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74화 (174/201)

천재 (4)

“볼넷. 볼넷입니다. 볼넷으로 주자 1루로 진루합니다.”

“챔피언 선수가 송석현 선수를 거르네요.”

“두 선수의 승부를 기대했는데 아쉽게 됐습니다.”

챔피언의 표정은 어두웠다.

스콜피언의 감독이 투수코치를 가까이 불렀다.

“잔루 쌓아도 좋아. 오늘 김인환, 송석현은 무조건 어려운 승부로.”

“네, 알겠습니다.”

유선호가 챔피언을 상대로 안타를 쳐 냈지만 추가 득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4회, 5회 양 팀 무득점.

클리닝 타임, 함성훈이 이백찬을 불렀다.

“백찬아.”

“네, 감독님.”

“더 던질 수 있겠어?”

이백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던지고 싶습니다.”

“많이 지쳐 보이는데. 괜찮겠어?”

“좀 지치긴 했는데 지금 쉬고 나면 괜찮을 거 같습니다.”

“오늘 유난히 달리더라. 전략이지?”

“한번 변화를 줘 봤습니다.”

“힘들면 바로 말해. 다음 투수 준비해 둘 테니까.”

이백찬이 우물쭈물하다 말했다.

“감독님.”

“왜?”

“괜찮다면 오늘 조금만 더 저한테 기회를 주실 수 있을까요?”

함성훈이 미소를 보였다.

“기회?”

“2~3점까지는 봐주시면 안 될까요? 최대한 많이 던져 보고 싶습니다.”

함성훈 감독이 투수코치를 바라봤다.

투수코치가 이백찬 뒤에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자신 있어?”

“자신은…….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함성훈은 웃는 얼굴로 이백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해 보는 데까지 해 봐. 초반에 점수 벌어진 건 네 책임이 아니잖아. 선발투수라고 생각하고 퀄리티 스타트를 끊어 봐. 2점까지는 내가 믿고 맡겨 볼게. 3점 이상은 상황을 보고 결정할 거야. 이견 없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이백찬이 자리를 떠난 후 투수코치가 다가왔다.

“백찬이가 오늘 뭔가 다르긴 다르네요.”

“이제 틀을 좀 깨려나 봅니다. 기회를 줘도 금세 움츠러들어서 힘들겠다 싶었는데 1군에 오래 있다 보니 자신감이 생기나 보네요.”

“템포를 저렇게 빨리하는 거, 극단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효과는 있는 거 같습니다. 스콜피언 애들이 쉽게 공략을 못 해요.”

“템포를 올리면 확실한 건 있어요. 투수도 생각할 시간이 없으니 더 집중하게 되죠. 백찬이가 잡생각이 많고 걱정이 많은 타입 아닙니까. 계속 저렇게 던질 수 있을까 싶지만 저렇게만 던지면 내년에는 더 괜찮아지겠어요.”

“내년에는 빨리 군대나 보내 버리려고 했는데 저 정도면 군대가 문제 아니겠어요.”

“실력을 끌어올리면 내년 올림픽도 노려 볼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 팀에 올림픽 티오 몇 명 없잖아요? 석현이랑 인환이 말고…… 아, 대성이 있나? 백찬이까지 들어가는 건 쉽진 않겠네요. 그래도 내년 초에 잘 던져 주면…….”

“올림픽까지 꿈꾸는 건 너무 앞서가는 거 같지만, 그렇게만 되면 안 먹어도 배부르겠습니다. 하하.”

6회 초.

이백찬이 마운드에 올랐다.

첫 타자부터 초구 2루타를 내주며 잠시 흔들리나 싶었지만 두 타자 연속 삼진.

황기덕마저 이백찬의 슬라이더를 정타로 때리지 못했다.

탕!

“우익수~~! 잡았습니다! 설진일 선수의 파인플레이! 설진일 선수가 추가 실점 기회를 끊어 버리면서 6회 초 고트가 무실점으로 넘어갑니다.”

“설진일 선수의 타격 때문에 묻혀서 그렇지 설진일 선수 외야 수비도 좋아요. 안정적입니다. 타격은 급한데 수비는 참 안정적으로 잘해요.”

“이백찬 선수가 잠시 주춤하나 싶었지만 이대로라면 다음 이닝까지도 노려 볼 수 있겠는데요?”

6회 말.

고트는 7, 8, 9 하위 타선의 연속 안타로 만루를 만들었다.

텍사스안타가 곁들여진 행운이었다.

스콜피언은 바로 챔피언을 빼고 불펜을 올렸다.

“여기서 챔피언 선수를 뺍니다. 오늘 투구 수에 여유가 있었는데요. 방금 전에도 운이 나쁜 거였지, 정타는 아니었구요.”

“이건후 감독이 원래 투수 교체가 빠르죠. 불펜 투수가 풍족한 게 스콜피언의 장점 아닙니까. 그리고 타순이 이지성 선수부터 시작되거든요. 상위 타순이란 말이에요. 확실하게 끊어 줄 필요가 있다는 판단으로 보입니다.”

