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는 나의 것 (2)
-아웃!
-아웃!
-아웃!
“멕킨지 삼자범퇴! 1회, 2회, 3회 모두 삼자범퇴를 기록하면서 쾌조의 스타트를 알립니다.”
“멕킨지 선수가 기복이 조금 있어서 그렇지 일단 한 번 공이 먹혀들기 시작하면 어쩔 도리도 없이 말립니다. 커터와 투심, 싱킹 패스트볼을 사용하는 선수들의 특징이죠.”
“이렇게 3회까지 3-0. 고트가 1회의 득점을 그대로 잘 지켜 내고 있습니다. 반대로 페가수스의 타선은 오늘은 좀 잠잠하네요.”
“타순이 한 번 돌 때까지는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한 타순 돌았거든요? 4회에는 또 다른 양상이 나타날 수 있어요.”
멕킨지가 선수들의 환대를 받으며 벤치로 돌아왔다.
송석현은 미트를 벗고 손을 탈탈 털었다.
“공 끝이 어우…….”
송석현의 말에 김인환이 데워 놓은 찜질팩을 건넸다.
“이거 해.”
“고마워요, 형.”
“오늘 멕킨지 공 좋아?”
송석현은 말 대신 엄지를 들어 올렸다.
“그럼 오늘은 승산이 좀 있나?”
“우리만 잘 치면 해볼 만할 거 같아요.”
4회 초 공격은 7번 타자 강하영.
강하영은 타석에 들어서자 숨을 크게 들이켰다.
“강하영 선수와 강형찬 선수의 대결입니다. 강형찬 선수가 초반에 3점을 뺏긴 게 크지만 추가 실점이 없어요.”
“이 정도면 아직까진 준수하다고 봅니다. 고트의 클린업을 상대로 3점이면 나쁜 성적은 아니거든요.”
“타석의 강하영 선수는 최근 들어 점점 타석수가 늘어나고 있네요. 하지만 성적은 아직 좀 부족하죠?”
“타율이 2할 7푼. 좌익수를 맡는 선수에겐 좀 부족한 성적이죠. 장타율도 3할 8푼입니다. 하지만 말이죠, 이 선수의 출루율은 좀 특이해요. 4할 1푼 3리. 타율보다 1할 4푼 이상 높습니다. 아주 특이한 케이스예요. 물론 아직 누적이 쌓이지 않아서 액면 그대로 믿긴 어렵지만, 나름 참고할 만한 기록 같습니다.”
팡!
팡!
팡!
강하영이 배트를 타석 밖으로 집어 던졌다.
“볼넷. 볼넷입니다. 강형찬 선수가 강하영 선수에게 볼넷을 내줬습니다.”
“지금은 승부했어야죠. 강하영한테도 승부를 걸지 못한다면 누구한테 승부를 걸겠습니까? 아쉽네요. 강형찬 선수가 너무 공을 예쁘게, 완벽하게만 던지려고 하는 거 같아요. 이럴 땐 한가운데로 던지더라도 과감하게 가야죠. 하위 타순 아닙니까.”
“다음 타자는 정백선 선숩니다. 최근 피로감이 쌓인 정동규 선수를 대신해 백업으로 나왔는데 의외의 알토란 같은 성적을 보여 주고 있죠?”
“고트가 1, 2군의 갭이 크다. 유망주가 없다는 얘기를 꾸준히 들어 왔습니다만 강하영이나 정백선처럼 준수한 백업 수준의 선수들은 항상 있었습니다. 오히려 고트의 약점은 확실한 스타급의 부재였죠. 고트가 FA로 갭을 메워 왔으나 모자란 부분이 있었습니다.”
“FA 영입을 가장 많이 하는 팀 중 하나였지만 성적은 투자에 비해 항상 아쉬웠죠.”
“하지만 이번에 김인환, 송석현 같은 로컬 보이들이 성장하고 늦깎이 설진일이나 트레이드로 온 이지성, 유선호도 안정적으로 안착하면서 1군의 스쿼드가 풍족해졌습니다. 기존의 주전 선수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팀으로서는 잘된 일이죠. 많은 전문가들이 고트의 뎁스가 부족하다고 얘기하는데 1군, 2군 모두를 통틀어서 말한다면 맞는 말이지만 1군만 콕 집어 얘기한다면 오히려 신구 조화나 실력 밸런스가 잘 맞는 팀이에요.”
“하지만 고트가 클린업 의존도가 높은 것도 사실 아닙니까? 클린업 외에서 득점 루트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데요.”
-볼. 볼넷. 타자 1루로.
캐스터와 해설이 대화를 하는 사이 정백선이 볼넷을 얻어 1루로 걸어갔다.
