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68화 (168/201)

쉬운 경기는 없다

“아, 안 풀리네. 오늘 와 이리 꼬이노.”

“후. 빡시다, 빡셔.”

“오늘 왜 이러지?”

4회 초.

전광판의 점수는 3-0.

고트 선수들은 단 한 점도 내지 못했다.

“정정국 선수, 오늘 의외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4회까지 무실점은 기대 이상의 모습이에요.”

“오늘 의외로 제구가 잘되고 있어요. 중요한 순간마다 기가 막히게 보더 라인을 타고 공이 들어갔거든요. 운이라고 해도 이 정도 공이 들어온다면 타자들은 쉽게 칠 수 없죠.”

“고트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목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정정국 선수가 이렇게 잘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제구만 된다면 정정국 선수는 에이스급으로도 발돋움할 수 있는 선숩니다. 오늘 같은 모습만 보여 준다면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겁니다.”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삼진이 나오면서 공수 교대. 정정국 선수가 4회까지 무실점으로 고트를 막아 냅니다.”

공수 교대를 위해 고트 선수들이 벤치를 나왔다.

벤치에 남게 된 송석현은 팔짱을 낀 채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너무 말리는데…….”

피시는 4회 말도 무실점으로 막아 내며 5회로 넘겼다.

5회 초 고트는 7번 타자부터 타석에 들어섰지만 세 타자 연속 범타 처리를 당했다.

“…….”

함성훈 감독이 두 눈을 감았다.

코치들도 연신 한숨을 쉬었다.

투수코치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피시가 잘해 주고 있으니 후반에는 역전할 수 있을 겁니다.”

5회 말.

폭스의 공격은 9번 타자 포수 박진환의 차례였다.

피시는 9번 타자에게 빠른 공 두 개로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후 체인지업으로 결정구를 던졌다.

툭.

“타자가 친 공 유격수에게 흐릅니다. 유격수가…… 어? 이걸 놓치네요? 글러브 뒤로 흐르는 공. 박진환 선수는 그대로 1루에 안착합니다.”

“방금은 바운드가 돼야 하는데 바운드가 제대로 튀지 않고 그대로 흘렀습니다. 불규칙 바운드죠?”

“여기서 아쉬운 수비가 나오면서 무사 주자 1루가 됩니다.”

피시는 미간을 좁혔다.

유격수 정백선이 투수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정백선 선수처럼 수비가 좋은 선수도 이런 실수를 하네요.”

“정백선 선수가 내야 멀티 플레이어로서 팀의 소금 같은 존재긴 하지만 아무래도 유격수라는 자리가 요구하는 기대치가 높잖습니까. 어쩔 수 없는 공이었지만 투수 입장에선 생각이 많아지죠. 주전 유격수 정영수 선수였다면 잡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함성훈 감독이 폭스전을 치르면서 주전과 백업 로테이션을 많이 시키고 있는데 그게 수비 불안으로 이어지는 거 같네요.”

“어쩔 수 없죠. 야구는 주전 아홉 명으로만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거든요.”

무사 주자 1루.

주자는 발이 느린 포수.

피시는 초구, 2구를 바깥쪽 빠른 공으로 윽박질렀다.

-볼. 아웃사이드.

-볼. 아웃사이드.

연속 두 개의 볼에 피시는 뒤를 돌아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좋은 공 두 개가 들어갔지만 아슬아슬하게 볼이 나옵니다.”

“투수 입장에서는 참 아쉽죠. 스트라이크를 줘도 무방한 공이거든요.”

피시는 다음 공은 스트라이크존 한가운데로 던졌다.

-스트라이크!

다시 바깥쪽에 체인지업.

TV의 스트라이크존에는 확연히 들어오는 스트라이크였다.

-볼. 아웃사이드.

피시가 발로 마운드를 확 찼다.

“아, 피시 선수가……. 좀 침착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저런 행동은 주심의 눈에 좋게 보일 수가 없죠. 아쉬운 건 아쉬운 거지만 흥분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습니다.”