“투수는…… 김영희 선수네요. 김영희 선수가 올라옵니다.”

“좌타자 이지성을 상대하기 위해 좌투수 김영희 선수를 올립니다. 점수 차이가 있어도 위험한 승부는 안 하겠다는 심산으로 보여요.”

“김영희 선수가 직구가 참 좋은 선수죠? 좌타자를 상대로 슬라이더도 날카롭구요. 이지성 선수가 어려운 승부를 각오해야 하겠네요.”

마운드에 김영희가 올라왔다.

이지성은 방망이를 어깨에 멘 체 김영희의 연습 투구를 지켜봤다.

팡!

팡!

미트를 두드리는 소리가 이지성의 귀를 울렸다.

“살살 좀 하시지.”

이지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타석에 들어섰다.

“고마, 살살 해 뿌라. 영희 성격 알제?”

포수 구승철의 말에 이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살 안타 하나만 치겠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선배님.”

“자가 어디 그랄 놈이가?”

팡!

-스트라이크!

이지성이 혀를 내둘렀다.

“몸 쪽 깊숙하게 들어온 직구였습니다. 150km/h가 찍히네요.”

“큰 키에서 내리꽂는 저 직구. 좌타자한테는 난공불락이죠.”

팡!

-스트라이크!

“헛스윙! 이지성 선수가 헛스윙을 하고 맙니다.”

“김영희 선수의 패턴을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어요. 저게 빠른 공을 지닌 선수의 장점인 거죠.”

이지성이 배트를 더 짧게 잡고 타석에 바짝 붙었다.

“니 그러다 맞는다.”

포수의 말에 이지성은 대꾸 대신 몸을 더 바짝 붙였다.

투수는 결정구로 슬라이더를 택했다.

탁!

배트 끝에 맞은 공이 3루 선상을 벗어났다.

다음 공은 바깥쪽 빠른 공.

탁!

또 한 번 파울.

김영희가 다시 슬라이더를 던졌다.

팡!

-볼. 아웃사이드.

“이지성 선수가 쉽게 물러서진 않네요.”

“끈질기네요. 타자라면 저렇게 해야죠. 쉽게 아웃 카운트를 내줘선 안 됩니다. 물고 늘어져야 돼요.”

김영희가 다시 한번 슬라이더를 던졌다.

-볼. 아웃사이드.

“독하다, 독해. 안 나가나?”

“공을 줘야 나가죠.”

이지성이 장갑을 고쳐 맸다.

탕!

탕!

-볼. 아웃사이드.

탕!

탕!

파울, 파울, 파울.

어느덧 김영희의 투구 수가 열세 개를 넘었다.

풀카운트.

투수가 모자를 한번 벗어 땀을 닦았다.

“고마해라. 날 새긋다.”

“볼넷이라도 주세요. 그럼 나가죠.”

“말이라고 하나. 만루에 볼넷을 줄 사람이 어딨노?”

“만루에 순순히 아웃당하는 타자는 어딨어요.”

“하이고, 니 딴 팀 갔다고 내한테 개기나?”

“선배님, 불쌍한 후배를 너무 쪼시는 거 아닙니까?”

김영희의 14구는 몸 쪽 바짝 붙는 빠른 공이었다.

-볼. 인사이드. 볼넷. 타자 1루로.

“밀어내기. 밀어내기가 나옵니다. 이지성 선수의 끈질긴 승부 끝에 밀어내기로 점수가 나옵니다. 여기서 밀어내기는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이지성 선수가 장타력을 잃은 대신 훨씬 더 끈끈해졌어요. 상대 투수에게 주눅 들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김영희가 이를 꽉 문 채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무사 만루. 안타 하나면 대량 득점이 나올 수 있는 상황입니다.”

“초구를 좋아하는 설진일 선수가 나옵니다. 투수들의 딜레마죠.”

“왜 딜레마죠?”

“초구를 좋아하는 타자니까 볼을 던져서 유인한다……. 이상적인 계산이지만 초구부터 볼로 시작하는 건 스스로 불리한 카운트로 시작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투수가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느냐, 마느냐가 피안타율에 유의미한 차이를 주거든요. 아무리 초구를 좋아하는 타자라고 해도 무조건 볼을 던질 수도 없는 게 투수의 심정입니다.”

“하지만 투수는 또 김영희 선수 아닙니까. 과감하게 승부하는 투수죠.”

“만루라서 더 재밌는 상황입니다. 공격적인 타자와 물러서지 않는 투수. 뒤에서 대기 중인 타자들은 김인환, 송석현이에요. 어쨌든 김영희 선수는 여기서 승부를 보는 게 좋습니다.”

김영희가 로진백을 집어 들었다.

설진일이 투수를 노려보며 배트를 높이 들었다 놨다.

포수가 요구한 초구는 바깥쪽 빠른 공.

김영희는 말없이 포수를 응시했다.

‘몸 쪽?’

김영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를 들어 와인드업 한 뒤 던지는 빠른 공.

