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는 나의 것 (7)
“벌써 내린다고?”
자신의 강판 소식에 로이 쉐버가 화를 참지 못했다.
“이제 겨우 2점이야, 2점이라고! 말이 돼? 이게 말이 되냐고?”
통역사가 비지땀을 흘리면서 욕설은 필터링해 코치에게 의견을 전달했다.
코치 또한 사람인지라 욕을 못 알아들은 건 아니었지만 모른 체했다.
“수고했어. 내려가.”
로이 쉐버가 얼굴을 붉힌 채 마운드를 내려갔다.
벤치에 도착한 로이 쉐버는 글러브를 집어 던지고 벤치 뒤로 나가 버렸다.
“……하.”
최성연 감독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돌아온 투수코치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문화가 다르잖습니까.”
“여기가 메이저리그라면 저렇게 하겠어? 여기가 만만한 거겠지.”
“……제가 주의시키겠습니다.”
“시즌 다 끝났는데 이제 와서 무슨. 내년에 저놈 쓸 일 없어.”
* * *
불펜에서 한 선수가 나와 마운드로 향했다.
팬들의 환호와 탄식이 뒤섞였다.
놀란 해설자와 캐스터가 말했다.
“조진호 선수가 올라옵니다. 5회에 조진호 선수가 올라와요.”
“리그 최고의 좌완 불펜 중의 하나죠. 마무리 오규옥 선수를 제외하면 페가수스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카드입니다.”
“조진호 선수가 5회에 2점으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올라왔습니다. 5회에 올라왔다는 것도 놀라운데 지고 있는 상황에서 올라왔어요.”
“그만큼 오늘 경기는 절대 내주지 않겠다는 최성연 감독의 각오가 보입니다. 물론 타이밍상으로는 나쁘지 않습니다. 2사지만 클린업으로 이어지거든요. 여기서 큰 거 한 방을 허용하면 오늘 경기를 따라잡는 게 어렵다는 판단을 한 거 같아요.”
“김인환 선수가 좌타자라는 이유도 있겠죠?”
“예. 조진호 선수가 좌투수인 데다 좌타자에게도 강하거든요. 김인환 선수는 좌투수에게 약한 편이고요.”
김인환이 타석에 들어서기 전부터 쓴웃음을 지었다.
조진호가 마운드에서 서서 연습 투구를 했다.
몸을 푸는 공이라지만 140km/h가 넘는 공이 하나도 없다.
대단찮은 구속이지만 조진호는 리그 톱 5 안에 꼽는 불펜 투수다.
구속은 느리지만 집요하게 바깥쪽으로 승부해서 타자를 잡아내는 투수.
보더 라인에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리그에서 몇 안 되는 투수다.
“후우우우.”
김인환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쉬었다.
타석 가장 앞에 바짝 붙어 서서 어깨에 힘을 풀었다.
빠른 공은 없다.
기다렸다 친다.
기다렸다-.
-스트라이크!
“조진호 선수가 초구 한복판 직구를 던져서 카운트를 잡습니다.”
“김인환 선수가 아쉬워하네요. 저건 실투거든요. 저걸 쳤어야죠. 너무 생각이 많았나요?”
김인환이 자기 머리를 툭 쳤다.
생각이 많았다.
조진호의 2구.
김인환의 배트가 돌았다.
-스트라이크!
“슬라이더. 김인환 선수가 슬라이더에 헛스윙하네요.”
“조진호 선수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성적이 좋은 게 바로 저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때문이죠. 조진호 선수의 서클 체인지업이 리그 최고 수준인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슬라이더는 과소평가돼 있습니다. 각은 크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직구와 구분이 더 까다롭습니다. 배트 끝에 걸려서 땅볼을 만드는 경우도 많구요.”
“최성연 감독의 한 수가 통하나요?”
“일단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거 같네요.”
대기 타석에 있던 송석현이 배트를 세운 채 앉았다 일어서길 반복했다.
김인환의 스윙이 간결해지면서 빠른 공, 변화구 모두 좋아졌지만 타고난 약점인 선구안은 이제야 리그 평균 수준에 그친다.
보더 라인에 공을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리그 최고 수준의 제구력을 갖춘 투수는 김인환의 천적이나 다름없다.
“또 선두 타자로 나가려나.”
송석현이 중얼거리는 순간, 김인환이 스윙했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 슬라이더.
김인환의 배트 끝에 공이 맞았다.
