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77화 (177/201)

천재 (7)

“정말요?”

송석현이 활짝 웃었다.

“정말 오늘부터 선발 출전입니까?”

“오늘부터가 아니라 오늘은. 출전은 상황 봐 가면서 우리가 조절할 거야.”

배터리코치의 말에 송석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건강합니다. 문제없어요.”

“그래그래. 그래도 조심해야지. 지금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포스트시즌에 더 잘해야 하는 거 알지? 그때를 위해서 몸 관리 잘해 놔야 한다.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코치와의 면담이 끝난 후 송석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팀 훈련 시간.

송석현은 선발투수 이창훈과 연습 투구에 들어갔다.

팡.

팡.

공을 받아 본 송석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투수코치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별로죠?”

이창훈의 질문에 투수코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컨디션이 안 올라오네.”

“……죄송합니다. 요 며칠 칼같이 몸 관리했는데도 이러네요.”

“아냐. 시즌 말에는 이럴 수 있지. 그동안 몇 년 동안 선발 로테이션도 거의 안 거르고 돌았잖아. 피로가 누적됐을 가능성이 높지.”

“…….”

“일단 오케이. 일단 몸은 여기까지 풀고 팀 미팅 때 또 얘기해 보자.”

“네.”

코치가 떠난 후 이창훈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송석현이 포수 마스크를 벗고 이창훈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보시다시피 이렇네.”

이창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좀 쉬면 컨디션이 올라올 거 같았는데…….”

“그래도 오늘 제구는 평소보다 더 좋던데요?”

“그거야 살살 던지니까 그렇지.”

“에이, 살살 던져도 공이 제멋대로 가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뭐.”

“석현아.”

“네.”

이창훈이 고개를 저었다.

“별로 위로가 안 된다.”

“……네.”

이창훈은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오늘 홈런 한 네 개만 까 줘라.”

“……네 개요?”

“오늘 엄청 얻어터지게 생겼어. 네가 홈런 팡팡 쳐 줘.”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만, 그게 제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나도 진짜 퇴물이 되려나 보다.”

“에이, 선배님. 우리 팀 에이스가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말만 고맙다, 말만. 짜식.”

이창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에이스라는 단어는 언제나 들어도 기분 좋다잉. 그치?”

“선배님은 명실공히 우리 팀 에이스십니다!”

“솔직히 우리 팀 에이스야 너 아니면 피시지 뭐. 내가 무슨.”

이창훈이 송석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쨌든 이따 경기 잘해 보자. 오케이?”

“넵.”

* * *

경기 전 고트의 미팅 룸.

코치진 회의 분위기는 밝지 않았다.

투수코치의 보고에 함성훈 감독은 침음을 흘렸다.

“구속까지 떨어졌다면, 어쩌면 에이징 커브일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갑자기 구속이 떨어진 거니 단순 피로 누적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음…….”

함성훈이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연 코치님.”

“네.”

“오늘 오프너 전략으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제 백찬이 덕분에 불펜이 충분히 쉬었으니 안 될 건 없다고 보는데.”

“네, 알겠습니다. 그럼 불펜을 세팅해 보겠습니다.”

“내일 경기를 위핸 최소한의 불펜을 남겨 두고 쓸만한 불펜은 다 올린다고 가정해 주세요. 오늘 경기까지 밀리면 2위 자리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코치진 미팅이 끝난 후 연우식 투수코치는 불펜코치와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수첩을 펴서 가용한 불펜 투수들을 써 내려갔다.

“서글프다, 서글퍼. 안 그래, 연 코치?”

불펜코치의 물음에 연우식이 쓰게 웃었다.

“창훈이요?”

“그래. 전반기까지만 해도 우리 팀 에이스였는데 이제는 퀵훅 대상이라니, 원.”

“투수라는 게 그렇잖습니까. 잘 던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두드려 맞는 날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면 어영부영 은퇴하는 거죠. 요새야 롱런하는 불펜 투수가 하나둘 생긴다지만 선발은 어쩔 수 없죠. 선발로 서른 넘어서 에이스 놀이하는 애들은 드물잖아요.”

“창훈이나 민석이나 그 부분은 참 대단하긴 해. 어쩌면 오래 버틴 걸 수도 있고.”

