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고래 (2)
팡!
-스트라이크!
김인환은 외곽으로 꽂힌 패스트볼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트의 벤치에선 욕까지 튀어나왔다.
“저런 공을 스트라이크를 줘?”
“해도 너무하네. 공 두 개는 빠진 거 같은데.”
“무슨 존이 저 따위야?”
로버트 유진이 밝게 웃으며 포수가 던진 공을 받았다.
김인환이 타석에 바짝 붙어서 다음 공을 기다렸다.
탁!
“파울! 김인환 선수가 체인지업을 걷어 냈습니다.”
“방금 공은 좀 빠졌는데 김인환 선수가 건드렸어요.”
“0-2. 오늘 로버트 유진 선수의 페이스가 좋습니다.”
김인환은 타석에서 물러나 한숨을 쉬었다.
벤치에 있던 유선호가 중얼거렸다.
“오늘 심판 와 이라노? 태평양도 저런 태평양은 처음 보네.”
한 선수가 대꾸했다.
“원래 외곽 많이 잡아 주잖아요, 저 양반은 특히.”
“그래도 정도가 있지. 저래 잡아 주면 우예 치노 말이다.”
로버트 유진은 이어 연속 볼 두 개를 던졌으나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범타를 유도해 아웃 카운트를 늘렸다.
“김인환 선수, 아웃. 오늘 고트의 공격이 KS 포에서 이어지지 않네요.”
“고트의 핵심은 결국 클린업 타선 KS포거든요. KS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점수를 내기 어려워요. 고트의 장점이자 단점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KSY가 역대 최고의 클린업 중 하나라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만큼 의존도도 높아요.”
김인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벤치로 돌아갔다.
“오늘은 뭐 답도 없는데요. 우타자였으면 몸에 맞을 공도 잡아 주고 있어요.”
타석에 송석현이 들어서자 고트의 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응원가를 불렀다.
로버트 유진은 응원가를 들으며 씨익 웃었다.
“고의사구, 고의사구네요. 7-1에서 고의사구를 줍니다.”
“송석현 선수도 어이없다는 표정입니다. 여기서 고의사구를 줄 필요가 있을까요?”
“송정남 감독의 결정에 조금 의문이 드는 대목입니다.”
송석현이 1루로 걸어 나가자 고트 팬들은 상대 투수 로버트 유진에게 야유를 쏟아 냈다.
로버트 유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유선호는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타석에 완전히 바짝 붙었다.
“선배님, 그러다 몸에 맞겠습니다.”
웨일스 포수 조진열이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차가웠다.
“치아라, 마. 시그럽다.”
포수가 벤치를 바라봤다.
벤치에서 나온 사인은 바깥쪽.
로버트 유진이 바깥쪽 커브를 초구로 던졌다.
탁!
“우익수, 우익수~ 잡습니다. 우익수 플라이. 유선호 선수가 노림수를 갖고 스윙했습니다만 너무 높게 떴습니다.”
“방금은 스윙이 너무 컸습니다. 저런 식으로 스윙을 하게 되면 모 아니면 도 아니겠습니까? 유선호 선수 같은 베테랑이 저런 스윙을 왜 가져갔을까요?”
유선호는 배트를 주우면서 중얼거렸다.
“수인이는 되드만 와 내는 안 되노.”
6번 타자 최재완이 로버트 유진의 공을 치면서 2사 1, 2루를 만들었지만 로버트 유진은 바로 땅볼로 이닝을 마무리했다.
“후우.”
함성훈 감독은 고개를 뒤로 젖히곤 목뒤를 주물렀다.
코치들도 다를 바 없었다.
짜증 나는 표정, 답답한 표정, 신경질적 표정 등 가지각색의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5회가 끝난 후 클리닝 타임.
전광판의 숫자는 8-3.
고트의 하위 타선이 추가점을 냈지만 벤치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완전 말맀다.”
유선호의 말에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마 저거, 심판을 갖고 논다, 갖고 놀아.”
“유일재 심판 저 사람이 원래 바깥쪽은 후하잖아요.”
이지성이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로버트 유진이 잘하는 거야. 1회부터 조금씩 바깥쪽으로 공을 빼더니 이제는 공 한 개 이상 벗어난 건 무조건 스트라이크 콜 받잖아. 저것도 투수 능력이지, 뭐.”
“이러다 로버트 저놈 완투할 거 같은데 어떻게 끌어내리지?”
선수들의 시선이 유선호에게 쏠렸다.
“하던 대로 해야지 우야겠노. 안 하던 거 해 뿌몬 더 망한다, 망해. 오늘만 야구 할 끼가?”
