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는 나의 것 (6)
심창규가 1루에서 리드를 줄였다 늘렸다 하면서 한민석의 심기를 건드렸다.
심창규는 한민석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몸을 건들거렸다.
함성훈 감독이 뒷짐을 진 채 중얼거렸다.
“이런 심리전이라…….”
투수 한민석은 좌투수다.
1루를 바라보면서 공을 던져야 한다.
성격 급한 한민석의 눈앞에서 1루 주자가 몸을 건들거린다는 건 신경을 긁어 보겠다는 심산이다.
대단한 작전은 아니지만 비용 대비 효과는 좋다.
한민석은 구위는 좋아도 제구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1루 주자에게 신경 쓰다 보면 타자와의 승부에서 실투가 나올 수도 있다.
설령 실투가 없더라도 상대 투수의 컨디션을 흔들 수만 있어도 성공이다.
팡!
-세입.
“한민석 선수가 견제를 한번 해 봅니다.”
“심창규 선수가 리드를 꽤 길게 가져가 봅니다. 저러면 투수가 짜증이 좀 나겠죠?”
송석현이 자리에서 한 번 일어나 사인을 냈다.
‘몸 쪽. 빠른 공. 높은 쪽.’
“음…….”
한민석이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꺾었다.
홈런 타자에게 몸 쪽 높은 공을 초구로 요구한다.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면 포수도 투수도 부담스러워하는 코스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이야말로 저쪽 코스에 공을 던질 수 있는 찬스다.
카운트가 몰리면 과감한 승부가 더 어려워지는 법이니까.
“후.”
한민석이 살짝 웃었다.
평소에는 샌님 같고 어리바리한 루키 같은 놈이 홈 플레이트 앞에만 앉으면 능구렁이가 된다.
때론 볼 배합이 과감하고 때론 볼 배합이 집요하다.
한민석이 공을 던지려 하자 1루 주자 심창규가 리드를 늘리면서 2루로 뛰었다.
정말 뛰는 건지 페이크 도루를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투수의 심기를 건드리기엔 알맞았다.
팡!
타자 몸 쪽으로 깊숙이 박힌 공, 김한성이 놀라서 몸을 뒤로 뺐다.
타자가 물러서자 미트에서 공을 빼는 송석현의 모습이 보였다.
페이크 도루 시도를 하다 귀루하던 심창규가 화들짝 놀랐다.
송석현이 어느새 공을 빼서 1루로 던지려고 하는 게 아닌가?
“송석현 1루로!”
심창규가 1루 베이스를 향해 팔을 쭉 뻗었다.
송석현의 공은 1루수 김인환의 미트로 빨려 들어갔다.
1루수 김인환은 그대로 공을 잡자마자 심창규의 손을 태그.
심판이 잠시 멈칫했다.
-세입!
“세입! 세입이네요. 아슬아슬했는데 세입이 됐습니다.”
“방금은 심창규 선수의 가슴이 철렁했을 겁니다. 원래 한민석 선수의 퀵 모션이 아주 빠른 편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마음 놓고 리드를 늘려 놨는데 설마 1루로 포수가 견제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게다가 통상 주자를 견제하기 위해 바깥쪽 아웃사이드에 빠른 공을 던지는 게 정석인데 방금은 타자 몸 쪽으로 공을 던졌습니다. 이러면 더 방심하기 마련이에요. 김한성 선수가 놀라서 몸을 뺀 덕분에 송석현 선수의 송구를 도와준 셈도 됐구요.”
“이러면 심창규 선수가 쉽게 리드를 못 넓히겠네요. 송석현 선수의 송구야 이미 리그 최고 수준 아닙니까?”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고교 시절에는 150km/h 이상을 던지던 투수 출신입니다. 160km/h를 던졌다는 얘기도 있구요. 아마 메이저리그를 통틀어도 송석현 선수보다 송구가 더 빠른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송석현 선수의 팝 타임이 1.9초를 넘지 않는답니다. 이 정도면 메이저리그에서도 A급입니다.”
페가수스의 최성연 감독의 한쪽 눈썹이 살짝 찡그러졌다.
다른 포수가 1루 견제를 했다면 오히려 쾌재를 불렀을 거다.
포수가 1루 견제로 1루 주자를 잡는 일은 드물다.
포수가 1루 견제를 하는 건 주자를 잡거나 견제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거슬려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견제하는 거다.
심창규 정도의 주자를 두고 1루 견제를 한다는 건 포수의 마인드가 미성숙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 상대하는 포수는 송석현이다. 통상적인 포수와는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하마터면 심창규가 아웃이 될 뻔했다.
몸 쪽 공을 요구한 것도 우연이라 볼 수 없다.
타자와 주자의 방심을 불러일으키는 건 물론이거니와 타자가 놀라서 타석을 벗어나는 일도 계산했을 수도 있다.
일련의 과정이 사실이라면 페가수스가 구사할 수 있는 작전의 폭이 줄어든다.
