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고래 (1)
아침 10시.
아파트 베란다 창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함성훈 감독은 소파에서 빛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잠을 더 자. 왜 그러고 있어?”
함성훈 감독의 와이프가 커피 한 잔을 건넸다.
“고마워.”
함성훈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기지개를 켰다.
“나도 자고 싶어. 그래도 출근 시간은 맞춰야지.”
“남들보다 꼭 그렇게 한참이나 일찍 가야 돼?”
“한참은 무슨. 그 정도는 아니야.”
“다들 점심 먹고 느지막이 출근하는데 자기는 꼭 아점 먹고 출근하잖아.”
“초짜 감독인데 미리 가서 준비도 하고 해야지.”
“자기는 너무 성실한 게 탈이야. 요새 고트 잘나가고 있잖아? 자기야말로 일 좀 줄이면서 페이스 조절해.”
함성훈이 커피를 홀짝였다.
“지금 여유가 없다, 여유가 없어. 밑에선 치고 올라오지, 위에선 계속 앞서가지.”
“언제는 포스트 시즌만 가도 성공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1위가 목표야?”
“이왕이면 우승까지 하면 더 좋잖아.”
와이프가 함성훈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자기 우승하면 그땐 감독 계약 연장인가?”
“글쎄…… 그 정도까지 하면 위에서도 왈가왈부 못 하겠지?”
“그럼 우리 한국에 계속 있을 수 있겠네?”
“아……마도?”
“근데 꼭 우승해야 감독 연장하는 거야? 지금 성적으로도 가능한 거 아냐?”
“고트잖아. 여기 돈은 원없이 쓰는 팀이야. 나보다 커리어가 짱짱한 감독들이 한둘이어야지. 지금 성적으론 안심할 수 없어.”
“참 인색하다, 인색해. 공을 세운 사람한테 상은 주지 못할망정……. 그러니까 뭐 하러 그런 팀에 들어갔어?”
“그래도 고트가 아니었으면 내가 감독이나 해 봤을까? 그러지 말고 응원을 좀 해 줘. 잘 안 돼도 한국에서 제일 인기 많은 팀 감독 해 보는 거고, 잘되면 내 인생에서 프로 야구 감독으로 우승 커리어를 쌓는 건데.”
“누가 응원 안 한대? 고트가 너무 인색하니까 그렇지. 이 정도 하면 앞으로도 감독 하라고 밀어줘야지.”
와이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함성훈은 그런 와이프의 어깨를 감쌌다.
“원래 세상은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거야. 야구도 그렇고. 그거 투정부릴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거 다 짜내는 게 낫지 않겠어? 성과가 좋으면 감독을 이어 갈 거고, 성과가 안 좋아도 다 쏟아 냈으니 후회는 없을 거고. 안 그래?”
“후, 설령 자기 다음 시즌 감독 한다고 해도, 내년에는 좀 여유를 가져 봐. 나도 자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다니까.”
“알았어, 알았어. 꼭 참고할게.”
와이프가 고개를 들어 함성훈을 바라봤다.
“그러면 오늘부터 여유를 갖는 건 어때? 나랑 점심 먹고 나가. 점심 맛있는 데 가서 먹자.”
“그건 좀 어려워. 이제 몇 경기 안 남았어. 시즌 막판이라 어려워.”
“됐다, 됐어. 시즌 초반에는 초반이라 어렵고, 중반에는 중반이라 어렵고, 막판에는 막판이라 어렵고.”
“이해해 줘. 페가수스랑 또 2경기 차로 벌어졌거든. 20경기 조금 더 남았는데 2경기 차를 줄이려면 쉽지 않아.”
“알았어, 알았어. 아, 오늘은 어떤 팀이랑 붙는데?”
“웨일스.”
“아아, 거기 요새 5위잖아. 못하는 팀인데도 그렇게 서둘러야 돼?”
함성훈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웨일스가 독이 바짝 올랐거든. 이번에도 4위 못 들어가면 감독이고 코치고 죄다 날아갈 판이라 요새 아주 필사적이야. 이런 팀이 무서워.”
“엄살은. 못하니까 5위겠지.”
* * *
잠실 구장 회의실.
함성훈은 훈련 전에 코치들과 사전 미팅을 갖고 3연전 대책을 준비했다.
“이번 3연전 선발로 내정된 로버트 유진, 성종현, 구인선 중에 로버트 유진과 구인선의 페이스가 심상치 않습니다. 특히 로버트 유진은 구위가 별로라서 올 시즌 내내 애를 먹더니 후반기 들어서 각성했습니다. 이걸 보면 아시겠지만 삼진이 늘어나고 볼넷이 줄었습니다.”
전력 분석 팀의 보고에 함성훈 감독이 물었다.
