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79화 (179/201)

천재 (9)

경기를 마친 후 숙소로 돌아온 함성훈 감독이 TV를 켰다.

야구 데일리 프로에선 오늘의 경기를 리뷰하는 중이었다.

“……2경기 차. 참 안 주네.”

함성훈이 TV를 껐다.

“후, 페가수스는 페가수스란 말이지.”

* * *

일요일.

주말 3연전 마지막 경기.

잠실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경기 시작이 가까워지자 해설자와 캐스터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경기의 양상은 어떻게 보십니까?”

캐스터의 물음에 해설자가 답했다.

“선발 싸움 아니겠습니까? 양 팀의 타선은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밸런스가 좋습니다. 기동력과 파워를 지닌 스콜피언, 역대 최고의 클린업이라는 고트. 불펜 방어율도 두 팀이 나란히 2, 3위를 기록하고 있어요. 이런 날에는 결국 선발의 컨디션이 경기를 좌우한다고 봅니다.”

“오늘 양 팀 선발은 강구일 선수와 한민석 선숩니다. 두 선수 모두 팀에서 주력으로 내세우는 선수들인데요. 누구의 손을 들어 주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허허, 그것 참 곤란하네요. 누구의 손을 들어 준다……. 굳이 따지자면 저는 강구일 선수의 손을 들어 주고 싶습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노련함이죠. 강구일 선수가 데뷔 때는 대단한 파이어볼러였죠? 현재는 구속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스플리터를 장착한 이후엔 노련함을 얻었습니다. 한민석 선수가 지옥에서도 데려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라지만 제구력도 그렇고 커맨드도 그렇고 많이 아쉽습니다. 공이 빠른 걸로 치면 한민석 선수가 3~5km/h 이상 빠르겠지만 그 외에는 강구일 선수가 모두 앞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오늘 경기는 스콜피언의 우세승으로 보시는 거군요.”

“네. 스콜피언이 또 가을 DNA가 있지 않습니까? 가을이 되면 더 강해지는 팀이 스콜피언이죠. 고트는 여름에 타올랐다가 가을에 약한 모습을 보여 줘 왔구요. 팀 색깔이라는 건 쉽게 바뀌진 않거든요.”

-플레이볼!

경기 시작과 함께 마운드에는 한민석이 올라왔다.

첫 타자는 황기덕.

한민석은 공 네 개로 삼진을 잡아냈다.

“리그 최고의 중견수 황기덕 선수지만 빠른 공을 던지는 좌완 투수에게는 쉽지 않네요.”

“빠른 공을 지닌 투수의 공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요. 한민석 선수가 원래 초반에는 헤매는 타입인데 오늘은 제구가 괜찮습니다.”

한민석은 강균승에게 안타를 내준 후 정대한, 조양철을 연속 삼진으로 잡아냈다.

“한민석 선수가 연속 삼진으로 1회의 위기를 넘깁니다. 1회 초 고트가 무실점으로 지켜 내네요.”

“이러면 오늘 경기 잘 모르겠네요. 원래 한민석 선수가 초반에 흔들리는 타입인데 이렇게 초반을 수월하게 넘기면 고트의 승산이 더 올라가죠.”

벤치로 돌아온 한민석이 머리를 양옆으로 돌렸다.

투수코치가 다가와 한민석에게 수건을 건넸다.

“오늘 로케이션 좋다? 폼 수정한 게 잘 맞나 보네.”

“점점 맞는 거 같아요. 처음엔 너무 사이드로 빠졌는데 이제는 감이 잡혔어요.”

“너도 난놈은 난놈이다, 시즌 중에 폼을 바꿨는데 이렇게 빨리 적응하고.”

“왜 이러세요. 저 한민석이에요. 전국 일짱 한민석. 이 정도는 해 줘야죠.”

듣고 있던 선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적 일짱이야, 일짱은.”

“좋겠다, 일짱이라.”

한민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왜 이러셔. 나 메이저리그 오퍼 받은 사람이야. 내가 고딩 때는 내 밑에만 있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늬예, 늬예. 그러세요?”

“어어, 내 말 못 믿어?”

“믿어, 믿어. 믿는다.”

한민석은 다리를 꼬고 팔을 양옆으로 뻗었다.

“재능충이 괜히 재능충인지 아나. 이 정도는 해야 재능충 소리를 듣는 거지.”

유선호가 한민석 옆에서 배트를 챙겼다.

“그래. 우리 민석이가 천재라서 좋~겠네.”

한민석이 슬쩍 다리를 풀었다.

유선호는 배트를 어깨에 걸쳤다.

“아이고~ 나도 재능충 소리 듣고 싶네. 누구는 재능이 없어서 살긋나.”

듣고 있던 선수들이 파하하 웃었다.

“우리 석현이도 없는 재능 잘 짜내가 열심히 해야 칸다. 알았제?”

“네, 알겠습니다.”

