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는 프로다
고트와 피닉스의 주중 3차전 마지막 경기.
양 팀 벤치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피닉스 벤치는 별다른 말 없이 절간 같았다면, 고트 벤치는 어린아이들 소풍처럼 소란했다.
마운드에 먼저 오른 건 피닉스의 용병 투수, 베론 바넷.
베론 바넷은 조용히 연습 투구를 하면서 영점을 조율했다.
“오늘 경기 피닉스와 고트가 각각 용병 투수를 앞세웠습니다. 베론 바넷과 마이클 피시의 대결이에요.”
“마이클 피시는 명실공히 리그에서 손꼽는 에이스 투수죠.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들었던 선수인 데다 나이도 아직 20대 후반, 젊습니다. 큰 키, 빠른 공, 낙차 큰 커브와 체인지업. 선발이 갖출 수 있는 모든 걸 갖춘 선수예요. 한국에서 용병 투수에게 바라는 전형과도 같은 선숩니다. 베론 바넷도 유형으로 보면 마이클 피시와 비슷한 선숩니다. 다만 전체적인 능력치로 비교하자면 나이도 조금 더 많고 구속도 조금 덜 나오는 정도? 객관적으로 두 선수의 성적이나 실력 모두 레벨 하나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도 피닉스는 쉽지 않은 경기가 되겠네요. 어제도 피닉스가 많은 불펜 투수를 동원했죠?”
“약 이틀 동안 피닉스가 많은 불펜을 동원했습니다. 오늘 경기까지 불펜을 끌어다 쓰면 주말 3연전에는 쓸 만한 불펜이 없을 거예요.”
“선발, 불펜에 이어 빈타에 허덕이는 타선까지. 삼박자 모두가 순조롭지 못한 피닉스네요. 그래도 피닉스 팬들을 보세요.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인데 걸개를 걸고 깃발을 흔들고 있어요.”
“팬심이 뜨거운 팀이야 많지만 피닉스 같은 팬들은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를 뒤져 봐도 흔치 않을 겁니다. 팬들의 응원만큼 피닉스의 실력도 뒤따르면 더 좋을 텐데 말이죠. 작년부터 유입된 팬들은 올 시즌이 참 많이 힘들 겁니다.”
* * *
-플레이볼!
경기 시작과 함께 바넷이 초구부터 몸 쪽 빠른 공을 찔렀다.
이지성이 몸을 뒤로 젖히자 스트라이크 콜이 나왔다.
“…….”
이지성은 고개를 한번 갸웃했다.
이번에는 바깥쪽으로 파고드는 공.
이지성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이크!
“지성이가 웬만하면 헛스윙 안 하는데.”
“오늘 바넷 공이 좋은가본데?”
바넷의 제3구는 커브.
이지성이 떨어지는 공을 걷어 내려 했으나 공은 바운드됐다.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삼구 삼진입니다! 바넷 선수가 삼구 삼진으로 이지성 선수를 잡아냅니다. 이지성 선수는 웬만하면 삼진이 없는 선순데 말이죠.”
“오늘 바넷 선수의 컨디션이 좋네요. 구위가 좋아요.”
다음 타자 설진일이 안타로 치고 나갔지만 김인환의 병살로 1회가 끝났다.
1회 말, 고트의 투수는 마이클 피시.
피시는 1, 2번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지만 3번 타자에게 우익수 앞 안타를 내줬다.
다음 타석은 4번 타자 경수인.
경수인은 마이클 피시의 바깥쪽 커브를 잡아당겼다.
“좌측 담장! 좌측 담장~~~ 넘어갑니다! 경수인의 투런포! 오늘은 피닉스가 먼저 치고 나갑니다!”
“경수인 선수가 원래는 저런 큰 스윙을 안 하거든요? 출루율과 장타력이 좋은 타자지 홈런 타자가 아닌데 이번에는 대놓고 크게 스윙을 해서 넘겨 버리네요. 역시 대타자는 스타일이 바뀌어도 잘한다는 걸 보여 주나요?”
경수인이 배트를 집어 던지고 1루로 걸어갔다.
피닉스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다.
“경수인! 경수인! 경수인!”
자신의 이름을 환호하는 팬들의 함성을 뒤로한 채 경수인이 홈을 밟았다.
송석현은 이를 꽉 문 경수인을 보곤 입맛을 다셨다.
“오늘 빡세겠는데…….”
피시는 다음 타자를 범타로 잡아냈다.
벤치로 돌아온 피시는 한쪽 구석으로 가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선수들은 피시에게 말을 걸지 않고, 피시를 피해 다녔다.
