 이는 따로 있었다.

“이거지, 그래!”

노인의 목소리에 가족들이 깜짝 놀랐다.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띤 노인의 이름은 김명진.

대기업 전성의 회장이자 고트의 구단주.

김명진은 붉어진 얼굴로 손을 들었다.

“술. 술 한 잔 가져와 봐. 가장 좋은 놈으로다가. 얼른!”

얼음을 감싸는 옅은 갈색의 액체.

김명진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흐흐. 흐흐흐흐. 그래. 되잖아. 되잖아, 우리도.”

* * *

[공동 1위의 탄생. 고트의 후반기 질주를 막을 자 누구인가?]

[페가수스의 추락? 고트의 비상? 페넌트레이스의 향방은 미궁 속으로]

[송석현이 없어도 강하다. 고트는 업그레이드 중]

[가을에 약한 남자 고트는 어디로? 올라갈 팀은 올라간다]

야구 기사의 반절은 고트에 관련된 기사였다.

매번 가을야구의 조연이었던 고트가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원년 서울 팀에 리그 초창기 우승으로 리그에서 가장 많은 팬을 보유했지만 매번 팬들을 울리던 팀.

지금은 가을 잠바를 찍어 놓기 무섭게 부리나케 매진되기 일쑤였다.

인터뷰 요청은 쏟아지고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는 제의도 들어왔다.

단연코 최고의 관심사는 스무 살의 포수 송석현.

웨일스와의 주말 3연전, 기자들은 물론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석현이 메이저 가는 거야?”

선수들도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을 보고 송석현을 놀려 댔다.

송석현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언론에선 송석현이 메이저리그에서 포수로 데뷔할 수 있는지 없는지, 가상의 미래를 그리느라 바빴다.

“우린 뭐 안중에도 없네.”

웨일스 선수들은 고트 벤치에만 몰려 있는 기자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느덧 4위와의 격차는 더 벌어져 사실상 가을야구는 마지막 희망의 끈 하나를 붙잡고 있는 형국.

상위 네 팀과 웨일스와의 차이는 더 벌어져 이제는 잡을 엄두도 못 내고 있다.

현재 4위는 대구 스콜피언.

페가수스와 함께 언제나 1, 2위를 다투던 팀이 4위로 내려앉을 만큼 상위 네 팀의 격전은 치열했다.

웨일스 내부에서도 스콜피언을 제칠 수 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선발, 불펜, 타선, 수비 모두 웨일스보다 뒤지는 게 단 하나도 없는 팀이 스콜피언이다.

가을야구의 희망이 옅어지자 선수들의 어깨도 축 처지기 마련이다.

“자자자. 오늘도 잘해 보자. 한 경기, 한 경기만 이겨 보자고. 어?”

선발투수 구인선이 후배들을 독려했다.

“내가 오늘 이겨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나만 믿으라고.”

구인선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었다.

선발 라인업은 구인선과 정천운.

선발의 무게감은 구인선이 앞섰다.

시즌 말로 갈수록 구인선의 기록이 더 좋아지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도 한몫을 거들었다.

구인선의 제구력은 좋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지만 타고난 체력, 어깨는 가히 리그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시즌 말이 돼도 시즌 초와 똑같은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건 확실한 장점이었다.

똑같은 공이지만 체력이 떨어진 타자들은 안타 대신 파울을 쳤다.

체력이 떨어진 다른 투수들이 파울이 될 공도 안타가 되는 것과 정반대였다.

상대 투수 정천운은 올해 선발로 올라온 투수.

첫 선발 로테이션이니만큼 지금쯤이면 체력 고갈로 허덕일 때다.

구인선의 예측은 합리적이었지만 단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세상에 체력이 좋은 투수가 자신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 * *

“후우.”

구인선이 벤치에서 음료를 홀짝거렸다.

4회 초 경기는 1-1.

구인선은 송석현에게 솔로 홈런 하나를 헌납했고 상대 투수 정천운도 김재홍에게 홈런 하나를 헌납했다.

좌타자가 많은 고트가 구인선에게 어려움을 겪는 건 예측 범위였지만 정천운의 호투는 예상 밖이었다.

“웨일스가 정천운 선수에게 고전하고 있습니다.”

“리그 최고의 5선발이라는 별명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정천운 선수가 기복이 좀 있어서 그렇지 잘해요. 팀 사정에 따라선 3~4선발도 맡을 수 있는 선수라고 봅니다.”

“고트는 올해 좋은 신인 선수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송석현, 김인환 선수는 둘째로 치더라도 투수들 중에서도 정천운, 정진오 선수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요. 이백찬, 홍대성 선수도 물론이구요.”

“잘되는 팀은 어떻게든 잘되네요. 이렇게 좋은 신인들이 한 번에 터지는 경우가 많지는 않거든요.”

구인선의 호언장담과 달리 승리는 고트의 몫이었다.

정천운의 퀄리티 스타트 이후 홍대성의 마무리.

다음 날에는 선발투수 정진오의 부진으로 고트가 패배했으나 마지막 3차전에선 에이스 피시를 앞세워 대승을 거뒀다.

위닝시리즈로 단독 1위를 노려 봤으나 페가수스 또한 위닝시리즈로 공동 1위.

좀처럼 식지 않는 1위 경쟁 속에서 더 뜨거운 곳이 있었으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