탕!

“좌측 담장! 파울입니다. 파울! 좌익 선상을 벗어나는 파울이 나옵니다.”

“투수도 과감했고 타자도 과감했습니다. 그냥 배트를 돌려 버리네요.”

“두 선수 모두 전혀 물러날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김영희의 제2구도 몸 쪽 빠른 공.

설진일이 스윙했지만 공은 배트 위를 지나갔다.

-스트라이크!

“빠른 승부! 김영희 선수가 그냥 밀어붙입니다.”

“몸 쪽 높은 코스. 위험하지만 잘만 들어간다면 타자가 꼼짝도 못 할 코습니다. 위기의 순간에서 김영희 선수는 더 과감하게 승부하네요.”

벤치에 있던 송석현이 고개를 좌우로 풀었다.

“잘하면 내 차례까지 안 오겠는데?”

제3구는 바깥쪽 빠른 공.

설진일이 공을 때렸다.

탕!

“우익수! 우익수가 잡았습니다. 아웃! 3루 주자는 홈으로 들어갑니다. 설진일 선수의 희생 플라이가 나옵니다.”

“양 팀 모두 최선의 수가 나왔습니다. 고트는 병살을 피하고 득점을 얻었고, 스콜피언은 병살은 못 얻어 냈지만 아웃 카운트 하나로 3루를 비웠습니다. 2루 주자의 발이 빠르지 않거든요? 장타만 아니면 홈 승부도 가능해요. 스콜피언 입장에서는 이 정도만 해도 나쁘지 않은 결괍니다.”

김인환이 타석에 들어서자 스콜피언의 감독 이건후가 침음을 흘렸다.

“김인환한테 승부해. 송석현까지 가게 만들면 안 돼.”

“네, 감독님.”

스콜피언 벤치에서 사인이 나왔다.

승부.

김영희가 모자를 고쳐 썼다.

“오늘 장외 홈런을 친 타자죠? 김인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김인환을 외치는 이 응원 소리가 들리시나요? 고트 팬들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투수 입장에서는 정말 힘들 거 같아요. 오늘 장외 홈런을 친 김인환이냐, 아니면 짐살의 왕 송석현이냐. 다다음 타자는 리빙 레전드 유선호 선수거든요. 피해 갈 타선이 없습니다. 누구와든 승부해야 돼요.”

“투수라면 김인환 선수한테 승부를 걸어야죠.”

“이유가 있을까요?”

“김인환 선수는 우선 좌타잡니다. 그것만 해도 50%는 먹고 들어가는 거예요. 또 하나가 더 있다면 여기서 주자를 내보내 봤자 송석현, 유선호로 이어지는 타순이라 밀어내기를 하지 않는 이상 반드시 한 번은 승부해야 합니다. 주자를 채워 놓고 위험한 승부를 하는 것보다 한 명이라도 주자가 적을 때 좌타자를 상대로 김영희 선수가 승부를 거는 게 맞아요.”

김영희의 초구는 빠른 공.

김인환이 초구부터 방망이를 대차게 돌렸다.

쾅!

“우측 담장! 파울! 와, 엄청난 파울입니다!”

“거의 일직선으로 공이 날아갔어요. 방금은 담장에 맞아서 다행인 거지 펜스를 넘어갔다면 관중이 다칠 뻔했네요.”

“잠실 외야 담장을 때리는 파울. 이게 김인환 선순가요? 소름 끼칩니다. 엄청난 파워예요.”

김영희가 입술을 물어뜯었다.

김인환은 스윙을 작게, 작게 반복했다.

김영희의 두 번째 공은 슬라이더.

팡!

-볼! 아웃사이드!

포수가 공을 잡은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김인환 선수가 공을 하나 골랐습니다.”

“김인환 선수가 달라졌네요. 이런 여유가 생겼나요? 항상 쫓겨 다니던 타자가 이제는 중요한 순간에 볼을 골라냅니다. 좋은 코스였거든요.”

“1-1. 서로에게 충분히 승부할 만한 카운틉니다.”

김영희는 빠르게 승부를 결정지었다.

몸 쪽 빠른 공.

김인환도 피하지 않았다.

턱!

“1루수! 1루수 머리 위로! 공이 떨어졌습니다! 완전히 먹힌 공이 1루수와 우익수, 2루수 사이로 떨어졌습니다! 아, 하지만 2루 주자가 멈칫하다가 홈으로는 못 들어갔네요. 3루에서 멈춥니다. 이러면 다시 만루, 만루가 됩니다.”

“스콜피언이 득점은 막았지만 만루에 타자는 송석현 선수가 나옵니다. 여기서 홈런 하나만 오늘 경기는 다시 뒤집어 지는 겁니다!”

송석현의 등장에 스콜피언 벤치가 침묵했다.

투수 김영희는 모자를 벗고 흥건한 땀을 닦았다.

포수는 타석으로 걸어 들어오는 송석현을 보자 한숨을 푹 쉬었다.

“하이고, 돌아가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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