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 김정률
“내리자, 내려.”
폭스 감독의 지시에 투수코치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오늘 백 투 백 투 백을 맞은 투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터벅거리며 벤치로 향하는 길.
깊게 눌러쓴 모자 챙 아래로 누군가의 손이 보였다.
“햄요, 고생했습니다.”
정하균이 고개를 들었다.
“뭔데?”
정하균은 손을 내민 사람의 얼굴을 보곤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손을 내민 이는 정정국이었다.
“이란 날도 있는 거 아인교.”
“미안타. 아, 이런 날 니한테 승 하나 따 줘야 카는데.”
“됐습니다. 뭐, 오늘 공 잘 던진 거 하나로 만족합니다, 저는. 것보다 지는 햄이 걱정입니다. 햄은 올해가 FA인데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하하.”
“참 나. 그러게 말이다.”
정하균과 정정국이 나란히 앉았다.
마운드에는 다음 투수가 올라와 몸을 풀었다.
“고트가 느무 세다. 안 그러나?”
정정국이 혀를 내둘렀다.
“오늘 운이 좋아서 이만치 던진 기지 아이고, 자들 상대할 땐 가슴이 쿵쾅쿵쾅한다니까요.”
“던질 데가 없다, 던질 데가. 내 참. 니 볼 면목이 없다.”
“됐습니다. 그래도 아직 한 점 찹니다. 우리 팀도 빠따는 어디 가서 안 꿀린다 아입니까. 또 역전하면 됩니다.”
뒤에서 손목을 풀던 최재국이 말했다.
“부담스럽네, 부담스러워. 다음 이닝 내가 들어간다고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니가 함 쌔리 삐라. 니도 힘은 어디 가서 안 꿀린다 아이가.”
“힘만 세다고 홈런을 때릴 거면 역도 선수를 데려다 놓지 뭐 하러 야구 선수를 데려다 놓겠냐?”
“고트 불펜은 뭐, 솔직한 말로 그냥 그런 거 아이가?”
“요새 고트 불펜이 좋아. 뭘 그냥 그래?”
“이름만 번지르르하지 쟤들 할 만한 거 다 안다.”
“지 일 아니라고.”
“야, 지금 눈앞에서 승리가 날아갔는데 뭐가 내 일이 아인데? 내 승리는 날아갔어도 팀 승리는 지켜 내고 싶은 거 니 모리나?”
“알았다, 알았어. 내가 한번 노려서 쳐 볼게. 사람 면박 주기는.”
정하균이 말을 보탰다.
“니가 역전을 시켜 줘야 내 역적질도 묻힌다. 오늘 이대로 지 뿌면 당분간 서면 시내 못 다니는 거 알제?”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노력은요.”
유선호의 홈런 이후 고트는 추가 득점을 내지 못했다.
9회 말 폭스의 공격.
폭스의 선두 타자는 2번 타자 2루수 김형남.
김형남이 나오자 폭스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응원가를 불렀다.
“폭스! 김형남! 안타, 안타, 안타!”
응원단장의 지휘 아래 폭스 팬들이 입을 모았다.
사직 구장에 응원가가 울려 퍼지자 고트 선수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우, 귀 아파.”
“대단하다, 진짜.”
마운드의 투수는 정홍민이었다.
“들리십니까, 야구 팬 여러분. 오늘 사직의 응원 소리가 이렇게 대단합니다.”
“이게 부산 팬의 매력이죠. 뜨거워요. 8개 구단 팬 중에 가장 뜨거운 팬을 꼽으라면 단연코 부산 폭스를 안 꼽을 수가 없습니다.”
“참, 여러 의미로 뜨거운 팬들입니다.”
“안 좋을 땐 쓴소리도 화끈하게 하지만 응원할 땐 내일이 지구 멸망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렬하게 하지 않습니까? 이게 매력이죠. 이 매력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듭니다.”
투수와 포수의 사인 교환이 길어졌다.
정홍민이 검지로 공을 휙휙 돌리다 한순간에 그립을 잡았다.
김형남은 다리를 넓게 벌리고 투수의 공을 기다렸다.
팡!
-스트라이크!
“타자가 고개를 흔듭니다. 이걸 놓치네요.”
“완전히 한복판의 직구였습니다.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려라. 야구계의 오래된 격언입니다. 그만큼 투수는 영점을 맞추는 게 쉽지 않거든요. 정홍민 선수가 저런 실투를 잘하지 않는 선수거든요. 폭스 입장에서는 천금 같은 기회가 지나간 겁니다.”
송석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몸을 앞으로 기울인 송석현이 중얼거렸다.
“고개가 들리는데…….”
정홍민의 2구, 3구는 볼.