함성훈이 투수코치에게 눈짓했다.

투수코치가 통역사와 함께 마운드로 올라갔다.

“FUCK! 심판이 병신 같잖아!”

피시는 통역사가 올라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

“심판 눈이 맛이 갔어! 저건 우리 할머니가 봐도 스트라이크라고!”

“맞아. 저 심판 거지같아.”

투수코치 연우식의 대꾸에 피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딴 꼴을 봐야 되는 거야?”

“그럼 심판 대가리에 공 하나 던질까? 어때? 일혁아, 너 피시가 공 던지면 잡지 마라. 오케이?”

서일혁의 눈동자가 코치와 피시를 번갈아 훑었다.

진의를 알아보려는 행동이었다.

“……정말요?”

통역사의 말을 들은 피시가 갑자기 입을 닫았다.

“저 심판 대가리에 공을 던져서 대기심으로 바꿔 버리자고. 괜찮지? 피시, 아 유 오케이?”

피시가 물었다.

“진짜?”

“그래, 던져. 포수한테는 바깥쪽에 빠져 앉아 있으라고 할 테니까 공이 빠진 거로 하자고. 증거도 없는데 어떻게 할 거야?”

“……후우.”

“일혁아, 잘 들었지? 내려가서 준비해라. 피시, 이번 타자 볼넷으로 내보내고 다음 타석에 바로 심판 얼굴 보고 정확하게 던져 버려. 지금 바로 던지면 티 나잖아. 알았지?”

연우식이 마운드에서 내려가려 하자 피시가 연우식의 어깨를 잡았다.

“워워, 진짜야? 진짜로 하자고?”

“와이 낫? 열 받으면 부숴 버려야지. 심판이 지랄하면 그라운드에서 철수하자고. 어차피 우리 5연승이나 했는데 1경기 내주는 게 뭐 어때. 9회까지 뛰는 것보다 체력 아끼고 몰수패당하는 게 훨씬 낫지.”

“…….”

피시가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몰수패도 경험인데 뭐 어때. 일단 볼넷 하나 주고 바로 하자고. 오케이?”

“잠깐, 잠깐, 잠깐만. 몰수패?”

“그 정도는 각오하고 던져야지.”

“진심이지?”

“슈어. 와이 낫?”

피시가 고개를 저었다.

“왓 더…….”

“심판 대가리. 오케이?”

“알겠으니까 일단 내려가, 코치.”

연우식은 그대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서일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연우식을 쳐다봤다.

연우식은 서일혁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서일혁은 고개를 한번 끄덕하곤 피시에게 말했다.

“유 캔 두 잇.”

서일혁까지 마운드를 내려갔다.

피시는 모자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미친놈들이 너무 많아.”

연우식이 벤치로 돌아오자 함성훈이 연우식을 불렀다.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렇게 오래 걸렸어요?”

“꼬우면 심판 대가리 맞히라고 했습니다.”

“……으음?”

곁에 있던 코치들도 술렁였다.

“무슨 말이야?”

“일을 왜 키워?”

연우식은 키득거렸다.

“어차피 사고 칠 놈이면 사고 칠 테니까 멍석 깔아 주는 거고 사고 안 칠 놈이면 그냥 흘려듣겠죠.”

피시의 선택은 삼진이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피시 선수의 빠른 공에 배트가 따라가지 못합니다.”

“150km/h 이상의 빠른 공이 제구까지 된다. 힘들죠. 힘들어요. 그게 피시구요.”

5회 초, 피시는 무실점으로 3-0 점수를 유지했다.

투수코치 연우식은 피시에게 다가가 인상을 구겼다.

“왜 안 던진 거야? 오늘 술이나 먹고 쉬려 했더니만.”

피시는 말없이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서일혁은 연우식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진짜 던졌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안 던져. 저런 애들은 절대 안 던지지.”

“왜요?”