“이유가 있나요?”
“네. 스트라이크존 바깥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와 한국의 스트라이크존이 달라 용병 투수들이 애를 먹는데 로버트 유진도 시즌 초에는 똑같이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이드 쪽 공략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타자 상대로 던지는 슬라이더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최근 5경기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1할 7푼 4립니다. 좌타자도 2할 5푼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있지만 나쁜 수준도 아닙니다.”
“로버트 유진은 그렇다고 치고…… 성종현은 어때요?”
“최근에 체력이 떨어져서 좀 고전 중입니다. 하지만 저번에 로테이션을 한번 걸러서 이번 3연전에는 조금 더 나아진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예측은 합니다만 피로가 누적된 거라 쉽진 않을 거라 봅니다.”
“구인선이 좋아졌다는데 어떻게 좋아졌나요?”
“좌타자 상대로 원래 좋았는데 최근에는 더 좋아졌습니다. 팔 각도를 스리쿼터에 가깝게 바꿔서 슬라이더가 더 좋아졌습니다.”
“포크볼은 어쩌고? 팔 각도를 그렇게 내리면 우타자한테 던지는 포크볼이 애매해질 텐데.”
“무회전 포크볼을 던집니다.”
“그러면 직구랑 포크볼이랑 구분이 확연해지잖아요?”
“알아도 공략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래로 떨어지는 빠른 너클볼 같은 그런 공입니다. 실투처럼 밀려들어 오는 케이스도 있지만 심할 땐 타자가 손도 못 댈 만큼 뚝 떨어집니다.”
“한마디로 복불복이네요.”
코치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웨일스가 저력은 있어.”
“만만한 거 같으면서도 까다로워, 게네들.”
전력 분석 팀장이 말했다.
“다행인 건 저희가 트레이드한 최대규, 강문규가 올 시즌 복귀는 무산됐다는 점입니다. KPBL에서 여론에 부담을 느낀 거 같습니다. 최근 들어 연예계 음주 운전, 마약 사건이 터지면서 대중이 비난 여론이 높아진 탓이라고 봅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남은 경기 중에 거의 절반이 웨일스잖아요? 9경기니까.”
“네. 올 시즌 웨일스는 까다롭긴 해도 그리 무서운 팀은 아니라는 게 저희의 분석입니다.”
“내년에 웨일스 정말 무섭겠네요. 국대 듀오 1, 2번에 최대규, 강문규, 심수경까지 클린업이면 후.”
함성훈이 손에 든 서류의 페이지를 넘겼다.
“내년은 내년 일이고. 오늘 경기 전략부터 보죠. 오늘 웨일스의 공략 포인트가…….”
* * *
경기 시작 전.
송석현은 김인환과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상대 벤치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김정률에게 쏠려 있었다.
“참, 정률 선배는 발이 넓어요. 어떻게 팀마다 다 저렇게 친한 사람들이 많을까.”
“형이 국대도 하고 TV에도 자주 나가고 그랬으니까. 원래 성격도 인싸잖아.”
“처음 만났을 땐 얼굴에 그늘이 있었는데.”
“그때야 뭐. 지금은 다르잖아. 요새는 리그 넘버원 클로저 소리까지 듣는데.”
맞은편 벤치에선 김정률이 웨일스의 마무리 황시완과 얘기 중이었다.
황시완은 김정률의 가슴을 툭툭 쳤다.
“좋겠어, 아주. 팀도 잘나가고 너도 잘나가고.”
“그래 봐야 아직 2위야. 페가수스가 있는데 1위가 쉽간.”
“1위 할 생각은 하고 있나 보네?”
“그럼. 이왕 할 거면 1위를 해야지.”
“좋겠다, 너는. 잘하면 올해 반지 낄 수 있겠어.”
“웨일스도 내년에는 좋아지잖아. 규규 둘이나 갔는데.”
“글쎄다. 내년에 좋아져도 내년까지 내가 던질지 모르겠어.”
“왜 그래, 형? 아직 잘 던지고 있으면서.”
“내년이면 나도 서른여섯이야. 마무리로 뛸 나이는 아니지.”
“아직도 145는 넘게 나오잖아. 나이가 문젠가? 실력이 문제지.”
“나이가 먹으면 실력이 떨어지는 게 문제지, 인마.”
“나는 나이 먹으니까 야구가 더 쉬워지던데. 흐흐.”
“재수 없는 새끼. 좋냐? 늙은이 놀리니까?”
둘이서 키득거리고 있는 사이 투수코치가 나타나 헛기침 했다.
김정률이 인사를 건넸지만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데면데면했다.
황시안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야. 그만 가라. 우리 팀 분위기 안 좋아.”
“응? 왜?”
“왜긴, 인마. 올해에도 포시 못 가면 감독 바뀐다는 소문이 파다해.”