제4구는 떨어지는 슬라이더였다.
부웅!
-스트라이크!
“헛스윙! 정홍민 선수의 명불허전 명품 슬라이더로 헛스윙을 이끌어 냅니다.”
“저 종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가 일품이죠? 좌타자, 우타자 가리지 않고 참 좋은 공입니다. 특히 좌타자한테는 마구나 다름없다고 하네요. 정홍민 선수의 투구 폼 때문에 타이밍 잡기도 어려운데 공도 잘 안 보이고 떨어지는 각도 좋아서 좌타자들은 그냥 감으로 휘두른다고 합니다.”
“2-2. 김형남 선수가 이제 신중해야 합니다. 공 하나면 아웃이에요.”
정홍민이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올린 후 몸을 뒤로 기울였다.
시소처럼 다시 앞으로 기울더니 공이 팽, 하고 날아갔다.
탕!
“쳤습니다! 좌익수! 좌익수 유선호~~~ 잡았습니다! 워닝 트랙에서 잡는 유선호 선수. 멀리 날아간 공이었는데 저걸 유선호 선수가 잡아내네요.”
“방금은 실투였죠? 높게 들어간 직구를 김형남 선수가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선호 선수가 수비를 거의 담장 앞에서 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짧게 맞았다면 2루타 코스였는데 너무 잘 맞아서 아웃이 돼 버렸어요.”
“출루가 간절한 폭스 입장에선 하늘이 원망스럽겠네요. 이럴 때 운도 안 따릅니다.”
송석현이 팔짱을 꼈다.
정홍민은 자신의 손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 타자는 김경심 선숩니다.”
“공수 밸런스가 참 좋은 타자죠? 수비 견실하고 공격도 뒤떨어지지 않는 선숩니다. 1루수를 보고 있지만 2루수, 3루수도 볼 수 있는 그야말로 만능 재주꾼이죠.”
정홍민의 초구는 떨어지는 슬라이더.
타자가 헛스윙을 하며 타석에서 벗어났다.
“정홍민 선수의 슬라이더, 대단합니다. 타자가 완전히 속았어요.”
“높은 각도에서 찍어 누르는 직구와 종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의 조합. 알아도 막을 수가 없어요. 누군가는 공의 회전을 보고 직구와 슬라이더를 알아차린다고 하는데 정홍민 선수의 공은 골라 낼 여유가 없습니다.”
정홍민이 손을 풀었다.
제2구는 빠른 공.
‘퍽’ 소리와 함께 타자가 이를 꽉 물었다.
“아, 공이 빠졌나요. 몸에 맞는 볼이 나옵니다.”
“김경심 선수의 표정이 밝네요. 어쨌든 출루를 하게 됐습니다.”
“김경심 선수가 나가면서 1사 주자 1루가 만들어집니다. 하필 다음 타자는 4번 타자 최재국 선수거든요.”
“정홍민과 최재국의 대결입니다. 1점 차 상황. 홈런 하나면 끝내기가 됩니다.”
송석현은 고개를 돌려 감독과 투수코치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그라운드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바꿀 사람이 없구나.”
송석현이 입맛을 다셨다.
고트가 6선발로 나서면서 불펜 투수 자리도 하나가 비었다.
필승조라고 하면 김정률, 정홍민, 고진석 셋.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홍대성 정도.
네 투수와 다른 불펜 투수들의 수준 차이는 명확했다.
믿을 투수가 적으니 불펜 운영이 빡빡하다.
필승조 투수 중 한 명이 부진하다고 다른 선수를 넣는다면 다음 경기의 대안이 막막해진다.
“공이 풀리는데…… 하.”
송석현이 보는 정홍민의 오늘 컨디션 날씨는 흐림이다.
정홍민은 다시 한번 손을 풀었다.
포수 서일혁도 사인을 내는 데 주저했다.
공이 자꾸 위로 간다.
공에 힘을 제대로 싣지 못한다는 얘기다.
“최재국과 정홍민, 정홍민과 최재국. 오늘 가장 중요한 장면이 될 수 있습니다.”
정홍민이 초구를 선택했다.
바깥쪽 빠른 공.
최재국이 공 하나를 지켜봤다.
-볼. 아웃사이드.
“초구는 볼입니다.”
“투수와 타자 모두 신중하죠?”
“최재국 선수도 지금은 굉장히 침착하게 공을 보고 있습니다.”
정홍민이 다음 공을 골랐다.
슬라이더.
정홍민은 공을 던지는 순간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공이 빠지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입니다! 최재국 선수가 아까워서 어쩔 줄 몰라 하네요.”
“방금은 그냥 실투였어요. 높은 쪽으로 가는 실투. 저 공을 놓치나요?”
