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6)
“어느덧 9회네요.”
“네, 어느덧 9회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마운드에는 이백찬 선수가 서 있어요.”
“오늘 경기가 긴박하다 보니 저희가 간과했는데 이백찬 선수가 9회까지 서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스콜피언은 오늘 네 명의 투수를 올렸는데 고트는 지금 두 명의 투수만 올리고 있습니다. 이백찬 선수가 1점을 내준 이후로 무실점 행진 중입니다.”
9회 초.
마운드에는 이백찬이 서 있었다.
고트의 투수코치 연우식은 흐뭇한 미소로 이백찬을 보고 있었다.
“어쨌든 오늘 확실한 성과가 있네요. 백찬이 최소한 1군에서 통할 만한 그릇이라는 건 증명된 거 같습니다.”
함성훈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만 더 쌓으면 선발도 가능하겠어요.”
스콜피언의 공격은 8번 타자부터.
이건후 감독은 선수들에게 침착한 공격을 지시했다.
결론은 삼구 삼진.
이백찬은 단 하나의 볼도 없이 존에 직구를 집어넣었다.
“삼구 삼진! 이백찬 선수가 150km/h 넘는 공으로 삼진을 잡아냅니다. 삼진까지 1분이 조금 넘었던 거 같아요. 오늘 이백찬 선수의 투구 템포는 심박수 200입니다. 숨이 가빠서 중계도 힘들 지경이에요.”
9번 타자는 포수 구승철.
구승철은 1구를 기다린 후 2구를 노려서 쳤다.
탕!
우중간으로 잘 뻗어 가는 공.
구승철이 1루로 여유 있게 뛰었다.
탓, 탓, 탓, 탓!
“이지성, 이지성, 이지성! 잡습니다! 저걸 잡아요! 이지성의 슈퍼 세이브! 저 공을 잡아 버립니다!”
“이지성 선수의 수비 범위는 정말 어메이징하네요. 전성기 시절의 실력을 다시 보는 거 같습니다.”
“분명히 빠진 공이라고 봤는데 저걸 잡아 버립니다.”
“이지성 선수가 친정 팀에 비수를 제대로 꽂네요. 이백찬 선수 든든하겠어요. 외야는 이지성 선수가 꽉 잡고 있네요.”
이지성이 공을 보여 주며 활짝 웃었다.
포수 구승철은 쓰게 웃었다.
“짜슥이. 그걸 잡아 뿌네.”
다음 타자는 1번 타자 황기덕.
황기덕이 나오자 서일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
타임을 부른 서일혁이 마운드로 걸어갔다.
이백찬이 영문을 몰라 서일혁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백찬아.”
“네.”
“질러라.”
“……네?”
이백찬이 눈을 깜박였다.
“지르라고. 몸 쪽으로 세 개 던져. 쟤 내보내도 되니까 승부해. 오늘 네 페이스면 쟤 1루 나가도 도루 못 해. 그러니까 자신 있게 질러. 오케이?”
“아…… 네.”
서일혁이 이백찬의 어깨를 두드렸다.
“짜식. 빨리도 큰다.”
서일혁이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이백찬은 멍하니 있다가 씨익 웃었다.
“두 선수가 무슨 말을 나눴을까요?”
“글쎄요.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자신 있게 던져라, 이런 얘기 아닐까요?”
“이백찬 선수가 웃네요. 좋은 얘기를 나눴나 봐요.”
“발 빠른 황기덕 선수가 나가면 고트는 또 머리가 아파요. 이백찬 선수가 견제에는 취약하거든요. 여기서 투수 교체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백찬이 숨을 크게 두 번 들이켰다.
로진백을 들었다 놓고, 모자도 고쳐 썼다.
이백찬은 다리를 들어 올린 후 몸을 앞으로 던졌다.
팡!
-스트라이크!
“154km/h! 오늘 최고 구속이 나옵니다! 이백찬 선수, 최고 구속을 갱신했습니다.”
“오늘 잠실 스피드건이 조금 후한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대단하네요. 9회에 공이 더 빨라졌어요.”
“이백찬 선수의 빠른 공에 황기덕 선수가 꼼짝도 못 했습니다.”
“저런 공이 몸 쪽으로 제대로 붙어 오면 타자는 할 게 없죠.”
황기덕이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배트를 조금 짧게 쥐고 스트라이드를 좁혔다.
이백찬의 제2구는 바깥쪽 빠른 공.
황기덕이 스윙했다.
탁!
“파울. 파울입니다. 배트가 밀리네요.”
“이백찬 선수가 공을 많이 안 던져서 아직 힘이 남아 있어요. 아니, 오히려 어깨가 풀려서 더 잘 던지는 거 같습니다.”
이백찬의 3구는 슬라이더.
황기덕의 배트가 돌다 멈췄다.
“주심, 주심은 노 스윙을 선언합니다.”
“서일혁 선수가 어필하지만 1루심도 안 돌았다고 하네요.”
“방금은 정말 위험했죠. 거의 돌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어요.”