무사 주자 1, 2루.
강형찬이 모자를 벗어 땀을 닦았다.
“이걸 보세요. 고트의 하위 타순이 약한 건 맞지만, 하위 타순은 어떤 팀이든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지금처럼 하위 타순에서 득점을 못 내더라도 출루를 이어 가면서 상대 투수의 투구 수를 늘리고 공격 찬스를 상위 타순에 이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이거든요.”
포수 정용욱이 마스크를 들어 올렸다.
“타임. 잠깐 얘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정용욱이 마운드로 걸어가자 강형찬은 마른 입술에 연신 침을 발랐다.
“쟤들을 피해 가면 어쩌자고? 쟤들은 시시해서 싫어? 김인환, 송석현한테 정면 승부하고 싶어?”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다음은 영수야. 9번 타자한테도 꼭 이렇게 승부하세요. 어?”
“죄송합니다.”
“너 초구로 한복판 직구 안 던지면 네 얼굴에 내가 공 던져 버린다. 알았어?”
“네, 네.”
정용욱은 마운드에 내려가기 전 강형찬의 배를 툭 쳤다.
“당당하게 던져, 당당하게.”
“네. 죄송합니다.”
정용욱이 다시 홈 플레이트로 돌아왔다.
타자는 정영수.
정영수가 배트를 길지도 짧지도 않게 잡곤 몸을 살짝 흔들고 있었다.
유격수답게 체구는 크지 않지만 유니폼 위로 드러나는 근육이 도드라졌다.
“무사 1, 2루. 타자는 9번 타자. 지금은 승부를 해야 할 타이밍 아닙니까?”
“맞습니다. 승부를 해야죠. 지금은 과감하게 몸 쪽 승부로 병살을 노려야 해요. 어렵게 갈 필요는 없어요. 큰 거 맞아도 1점입니다. 정영수 선수의 펀치력으론 1루 주자까지 불러들이기 어려워요. 올 시즌 홈런이 세 개가 전부거든요? 장타력은 거의 없는 선수예요.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강형찬은 바로 공을 던지지 않았다.
로진백을 만지작거리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숨을 세 번, 네 번 들이켰을까.
강형찬이 다리를 살짝 들어 초구 한복판에 빠른 공을 던졌다.
탕!
정영수가 몸을 뒤로 뒤집으면서 배트를 돌렸다.
배트에 맞은 공은 하늘로 높이 떴다.
좌익수가 담장 뒤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동시에 2루 주자도 베이스를 밟고 뛸 준비를 마쳤다.
“좌익수가 손을 뻗어서, 점프……가 아니라, 공이 넘어갔습니다! 홈런! 홈런이에요! 정영수 선수의 홈런! 정영수 선수가 기어이 홈런을 때립니다.”
“방금은 투수도 어쩔 수 없었어요. 볼넷만 두 개라서 승부할 타이밍이었거든요. 타자가 잘 노려서 친 거 같습니다.”
“정영수 선수까지 홈런을 치면서 고트는 클린업과 하위 타선 모두에서 홈런이 나옵니다. 고트의 하위 타선이 약하다고 몇 분 전에 얘기했는데 민망한 일이 됐네요.”
“정영수 선수가 홈런을 때린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1위 팀을 만나서 더 펄펄 나나요? 오늘 고트의 공격력이 심상치 않습니다.”
6-0.
페가수스 벤치에선 투수를 내렸다.
고트 팬들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바뀐 투수 장지훈은 이지성, 설진일을 범타로 잡아냈으나 김인환에게 볼넷을 내줬다.
“페가수스가 또 위깁니다. 또 위기예요. 송석현 선수 앞에 밥상이 차려져 있습니다.”
“송석현 선수를 거르기도 애매한 게, 뒤에는 오늘 스리런의 주인공 유선호 선수가 있거든요. 컨디션이 좋은 타자를 상대하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장지훈 선수의 선택이 궁금해집니다.”
정용욱은 눈으로 송석현의 위아래를 훑었다.
넓지 않은 스트라이드, 긴장이 풀린 어깨와 손목, 얕은 숨.
긴장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가 돼서야 몸에 힘이 들어갈 테다.
베테랑도 아닌데 힘을 뺄 때와 줄 때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포심. 몸 쪽.’
정용욱의 사인에 장지훈이 입술을 한 번 훔쳤다.
송석현에게 몸 쪽 승부.
망설이는 사이 정용욱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사인을 냈다.
‘포심! 몸 쪽!’
짜증을 동반한 손가락의 움직임에 장지훈이 얼른 자세를 취했다.
눈으로 김인환을 한 번 견제한 후 몸 쪽으로 힘껏 공 하나를 꽂았다.