“최재국 선수가 낮은 쪽 슬라이더를 신경 쓴 거 같습니다.”
“정홍민 선수도 자꾸 실투가 나오네요. 아무래도 더 잘 던지려는 욕심 때문인가요?”
함성훈 감독이 투수코치를 봤다.
투수코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바꿀까요?”
“……흠, 정률이로 가죠. 정률이 몸 풀 시간 필요하니까 마운드에서 시간 끌고 볼넷 주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함성훈이 뒷짐을 진 채 고개를 흔들었다.
“아끼고 싶다고 아껴지지 않네. 후.”
벤치의 사인이 나오자 서일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일혁은 일부러 사인을 늦게 내고 볼을 유도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최재국의 볼넷.
1사 주자 1, 2루였다.
“마운드가 바뀝니다. 고트에서 오늘 큰 결단을 내리네요. 김정률 선수가 올라옵니다.”
“고트는 불펜 투수에게도 긴 이닝을 맡기기로 유명한데 이번에는 빠르게 판단했습니다. 역시 이게 맞죠. 정홍민 선수의 컨디션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거든요. 이렇게 역전한 경기를 지게 되면 선수단 사기에도 큰 영향이 갑니다. 이길 수 있을 땐 이겨야 돼요.”
“고트의 수호신으로 변모한 김정률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섰습니다. 우완 에이스의 계보를 잇던 투수가 언더 투수가 됐는데, 심지어 리그 톱급의 불펜 투수가 됐습니다.”
“김정률 선수가 본 투 비 천재라지만 몇 달 만에 언더 핸드 투수로 정점에 선다는 건 좀체 보기 드문 일이죠.”
“불같은 강속구는 없어졌지만 기가 막힌 싱커로 쏠쏠한 활약을 하고 있죠?”
“저 싱커야말로 병살 제조깁니다, 병살 제조기. 고트가 최재국 선수를 거른 것도 병살을 얻어 낼 자신이 있어서가 아닌가 추측합니다.”
김정률이 연습 투구를 마친 후 고개를 까닥였다.
“타석에는 오충진 선수가 올라옵니다. 한 방이 있는 선수죠.”
“하지만 병살도 자주 치는 선숩니다.”
“병살 유도에 능한 투수와 병살에 약한 타자의 대결이네요.”
“오충진 선수의 그립을 보세요. 배트를 짧게 쥐었죠?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스윙 궤적은 어퍼로 치려고 할 겁니다.”
김정률이 초구를 던졌다.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공.
오충진이 스윙했다.
팡!
-스트라이크!
“헛스윙! 커브에 오충진 선수가 헛스윙합니다.”
“방금은 완전 속았죠. 저 솟구치는 커브. 저 공도 싱커 못지않은 마굽니다. 타자들에게 물어보니까 전혀 타이밍을 모르겠다고 하네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변화구가 어디 뭐 그리 흔하겠습니까?”
“초구부터 제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는 김정률 선숩니다.”
송석현은 그제야 벤치에 허리를 댔다.
최고 컨디션의 김정률?
볼 것도 없다.
팡!
-스트라이크!
팡!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삼진입니다! 병살로 갈 것도 없이 삼진!”
“오충진 선수가 생각이 너무 많았어요. 어차피 싱커 들어올 거 다 아는 거 아닙니까? 병살이 두렵다고 안 친다면 투수만 좋죠.”
“다음 타자는 장성구 선숩니다. 이 선수도 장타력이 있습니다.”
“장성구 선수, 이제 병살은 없어요. 자신 있게 쳐야 합니다. 커브든 싱커든 공 하나 노려서 치는 게 좋아요. 다 치려고 하면 안 돼요.”
김정률의 초구는 싱커.
장성구는 배트를 내지 않고 지켜봤다.
-스트라이크!
장성구가 심판에게 낮지 않냐고 어필했다.
“본인의 눈에는 많이 낮았다고 판단했나 봅니다.”
“김정률 선수의 공이 홈플레이트에 와서는 갑자기 떨어지거든요. 타자가 보기엔 너무 낮다고 판단할 수 있어요.”
제2구는 싱커, 제3구도 싱커, 제4구는 체인지업.
부웅!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삼진입니다! 김정률 선수가 오늘 경기를 기어코 막아 내네요. 김정률 선수가 세이브를 올립니다.”
“이렇게 되면 폭스는 6연패, 고트는 6연승입니다. 폭스는 오늘 8회까지 이기다가 결국 1이닝을 못 버티고 무너져 버렸네요.”
“무서운 기세의 고틉니다. 페가수스 팬들은 잠도 편히 못 자겠는데요? 지금 고트의 기세를 보아하니 당장 내일 1위가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