로버트 유진은 6회에도 7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왔다.
7.1이닝 3실점, 7K, 3BB.
웨일스 팬들이 로버트 유진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탕!
“중견수! 중견수! 중견수 머리 뒤로! 아, 잡았습니다! 정기수 선수의 나이스 플레이!”
“김인환 선수가 큰 스윙으로 반전을 노려 봤지만 어쩔 수 없었네요.”
“11-3. 11-3으로 웨일스가 고트와의 경기를 승리로 이끕니다.”
“오늘 고트는 로버트 유진 선수에게 완전히 꽁꽁 묶여 버리면서 KS포가 침묵했습니다. 웨일스는 3번 타자 김인환 선수에게 철저하게 승부를 피했고, 송석현 선수에겐 고의 사구만 두 번을 내줬습니다. 오늘 송석현 선수는 전 타석 출루를 했는데 모두 볼넷입니다. 사실상 KS포를 걸렀던 거나 마찬가지예요.”
“고트가 안 좋을 때 흔히 겪었던 일 아닙니까? 중심 타선 KS포만 거르고 승부. 최근에는 이런 전략이 안 통했는데 왜 오늘은 통했을까요?”
“유선호 선수가 들어오고 이지성, 설진일 선수가 앞에서 버텨 주기 시작하면서 KS포 거르기가 안 통했죠. 하지만 오늘은 유선호, 설진일 선수 모두 부진했습니다.”
“두 선수가 부진한 이유가 있을까요?”
“유선호 선수는 자기만의 존이 확고한 선숩니다. 그러니 통산 출루율이 4할이 넘어가겠죠. 하지만 그 얘기는 오늘처럼 존이 넓은 타입의 심판을 만나면 곤란해진단 뜻입니다. 설진일 선수에 대해 얘기하자면 이 선수는 초구 좋아하고 초구를 참 잘 치는데 수 싸움에는 약해요. 로버트 유진 선수처럼 존을 넓게 활용하는 선수를 만나면 아무래도 초구 공략이 쉽지 않죠.”
“이렇게 오늘 웨일스가 승리를 가져가면서 웨일스가 4위와의 격차를 한층 좁혔습니다. 이에 반해 고트는 페가수스와의 경기 수를 3경기로 늘리면서 1위 탈환에 먹구름이 끼었습니다.”
“이번 3연전에서 1, 2위와 4, 5위의 선이 확실하게 가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 * *
경기가 끝난 후 잠실.
송석현은 퇴근하지 않고 배트를 어깨에 맨 채 연습장으로 들어섰다.
피칭머신을 앞에 두고 그저 배트를 잡고 서 있기를 10분.
송석현은 배트를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이 봐라, 이 봐라. 니 뭐 하노?”
“선배님, 안 가셨어요?”
유선호가 배트를 한 손에 쥔 채 연습장으로 들어섰다.
“어쩐지 안 보인다캤다. 니 여서 빠따 돌리고 있었나?”
“그냥 뭐…… 있었어요.”
“공 안 쳤나? 공이 안 보이네.”
“네. 그냥 있었어요.”
“그냥? 하이고. 와? 니 집에 와이프라도 있나? 집에 드가기 싫나?”
송석현이 손사래 쳤다.
“아뇨. 그게 아니라.”
“그게 아이몬?”
“그냥 이런저런 생각 좀 했거든요.”
“뭔 생각?”
송석현이 배트를 들고 타격 자세를 잡았다.
“실은 오늘 고민이 많았거든요. 공을 칠까, 말까. 로버트 유진의 공이 좀 빠지긴 했어도 제 배트가 기니까 저라면 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제 타격 폼이 망가질까 봐 안 쳤어요. 그런데 오늘 우리 팀이 너무 크게 졌잖아요. 4번 타잔데 어떻게든 타점을 올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뭐……. 모르겠어요. 잘한 게 맞나.”
유선호는 송석현의 엉덩이를 발끝으로 툭 때렸다.
“지금 우리 포스트 시즌이가?”
“예?”
“지금 우리 리그 하는 거 아이가?”
“예, 그쵸.”
“포시라면 모를까, 리그할 땐 절대로 타격 폼에 손대지 마라. 아니, 포시에서도 웬만하면 타격 폼 건드는 거 아이다. 자기 존을 만드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거든.”
“음 음, 오늘 같은 경기에서도요?”
“그래, 지면 지는 거지, 니가 혼자서 멱살 잡고 이길 수 있는 경기가 몇 개나 되겠노? 1경기? 2경기? 그거 이기겠다고 나머지 경기 버릴 끼가?”
“아아.”
송석현이 그제야 조금 웃어 보였다.