한민석이 수건을 옆에 놓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이, 진짜. 여기서 자랑도 못 하겠네.”

투수코치가 유선호를 보며 말했다.

“선발투수 기 좀 세워 줘라. 누가 너 잘난 거 모른다냐?”

“알겠습니다~.”

1회 말.

고트는 이지성이 볼넷으로 출루한 후 설진일의 안타, 김인환의 볼넷으로 만루를 맞았다.

선발투수 강구일이 모자를 한번 벗어 땀을 닦았다.

“오늘 강구일 선수의 제구가 흔들리면서 1회에만 벌써 볼넷이 두 개쨉니다.”

“강구일 선수의 레퍼토리가 바깥쪽의 낮은 코스로 들어가는 빠른 공과 아래로 떨어지는 스플리터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제구가 전반적으로 높게 되고 있습니다. 제구가 높으면 당연히 위험해지거든요. 그러다 보니 안 맞으려고 바깥쪽으로 공을 빼고,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만 들어오니 타자들은 안 치면 그만인 거죠. 높은 코스로 공이 가다 보니 스플리터도 자연스럽게 봉인돼 버렸습니다. 자신의 강점이 모두 꽁꽁 묶여 버린 셈이에요.”

“강구일 선수의 컨디션이 오늘 안 좋은가요? 평소와는 다릅니다.”

“선발투수가 경기마다 컨디션이 좋지는 않습니다. 보통 3~4경기, 잘하면 1~2경기는 좀 아쉬운 편인데 하필 오늘이 그날인 거 같아요. 경기 전에 만났을 땐 오늘 공이 좋다고 했는데 막상 또 마운드에 올라가면 다른 거 같습니다.”

“벌써 스트레이트 스리볼입니다. 이러면 밀어내기도 가능하겠는데요?”

“볼넷이네요. 결국 밀어내깁니다. 스리볼이 나온 이상 예상 가능한 수순이었죠. 잠실의 송석현과 승부하는 것보단 1점을 내주고 유선호 선수와 승부하는 게 낫죠.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스리볼에선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송석현이 1루로 걸어갔다.

강구일은 손에 로진백을 들었다.

타석에 들어선 유선호가 포수에게 말을 걸었다.

“깔끔하게 빠른 공 하나 도. 그럼 안타 하나만 치고 나가께.”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앉아 있어.”

“서로 상부상조해야지. 저러다 큰 거 맞는다니까.”

“서울 가더니 헛소리가 늘었네.”

강구일의 초구는 바깥쪽 빠른 공.

볼.

제2구도 볼이었다.

“또 밀어내기 하면 구일이 멘탈 터져 뿐다. 오케이. 내가 많이 봐줬다. 지금이라도 직구 하나 주면 내가 딱 단타 하나만 치께.”

“헛소리는 진짜.”

포수 구승철이 사인을 냈다.

강구일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자세를 잡았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은 위로 솟구치듯 날아가다 아래로 훅 떨어졌다.

커브.

포수의 미트가 포수의 얼굴 위로 올라갔다.

탕!

유선호가 배트를 던졌다.

공은 잠실의 우측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그랜드슬램! 그랜드슬램이 터집니다! 1회부터 유선호의 만루 홈런이 터집니다!”

“방금 커브는 정말 아니었어요. 애초에 투수가 공을 너무 높게 던졌습니다. 커브는 타자의 눈높이에서 존 아래로 떨어져야 효과적인데 방금 커브는 타자 머리 위에서 존 한가운데로 오는 공이었습니다. 저건 그냥 치라고 던지는 공이죠.”

“유선호 선수의 그랜드슬램으로 고트가 시작부터 5-0으로 앞서갑니다. 오늘은 고트가 먼저 앞서가네요.”

“노련한 유선호 선수에게 저런 실투는 먹잇감이나 다름없죠. 유선호 선수의 장점을 타고난 선구안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저런 실투를 놓치지 않는 노련함이 더 무서워요. 좋은 공은 거르고 나쁜 공을 노리니 어떻게 성적이 안 좋을 수가 있겠습니까. 통산 OPS 0.9는 아무나 쌓을 수 있는 기록이 아니죠.”

유선호가 선수들의 환호를 받으며 벤치로 돌아왔다.

가장 기뻐하는 건 선발투수 한민석이었다.

“오오, 야구의 신이시여. 저에게 승리를 내려 주셔서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재능은 없어도 한 방은 있다 아이가.”

“선배야말로 재능 오브 재능충인데 무슨 그런 말씀을.”

“근데 고마 충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나? 신이면 신이지 충은 뭐꼬.”

“신께서 명하신다면 얼마든지.”

강구일이 허리를 꺾어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스콜피언 이건후 감독은 자리에 앉아 팔짱을 꼈다.

“아직도 옛날 강구일인 줄 아나…….”

강구일은 추가로 2실점을 한 뒤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벤치로 돌아온 강구일은 넋 나간 얼굴로 수건을 뒤집어썼다.

