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는 나의 것 (5)
고트의 선수단이 짐을 싸 들고 벤치 밖으로 나갔다.
전광판에는 4-2라는 점수가 떠 있었다.
고트가 4, 페가수스가 2.
“…….”
페가수스의 최성연 감독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후 전광판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떠났다.
* * *
고트의 숙소.
페가수스를 상대로 2연승임에도 숙소는 조용했다.
선수들은 일찍 씻고 일찍 잠에 들었다.
코치들만 맥주 한 캔을 벗 삼아 모였다.
“이제 한 게임인가?”
“그러게요. 이제 한 게임만 남았네요.”
배터리코치 김태우가 땅콩을 한 줌 입에 털어 씹어 먹었다.
“신기하지 않아? 시즌 초만 해도 나가리 되니 마니 했는데 내일 경기에서 이기면 공동 1위라니. 내가 프로 짬밥이 20년이 넘었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야.”
수비코치 안영재가 입을 열었다.
“이런 역대급 시즌이 될 줄 누가 알았나. 솔직히 우리 1군으로 콜업 될 때만 해도 기분이 별로였잖아. 형도 좀 툴툴거렸고.”
배터리코치 김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그런 상황에서 콜업 되는 걸 좋아하겠어. 쓰다 버릴 게 뻔한데 말이야.”
“우리도 올라올 땐 반반이었지. 사실 성적에 대해서 확신하기 어려웠고.”
“결국 석현이 덕분 아니겠어? 치는 것도 잘 치는 거지만 그 나이에 주전 포수를 한다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야. 그렇잖아. 포구도 이 정도만 안정적이고 송구야 역대 최고 수준이고. 투수를 해 봐서 그런지 사인 내는 것도 평균 이상이야.”
안영재가 키득거렸다.
“아, 그래서 석현이를 잘 길러 낸 형 덕이 크다?”
김태우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나도 그렇게 자랑하고 싶지만, 양심적으로 그렇게는 안 되네. 솔직히 내가 아니었어도 석현이는 올 시즌 안에는 터졌겠지. 하지만 내 덕도 조금은 있잖아. 안 그래?”
“누가 뭐래? 흐흐. 좋겠수, 석현이 같은 제자를 둬서.”
“제자라고 하기엔 좀 남부끄러운데. 흐흐. 그래도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코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때 조용하던 투수코치 연우식이 말했다.
“석현이도 잘했지만 지금 우리 팀이 잘된 건 결국 함 감독님 덕이라고 봐야죠. 안 그래요?”
배터리코치 김태우가 입맛을 다셨다.
“뭐, 그건 부정할 수 없지. 밑지는 트레이드라고 난리였는데 결국 성공했잖아. 내년에는 이최강 애들 전부 뛸 수 있으니까 그때는 우리가 손해일지 몰라도 어쩌다 보니 우리 윈나우가 됐잖아. 그럼 성공이지.”
“밑지더라도 장사는 제대로 했어요. 유선호를 데려온 것도 컸는데 지성이가 대박이죠. 고트에 와서 터질 줄 누가 알았어요.”
“하기야. 지성이는 덤이었는데 이렇게 잘해 줄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지성이가 터질 걸 알고 데려왔는지는 몰라도 굿 초이스였지.”
“만성이랑 석현이, 환윤이 수술하고 재활시킬 때만 해도 우리 감독님이 제정신인가 싶었는데 어떻게 불펜도 안정화됐어요. 오히려 요새는 선발이 걱정이지.”
“선발이야 원래 시즌 말에는 다들 죽 쑤니까. 이 정도면 상위권이지. 확실한 에이스 있고 로테이션을 채워 줄 투수들도 충분하잖아. 다른 팀에서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난리칠걸.”
타격코치 강연태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우리 내년에는 어떻게 될까요? 내년에도 이 멤버로 쭉 갈 수 있을까요?”
“음…….”
“…….”
코치들이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요새 우리 팀 성적이 좋아져서 말이 들어가긴 했는데 얼마 전까지 감독 알아본다고 소문이 짜르르하게 퍼졌잖아요. 새로운 감독이 오면 우리도 다시 2군으로 롤백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팀이 어디서 신삥을 데려올 것도 아니고 자기 사단이 있는 감독이 올 테니…….”
“우리 입장에선 지금 함 감독님이 내년에도 계시는 게 좋은 거죠? 함 감독님은 따로 사단이랄 것도 없잖아요. 임 감독님 사단이랑도 사이가 썩 좋지 않은 거로 알고 있고.”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하면 함 감독님이 쭉 가시겠지만, 우리 팀이 하도 네임 밸류에 목을 매니, 원.”