송석현의 움직임은 정용욱의 예상 그대로였다.
투수가 공을 던지는 리듬에 맞춰 히팅 포지션을 올리더니 허리가 팽이처럼 돌아갔다
코킹된 손목은 직선으로 뻗어 갔고 배트는 그새 90도 이상 돌았다.
정용욱의 눈에 비친 송석현의 스윙은 동작이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찍힌 사진이었다.
탕!
송석현이 배트가 하늘을 날았다.
“하늘로! 하늘로! 하늘로! 하늘로 뻗은 공이! 담장을! 넘어! 갔습니다! 송석현의 투런 쐐기 포! 고트가 4회 초에 페가수스의 멱살을 잡아 패대기를 쳐 버립니다! 고트가 오늘 홈런만으로 득점을 합니다. 그것도 페가수스를 상대로 말이죠!”
“한 편의 예술입니다. 저는 정말 거짓말 안 하고 송석현 선수의 저 스윙을 무형문화재로 삼고 싶어요.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스윙인데 임팩트도 있어요.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스윙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에요. 야구의 신이 가르쳐 준 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런 스윙이 나올까요?”
“송석현의 투런포로 8-0. 페가수스가 단 한 점도 얻지 못하고 홈런만으로 8점을 내줍니다. 1위 팀 페가수스의 체면이 구겨지네요.”
김나영의 목청은 이미 쉬어 버렸다.
어찌나 소리를 질러 댔는지 정미남마저 그만하라고 말릴 지경이었다.
“봤어? 봤어? 봤어? 봤냐구!”
“봤다고! 시끄러워! 좀 앉아!”
“대박! 대박! 대박! 공이 저만큼 날아간 거 봤어? 저게 말이 돼? 조금만 더 날아갔으면 장외 홈런이었어!”
“다 봤거든요. 그만하세요. 유난떨지 말라더니 지가 제일 유난을 떨어.”
송석현의 홈런에 페가수스 최성연 감독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놈 어떻게 안 되냐. 이러다 화병으로 죽겠다.”
“…….”
“한국시리즈에 쟤 나오면 바로 대가리 맞혀 버려. 그게 훨씬 싸게 먹히겠다.”
4회 8점 차는 1위 팀 페가수스 선수들의 무릎을 풀리게 하기에 충분한 점수였다.
멕킨지가 페가수스 4번 타자 김욱에게 투런을 허용했으나 7.1이닝 2실점을 기록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백찬이 가 보죠.”
“네, 바로 올리겠습니다.”
7회 말에 올라온 투수는 이백찬.
이백찬이 올라오자 송석현이 씨익 웃었다.
이백찬도 송석현을 보며 웃었다.
페가수스의 5번 타자는 외다리 타법의 김성현.
힘과 정확도를 갖춘 정상급 타자였다.
“이백찬 선수, 저번 등판에는 상당…….”
-스트라이크!
“벌써 공을 던졌어요. 템포가 빠른데요?”
“상당히 템포가 빠르네요. 마음이 너무 조급한 거 같은데요?”
“말씀드리는 순간 또 던졌습니다. 볼. 1-1.”
김성현이 잠시 타임을 외쳤다.
“김성현 선수는 다리를 들어서 스윙하는 리니어 스윙의 대표 주자거든요. 그런데 저렇게 템포가 빠르면 스윙 타이밍을 잡는 게 어려워지죠.”
“김성현 선수가 다시 타석에 들어섭니다.”
탁!
김성현이 들어서자마자 이백찬은 바로 공을 던졌고 김성현은 공을 쳤다.
스윙하자마자 김성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공은 배트 끝에 맞았다.
이백찬이 던진 공은 슬라이더.
땅볼 아웃이었다.
“아웃. 이백찬 선수가 공 세 개로 까다로운 타자 김성현을 잡아냅니다.”
“아, 기록을 보니까 알겠네요. 이백찬 선수가 일부러 저렇게 템포를 빠르게 하는 거였군요. 저는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전략적 선택인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이백찬 선수의 빠른 템포가 먹혀드는 걸까요?”
“김성현 선수를 잡아낸 걸 보면 효과는 확실히 있어요.”
이백찬은 다음 타자까지 잡아내곤 이닝을 마무리했다.
송석현과 이백찬이 주먹을 부딪쳤다.
“오늘도 좋은데요?”
“땡큐. 이게 잘 먹히네. 네 덕이다.”
“던지는 사람이 잘 던지는 거죠.”
“오늘 아쉽네. 몸이 가벼운데 세이브 찬스가 안 나겠어.”
“오늘 영점 잡아 놔요. 그래야 다음에 세이브 올리죠.”
“페가수스, 별거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