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쾅!
“떴습니다! 높이 떴어요! 가운데 담장! 가운데 담장! 가운데 담장! 아! 못 넘어가네요. 중견수 글러브에 공이 들어갔습니다.”
“김인환 선수가 크게 한 방을 노렸지만 하필 가장 먼 곳인 가운데 담장으로 공이 날아갔어요. 조금만 더 사이드로 치우쳤다면 홈런이 됐을 타군데 말이죠.”
“김인환 선수가 고개를 떨어뜨리네요. 정말 아쉬웠습니다.”
김인환은 한숨을 푹푹 쉬며 벤치로 들어섰다.
서일혁은 김인환을 보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아쉬웠다, 잘 쳤는데.”
“아, 한 끗인데. 타이밍이 늦어 버렸어요.”
“진짜 야황이 될 찬스였는데. 아쉽네.”
“아, 형.”
선수들이 키득거렸다.
타석에는 송석현이 들어섰다.
송석현이 들어서자 고트 팬들이 입을 모아 응원가를 외쳤다.
“오오, 고트의 송석현. 팔방미인 송석현. 장외 홈런 송석현. 날! 려! 버! 려!”
“날! 려! 버! 려!”
정정국은 혀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포수의 사인은 초구부터 유인구.
만루를 채우고 유선호와 승부하겠다는 작전이었다.
정정국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
포수가 입술을 모았다.
정정국와 포수의 사인 교환이 길어졌다.
“타임.”
송석현이 타석에서 물러서 숨을 골랐다.
폭스의 감독 김영식은 사인을 냈다.
‘승부.’
사인을 받은 작전코치가 멈칫하다 포수에게 사인을 전달했다.
포수도 망설이다 투수에게 사인을 전했다.
투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송석현 선수가 다시 타석에 들어섭니다. 폭스 배터리의 사인 교환이 길어지네요.”
“아무래도 상대가 송석현 선수잖습니까? 어쩔 수 없죠. 신중하게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팡!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정정국 선수가 과감하게 공 하나를 찌릅니다.”
“이건…… 의왼데요? 저는 당연히 루를 채우고 만루 작전으로 갈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저런 공을 던진다는 건…… 역시 실투일 확률이 높을까요?”
송석현이 배트를 한번 휘둘렀다.
포수는 숨을 고르며 다음 공을 선택했다.
‘커브.’
투수의 공은 존 아래로 빠지는 커브.
송석현은 공을 골라냈다.
“어렵다, 어려워.”
투수가 혀를 내둘렀다.
“송석현 선수가 유인구에 속질 않네요.”
“저게 송석현 선수의 특징이죠. 선구안이 좋아서 웬만한 유인구에는 속아 넘어가질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켜만 보지도 않아요. 때로는 확연한 볼도 노려서 칠 때가 있거든요.”
“그렇죠. 송석현 선수의 그랜드슬램을 보면 스트라이크보단 볼을 노려서 칠 때가 있었죠.”
“투수들은 송석현 선수를 상대할 때 머리가 아플 겁니다. 선구안이 좋은 것만으로도 투수에게는 곤혹스러운데 볼도 노려서 홈런을 칩니다. 유인구같이 적당히 빼는 공을 던지기 어렵다는 뜻이에요. 그럼 송석현 선수를 상대로는 공을 확실히 빼는 식으로 유인구를 던져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볼과 스트라이크 구분이 더 쉬워지는 결과를 낳아서 투수에겐 악순환이나 다름없습니다.”
포수의 생각이 길어졌다.
투수가 로진백을 툭툭 털면서 송석현을 바라봤다.
타석에 선 송석현의 눈은 무심하다.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투수는 포수의 사인을 기다렸다.
고민 끝에 내린 포수의 선택은 포심 패스트볼.
바깥쪽에 꽉 차는 빠른 공이었다.
탕!
“우측 담장! 파울이네요. 공이 많이 휘어져서 나갑니다.”
“지금 공은 오늘 경기에서 가장 빠른 공이 나왔네요. 153km/h입니다.”
“이렇게 되면 1-2. 투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여기서 유인구 하나 나오겠죠?”
정정국이 손을 풀었다.
포수의 사인은 체인지업.
투수는 고개를 저었다.
“제4구!”
팡!
-볼. 인사이드.
“여기서 직구 하나를 더 찌르네요.”
“몸 쪽에 과감한 승부였네요. 정정국 선수가 송석현 선수와의 승부를 피하지 않습니다.”
고트 벤치에서도 사인이 나왔다.
강하영이 슬쩍 2루 쪽으로 한 발 움직였다.
정정국의 제5구.
탕!
“파울! 이번에도 가장 빠른 공이 나옵니다. 154km/h! 계속 오늘 최고 구속을 갱신하는 정정국 선숩니다.”
“이런 승부 재밌네요. 좋아요. 화끈합니다.”
폭스 벤치에서 투수코치가 감독에게 조용히 묻는다.
“감독님, 괜찮겠습니까?”
“이랄 때 크는 기다, 이랄 때. 투수는 지든 이기든 승부를 걸어야 경험치를 먹는 거 아이가. 봐라. 정국이 점마 공 더 좋아하지는 거 안 비나?”
