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71화 (171/201)

천재 (1)

서울 모처의 호텔.

스콜피언의 이건후 감독이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화장실을 나왔다.

틱.

리모컨을 들어 TV를 켜자 야구 하이라이트 프로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고트는 6연승이죠?

-네. 맞습니다. 이제 1위 고지까지 코앞입니다. 이번 주말 3연전마저 위닝 시리즈 이상으로 가져간다면 리그 1위도 꿈같은 얘기는 아닐 겁니다.

-고트이 상승세가 무섭습니다. 한때는 하위권 싸움을 하는 거 아니냐 걱정이 많았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올라왔어요.

-연패는 짧게 연승은 길게. 이게 고트의 현 모습입니다. 고트가 한번 연승을 시작하면 2~3연승에서 끝나지 않거든요. 5연승, 6연승을 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연승하고. 이런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다른 팀이 주춤할 때 쭉쭉 치고 올라왔습니다.

-내일은 고트와 스콜피언의 경긴데요. 스콜피언은 이번 경기가 아주 중요하겠어요.

-네. 이번 경기에서 고트와 승차가 벌어진다면 이걸 다시 따라잡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1, 2위와의 격차가 벌어지는 3위가 된다면 팀 내부적으로도 사기가 많이 떨어질 게 자명하구요.

-고트와 스콜피언의 주말 3연전은 야구팬들이 주목하는 경기가 되겠네요. 어쩌면 리그 1위가 바뀔 수도 있겠어요.

-네. 하지만 스콜피언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만약에 이번에 고트 상대로 스윕을 한다. 그러면 스콜피언도 바로 1위를 코앞에 두게 되는 거예요.

-양 팀 모두 결코 물러설 수 없는 경기가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일 양 팀에서 주목해야 할 선수 하나씩을 뽑아 준다면 누가 있을까요?

-스콜피언에선 선봉장 황기덕 선수가 되겠죠? 리그 최고의 주자이자 리드오픕니다. 반대로 고트에선 서일혁 선수를 꼽겠습니다.

-송석현 선수가 아니라 서일혁 선수를 꼽아 주셨네요? 이유가 있을까요?

-송석현 선수의 송구 능력이 이미 리그 1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제로 송석현 선수가 포수로 있을 땐 황기덕 선수도 쉽게 발을 못 놀렸는데요. 하지만 지금 포수는 서일혁 선수가 보고 있죠. 서일혁 선수도 좋은 포수지만 황기덕 선수의 발을 잡을 만큼 어깨가 좋냐, 라고 물으면 사실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황기덕 선수의 빠른 발이 내일 경기, 나아가선 이번 3연전의 키가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결국 핵심은 황기덕이에요. 데뷔 때부터 압도적 실력을 뽐낸 천재 아니겠습니까. 황기덕 선수를 막을 사람, 리그에서 몇 없을 겁니다.

이건후 감독이 TV를 껐다.

검은 화면에 이건후 감독의 모습이 비쳤다.

“천재라…….”

이건후 감독은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방을 나섰다.

편의점을 들러 돌아오던 이건후 감독이 우뚝 섰다.

휙! 휙!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

이건후 감독이 파공음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의 진원지는 호텔 주차장이었다.

“여기서 뭐 해?”

“아, 감독님.”

이건후의 목소리에 한 남자가 야구 배트를 내려놨다.

검은 스포츠웨어를 입은 남자, 황기덕이었다.

“새벽이야. 잠 안 자?”

“조금만 더 하다가 자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돌렸어?”

“얼마 안 됐습니다. 30분? 1시간?”

이건후 감독이 비닐봉지에 손을 넣더니 황기덕에게 음료수 한 캔을 던졌다.

“그거 마시고 들어가.”

“네, 알겠습니다.”

이건후 감독은 자리를 뜨기 전 몸을 돌려 황기덕에게 물었다.

“오늘 안타 못 쳤다고 달밤에 쌩난리를 친 거냐?”

“……면목이 없습니다, 감독님. 내일은 꼭 잘하겠습니다.”

“내일 경기가 걱정되면 잠을 더 자. 컨디션 조절이 프로 최우선의 덕목이야.”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후 감독은 호텔로 올라가기 전 호텔 옆 골목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피웠다.

붉은 점과 함께 회색 연기가 밤거리에 번졌다.

“천재라…….”