스콜피언 응원석에선 벌써 자리를 떠나는 이들이 있었다.

“점마는 글렀다. 공이 탱탱볼 아이가, 탱탱볼.”

“강구일이 옛날에나 강구일이지 지금 강구일이가?”

“그라지들 마소. 그래도 강구일 아입니까. 스콜피언 우승시킨다고 어깨 갈아 뿐 아안테 너무하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공도 시원찮은데 볼질만 해 뿌몬 우째 이기는데?”

“하이고, 고마 또 잘하겠지. 구일이 응원이나 하입시더.”

머리가 희끗한 팬 하나가 중얼거렸다.

“공이 빠를 때나 강구일이지, 저래 던쪄 뿌몬 동네 얼라도 치긋다.”

1회에만 7실점.

강구일은 3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 냈으나 2사 만루를 만들고 강판됐다.

만루에서 이지성의 적시타로 9-0.

설진일의 안타로 11-0.

김인환의 플라이로 3회가 끝났다.

“우우우!”

“고마 때려치 뿌라!”

“이래가 우승하겠나!”

“돈이나 물어도!”

초반부터 대량 실점이 나오자 스콜피언 팬 중 일부는 야유를 하고 이물질을 야구장에 던졌다.

장내 소란이 생기자 심판이 나와 정리했다.

벤치 한구석에 있던 강구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벤치를 나가 버렸다.

“쯧쯧. 구일이가 어쩌다 저렇게 됐나.”

김정률의 탄식에 송석현이 물었다.

“예전에는 구일 선배님이 정말 잘하셨죠? 저 초등학교 때부터 구일 선배님은 유명했는데. 팔공산 에이스였잖아요.”

“쟤가 진짜 난놈이었지. 중학교, 고등학교, 프로, 국가대표 전부 에이스였잖냐. 민석이가 지 입으로 일짱, 일짱 타령했지만 진짜 전국구 일짱은 강구일 같은 놈이지. 스콜피언을 멱살 잡고 우승시킨 거나 다름없었어. 그때 이후로 어깨 완전히 갈린 게 흠이지. 에휴.”

“구속이 많이 줄었나요?”

“그때는 150km/h 쉽게 던졌지. 지금도 145km/h는 던지지만 그때랑 같나. 애초에 힘으로 밀어붙이던 놈이야. 그런 놈이 구속이랑 구위 다 잃었으니 별수 있나. 피네스 피처로 변하겠다고 발버둥은 치는데 옛날 버릇 버리기가 쉽지 않아. 옛날에는 저런 높은 공만 던져도 죄다 헛스윙이었거든.”

“아쉽네요, 저도 전성기 강구일 선배랑 한번 붙어 보고 싶었는데. 우리 때는 강구일 선배가 진짜 야구 천재였거든요.”

“천재…… 천재였지. 그런데 야구판에서 진짜 천재는 몇 안 돼. 나이 먹고도 커리어를 유지하는 게 가장 어렵거든. 그런 면에서 진짜 천재는 저 양반이지.”

김정률의 손가락이 유선호를 가리켰다.

“저 나이에도 OPS 0.9가 사람이냐? 저러다 마흔까지 치겠어.”

11-0에서 경기는 기운 거나 다름없었다.

한민석은 8회까지 단 1실점만 내줬다.

최종 결과는 15-2.

천재 타자 정대한의 솔로 홈런이 스콜피언 팬들에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경기 끝났습니다. 오늘 경기는 의외로 일방적으로 흘렀습니다.”

“고트가 1회 대량 득점에 성공한 게 주효했어요. 역시 투수는 1회가 가장 힘들어요. 강구일 선수의 제구가 유독 말을 안 듣던 하루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고트는……. 아, 오늘도 페가수스가 승리를 거뒀네요. 페가수스와 고트가 2경기 차를 유지합니다.”

“좁힐 듯 좁힐 듯 좁혀지지 않네요. 그래도 고트의 9월 전망은 아주 밝습니다. 상위 4개 팀 중에 페가수스와 3연전 한 번, 울브스와 3연전 한 번을 빼면 전부 하위 4개 팀과의 일정이 남았거든요. 이건 뒤집어 말하면 고트가 상위 팀과 승부하면서도 2위를 지켜 냈다는 얘기예요. 고트의 저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네요.”

“이번 잠실 주말 3연전은 고트가 스콜피언 상대로 위닝시리즈를 기록했습니다. 스콜피언은 일격을 맞으면서 1위와의 격차가 더 벌어졌어요.”

“이제 9월입니다. 그 말은 이번 한 달이 지나면 포스트 시즌이라는 거죠. 이번 한 달이면 포스트 시즌의 승자가 가려질 겁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페가수스가 1위로 올라갈지, 아니면 고트가 1위를 뺏어 내면서 근 23년 동안 해 보지 못한 리그 1위를 탈환할지 정말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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