정정국의 제6구는 포심 패스트볼.
바깥쪽에 살짝 빠진 공이었다.
팡!
-볼. 아웃사이드.
송석현이 숨을 골랐다.
정정국이 미간을 좁혔다.
“박하다, 박해. 우리 석현이 스윙이 너무 박해.”
포수 박진환이 농담을 했지만, 송석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풀카운트 승부가 나옵니다. 이렇게 되면 만루 작전으로 갈 수도 있겠어요.”
“만루로 가야죠. 지금 승부하는 건 어렵다고 봅니다.”
포수가 커브 사인을 냈다.
아래로 빠지는 유인구 사인.
정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고른 정정국이 공을 던졌다.
공은 앞으로 쭉 뻗어 나가다 아래로 훅 빠지기 시작했다.
탕!
송석현은 그대로 공을 밀어 우중간으로 보냈다.
“우익수! 우익수가 달립니다! 우익수 임상준이…… 나이스 캐치! 잡았어요! 저걸 잡습니다! 완전히 빠졌다고 봤는데 저걸 잡았습니다. 임상준 선수의 파인플레이가 나오네요.”
“임상준 선수가 수비가 그렇게 좋은 선수가 아닌데 저 공을 저렇게 잡아내네요.”
“임상준 선수의 호수비로 고트의 득점 찬스가 무산됩니다.”
“송석현 선수가 이번에도 떨어지는 공을 잘 노려서 쳤는데 수비에 막혔네요. 이건 어쩔 수 없죠.”
송석현이 입맛을 다시며 벤치로 돌아갔다.
정정국은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허허 웃었다.
다음 타자 유선호의 땅볼로 이닝 종료.
정정국은 벤치 입구에 서서 우익수 임상준을 맞았다.
“형! 뭐야?”
“뭐?”
“갑자기 슈퍼맨이 됐어.”
“오늘 우리가 승리 따 준다니까.”
정정국이 크게 웃었다.
“무조건 장타 코스여서 개쫄렸는데.”
“나도 어떻게 잡은 건지 모르겠다.”
“송석현 무섭긴, 무섭네. 그걸 치네. 그걸 쳐.”
양 팀은 8회까지 추가 실점이 없었다.
폭스의 김영식 감독은 9회 정정국을 내리고 새로운 마무리 정하균을 올렸다.
“첫 타자로 강하영 선수가 나옵니다. 오늘 강하영 선수 활약이 나쁘지 않죠?”
“경기를 뛰면서 적응하는 스타일 같아요. 오늘 활약은 괜찮습니다.”
“정하균 선수는 스플리터를 결정구를 쓰는 선숩니다. 최근 다섯 경기 방어율이 1.87. 굉장히 좋아요.”
“이번 타순이 강하영, 김인환, 송석현으로 이어지는 만큼 주자를 내보내면 안 됩니다. 홈런 한 방을 각오하더라도 빠르게 승부해야 돼요.”
정하균은 빠른 공 두 개로 스트라이크 두 개를 잡고 시작했다.
유인구로 던진 스플리터는 볼.
다시 던진 스플리터도 볼.
다섯 번째로 던진 빠른 공은 파울.
카운터는 2-2.
정하균이 다시 스플리터를 던졌다.
강하영의 배트가 돌다가 멈췄다.
“저걸 참아 내네요. 강하영 선수의 초인적인 인내심!”
“방금 공은 누가 봐도 삼진 코스였는데 저걸 참아 냅니다.”
“이러면 스플리터를 또 던지기 부담스럽죠?”
투수는 하이 패스트볼로 헛스윙을 유도했지만 강하영은 배트를 내지 않았다.
“볼넷. 볼넷입니다. 강하영 선수가 볼넷을 얻어서 1루로 걸어갑니다.”
“강하영 선수의 선구안은 역시 좋네요. 괜히 고트의 외야에서 오랫동안 버텨 온 게 아닙니다.”
김인환이 타석에 들어섰다.
포수와 투수가 신중하게 초구를 골랐다.
이들의 선택은 바깥쪽 스플리터.
김인환이 헛스윙했다.
“정하균 선수의 스플리터가 춤을 춥니다!”
“명품 스플리터네요. 아주 날카롭습니다.”
제2구는 바깥쪽 빠른 공.
김인환의 배트가 벼락같이 돌았다.
쾅!
“아!”
“아…….”
공은 직선을 그리며 우측 담장을 넘었다.
포물선 하나 없는 다이렉트 홈런.
사직의 폭스 팬들이 얼어붙었다.
“홈런! 김인환이 투런 포로 폭스의 뒤를 바짝 뒤쫓습니다! 3-2. 드디어 추가 득점이 나오네요.”
“정하균 선수의 공도 나쁘지 않았는데 김인환 선수의 노림수가 너무 좋았습니다. 정하균 선수가 초구 스플리터를 보여 준 터라 타자가 바깥쪽 빠른 공 대처에 늦을 거라 생각하고 공을 던진 거 같은데 김인환 선수는 망설임이 없었어요.”
