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는 나의 것 (1)
월요일.
직장인, 학생, 주부들에겐 주말의 꿀 같은 휴식이 끝나는 날.
야구 선수들에겐 공식 휴일.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애인,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일반적이다.
월요일 잠실은 조용해야 당연한 일일진대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연습장에는 경쾌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고, 거친 숨소리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쪼매 좀 쉬따 하까?”
“네. 조금만 쉬죠.”
유선호가 먼저 훈련을 멈추자 다른 선수들도 훈련을 멈췄다.
유선호를 비롯해 이지성, 김인환, 송석현 같은 중심 타자부터 박종일, 정백선, 조지호 같은 백업 타자들까지 연습장은 전지훈련장을 방불케 했다.
“후우.”
“…….”
선수들은 주저앉아 말없이 쉬었다.
얼마를 쉬었을까.
유선호가 일어서자 다른 타자들도 일어섰다.
“한 사이클만 더 하고 오늘은 좀 쉬 뿌자. 어잉?”
“네!”
연습을 마친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퇴근했다.
유선호는 퇴근하는 선수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 보자잉.”
“들어가십쇼.”
“수고하셨습니다.”
송석현과 김인환이 뒷정리를 마치고 나오자 유선호가 두 사람에게 어깨동무했다.
“고생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밥이나 한 그릇 묵고 가 뿌까?”
김인환이 곤란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저기 그게…….”
빵빵.
그때 외제 차 하나가 클랙슨을 울리더니 차 안에서 사람이 내렸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키는 작았지만 얼굴은 더 작아서 눈길을 확 끄는 여자였다.
여자는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두 팔을 들어 손을 흔들었다.
“여기, 여기.”
김인환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저기……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안 될 거 같습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그래. 그래 보이네. 후우. 고마 가뿌라. 마이 기다린 거 같은데.”
“죄송합니다. 다음에 기회 있으면 그때 또…… 네……. 그럼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가 뿌라.”
김인환은 총총걸음으로 유선호 곁을 떠나 한가연에게 걸어갔다.
한가연은 김인환에게 다가와 팔짱을 끼고 폭 안겼다.
“……좋을 때다.”
송석현은 유선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선배님, 저도 오늘은 약속이…….”
“그래. 니 나이에 약속 하나 없겠나. 얼른 가 봐라.”
“죄송합니다.”
“아이다. 괜찮다. 얼른 가라.”
한가연은 김인환을 차에 태우고 떠났다.
송석현도 어느새 구장 밖으로 사라졌다.
유선호만 뒷짐을 진 채 잠실 구장 한편에 서 있었다.
“어? 형, 안 가고 뭐 해요?”
“정률이가? 니는 안 가고 뭐 하노?”
김정률이 가방을 챙겨 구장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할 게 좀 있어서 늦게 나왔지. 형은?”
“내도 이제 갈라꼬.”
“여태 안 가고 뭐 했대.”
“밥이나 같이 묵을까?”
“나?”
“왜? 니도 선약 있나?”
김정률이 하하 웃었다.
“이해해 줘. 당연하잖아, 시즌 끝나면 결혼식인데. 할 거 많수다, 형님.”
“……와 다들 이렇게 결혼 빨리 하는데. 요새 아들은 결혼 늦게 한다고 안 했나?”
“야구 하는 애들은 다 결혼 일찍 하는 거 알면서. 형이 늦는 거지. 형 주변을 봐. 형 나이대 중에 아직 결혼 안 한 사람이 누가 있어? 형이 유난히 늦는 거라니까.”
“와, 요새 직장인들은 내 나이가 돼야 결혼한다 카던데.”
“형, 배트 쥘 수 있을 때 결혼해. 나이 먹고 은퇴해서 결혼하면 식장 썰렁하다. 이왕이면 정점을 찍었을 때 결혼해야 뽀대도 나고 하는 거지.”
“결혼을 뽀대로 하나? 인마 이거, 생각이 글러 뿟네.”
“이왕 할 거면 가장 좋을 때에 하는 게 좋다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형. 형은 결혼이 싫어?”
유선호가 입맛을 다셨다.
“누가 싫어하노? 사겨도 오래 못 가서 문제지.”
“으이구. 형처럼 휴일에도 나와서 야구 하고 평일에도 야구 하고 스프링 시즌에도 야구 하고. 그렇게 야구만 하면 누가 좋아해?”
“이래 안 하모 실력이 유지 안 된다. 우야겠노.”
“소개팅을 해도 매번 그러니 원……. 그래도 적당히 해. 연애도 좀 하고 그래야지. 인환이 봐. 연애하니까 더 펄펄 날아다니잖아.”
“염장은, 염장은. 고마 가 뿌라. 내도 이제 갈란다.”
김정률이 떠난 후 유선호는 다시 구장으로 들어갔다.
유선호가 향한 곳은 연습장.