황기덕이 눈을 한번 감았다.
이백찬도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제4구.
팡!
-스트라이크! 아웃!
몸 쪽 하이 패스트볼.
황기덕이 몸을 움츠린 채 꼼짝도 못 했다.
“삼진! 삼진이 나옵니다! 여기서 삼진이 나와요!”
“천하의 황기덕을 삼진으로 잡아 버리네요. 오늘 이백찬 선수의 인생 피칭이 나옵니다. 대단하네요. 선발도 아니고 가비지 이닝을 처리하려다 역대급 경기를 펼쳤어요.”
“아직까진 승리투수가 아니지만 경기가 이대로 끝난다고 해도 오늘 최고의 선수는 다름 아닌 이백찬 선수가 될 겁니다.”
“그럼요. 대단한 경기를 펼쳤어요. 정말 대단한 피칭이었습니다. 저희가 감상할 시간도 주지 못했다는 게 아쉽지만 말이죠.”
“하하, 그렇죠. 저희가 감상할 시간도 부족했죠.”
“빠르고 또 빨랐습니다. 액션 영화 한 편 보는 거 같았어요. 그것도 잠시 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는 액션 영화 말이죠.”
“이백찬 선수가 잠실 팬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마운드를 내려갑니다. 그렇죠. 이백찬 선수는 오늘 기립 박수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선숩니다. 훌륭한 경기였어요.”
고트 선수들도 벤치 밖으로 나와 이백찬을 맞았다.
“잘했어.”
“오늘 완전 최고야.”
“굿굿. 완전 굿이야.”
“죽이는데, 이백찬.”
이백찬은 넋이 나간 얼굴로 벤치로 돌아와 앉았다.
아직도 열기가 채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끝까지 던졌네. 내가 끝까지 던졌어.”
혼자 중얼거리던 이백찬이 헤헤, 웃어 버렸다.
“나도 끝까지 던졌어. 나도 끝까지 던질 수 있었네.”
9회 말.
송석현이 타석에 들어서자 고트 팬들이 또 자리에서 일어섰다.
9회 말, 4번 타자.
앞에 주자가 없다는 것만 빼면 최고의 찬스.
송석현이 자세를 잡자 스콜피언의 마무리 탁기덕도 숨을 한번 내뱉었다.
“이 장면도 오늘 경기의 하이라이트 중에 하나로 뽑을 수 있겠네요. 9회 말, 마무리 탁기덕과 4번 타자 송석현. 탁기덕 선수가 송석현 선수를 거르고 승부할 수도 있겠지만, 주자를 모아 놓고 큰 거 한 방이면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요.”
“탁기덕 선수가 포수와의 사인을 주고받습니다.”
“신중해야죠. 신중해야 합니다. 송석현 선수는 그냥 잘하는 선수가 아니에요. 잘 치는 걸 넘어서 노림수도 좋은 선수거든요. 생각 없이 던졌다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탁기덕이 공을 등 뒤로 숨긴 채 포수의 사인을 지켜봤다.
포수의 초구 사인은 포크.
탁기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탁기덕, 와인드업!”
탁기덕의 손을 떠난 공이 스트라이크존 하단을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송석현의 허리도 돌았다.
송석현의 배트가 나오는 찰나, 공은 땅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팡!
포수는 공을 잡았고, 타자는 배트를 멈췄다.
포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1루심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노 스윙.
1루심의 판정은 노 스윙이었다.
“노 스윙. 이번에는 고트에서 노 스윙이 나오네요.”
“거의 다 돌아갈 뻔했는데 송석현 선수가 잘 참았습니다.”
“이게 스무 살짜리 선수의 실력인가요? 말도 되지 않습니다. 리그 최고의 마무리의 포크볼을 참아 냅니다. 저걸 어떻게 참아 냈을까요?”
탁기덕이 입을 벌리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하기는 스콜피언 벤치도 마찬가지였다.
“저걸 골라?”
“돌겠다.”
“저게 사람이야?”
가장 표정이 어두운 건 스콜피언의 감독도, 투수도 아니었다.
공을 받은 포수였다.
“이러면 포수의 셈법이 복잡해지죠. 타자가 투수의 포크볼을 골라냈어요. 결정구를 골라냈다는 얘깁니다. 이러면 포크볼을 결정구로 쓰기가 참 애매해집니다.”
“탁기덕 선수의 포크볼을 골라내면서 송석현 선수가 볼 하나를 얻어 내고 시작합니다.”
구승철의 제2구 사인도 포크볼.
이번엔 송석현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니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그걸 우째 고르는데?”
“배트가 나가려다 말더라구요.”
“뭔 말이고, 그게?”
“배트가 께름칙하다구요.”
“……?”
구승철은 고개를 저었다.
구승철이 사인을 바꿨다.
바깥쪽 빠른 공.
송석현은 존에 들어오는 공 하나를 지켜봤다.
“2-1. 2-1입니다. 송석현 선수가 직구 하나를 지켜봤습니다.”