“그래서 애들도 죽상이야?”
“포시 못 가면 모기업에서 지원도 줄인단다. 우리 연봉도 간당간당해.”
“세게 가네.”
“오늘은 이만 가. 다음에 밖에서 얘기하자고.”
“알았어, 형. 나중에 연락하자.”
김정률은 고트의 벤치로 돌아왔다.
투수코치는 김정률에게 어딜 돌아다니냐며 핀잔을 줬다.
“노가리 좀 까는 게 국룰인데 왜 쿠사립니까, 코치님?”
“넌 맨날 돌아다니니까 그렇지.”
“가서 분위기도 살피고 정보도 얻고 하는 건데, 너무 구박하신다.”
“정보는 무슨. 그래서 뭐라도 건진 거 있냐?”
“웨일스 애들이 발등에 불 떨어진 거? 이번에 포시 못 가면 감독 날아가고 연봉도 줄인다던데?”
“그거는 다 아는 사실이고.”
“나는 몰랐는데?”
“너는 실속이 없어, 실속이. 다 아는 걸 이제 알아 와 놓고 유세는. 이번 3연전 동안 웨일스 벤치는 가지 마. 저기 애들 날카로우니까. 괜한 분란거리 만들지 마란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아이, 형은 참 잔소리만 늘었어.”
“코치님. 코치님이라고 하라고.”
“늬예, 늬예, 알겠습니다, 코치님.”
김정률이 음료수를 꺼내 먹으면서 투덜거렸다.
“웨일스가 뭐라고 별 걱정을 다 해.”
* * *
5-1.
3회 말을 마친 전광판의 숫자는 5-1을 가리켰다.
웨일스가 5, 고트가 1.
고트의 선발투수 정천운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땅만 보고 있었다.
해설자와 캐스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 고트가 영 힘을 못 쓰고 있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고트의 타선이 로버트 유진 선수에게 제대도 말렸습니다. 3횐데 삼진만 네 개째에요.”
“이에 반해 정천운 선수는 삼진이 아직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홈런만 두 개를 맞았어요. 정천운 선수가 리그 최고의 5선발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이건 뒤집어 말하면 믿고 맡기기엔 불안하다는 얘기거든요. 이닝 소화력이 좋은 건 확실하지만 방어율이나 경기 내용은 좀 아쉬움이 많아요. 물론 5선발투수에게 많은 걸 바랄 수는 없고, 정천운 선수가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는 것도 맞습니다.”
“고트에선 선발투수 정천운 선수를 벌써 내렸습니다. 길게 가져가는 게 고트의 팀 컬러인데 오늘은 좀 다르네요.”
“이제 30경기도 안 남았어요. 한 경기, 한 경기가 아주 소중한 시점이란 얘기죠. 이제는 버릴 경기 같은 건 없습니다. 무조건 한 경기라도 따내야 해요.”
“마운드에 올라온 건 노진환 선수네요. 고트의 추격조로 좋은 활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타석에는 이재훈 선수가 들어옵니다. 3할 40도루의 주인공이죠. 국가 대표 우익수를 겸하고 있습니다. 장타력도 있지만 발도 빠르고 어깨도 좋아요. 웨일스의 기둥 같은 선숩니다.”
바뀐 투수 노진환은 이재훈에게 안타 후 도루를 내줬다.
“노진환 선수, 어차피 도루는 이미 준 겁니다. 도루 준 건 잊어버리고 김재홍 선수와의 승부에 집중해야 해요. 김재홍 선수의 펀치력을 조심해야 합니다.”
노진환은 김재홍에게 2-2까지 끌고 갔으나 결정구로 가져간 슬라이더가 빠지지 않았다.
탕!
“좌측 담장을 향해 뻗어 가는 공! 갑니다! 갑니다! 갔습니다! 김재홍의 투런포! 웨일스가 고트를 상대로 폭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7-1. 이 점수는 쉽지 않습니다. 고트의 폭발력을 감안해도 쉽지 않아요.”
“웨일스가 갈 길 바쁜 고트의 앞길에 고춧가루를 뿌리네요.”
“급한 건 웨일스도 마찬가지거든요. 고트는 오늘 경기까지 지게 되면 페가수스와의 승차가 3경기까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타선이 터져 주지 않으면 오늘 고트, 쉽지 않겠는데요?”
송석현이 오른손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노진환은 4회에 추가 실점 없이 막아 냈지만 한 이닝 동안 서른세 개의 공을 던지며 지친 티를 냈다.
4회 말 공격은 김인환.
김인환이 나서고 송석현이 대기 타석에 들어섰다.
마운드 위의 로버트 유진은 김인환을 보며 로진백을 매만졌다.
“오케이. 컴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