* * *

다음 날 아침.

송석현은 눈을 비비며 택시에 올랐다.

택시 기사는 대번 송석현을 알아보곤 악수를 청했다.

“송석현! 맞지? 내가 고트 팬이야, 팬.”

“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내가 요새 너 보는 맛에 살아. 어이구, 이뻐라.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왔을까?”

머리가 새하얀 기사는 잠실로 가는 내내 콧노래를 불렀다.

“원래부터 그렇게 야구를 잘했어?”

“저도 노력하는 거죠.”

“에이. 운동은 재능이야, 재능. 재능이 없는데 노력한다고 되나. 타고난 재능이 있으니까 되는 거지. 노력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 노력을 해도 되는 놈 있고, 없는 놈 있는 거지.”

“아…… 하하. 네.”

“부모님이 안 먹어도 배부르시겠어. 잠실의 왕 아니야, 잠실의 왕.”

잠실에 도착하자 택시 기사가 대뜸 핸드폰을 꺼냈다.

“사진 찍어 줄 수 있을까? 내가 경기를 보고 싶어도 일한다고 갈 수가 있나. 만날 라디오로만 듣다가 야구 선수 실물은 처음 봐서 말이야.”

“예, 그럼요.”

“고마워. 우리 딸내미도 요새 팬이라니까.”

송석현이 사진을 찍어 주자 택시 기사는 고맙다며 택시비를 사양했다.

송석현이 현금을 꺼내자 택시 기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 찍어 줬으면 된 거지, 무슨 돈을. 정 그러면 오늘 안타나 하나 더 쳐 달라고. 어?”

택시 기사의 쇠고집에 송석현은 결국 그냥 내리고 말았다.

멋쩍은 표정을 짓던 송석현이 떠나는 택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후.”

머리를 긁적인 송석현은 잠실 구장으로 향했다.

송석현을 알아보는 보안 요원과 프런트 직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한 뒤 라커룸에 들어갔다.

“음?”

“어? 왔어?”

“안녕하세요. 형, 벌써 온 거예요?”

“뭐, 잠도 안 오고 해서 말이야.”

라커룸에는 먼저 도착한 이가 있었다.

불펜 투수 이백찬이었다.

“왜 잠이 안 와요? 요새 전 머리를 대면 바로 딥슬립하던데.”

이백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야 피곤할 만하지. 그런데 난 좀 널널한 편이거든. 본의 아니게 웰빙 중이지.”

“아…… 형이요?”

“그래. 나는 몇 경기 안 뛰잖아. 이닝도 짧게 먹고.”

송석현이 코를 찡긋했다.

“다들 리그 후반기라고 힘들다고 하는데 나만 체력이 남아돈다니까. 오늘은 아침부터 눈이 떠져서 뒹굴뒹굴하다 온 거야.”

“그래요…….”

“너는? 넌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저는 원래 좀 일찍 와요. 와서 웨이트도 하고 스트레칭도 하고…….”

“벌써? 시간 좀 있잖아.”

“집에 있어 봐야 딴짓만 해요. 일단 웨이트 끝내 놓고 전력 분석도 해 보고 스윙도 따로 해 보고 하는 거죠. 야구장에 오면 남는 시간에 뭐라도 하게 된다니까요.”

“그러냐……. 너도 참 부지런하다. 잘하는 놈이 열심히까지 하니 누가 널 이겨 먹겠어?”

“형까지 왜 그래요? 저도 계약금 두둑하게 받았으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안 했을걸요. 하하. 형은 계약금도 억으로 받았잖아요.”

“내 계약금보다 네 내년 연봉이 더 높을걸.”

“저는 돈 많이 벌어야 돼요. 우리 집에 돈 나올 구석이 저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죽기 살기로 해야죠, 뭐. 저라고 야구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이렇게 열심히 하겠어요?”

이백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가 좋아서 열심히 한다는 것도 웃기지.”

“형은 뭐 할 거예요? 저랑 같이 운동하실래요?”

“그럴까? 막상 일찍 와도 할 게 마땅치 않았는데 잘됐네.”

두 사람은 웨이트 룸에서 함께 운동했다.

30분가량의 웨이트를 마친 후 이백찬은 송석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네. 왜요?”

“프로에 와서 연습을 하면 늘기는 늘까?”