“급하게 칠 필요 없어요. 볼 두 개가 들어왔다면 몰리는 공이 아닌 이상 침착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보더 라인을 잘 타고 들어오는 공은 투 스트라이크 전에는 건드리면 안 돼요.”
탁기덕이 숨을 골랐다.
2-1.
나쁘진 않지만 타자에게 유리한 카운트.
탁기덕이 포수의 손가락에 집중했다.
“직구 하나로 스트라이크를 잡았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예요. 여기서 또 직구를 던지느냐, 아니면 직구 하나를 보여 줬으니 포크볼을 또 던질 수 있느냐.”
“포크볼 두 개를 골랐는데 여기서 또 던질 수 있을까요?”
“송석현 선수가 노릴 공은 8할 이상이 직구일 겁니다. 당연하죠. 포크볼을 골라냈는데 상대 투수가 직구를 던질 거라고 예상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 그렇군요.”
“그럼요. 당연하죠. 송석현 선수가 직구를 노리고 있으니까 포크볼을 던져서 유인하기 더 좋다는 겁니다. 만약에 여기서 직구를 던졌다고 치죠. 스트라이크가 나오면 모를까, 송석현 선수가 직구를 노리는 상황에선 안타를 허용할 확률이 높아요. 투수는 자기 공을 믿어야 합니다. 포크볼을 던져야 해요.”
‘직구. 직구 던져.’
포수의 사인은 바깥쪽 직구.
제아무리 송석현 같은 톱급의 타자라도 9회 말 보더 라인을 타고 오는 빠른 공은 투 스트라이크 전에는 쉽게 배트를 낼 수 없다.
조금 전과 같은 직구라면 투 스트라이크를 만들 수 있다.
“…….”
탁기덕은 볼을 부풀렸다.
직구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투수 중에 하나가 탁기덕이다.
가장 빠른 직구는 아니어도 가장 묵직한 직구를 꼽는다면 탁기덕은 세 손가락 안에 무조건 뽑히는 선수다.
하지만.
탁기덕이 가장 자랑하는 구질은 역시 포크볼.
일본의 포크볼 장인이 오더라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으로 여태 살아왔다.
국제 대회에서도 메이저리거, NPB를 돌려세운 포크볼이다.
“음.”
탁기덕은 잠시 망설이다 허리를 세웠다.
투수는 포수를 믿어야 한다.
믿음이야말로 실력 그 이상의 알파다.
“악!”
탁기덕은 정말 오랜만에 기합과 함께 공을 던졌다.
공은 그대로 보더 라인을 향해 날아갔다.
송석현의 허리가 순식간에 돌아 버렸다.
쾅!
“가운데 담장~~! 가운데 담장을~~!”
공은 쭉쭉 뻗어 갔다. 중견수의 뜀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멈춰 버렸다.
“넘어갔습니다! 송석현의 솔로포! 송석현의 솔로포가 터집니다!”
“가운데 담장을 완전히 넘긴 홈런이었어요. 제가 말했잖습니까. 직구를 기다리는 선수한테 직구를 던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차라리 몸 쪽 공 하나를 보여 주고 바깥쪽 직구를 던졌다면 모를까, 스트라이크 받았던 공으로 똑같은 코스에 똑같은 공을 던진다면 아무리 좋은 공이라도 타자는 구분하기 쉽거든요.”
“이제 고트가 스콜피언을 다 따라잡았어요. 이제 역전도 가능합니다. 고트, 오늘 기어이 역전을 하고 맙니까?”
* * *
정동규가 친 공이 중견수의 글러브에 들어가면서 경기는 끝났다.
송석현의 홈런 이후 볼넷, 아웃, 아웃, 아웃.
탁기덕이란 벽은 쉽게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와, 죽다 살았네.”
“잘했다. 잘했어.”
“고생했다!”
스콜피언 선수들은 환히 웃었다.
고트 선수들은 아쉬움에 몇 번이고 한숨을 쉬고 전광판을 쳐다봤다.
함성훈 감독은 벤치에서 나와 박수로 지친 선수들을 맞았다.
“잘했어. 오늘 경기 다 잘했어.”
함성훈은 선수 하나하나를 위로한 후 마지막으로 벤치에 들어왔다.
고트 선수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흩어졌지만 코치들의 표정은 밝았다.
특히 투수코치 연우식은 패배가 무색하게 웃고 있었다.
“기어이 포텐이 터졌네요.”
“그러게. 포텐이 터졌어.”
1라운더 파이어볼러가 선발로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
투수 한 명을 기르기 위해 얼마나 긴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던가.
패배의 쓴맛은 없었다.
선발의 가능성을 보여 준 스물한 살의 파이어볼러.
고트의 패배에도 고트의 팬들은 이백찬을 주제로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눴다.
“그래도 우리도 뒷심 늘지 않았어?”
“오늘 좋았다니까. 오늘 경기 재밌지 않았어?”
“재밌었지?”
“재미는 있더라.”
“그럼 됐지, 뭐. 한국시리즈는 무조건 보장인데 우리가 아쉬울 게 뭐야! 맥주 콜?”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