“유격수 방면으로 가는 느린 공! 유격수가 달려와서 잡고 1루로! 1루에서…… 세입! 세입입니다! 김인환 선수가 살았어요!”
“김한성 선수가 어필하네요. 타이밍은 거의 동 타이밍으로 봤거든요. 혹시 느린 그림으로 볼 수 있을까요?”
“아, 지금 바로 나옵니다. 유격수 김형우 선수가 공을 잘 잡았고 던지는 것도 좋았는데…… 아, 살짝 옆으로 공이 가긴 했네요. 그래도 김한성 선수가 잘 잡았는데, 여기서 세입이 나왔단 말이죠.”
“베이스, 베이스 부분을 보여 주세요.”
“베이스에서 발도 안 떨어졌네요. 그렇다면 김인환 선수가 더 발이 빨랐다는 판정인가요?”
“예. 그런 거 같네요. 그렇다면 방금의 세입은 김인환 선수의 전력 질주 덕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아웃 타이밍이었는데 공이 배트 끝에 맞으면서 공이 속도가 죽었습니다. 덕분에 김인환 선수가 세입이 된 거 같네요.”
“이러면 2사 주자 1, 3루. 주자 있는 상황에서 송석현 선수가 들어옵니다. 고트는 기회를 잡았어요.”
“하필 이럴 때, 이런 판정을 받을 때 상대 최고의 타자가 나온다. 페가수스 팬들은 오늘 하늘을 원망할 거 같네요.”
김인환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1루 베이스로 돌아왔다.
타격 후의 전력 질주.
타격 후엔 원래 1루로 뛰는 게 정상이지만 아웃 타이밍이라면 설렁설렁 뛰기 마련이다.
전력 질주도 체력을 소모시키는 요인이다.
유선호가 고트로 트레이드 되면서 김인환은 습관을 바꿨다.
유선호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코치들이 강요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제 베테랑 축에 드는 유선호가 아웃이 뻔한 공임에도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1루로의 전력 질주가 타율을 유의미하게 올리진 못해도 한 시즌에 안타 한두 개는 너끈히 건지고도 남는다는 게 유선호의 주장이었다.
“야, 살살 뛰어. 그러다 다친다, 너.”
김한성의 충고에 김인환이 씨익 웃었다.
“꼬우면 너도 열심히 뛰든가.”
페가수스의 감독 최성연 감독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비장의 한 수마저 삐끗했다.
상대 클린업 찬스에서 끊기 위해 조진호까지 올렸는데 밥상을 차리고 송석현을 불러들였다.
‘걸러.’
최성연의 사인이 투수에게 전해졌다.
다음 타자 유선호는 좌타자다.
송석현에게 승부해서 홈런을 맞으면 3점, 유선호에게 승부해서 홈런을 맞으면 4점이다.
1점 차이지만 송석현보단 유선호와 승부하는 게 더 확률적으로 안전한 선택이다.
“볼. 볼넷입니다. 송석현 선수를 거르네요.”
“어쩔 수 없죠. 지금 상황에선 유선호 선수와 승부하는 게 더 낫습니다. 송석현 선수가 바깥쪽 공에 또 강하지 않습니까? 바깥쪽에 승부를 거는 조진호 선수에겐 상성상 안 좋은 타입이죠.”
“하지만 유선호 선수가 이번 페가수스 3연전에서 성적이 좋아요.”
“결국 확률 아니겠습니까. 컨디션 좋은 유선호보다 송석현이 더 까다롭다는 얘기죠.”
유선호가 타석에 들어섰다.
평소 농담 따먹기를 하던 정용욱, 유선호는 서로 아무 말을 건네지 않았다.
조진호는 긴장한 기색 하나 없었다.
만루 상황은 불펜 베테랑 투수에겐 익숙한 상황이다.
한 타자만 아웃이면 되는 상황.
조진호의 초구는 바깥쪽 슬라이더.
-스트라이크!
“헛스윙! 조진호 선수가 초구를 노려 봤지만 헛스윙이 나옵니다.”
“초구가 중요하죠. 조진호, 정용욱 배터리가 유선호 선수의 심리를 잘 꿰뚫은 거 같습니다. 베테랑 타자들은 공 보고 공 치기보다 자기가 노리는 공 하나를 딱 들고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유선호가 숨을 골랐다.
직구 구속 140km/h 초반임에도 불펜 에이스 대접을 받는 이유가 있다.
사람을 가지고 놀 듯 변화구가 적절하게 빠진다.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은 공.
함성훈 감독이 투수코치에게 물었다.