“제가 잘못한 거 아니었네요.”
“잘못은 무슨.”
송석현은 유선호의 방망이를 가리켰다.
“그런데 선배님은 오늘 왜 오신 거예요? 연습하시려구요?”
“내도 오늘 배트 마이 못 휘둘렀잖아. 그래서 찌부둥해가 공 좀 칠라고 왔지.”
“제가 도와드릴까요?”
“됐다. 나는 혼자 하는 게 좋다. 왜? 니도 할 끼가?”
“아뇨. 선배님 말씀 들으니까 오히려 오늘은 배트 안 휘두르고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내일 경기를 위해서라도.”
송석현이 유선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매번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님 덕분에 배우는 게 많아요.”
“듣는 놈들이 웃겠다. 내가 니한테 배워야지 니가 내한테 배울 게 있나?”
“리빙 레전드한테 안 배우면 누구한테 배웁니까. 헤헤.”
유선호가 피식 웃었다.
“띄워 주기는.”
“선배님 오래 안 있으실 거면 제가 기다릴까요? 같이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서…… 어떠세요?”
“아이다. 오늘은 가볍게 돌리고 집에 가 푹 잘라꼬. 밥 무으면 늦게 잔다 안 카나.”
“아. 네, 그럼 먼저 가도 될까요?”
“그래. 가라, 마. 후딱 가서 푹 자고 일나라.”
“넵.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낼 보자.”
송석현이 떠난 후 유선호는 피칭머신을 돌렸다.
탕!
탕!
탕!
공을 칠 때마다 공은 쭉쭉 뻗어 갔다.
5분, 10분, 20분.
피칭머신의 공을 다 친 후엔 벽을 보고 스윙했다.
그러기를 또 한참.
유선호가 잠실 구장을 나왔을 땐 이미 자정이 넘었다.
* * *
웨일스와의 2차전.
고트는 대참사를 맞았다.
최근 호성적을 거두며 안정적인 6선발로 손꼽던 정진오가 1회에 강판됐다.
1회에만 3홈런.
함성훈이 모자를 벗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어제, 오늘 고트가 참 험난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선발투수가 초반부터 무너지고 있어요.
-대참삽니다. 사실 예정된 대참사라고 봐요.
-예정된 대참사요?
-네. 함성훈 감독이 시즌 중반에 6선발을 꺼내 들지 않았습니까? 표면적으로는 지친 선발투수들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지만 다른 팀에서는 그걸 몰라서 5선발을 밀고 나가겠습니까? 결국 5선발이 최적화된 시스템이라는 거죠. 함성훈 감독이 경험이 적어서 저런 무모한 결정을 한 거 같은데 요행으로 몇 경기 통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이런 사달이 나는 거죠.
-하지만 정진오 선수가 최근 잘해 주지 않았나요?
-저런 어리고 경험 적은 선수는 불펜부터 돌렸어야죠. 불펜에서 잘하면 선발로 올리고 이런 게 선순환인데 마음이 급했어요. 2군에서 잘한다고 1군에서 마냥 잘한다? 아니라고 봅니다.
TV를 보던 김나영이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김나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해설자라는 놈들이 밸도 없나. 주관이 없어, 주관이!”
정진오는 죄인처럼 벤치 한구석에서 찌그러져 있었다.
웨일스의 선발 성종현은 물오른 실력으로 고트의 타선을 압도했다.
“……후.”
함성훈은 볼넷을 얻어 내는 송석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투수코치 연우식이 말했다.
“아무래도 송 감독님이 확실하게 지시하신 거 같습니다, 우리 클린업은 무조건 피하라고.”
“이런 작전이 한두 번은 아닌데 웨일스한테 이렇게 고전할 줄은 몰랐네요.”
“……이런 말씀은 외람되지만 이런 경기, 시즌 치르면서 어쩔 수 없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말씀, 감사합니다. 어쩔 수 없는 거긴 한데 마음 아픈 건 어쩔 수 없네요.”
고트는 이날 경기 5점을 뽑아내며 나쁘지 않은 성적을 내놨으나 웨일스는 8점을 내면서 8-5, 웨일스의 승리였다.
이날 저녁.
인터넷에는 함성훈을 비난하는 기사가 속속 올라왔다.
[미국에도 일본에도 없는 6선발. 함성훈 감독의 뚝심? 미련?]
[KS포 말고는 대안이 없는 고트. 시즌 내내 아무 준비 없던 함성훈 감독에 대한 비난 쇄도]
[페가수스와 4경기 차. 고트의 1위는 물 건너갔나?]
[고트의 흥행, 브레이크. 모 해설자 曰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