“이렇게 되면 9회 초, 3-2. 1점 찹니다. 1점만 나면 바로 동점이에요.”
“타석에는 송석현 선수가 들어옵니다. 1점 차 승부에 송석현. 이거 쉽지 않죠.”
김인환은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벤치로 돌아왔다.
야황, 이라는 외침도 이번만은 상관없었다.
“김인환 선수에게 홈런. 정하균의 선구가 더 신중해지겠네요.”
“송석현 선수가 떨어지는 공을 참 잘 치지 않습니까? 퍼 올리는 스윙이 기가 막힌단 말이죠. 스플리터를 던지는 정하균 선수에겐 좋은 궁합의 타자는 아니에요.”
포수가 사인을 고르고 또 골랐다.
다음 타자는 오늘 부진한 유선호.
볼넷을 내주고 병살 유도도 나쁘지 않다.
‘어렵게, 어렵게.’
벤치의 사인은 어려운 승부.
볼넷을 염두에 두고 속으면 좋지만, 안 속아도 상관없는 전략이었다.
포수는 스플리터 사인을 내려다 멈칫했다.
송석현이다.
떨어지는 공에 강한 송석현이라면 초구에 떨어지는 공을 노리지 않을까?
투수의 결정구가 스플리터다.
“포수, 속행하지.”
“네, 죄송합니다.”
심판이 포수에게 주의를 줬다.
텀이 너무 길었다.
박진환이 고민 끝에 초구를 결정했다.
“후.”
투수가 숨을 한번 고르곤 힘껏 공을 던졌다.
투수가 선택한 공은 하이 패스트볼.
탕!
송석현의 스윙은 부드러웠다.
“좌측 담장! 홈런! 홈런입니다! 송석현이 9회에 솔로포를 터뜨리며 동점을 만듭니다!”
“방금 공은 높이가 너무 어중간했죠? 거의 한복판이었습니다. 실툰가요?”
“김인환에 이어 송석현까지 다이렉트 직격타로 사직 담장을 넘깁니다. 오늘 고트는 8이닝 무실점 빈타로 허덕이다가 9회에 클린업이 홈런 두 개로 3득점을 만들어 냅니다.”
“정하균 선수가 올해 FA인데, 이런 모습은…… 아쉽네요.”
“이러면 오늘 정정국 선수의 승리가 무산됐죠?”
“이게 야굽니다. 끝날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게 야구예요.”
폭스 선수들이 말하는 대신 정정국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렸다.
정정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외쳤다.
“자 자! 여기서 막고 9회에 역전 가자!”
다음 타자는 유선호.
폭스 투수코치와 감독이 머리를 맞댔다.
“바꿀까요?”
“아니, 가자. 오늘 쟤 별로잖아요.”
“알겠습니다.”
폭스 마운드에는 정하균이 그대로 서 있었다.
“폭스는 정하균 선수를 내리지 않습니다. 믿는다는 의미겠죠?”
“폭스에 정하균 선수보다 좋은 불펜 투수는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 이유는 오늘 유선호 선수가 부진하다는 걸 겁니다. 이미 동점이 된 이상 10회, 11회도 각오해야 하거든요. 유선호 선수 이후론 하위 타선이니만큼 정하균 선수로 최대한 긴 이닝을 막는 게 효율적이죠. 그리고 좌투수와 좌타자 아닙니까? 바꿀 이유가 하등 없어요.”
정하균은 로진백을 매만졌다.
백 투 백 홈런.
투수의 치욕.
정하균은 초구부터 몸 쪽에 빠른 공을 붙였다.
좌투수가 좌타자에게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은 몸 쪽 빠른 공이다.
탕!
유선호가 한복판으로 몰린 공을 놓치지 않았다.
“백 투 백 투 백! 유선호가 우측 담장을 넘겨 버립니다! 오늘의 부진을 홈런 하나로 씻어 버리는 유선호! 고트가! 9회! 백 투 백 투 백으로! 역전합니다! 이게 베테랑의 품격인가요? 결국 한 건 해내고야 마는 유선홉니다!”
“대단하네요. 고트, 정말 대단합니다. 이게 고트의 클린업이에요. 한번 터지면 막을 수가 없습니다. 송석현과 꼬마들의 시절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훌륭한 클린업입니다.”
“정하균 선수가 고개를 숙입니다. 한 투수가 한 이닝에 홈런 세 개를 허용하는 진기록이 나왔죠. 아마 KPBL의 신기록이 될 거 같은데요.”
“오늘 정하균 선수의 실투가 나오는 족족 홈런이 됐어요. 실투가 장타로 연결되는 경우가 있지만 오늘 정하균 선수가 운도 안 좋았습니다.”
“4-3. 4-3입니다. 고트가 기이어 사직에서 부산 팬들을 펑펑 울리고 떠나고 마는 걸까요? 아, 폭스에선 마운드를 교체합니다. 어쩔 수 없죠?”
“어쩔 수 없죠. 홈런 세 방은 어쩔 수 없어요.”
유선호가 선수 하나하나와 주먹을 맞댔다.
“똥 싼 거 이제 좀 치운 거 맞나?”
유선호의 농담에 선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