송석현이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프로에 와서 실력이 느는 케이스가 얼마나 있나 싶어서.”

“당연히 늘겠죠, 열심히 하는데. 게다가 프로 팀 코칭을 받는 거잖아요.”

“후, 보통은 그렇겠지?”

송석현은 침울해하는 이백찬의 얼굴을 빤히 봤다.

“왜 그래요? 퀵 모션 때문에 그래요?”

“그게 문제지 뭐. 퀵 모션이 계속 안 고쳐지니까 타이트한 상황에선 내가 못 올라가잖아. 경기를 자주 못 나가니까 감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지고. 이러다 어영부영 사라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송석현이 턱을 매만졌다.

“형 퀵 모션은 별로 안 느리잖아요. 그쵸?”

“시간으로만 본다면 1.4초는 무조건 들어오지. 1.3초는 애매하고.”

“사실 그건 퀵 모션의 문제가 아니라 타이밍의 문제죠. 형 견제하는 타이밍이 두세 개 정도로 거의 일정하잖아요. 타이밍 읽기가 좀 쉬워요.”

“그러니까. 그게 문제야. 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송석현이 퀵 모션 자세를 취했다.

“봐요. 형은 여기서 바로 1루에 던지거나 아니면 6초 정도에 던져요. 아니면 10초나 11초 정도에 던지고. 그건 알고 있어요?”

“대충은 알고는 있었어. 그래서 시간 변화를 주려고 하는데 결국 타임이 비슷해지더라. 그러니까 더 환장하지.”

송석현이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그러면 방법은 두 개밖에 없죠.”

“방법이 있어? 두 개나?”

이백찬의 눈이 커졌다.

“뭔데, 그게?”

“바로 던져요. 투구 템포 신경 쓰지 말고 타자가 준비되면 바로 던져요. 그러면 주자도 뛸 타이밍 못 잡죠.”

“바로? 그러면 숨차잖아. 체력 관리도 안 되고.”

“형 타이밍이 문제잖아요? 체력은 나중 문제로 미뤄 둬요. 지금도 체력 남아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거야…… 그렇지…….”

“숨이 좀 차도 1, 2이닝은 문제없을걸요.”

“그러려나.”

이백찬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다른 하나는? 두 개라며?”

“다른 하나는…….”

* * *

경기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자 잠실 구장은 내야는 물론 외야까지 팬들로 가득 했다.

양 팀 팬들은 걸개와 깃발을 들고 응원가를 불렀다.

“오늘도 잠실이 매진이라고 합니다. 요새 잠실은 툭하면 매진인 거 같아요.”

“고트의 인기를 대변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시즌 고트의 성적은 기대를 걸어 볼 만하죠. 매번 포스트시즌 턱걸이만 하던 팀이 아닙니다. 리그 최고의 클린업을 가진 팀이에요. 성적도 좋고 홈런도 빵빵 터지고 유선호 같은 베테랑과 송석현 선수 같은 프랜차이즈 스타까지 있으니 인기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있겠어요?”

“이번 주말 3연전 결과에 따라 리그 1위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경기예요. 전국의 야구팬들이 주목하는 경기가 될 겁니다. 그럼 양 팀의 라인업을 살펴보겠습니다.”

-플레이볼!

경기 시작과 함께 마운드에는 제임스 멕킨지가 올라왔다.

“스콜피언의 1번 타자는 말할 것도 없는 선수죠. 황기덕 선수가 들어섭니다.”

“제임스 멕킨지 선수는 내추럴 싱커, 커터, 체인지업을 던지는 조금 특이한 선숩니다. 기본적으로 공을 던지면 투심이나 싱커처럼 간다는데 본인은 이걸 자신의 무기로 만들어 냈죠. 여기에 커터를 섞어서 땅볼을 잘 이끌어 내는 선숩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황기덕 선수가 투수의 키를 훌쩍 넘기는 안타를 뽑아냅니다. 초구를 잘 노렸네요.”

“바깥쪽 싱커로 보이는데 초구부터 과감했네요.”

이건후 감독이 짧은 박수를 보냈다.

어제 주차장에서 본 황기덕의 스윙은 짧았으나 날카로운 어퍼 스윙이었다.

“천재긴 천재야.”

이건후 감독이 살짝 미소를 짓자 이를 본 코치들이 쑥덕였다.

“웬일이래, 생전 무표정하던 양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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