다시 배트를 쥐고 자리에 섰다.
“실력이 안되면 노력이라도 해야제. 별수 있나.”
연습장에선 한참이나 배트가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 *
화요일.
수원 구장.
평소에도 사람이 많던 수원 구장이지만 오늘은 경기 시작부터 만원이었다.
페가수스 유니폼과 고트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수원 구장 구석구석을 꽉 채웠다.
“이번에 고트 확실히 밟고 1위 굳혀야지.”
“이번에 페가수스 스윕하면 1위 할 수도 있다니까.”
서로의 희망 사항을 쏟아 내는 팬들 사이로 모자를 깊게 눌러쓴 한 여자가 지나갔다.
여자 뒤로 건장한 남자 하나와 왜소한 남자가 뒤따랐다.
“여기야.”
“자리 좋네. 잘 잡았다. 영석이 수고했어.”
“내가 또 광클 했지. 인기 쩔더라. 서버가 렉 먹더라니까.”
내야 탁자석에 앉은 세 사람은 김나영, 정미남, 김영석이었다.
정미남은 앉자마자 치킨을 입에 넣고 맥주를 들이켰다.
“캬, 좋다.”
“너는 벌써 술을 마셔?”
“원래 경기 시작 전에 마시는 거야. 너도 한 잔?”
“난 됐어. 이따가.”
정미남이 흐흐 웃었다.
“남자 친구 경기 직관하는 건 처음인가?”
김나영이 눈을 흘기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사람 많은 데서 그런 얘기 하지 마라아. 어?”
정미남이 움찔했다.
“알았어. 예민하긴.”
김영석이 히히 웃었다.
“놀라긴 했어, 어제 그 폭탄 발언. 정말 둘이 사귈 줄이야.”
“뭐…… 어쩌다 그렇게 됐어.”
“나영이 너도 부끄러움 타는 거야? 얼굴 빨간 거 봐.”
“야, 놀리냐?”
“축하하는 거지. 언젠간 사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네. 그치, 미남아?”
“뭐, 그렇지. 그런데 나영이 남자 친구는 언제 나온대냐. 오늘 여친도 왔는데 홈런 하나 치려나.”
“야, 정미남……!”
경기 시작 시간이 다가오자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모두 나왔다.
국민의례가 끝나자 페가수스의 선발투수 강형찬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강형찬? 쟤는 누구야?”
김나영의 물음에 김영석이 바로 답했다.
“선발도 하고 불펜도 하는 멀티야. 공도 빠르고 제구도 괜찮고……. 나이가 좀 많은 거 말고는 좋은 투수지.”
“그래? 잘하는 투수라는 건데?”
“그건 좀 애매해. 공이 좋은 건 맞는데 결정구가 부족해서 파울을 많이 주거든. 지금 한 서른 가까이 됐는데도 자리 못 잡은 데는 이유가 있지.”
강형찬은 1번 타자 이지성을 상대로 5구 끝에 안타를 내줬다.
다음 타자 설진일에겐 체인지업으로 병살 유도.
고트 팬들이 탄식을 쏟아 냈다.
“설진일 쟤는 초구 못 치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어?”
“환장하겠네. 적당히 좀 하자!”
3번 타자 김인환이 나오자 팬들은 응원가를 불렀다.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김인환!”
김나영이 귀를 막았다.
“귀 떨어지겠네. 왜 이렇게 응원 소리가 커?”
“인기 스타잖아. 나중에 석현이 나오면 더 할걸.”
“넌 와 봤어? 야구장?”
정미남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가게가 바빠서 거의 못 왔는데 그래도 잠실은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왔지.”
“석현이는 그런 말 없던데?”
“석현이 보고 갈 시간도 없었어. 1시간이나 봤나? 요새 가게가 오죽 잘돼야지. 돈은 많이 벌어서 좋긴 한데 공부할 시간도 빠듯해서 힘들다.”
강형찬은 김인환 상대로 8구 승부 끝에 볼넷을 내줬다.
김영석이 혀를 찼다.
“저게 문제야. 결정구도 없는데 배짱도 없어. 계속 안전빵으로만 던지려고 하니 예측이 너무 쉽잖아.”
“투아웃 주자 1루에서 석현이가 나오네.”
송석현이 나오자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팬들까지 다 일어섰다.
“오오, 고트의 송석현. 팔방미인 송석현. 장외 홈런 송석현. 날! 려! 버! 려!”
“날! 려! 버! 려!”
“날! 려! 버! 려!”
김나영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귀가 울리다 못해 머리가 아플 정도로 큰 소리였다.
“워워워워워!”
“워워워워워!”
“날려 버려!”
팬들은 응원을 쉬지 않았다.
정미남과 김영석도 일어나 응원을 보탰다.
김나영은 타석에 선 송석현을 바라봤다.
“석현이가 인기 정말 많긴 많구나.”