포수가 아무리 어깨가 좋고 팝 타임이 짧아도 도루는 투수의 역량이 7할이다.
퀵 모션이 빠르지 않은 한민석이라면 도루는 해 볼 만하겠지만, 1루 견제로 1루 주자 심창규가 바짝 얼어붙었다.
여차하면 1루로 공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심창규의 리드가 반 발자국이나마 줄어들 수밖에 없다.
“허. 허허.”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스무 살짜리가 판을 설계한다.
베테랑 감독이라고 해도 쉽사리 짜낼 수 없는 작전이다.
고트의 함성훈 감독이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작전을 고안하고 전달하기엔 불가능한 시간이고 복잡한 작전이다.
결론인즉…… 그 짧은 시간에 송석현 혼자 생각해 내고 실천해 냈다는 얘기다.
“……어쩌다 저런 놈이 고트에.”
“네?”
“아냐. 아니야, 아무것도.”
최성연이 다시 사인을 바꿨다.
리드를 줄이고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하라는 사인이었다.
“이봐, 후배님.”
김한성이 송석현에게 말을 걸었다.
“살살 좀 해 줘. 나 아직도 맞은 데가 얼얼하거든? 또 맞았다간 나도 진짜 야마 돌 수가 있어.”
“선배님.”
“그래.”
“인환이 형보다 싸움 잘하세요?”
“뭐?”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넋이 나간 사이 한민석의 공이 바깥쪽 보더 라인을 타고 들어온다.
급한 마음에 휘두른 배트는 허공을 갈랐다.
체인지업.
-스트라이크!
“1-1. 한민석 선수가 헛스윙을 이끌어 냅니다.”
“한민석 선수의 체인지업이 많이 좋아졌네요. 타자가 치려고 하면 도망가 버립니다.”
김한성은 미간을 확 좁혔다.
“뭔 소리야, 그건?”
“선배님 몸이 공에 맞으면 전 인환이 형 뒤로 숨을 거라서요.”
“……하.”
곧 죽어도 몸 쪽 공은 안 던진다는 말은 없다.
김한성은 배트를 높게 들었다.
“숨을 거라면 잘 숨어라, 내가 너 먼저 잡기 전에.”
“근데 이번에 공이 오면 머리 쪽으로 갈 거라 저 잡을 여유는 없을걸요.”
“뭐, 인마?”
김한성이 이를 악문 사이 한민석의 공이 날아온다.
한가운데로 오는 공.
김한성이 배트를 휘두르려 하는데 공이 안쪽으로, 안쪽으로 꺾여 온다.
슬라이더.
타자의 몸 쪽을 노리는 슬라이더다.
김한성이 움찔하는 사이 공은 이미 미트에 들어왔다.
-스트라이크!
“1-2. 한민석 선수가 볼 하나를 준 이후로 연속으로 스트라이크 두 개를 만듭니다.”
“방금은 좀 위험한 공이었어요. 백 도어 슬라이더를 노린 거 같은데 너무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김한성이 배트를 부숴 버릴 듯 꽉 쥐었다.
적당히 경고 좀 하려고 했더니 저 어린 놈이 자신을 가지고 논다.
가슴에서 욱했지만 차라리 말을 걸지 않기로 했다.
왜 김욱 선배가 웬만하면 대거리를 하지 말라고 했는지 체감했다.
건드리면 배로 갚는 놈이다.
타자일 때는 더없이 신중한 놈인데 포수일 땐 양아치가 따로 없다.
“체인지업 오네요. 잘 쳐 보세요.”
김한성이 꾹 눌러 왔던 욱이 또 한 번 꿈틀했다.
한민석이 던진 공은 바깥쪽 보더 라인을 타고 왔다.
생각보다 반응이 앞섰다.
배트를 휘둘렀지만 허공이었다.
팡!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한민석 선수가 김한성 선수를 삼진으로 잡아냅니다.”
“152km/h. 오늘 최고 구속이 나왔네요.”
“빠른 공에 김한성 선수가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김한성이 배트를 무릎으로 부숴 버렸다.
왜 체인지업이란 말에 넘어가 체인지업 타이밍에 공을 휘둘렀단 말인가.
스스로가 바보 같고 한심해서 울화통이 터졌다.
“워, 워. 진정해, 인마.”
김욱이 한마디를 건네자 김한성이 부서진 배트를 챙겨 벤치로 향했다.
김욱은 타석에 들어서면서 송석현에게 말을 건넸다.
“너 쟤한테 뭐라고 했어? 생전 안 저러던 놈이 왜 저래?”
그 말을 들은 심판이 풉, 하고 웃었다.
“뭐 있구나, 그치?”
“아무것도 없어요. 화가 많으신 분 같아요, 한성 선배님.”
“한성이가 무슨. 세상 착한 놈인데.”
“아, 선배님.”
“왜, 왜.”
“체인지업 옵니다. 하나 치세요.”
심판이 크흥, 하고 소리 냈다.
한민석이 던진 공이 바깥쪽 보더 라인을 타고 들어왔다.