“점마 저거, 오늘 조심해야겠는데.”
유선호의 혼잣말에 이지성이 물었다.
“누구 말하는 거예요?”
“수인이. 자는 에지간하면 자기 스타일 안 바꾸는 놈이거든. 저래 이 악물고 치 뿌면 오늘 골치 아플 수도 있다.”
“그래 봐야 피닉슨데요, 뭐. 경수인 빼고 누가 있어요.”
“글카긴 한데, 모르지. 자들은 프로 아이가?”
2회 초.
바넷은 송석현에게 볼넷을 내준 후 유선호와 승부했다.
유선호가 큼지막한 외야 안타를 칠 뻔했으나 중견수 강영호가 몸을 날려 공을 잡아냈다.
“저걸 잡아 뿌노.”
바넷은 6번 타자 최재완의 배트를 부러뜨리면서 병살을 유도했다.
“아웃! 아웃입니다! 오늘 경기 벌써 두 개의 병살을 유도하는 바넷 선숩니다.”
“바넷 선수가 그라운드 볼러는 아닌데 오늘 공 끝이 지저분하다 보니 타자들이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질 못하네요.”
“고트는 빌드업을 못 하고 있어요. 출루를 하면 바로 병살로 이어집니다.”
“흐름이 끊기면 다시 이어 가는 건 어렵습니다. 스포츠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결국 기세거든요. 흐름이라는 게 분명히 있어요.”
피시는 2회 말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경기가 3, 4, 5회가 넘어가도록 양 팀은 더는 득점이 없었다.
점수는 그대로 2-0.
6회 초 바넷은 9번 타자를 상대로 몸 쪽 빠른 공을 던졌다.
9번 타자 정영수가 친 공은 땅볼이 됐으나 배트가 부러져 파편이 날렸다.
바넷이 땅볼을 잡으려는 찰나 부러진 배트의 상단이 바넷의 발목을 때렸다.
“Shit!”
바넷이 1루에 공을 던졌으나 정영수는 발이 빠른 주자였다.
결과는 세입.
바넷이 그라운드에 주저앉았다.
“아, 바넷 선수 부상인가요?”
“배트에 맞은 부위가 썩 좋지 못했죠. 발목에 정확히 맞았으면 오늘은 강판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코치가 올라갑니다. 저건 빨리 봐야죠. 부상이 깊어지면 팀도 손해지만 본인이 가장 큰 손해거든요.”
컨디셔닝코치가 바넷의 발목을 살폈다.
“하필 맞아도 정확하게 여길 맞냐.”
투수코치가 물었다.
“어때? 오늘 더는 어렵겠어?”
“이 정도면 깊은 부상은 아니라서 1~2주만 쉬어도 낫긴 나을 건데 오늘 경기는 어려워요. 발목에 힘이 잘 안 들어갈 거예요.”
“그래? 하, 오늘 잘 던지고 있었는데.”
그때 바넷이 통역을 통해 자기 말을 전달했다.
“발목 괜찮답니다. 이 정도는 부상도 아니라는데요?”
컨디셔닝코치가 고개를 저었다.
“딱 일주일만 쉬어도 좋아질 수 있어. 괜히 고집 피우다가 부상만 깊어질 수 있다고.”
“음…… 본인은 무조건 괜찮답니다.”
“고집은. 뭐가 무조건 괜찮아?”
바넷이 자기 가슴을 손으로 탕탕 쳤다.
“나는 프로 야구 선수야. 프로는 뛸 수 있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프로라고.”
바넷이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화를 내자 투수코치가 컨디셔닝코치에게 물었다.
“오늘 전혀 안 되는 거야?”
“전혀 안 될 건 없어요. 하지만 부위가 민감한 부위라서 제 입장에서는 쉬는 게 낫다고 보는 거죠.”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헤이, 바넷.”
바넷이 투수코치를 바라봤다.
“볼넷이나 안타 하나라도 내주면 교체. 더는 협상 없어. 오케이?”
바넷은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이지. 코치, 당신도 약속 지켜.”
코치들이 내려가자 바넷이 다시 마운드에 섰다.
피닉스의 안용덕 감독이 투수코치에게 물었다.
“괜찮대?”
“본인이야 괜찮다고 하죠. 투수들이야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강행한 거야?”
“출루 하나라도 내주면 강판시킨다고 했습니다. 투수들 자존심, 아시잖아요. 자기가 납득돼야지 고분고분해지는 거.”
“그래, 그렇긴 하지.”