타격코치 강연태가 말했다.
“그럼 올 시즌은 무조건 우승해야겠네요. 그러면 프런트에서도 어쩌지 못할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겠지. 우리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다면.”
코치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한 경기만 더 이겨 보자. 1위 찍고 한국시리즈 직행 가야지.”
“팀도 우승시키고 감독님도 지켜 내 봐요.”
“우리 직장도 지키고?”
“하하, 그래. 우리 직장도 지켜야지. 해 보자. 우리도 이제 우승할 때가 됐잖아.”
* * *
9월 12일 목요일 수원 구장.
페가수스와 고트와의 3차전을 보기 위해 팬들이 운집했다.
팬뿐이랴.
스포츠 기자들이 평소보다 배로 모였다.
고트가 오늘 경기에서 이긴다면 공동 1위가 탄생한다.
페가수스가 이긴다면 다시 2경기 차로 벌어진다.
20경기도 안 남은 시점에서 2경기 차는 넘을 수 없는 벽이나 다름없다.
페가수스가 이긴다면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손에 쥐게 된다.
고트가 이긴다면 시즌이 끝날 때까지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의 행방은 오리무중으로 빠진다.
오늘 경기가 한국시리즈의 향방을 결정한다.
* * *
-플레이볼!
1회 초. 로이 쉐버는 세 타자를 범타로 처리했다.
1회 말 마운드에는 한민석.
페가수스 벤치도 고트 벤치도 조용했다.
타석에는 페가수스의 리드오프 최영석.
한민석이 공을 손가락으로 휙휙 돌렸다.
“경기 시작됐습니다. 오늘 경기의 중요성을 모르는 선수들이 있을까요? 페가수스가 이번 3연전에서 고트에게 발목을 잡혔습니다. 오늘 경기까지 내준다면 발목을 잡히는 게 아니라 멱살을 내주는 거나 다름없죠.”
“그렇습니다. 오늘 경기를 페가수스가 이긴다면 사실상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만, 오늘 경기를 내준다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수가 나올 수 있습니다.”
“최악의 수라면 역시 한국시리즈 우승 실패를 말하는 거겠죠?”
“작년에는 그야말로 사고 같은 일이라 모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올 시즌마저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건 사고가 아니라 실력이 됩니다. 승승장구해 오던 최성연 감독에게도 큰 시련이 될 겁니다.”
한민석이 빠른 공 두 개로 스트라이크 두 개를 뽑아냈다.
최영석이 손도 대기 어려울 만큼 빠르고 날카로운 공이었다.
“후우.”
최영석이 배트를 짧게 잡고 타석에 바짝 붙었다.
맞더라도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나 한민석은 좌투수가 우타자에게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최영석의 헛스윙! 삼구 삼진입니다!”
“안쪽으로 들어오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체인지업입니다. 한민석 선수의 서클 체인지업이 저렇게 좋았나요? 최영석 선수가 배트에 공을 맞히지도 못했습니다.”
송석현이 미트의 공을 빼내 야수들에게 돌렸다.
방금 전 보았던 체인지업은 사이드암의 느린 싱커와 비슷했다.
한민석이 스리쿼터로 변신하면서 슬라이더만 좋아진 게 아니라 체인지업의 궤적도 달라졌다.
낙차는 기존의 체인지업과 비슷했지만 바깥쪽으로 빠지는 좌우 무브먼트가 더 커졌다.
삼진을 당한 최영석이 벤치로 돌아와 한숨을 쉬었다.
“기다리는 전략은 아닌 거 같다. 빠르게 승부해야 돼.”
2번 타자 심창규는 초구 플라이로 아웃.
3번 타자 김한성은 몸에 맞는 공으로 1루에 나갔다.
김한성은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계속 끙끙 앓았다.
“많이 아프냐?”
김인환이 김한성에게 말을 걸었다.
김한성이 숨을 골랐다.
“죽을 맛이다. 멍이 두 달은 갈 거 같아.”
“뻥은.”
“진짜 숨을 못 쉴 만큼 아파. 공이 왜 이렇게 묵직하냐? 쇳덩이에 맞는 줄 알았네.”
한민석과 4번 타자 김욱의 대결.
송석현은 초구부터 몸 쪽 공을 요구했다.
팡!
-스트라이크!