“두 사람 상대 전적, 2할대 맞나요?”
“네. 선호가 진호한테는 좀 약합니다. 진호가 좌타자한테 유독 강하기도 합니다.”
제2구는 아래쪽으로 빠지는 체인지업.
유선호가 가까스로 참았다.
“노 스윙이네요. 유선호 선수가 잘 참았습니다.”
“위험했어요. 조금만 더 돌았어도 스트라이크입니다.”
유선호가 볼을 부풀렸다.
송석현을 거르고 자신과의 승부.
송석현이 잘하는 것과 별개로 타자의 자존심이 흔들리는 일이다.
유선호는 타석에 바짝 붙었다.
맞아서라도 나간다.
정용욱은 유선호의 발을 보곤 사인을 바꿨다.
‘체인지업. 아웃사이드.’
조진호의 서클 체인지업은 좌타자에겐 바깥쪽으로 가다가 안쪽으로 들어오는 백 도어 체인지업이다.
좌타자 상대로 슬라이더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이라 위험한 백 도어 체인지업은 아껴 왔지만 상대는 유선호다.
노림수가 좋은 타자에겐 허를 찔러야 한다.
조진호가 공을 던지는 순간, 유선호의 몸이 움직였다.
배트를 양손으로 잡고 가로로 길게 눕힌 폼.
번트였다.
조진호의 손을 떠난 공은 낮게 날았다.
툭.
유선호의 장타력을 대비해 뒤로 밀어 놓은 수비진이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3루수, 3루수, 3루수가 공을 잡고 1루로! 1루로! 1루에서 세입입니다! 세입! 유선호의 번트 안타가 통했습니다! 3-0. 3-0입니다. 고트가 또 1점을 앞서갑니다.”
“방금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번트가 나왔습니다. 번트를 잘 대지도 않는 타자인 데다 만루 상황이었거든요. 8회나 9회도 아니고 5회 만루 상황에 클린업 찬스에서 번트가 나왔습니다. 이건 페가수스는 물론, 저희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이었어요.”
“함성훈 감독이 그동안 너무 믿음의 야구를 하는 거 아니냐, 관망하는 거 같다, 이런 비판도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작전도 잘 쓰는 거 같습니다.”
“성공하긴 했지만 좋은 작전인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찬스에서는 대량 득점할 수 있게 타자에게 맡겨 두는 게 최선의 방법이긴 하거든요.”
정용욱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번트를 대놓고 대라고 느린 공을 준 셈이다.
자신도 여기서 번트가 나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평소 작전을 잘 쓰지 않는 고트가 5회 2사 만루 유선호 타석에서 번트를 댄다…….
페가수스 최성연 감독은 다시 사인을 냈다.
“괜찮아. 나쁘지 않아. 1점 주고 이번 이닝 막는 거야. 다음 타자 그대로 승부하면 돼.”
페가수스 입장에서 1점을 내줬지만 최악은 면했다.
다음 타자 최재완은 송석현, 유선호와 비교하면 만만한 타자다.
최재완만 잡으면 5회 3실점으로 막아 내는 셈이다.
3점내라면 아직 4이닝이 남았으니 충분히 역전시킬 수 있다.
조진호를 빨리 올린 것도 역전할 수 있는 점수 차를 유지하기 위함 아닌가.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흐름이다.
대량 실점은 면했지만 계속 상대가 공격을 이어 가고 있다.
빨리 흐름을 끊어야 한다.
최재완을 잡고 다음 이닝부터 반격에 나서야 한다.
“초구. 무조건 초구야. 직구만 생각하고 초구를 때려. 알았지?”
“네.”
타격코치 강연태가 최재완에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
초구 직구.
조진호는 오늘 변화구 구사가 많았다.
클린업을 상대로 정직한 승부가 어려웠던 탓이다.
하지만 변화구 승부가 실력이든 불운이든 안타로 계속 연결됐다.
페가수스 입장에서 최재완은 만만한 타자다.
변화구가 올 확률은 많아야 30%.
이제는 직구 타이밍에 승부를 건다.
“조진호 선수와 정용욱 선수의 사인 교환이 길어지네요.”
“신중해야죠. 한 타자만 잡으면 이번 이닝이 끝납니다.”
조진호가 공을 던졌다.
141km/h의 포심 패스트볼.
최재완이 공을 때렸다.
“우익수! 우익수! 우익수 앞으로~~!”
최재완이 때린 공이 높게 떴지만 멀리 뻗지 못했다.
공은 2루수와 우익수 사이를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