강형찬은 초구부터 바운드되는 커브를 던졌다.
김인환이 뛰려고 했으나 정용욱은 틈을 주지 않았다.
송구 자세를 취하자마자 김인환이 뛰는 걸 포기했다.
이를 본 해설자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저게 정용욱 효과죠. 정용욱 선수의 송구 능력을 알기 때문에 확실히 빠지는 거 아니면 달리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정용욱이 다시 자세를 잡고 앉았다.
‘포심. 존 안으로.’
정용욱이 미트를 내밀었다.
강형찬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깥쪽에 공 세 개 빠지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
공을 받아 든 정용욱이 인상을 찌푸렸다.
페가수스 최성연 감독이 뒷목을 주물렀다.
“쟤는 저 성격, 하……. 저 성격이 문제야. 너무 소심해. 겁이 많아.”
“죄송합니다.”
투수코치가 자기 죄인 양 고개를 숙였다.
“너무 생각이 많은 게 문제야. 생각이 많으니 공도 마음을 못 잡지.”
송석현은 제3구 체인지업을 걸렀다.
3-0.
페가수스 벤치에선 거르라는 사인을 보냈다.
“석현이한테 공을 안 주네. 그냥 걸러 버려.”
“당연한 거 아니야? 요새 누가 석현이한테 승부하겠어?”
“석현이가 잘하긴 정말 잘하네.”
“그럼. 누구-.”
“야.”
“……크흠.”
2사 1, 2루.
유선호가 나오자 정용욱이 먼저 말을 걸었다.
“어서 오시게나. 기다리고 있었네.”
“인환이, 석현이 거르고 내한테 승부하는 기가?”
“왜? 자존심 상해?”
“자존심 상할 게 뭐 있노. 갸들이 요새 내보다 잘하는데.”
“그러게 더 잘하지 그랬어. 요새 시원찮아. 이번 시즌은 쉬어 가는 시즌인 거지? 하긴 시즌 중반까지 경기를 못 뛰었잖아. 그치?”
유선호가 피식 웃었다.
강형찬의 초구는 바깥쪽 걸치는 포심 패스트볼.
-스트라이크!
“아아, 공 좋다. 선호는 어렵겠는데?”
정용욱의 이죽거림에 유선호가 배트를 어깨 위로 당겼다.
“그래, 공 좋네. 함 던져 봐라, 내 함 쳐 보게.”
제2구는 포심 패스트볼.
유선호는 한가운데 공을 힘껏 잡아당겼다.
탕!
공은 우측 폴대를 한참 지나 담장 위에 꽂혔다.
“아직 힘은 남아 있네, 우리 선호, 힘은 좋아. 타이밍이 안 맞아서 그렇지.”
유선호가 입맛을 다셨다.
“파울 홈런 다음엔…… 알지? 조심해?”
“징글징글하다. 주둥아리 안 다무나?”
“꼬우면 홈런 치든가.”
강형찬의 3구는 체인지업.
유선호의 배트가 나가려다 멈췄다.
정용욱이 3루심에게 손짓했으나 돌지 않았다는 판정이었다.
“이야, 허리 힘 좋아. 그걸 참네.”
유선호는 말을 아꼈다.
강형찬의 4구 포심은 파울, 5구 커브는 볼, 6구 포심 파울, 7구 체인지업 볼.
3-2 풀카운트.
페가수스 벤치에선 어렵게 승부하란 사인을 보냈다.
뒤 타자 최재완은 유선호에 비해선 쉬운 상대.
한 타자만 잡으면 이닝 종료이니만큼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커브. 바운드.’
속으면 좋고, 안 속으면 어쩔 수 없는 공.
강형찬이 커브를 던졌다.
유선호의 허리가 돌았다.
정용욱이 미트를 내밀었지만 공은 들어오지 않았다.
바운드 되려던 공이 유선호의 배트 끝에 걸렸다.
“우측 담장! 우측 담장으로 가는 공! 공이! 넘어갔습니다! 유선호의 스리런! 1회 초 유선호가 스리런을 날립니다!”
“방금은 완전히 떨어진 공이었는데 유선호 선수가 잘 노려서 쳤습니다.”
“유선호의 스리런으로 시작부터 3점을 가져오는 고틉니다.”
“페가수스와 고트가 3경기 차 아닙니까? 페가수스 입장에선 5선발 강형찬 선수가 나오는 경기가 가장 걱정스러웠을 부분인데 결국 시작부터 우려가 현실이 됐습니다. 페가수스는 고트와의 경기 차를 벌리는 게 목적이었을 텐데 마음대로 되진 않네요.”
“이제 스무 경기나 남았나요? 3경기 차는 까마득한데 고트가 희망의 불씨를 살립니다. 유선호가 피운 희망의 불씨예요.”
유선호가 주먹을 불끈 쥔 채 베이스를 밟았다.
고트 팬들의 함성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