“초구 몸 쪽 빠른 공. 스트라이크가 나옵니다.”
“저건 건들 수 없는 공이었어요. 저런 공은 투 스트라이크 전에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김욱은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또 몸에 맞히려고? 살살 하자, 살살 해. 나도 몸에 맞으면 그땐 벤클인 거 알지?”
“넵. 이번에는 바깥쪽 공을 드리겠습니다.”
2구도 몸 쪽 공.
존 가운데로 조금 몰린 공이었지만 김욱은 배트를 내지 못했다.
-스트라이크!
“아이고, 이런. 바깥쪽 공을 달라고 했는데 한가운데로 왔네요.”
“몸 쪽 공이었던 거 같은데.”
“에이, 그럴 리가요. 누가 봐도 몰린 공이었습니다.”
“이번에 너 체인지업 달라고 할 거지?”
“넵. 체인지업입니다.”
“그래. 한번 보자.”
한민석의 3구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이었다.
김욱의 어깨가 멈칫하는 사이 공은 각도를 꺾어 존 안으로 들어왔다.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삼진입니다. 백 도어 슬라이더로 김욱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한민석! 오늘 한민석 선수의 컨디션이 아주 좋네요.”
“한민석 선수가 저렇게 제구가 좋았나요? 오늘 구석구석 잘 찌릅니다.”
김욱은 헛웃음을 지었다.
백 도어 슬라이더.
김욱이 타석을 쉽사리 못 떠나는 사이 송석현이 먼저 홈 플레이트에서 일어섰다.
“약아, 약아. 약아빠진 놈.”
김욱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벤치로 돌아갔다.
2회 초 고트의 공격.
선두 타자는 송석현.
페가수스의 선발투수 로이 쉐버는 볼넷으로 송석현을 출루시켰다.
“페가수스에선 송석현 선수와의 승부를 피합니다. 변화구로만 송석현 선수를 상대했어요.”
“송석현 선수의 장타력은 알아줘야죠.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송석현 선수와 정직한 승부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유가 있으면 피하는 것도 상책이에요.”
“하지만 이번 시리즈에서 펄펄 날고 있는 타자가 들어옵니다. 유선호 선숩니다.”
로이 쉐버의 초구는 빠른 공, 파울.
다음 공 커브는 볼.
3구 체인지업에는 헛스윙.
1-2.
유선호는 로이 쉐버의 커브에 루킹 삼진을 당했다.
“유선호 선수가 꼼짝도 못 했습니다. 루킹 삼진.”
“페가수스의 포수가 누구겠습니까? 정용욱 선수 아닙니까? 타자들의 허를 찌르는 데 도가 튼 선수죠. 유선호 선수가 커브를 유인구가 아닌 결정구로 쓸 거라고 예상을 못 한 거 같습니다.”
다음 타자 최재완은 병살.
이닝 종료.
2회 말 한민석도 세 타자 연속 범타로 이닝을 끝냈다.
“오늘 양 팀의 투수들의 수준이 높습니다. 양 팀 타자들이 쉽사리 공략하질 못하네요.”
“로이 쉐버 선수는 원래 제구력이 좋은 선수거든요. 그만큼 안정감이 있어요. 하지만 한민석 선수는 잘할 때는 정말 잘하지만 기복도 심한 선수거든요.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 날인 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한민석 선수가 더 유리하단 말씀이신가요?”
“서로 비등하단 얘기죠. 아직까진 말이죠.”
3회까지 양 팀 무실점.
먼저 나선 건 페가수스의 최성연 감독이었다.
4회 말.
선두 타자로 나온 심창규가 기습 번트로 1루로 노렸다.
한민석이 3루로 타고 흐르는 공을 잡아 1루로 던졌지만 아슬아슬한 세입.
심창규가 두 손을 번쩍 들고 포효했다.
“기습 번트! 여기서 기습 번트가 나옵니다!”
“최성연 감독의 승부수가 나왔네요. 최성연 감독이 페넌트레이스도 잘 꾸려 가지만 단기전에는 더 강하거든요. 그건 그만큼 작전을 잘 쓴다는 얘깁니다. 한민석 선수의 번트 수비는 썩 좋은 편이 아니거든요. 선두 타자가 기습 번트를 노릴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작전이 들어갔습니다.”
한민석이 미간을 좁혔다.
번트 안타처럼 맥 빠지게 만드는 공격은 없다.
최성연 감독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 타자는 강타자 김성현.
주자는 발 빠른 심창규.
또 한 번 작전 타이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