“선발 로테이션을 여태 버텨 준 거 생각하면 참 고맙긴 하죠. 감독님 앞에서는 솔직히 말 못 했지만 창훈이 에이징 커브라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니죠, 뭐.”

“결국 투수 FA는 다 이렇게 되네. 많이 써도 2~3년이 맥스야.”

“잘하는 놈일수록 많이 던지니 그만큼 빨리 은퇴하는 거죠.”

“창훈이가 벌써 내려가기에는 실력도 그렇고 참 아까운 놈인데.”

“올해까지라도 버텨 주면 고맙겠어요.”

“선발이 구속 떨어지면 다시 올리기 힘들지.”

“공이 빠르면 불펜으로라도 쓰는데 공까지 느리면 솔직히 그렇긴 하죠.”

“그럼 창훈이도 올해까지가 잠실에선 마지막이려나?”

“그래도 아직은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요새도 어쨌든 구위가 떨어졌어도 잘 던져 줬잖아요.”

“그게 언제까지 갈지 모르지. 운이잖아, 운.”

“운인지 실력인지는 보면 알겠죠.”

* * *

-플레이볼!

경기 시작과 함께 이창훈이 초구를 던졌다.

1번 타자 황기덕은 공을 치지 않고 외곽에 들어오는 공 하나를 지켜봤다.

-스트라이크!

송석현은 공을 받고선 움찔했다.

전광판에 떠 있는 구속은 138km/h.

“이창훈 선수가 초구 스트라이크로 기분 좋게 시작합니다.”

“역시 제구가 좋은 선수죠. 보더 라인에 딱 걸치는 공입니다.”

전광판의 구속을 본 함성훈은 팔짱을 꼈다.

이창훈의 제2구는 바깥쪽 커브.

존 아래로 떨어지는 공이었으나 황기덕은 좌중간으로 당겨 올렸다.

“좌중간을 꿰뚫는 공! 황기덕 선수가 2루타를 때려 냅니다.”

“좋은 커브였는데 잘 쳤어요. 황기덕 선수가 잘 노려서 쳤네요.”

“황기덕 선수가 2루에 있다면 짧은 안타로도 홈 쇄도가 가능합니다.”

“다음 타자는 강균승 선숩니다. 이창훈 선수, 조심해야 합니다.”

이창훈은 초구부터 외곽 체인지업을 던졌다.

강균승은 초구를 흘려보냈다.

제2구는 바깥쪽 빠지는 포심. 볼.

제3구는 바깥쪽 체인지업. 볼.

제4구는 바깥쪽 포심, 볼.

“볼넷. 스트레이트 볼넷이 나옵니다.”

“신중한 승부를 하다 보니 카운트가 몰렸어요.”

이창훈은 다음 타자 정대한에게도 볼넷을 허용하며 만루를 만들었다.

만루의 대가는 컸다.

탕!

“안타! 안타! 조양철의 싹쓸이 안타가 터집니다! 홈런은 아니지만 주자들을 모두 불러들이는 2루타! 1루 주자까지 홈으로 세입! 3-0. 스콜피언이 오늘도 초반부터 앞서갑니다.”

“이게 스콜피언의 힘입니다. 최고의 1, 2, 3, 4번 라인. 발 빠르고 잘 치는 1, 2, 3번 타자와 타점 머신 조양철 선수까지. 스콜피언을 상대하는 팀은 1회를 넘기는 게 참 어려워요. 쉽지 않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고트가 초반을 힘겨워합니다.”

이창훈이 손을 털었다.

이미 얼굴은 땀범벅.

함성훈 감독이 턱을 괴었다.

“벌써 내릴 수도 없고……. 어쩐다.”

이창훈은 5번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할 뻔했으나 이지성의 호수비로 아웃 카운트 하나를 늘렸다.

이후 6번 타자에겐 또 볼넷.

송석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선배님.”

“후, 알아, 알아. 아직 몸이 덜 풀려서 그래. 이젠 공이 좀 더 빨라질 거야.”

“아뇨. 여기서 구속을 더 늘리시기보다는 차라리 더 줄이시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구속을 줄이라고?”

“네. 오늘 제구도 좋으시고 체인지업도 좋으시잖아요. 구속을 조금만 더 낮춰 보시는 건 어떠세요?”

“뭔 말이야?”