김욱은 스윙하지 않았다.
팡
-스트라이크.
“체인지업 존에다 넣어 드렸는데도 못 치시면 어떡해요?”
“……진짜 체인지업을 던지네.”
“이번에는 빠른 공이에요. 꼭 치세요.”
김욱이 뭐라 답변하기도 전에 한민석이 공을 던졌다.
존 가운데로 오는 공.
김욱이 스윙하자 공이 안쪽으로 휙 꺾였다.
탁!
배트 손잡이 부분에 맞은 공이 투수 앞으로 흘렀다.
한민석은 그대로 공을 잡아 2루로 던졌다.
2루수는 베이스를 밟고 1루로.
병살이었다.
“빠른 공이라고 했잖아요. 너무 빨라서 공이 다 휘네.”
송석현이 김욱한테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김욱은 어이가 없어 송석현을 곁눈질로 쳐다봤다.
“와…… 허. 허허허허.”
화도 나지 않는다.
어쩌다 저 새파랗게 어린 놈이랑 이렇게 됐을까?
농담 따먹기로 새파란 어린 후배를 골려 주려다 자신이 오히려 뒤통수를 맞고 있다.
차라리 애초에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괜찮았을 것을.
이제 와 화를 내는 것도 체면만 우스워진다.
“빡치네…….”
김욱이 배트를 어깨에 걸치고 벤치로 돌아갔다.
5회 초.
고트의 7번 타자로 나선 오진영은 로이 쉐버의 커브를 홈런으로 만들어 냈다.
생각지도 못한 타자에게 맞은 홈런에 로이 쉐버가 욕설을 쏟아 냈다.
“홈런! 홈런입니다! 오진영의 솔로 홈런! 로이 쉐버가 오진영 선수에게 홈런을 허용합니다.”
“오진영 선수도 일발 장타가 있는 선순데 그동안 홈런 소식이 적었습니다. 최근에는 강하영 선수와의 주전 경쟁에 타석수도 줄어들었는데 이번 홈런이 본인에게 의미 있는 홈런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팽팽한 균형을 깨는 홈런이 5회에 나옵니다. 고트가 1-0으로 먼저 앞서갑니다.”
쉐버는 8번, 9번 타자를 연달아 아웃시켰다.
순조로운 흐름이었으나 1번 타자 이지성은 쉐버의 부아를 돋웠다.
탁!
탁!
탁!
“파울. 파울입니다. 풀카운트에서 이지성 선수가 좀체 물러나지 않네요.”
“벌써 11구쨉니다. 쉐버 선수가 땀을 닦네요. 짜증 나죠. 짜증 날 겁니다.”
“볼. 볼입니다. 볼넷이 됐어요. 결국 쉐버 선수가 이지성 선수에게 진루를 내줍니다.”
“투수는 말이죠, 이럴 때 정말 허무합니다. 너무 허무해요. 기껏 승부를 하다가 안타도 아니고 볼넷으로 내주면 화딱지 나죠.”
쉐버는 이지성에게 도루를 허용했다.
2사 주자 2루.
쉐버가 숨을 크게, 크게 들이켰다.
설진일에게 초구로 선택한 공은 체인지업.
초구를 좋아하는 타자에게 정직한 승부를 할 필요는 없었다.
탕!
“우중간! 우중간을 꿰뚫는 안타! 2루 주자는 홈으로 쇄도합니다! 타자 주자까지 2루로! 2-0. 2-0입니다. 설진일 선수의 1타점 적시타!”
“방금은 제대로 어퍼 스윙이었죠?”
“네, 제대로 노려서 퍼 올렸네요.”
설진일이 초구를 좋아한다는 걸 전 구단에서 다 알 듯이, 설진일도 초구로 좋은 공이 안 온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초구로 좋은 공을 주지 않는다면 어떡할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같은 팀의 송석현이 해답을 보여 줬다.
송석현에게 정직한 승부를 하는 팀은 드물다.
송석현은 선구안이 좋은 선수지만 때론 대놓고 존을 벗어나는 공을 노려서 친다.
존을 벗어나는 공이라도 타자가 노려서 치는 공이라면 얼마든지 안타를 쳐 낼 수 있다.
송석현은 장외 홈런까지 때려 내지 않았는가.
초구에 좋은 공을 주지 않는다면 애초에 나쁜 공을 노린다.
“왓 더…….”
쉐버가 이를 꽉 물었다.
페가수스의 최성연 감독은 눈을 잠시 감았다.
고트가 한 방이 있는 팀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비교적 약점이라고 봤던 상하위 타선도 제법 매섭다.
어쩌면.
어쩌면 한국시리즈도…….
“교체. 투수 준비해.”
“네, 감독님.”
최성연 감독이 악몽을 잊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자신마저 한국시리즈에서 실패한다면 자신의 사단은 실업자 신세가 된다.
어떻게든 오늘 경기를 잡는다.
최성연 감독의 머릿속엔 ‘질 수 없다.’라는 문장만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