바넷은 자기 발목을 한번 바라본 뒤 자세를 잡았다.
타자는 발 빠른 이지성.
주자 또한 발 빠른 정영수.
바넷이 숨을 골랐다.
“바넷 선수가 뛸 수 있는 상황인 건 다행인데 지금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고트의 숨겨진 득점 루트죠. 정영수 선수가 출루율이 좀 낮아서 그렇지 일단 나가면 꽤 골치 아픈 주자예요. 발도 빠르고 주루 센스도 좋거든요. 이지성 선수와 함께 9번, 1번 타자로 있을 때 고트는 다양한 작전을 짤 수 있습니다. 런 앤드 히트든, 히트 앤드 런이든 옵션이 많아질수록 투수의 선택 폭이 좁아지기 마련이거든요.”
바넷의 초구는 바깥쪽 빠른 공.
이지성이 공을 쳤지만 파울.
구속은 142km/h였다.
“구속이 좀 떨어지네요. 아무래도 조금 전 부상의 여파가 있는 거 같아요.”
“만약에 발목이 좋지 않다, 이러면 고트는 번트를 댈 수도 있어요. 투수가 맞은 곳이 오른쪽 발목이었나요? 그렇다면 투수의 오른편으로 공을 보낸다면 투수가 몸을 틀어서 1루로 던지기 까다로울 수 있습니다.”
함성훈의 손이 바빴다.
작전코치의 손도 덩달아 바빠졌다.
이지성은 고개를 한 번 끄덕거리곤 배트를 짧게 잡았다.
툭툭.
피닉스의 안용덕 감독도 사인을 냈다.
내야가 전진하면서 번트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
베넷의 제2구는 몸 쪽 빠른 공.
존에서 빠지는 공이라 이지성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1-1.
구속은 141km/h.
1루 주자 정영수가 야금야금 리드를 넓혔다.
“베넷 선수는 우투수라 1루 견제를 하려면 빠르게 몸을 틀어서 던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당연히 발목에 무리가 오게 됩니다. 주자 견제가 어렵다는 얘기죠.”
“공은 느려지고 주자 견제도 어려워졌습니다. 베넷 선수와 피닉스의 위기예요.”
베넷의 3구는 바깥쪽 체인지업.
이지성은 기다렸다는 듯 느린 공을 3루 방향으로 번트를 했다.
“베넷 선수! 바로 잡아서 2루로! 2루수가 잡아서 바로 1루로! 아웃! 아웃입니다! 병살을 만들어 내는 베넷 선수예요!”
“방금은 기다렸다는 듯이 베넷 선수가 뛰어나갔어요. 발목을 다친 선수가 맞나요? 설마 페이크였나요?”
“덫을 놓고 기다린 거 같습니다. 공은 던지자마자 앞으로 뛰어나갔거든요. 정영수 선수가 2루에서 탄식하네요. 정영수 선수가 리드를 잘 잡아 놨는데 2루까지 달리기는 그리 빠르지 않았습니다.”
“방심한 거죠. 번트를 댔어도 1루로 던지겠거니 생각한 겁니다.”
“베넷 선수의 연기였는지는 몰라도 완벽한 수비로 병살을 만들어 내는 피닉습니다.”
베넷은 설진일을 초구 플라이로 잡아내며 포효했다.
설진일에게 던진 공은 몸 쪽 147km/h의 패스트볼이었다.
“영악한 놈이네. 하하.”
함성훈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6회 말. 피시는 피닉스의 홍찬열에게 솔로 홈런을 헌납하며 한 점을 더 내줬다.
3-0.
고트의 벤치에선 투구 수 관리를 위해 피시를 6회까지만 뛰게 한 후 마운드에서 내렸다.
베넷은 7회 김인환, 송석현, 유선호 클린업을 플라이와 범타 2개로 잡아낸 후에야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발목은 괜찮아?”
컨디셔닝코치의 물음에 베넷은 대답 대신 인상을 찌푸렸다.
“병원에 바로 가자.”
베넷은 약간 절뚝이면서 코치와 함께 벤치를 나갔다.
피닉스 선수들은 베넷을 보며 말을 아꼈다.
“우리 승리는 꼭 지켜 주자. 알았지?”
경수인의 말에 선수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
피닉스는 9회 말까지 1점도 내지 못했으나 1점도 내주지 않았다.
경기 스코어는 3-0.
고트가 단 한 점도 내지 못한 경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송석현은 그라운드를 떠나지 않고 팬들에게 손을 흔드는 경수인을 바라봤다.
“뭐 해? 가자, 석현아.”
“아, 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