“직구도 체인지업도 다 구속을 낮춰서 레인지를 넓히시는 거죠. 직구를 130~140 정도로 던지고 체인지업도 110~125 정도로 던지면 구속 레인지가 30km/h 차이가 나잖아요.”

“더 느리게……. 그게 스콜피언한테 통할까?”

“선배님 구속이 150km/h씩 나온다면야 상관없지만 지금 구속을 늘릴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창훈은 고개를 숙여 발끝을 바라봤다.

“좋아. 어차피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는데 해 보자.”

“오늘 커브도 빠르게 던지지 마시고 슬로커브도 섞어 보시죠. 템포를 최대한 늦춰 놓으면 선배님 직구가 더 빨라 보일 겁니다.”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템포를 최대한 늦추라는 거잖아, 어제 백찬이랑 정반대로.”

“상대의 타격 템포를 늦추는 거죠. 투구 템포를 더 죽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어쨌든 타자는 생각할 시간이 없으면 없을수록 좋은 거니까요.”

“오케이. 알았어. 해 보자. 해 보지, 뭐.”

송석현이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이창훈이 혼자 중얼거렸다.

“느리게, 더 느리게.”

타자가 들어서자 송석현이 미트를 내밀었다.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 사인.

빼는 게 아니라 존에 넣으라는 신호다.

이창훈이 초구를 꽂았다.

-스트라이크!

전광판의 구속은 136km/h

타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가자! 가자, 스콜피언!”

“이창훈 퇴물 다 됐어! 그냥 보고 쳐!”

“홈런 하나 까자! 홈런!”

스콜피언 팬들의 응원 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팬들의 응원과 달리 스콜피언 벤치는 기다리는 사인을 냈다.

팡!

-스트라이크!

“연속 바깥쪽 공 두 개로 스트라이크 두 개를 가져갑니다.”

“이번에는 포심 두 개를 연속으로 던졌어요. 오늘 변화구를 절반 이상 던지던 이창훈 선순데 전략을 바꿨나요?”

타자가 배트를 짧게 쥐었다.

투 스트라이크.

투수가 공을 던졌다.

팡.

포수의 미트에 들어온 공.

타자의 몸이 움찔했다.

-볼. 아웃사이드.

“공 하나를 바깥쪽으로 빼네요. 볼입니다.”

“방금 공은 체인지업이었나요? 128km/h이면 체인지업 같은데 공이 안 떨어졌어요. 참 위험한 공을 던졌네요. 저게 스트라이크존에 들어갔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제4구.

타자는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오는 공에 자신 있게 스윙했다.

공은 타자의 배트를 비웃듯 배트를 피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삼진입니다. 드디어 첫 삼진이 나오네요.”

“요새 이창훈 선수의 체인지업이 참 좋아졌는데 이번에도 체인지업으로 삼진을 잡네요. 속도, 낙차 모두 훌륭한 체인지업입니다.”

전광판에 찍힌 숫자는 128km/h.

타자는 혀를 내두르며 벤치로 돌아갔다.

“기다리라니까. 뻔한 거 안 보여?”

타격코치의 핀잔에 타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벤치에 앉자 다른 선수들이 타자에게 물었다.

“오늘 뻔히 유인구만 던지는 거 아는데 그걸 왜 치려고 했어?”

“……후, 그러게.”

이창훈은 다음 타자에게도 삼진을 낚아냈다.

-스트라이크! 아웃!

“연속 삼진! 이창훈 선수가 1회에 3점을 내줬지만 더 이상의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연속 삼진 2개로 이창훈 선수가 위기를 벗어납니다.”

“역시 공이 좋아요. 저 체인지업이 정말 좋습니다.”

함성훈은 수비를 마치고 들어오는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연우식 투수코치가 감독에게 가 물었다.

“불펜은 언제부터 준비시킬까요?”

“창훈이가 나름 감을 잡은 거 같은데 일단 3회까진 지켜보죠.”

“네, 알겠습니다.”

스콜피언의 투수는 데일 예거.

빠른 공을 앞세운 좌완 용병이었다.

1, 2, 3번에 좌타자가 두 명이나 있는 고트에는 썩 좋은 조합은 아니었다.

결과는 세 타자 연속 범타.

무득점이었다.

“후우. 가자, 석현아.”

득점 지원은 없었지만 마운드에 오르는 이창훈의 표정은 더없이 결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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