“양놈들이 다혈질처럼 보여도 얼마나 셈이 빠른데. 자본주의 나라 아니냐, 자본주의. 몰수패 이력이 떡하니 남아 봐. 자기가 다혈질이라 메이저고 아시아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다 아는데 몰수패 이력까지 있으면 자기 몸값이 폭락할 게 뻔한 거 아니겠냐?”

서일혁이 혀를 내둘렀다.

“그걸 다 생각해서 하신 말씀이세요?”

“용병 하루 이틀이냐. 성질부리는 놈들도 유형이 다 달라. 그냥 성질이 더러운 놈은 나도 답 없어. 피시처럼 승부욕이 강한 케이스는 살살 구슬리면 그래도 다룰 수는 있어.”

클리닝 타임.

유선호가 타자들을 따로 불러 모았다.

“오늘 내가 사고 쳐서 미안하긴 한데, 우리 전반적으로 쪼까 풀려 있는 게 알제?”

“네.”

“타격 템포가 너무 빨라. 투수는 빨리빨리 끝내고 싶어 한다고. 타자는 반대로 천천히 느긋하게 가야 돼. 공 마이 보자. 알았제?”

“네.”

“아, 그래도 찬스가 오면 초구부터라도 휘둘러야 돼. 치기 애매한 공을 넘기라는 거지 무조건 카운트 채우라는 거 아이다. 무슨 말인지 다 알제?”

“네!”

맞은편 폭스 벤치.

정정국이 화장실을 간 사이 포수 박진환이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 정국이 승리 하나 챙겨 줘야지. 안 그래?”

“네.”

“정국이 긁히는 날이 시즌에 몇 번이나 있겠어?”

선수들이 웃었다.

“정국이 저놈 소심하고 내성적인 거 다들 알잖아. 자신감만 있으면 크게 일 낼 놈인데 자신감이 없네, 자신감이.”

“오늘 고트한테 확실하게 갚아 주자. 쟤들도 백업 나왔는데 우리가 질 수 없잖아.”

박진환이 손짓으로 선수들을 더 가까이 불러 모았다.

“사직에서 6연패는 아니잖아. 안 그래?”

“네!”

“자, 손.”

선수들이 손을 내밀었다.

“폭스!”

“아자!”

6회 초.

고트의 첫 타자는 강범재였다.

“고트는 오늘 선수단을 그대로 밀고 나갑니다. 주전 선수들을 안 올리네요.”

“아직 점수 차이가 크게 안 나기도 하고, 내일부터 있을 스콜피언전 대비를 위해서 휴식을 더 주는 거 같습니다.”

“강범재 선수가 오늘은 활약이 없습니다.”

정정국이 초구로 바깥쪽 빠른 공을 택했다.

정정국이 공을 던지려는 순간 강범재가 손을 올려 배트의 가운데를 잡았다.

“기습 번틉니다!”

폭스 야수들이 앞으로 달려 나왔다.

정정국이 던진 공은 그대로 존으로 향했고, 강범재는 번트를 댔다.

3루 방향으로 튕겨 나간 공.

강범재는 그대로 1루로 달렸다.

“투수, 공을 잡습니다! 바로 1루로! 1루에서! 세입! 세입입니다! 강범재의 발이 기습 번트를 성공시켰네요.”

“저게 세입이 되나요? 투수가 무난하게 공을 잡아서 아웃 타이밍이라고 봤는데 강범재 선수가 정말 발이 빠르긴 빠르네요.”

“강범재 선수가 이렇게 활로를 뚫나요? 빠른 발이 참 매력적인 선수네요.”

정정국은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무사 주자 1루, 발 빠른 주자.

“투수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 2루가 비어 있는 상황에서 발 빠른 주자가 1루에 들어설 땝니다. 도루에도 신경 써야 하고 병살도 어렵고 안타 하나면 3루, 조금만 크게 맞으면 점수까지 줄 수 있거든요. 솔직히 투수 입장에선 아예 눈에 안 보이게 주자 2루가 더 마음이 편합니다.”

“강범재 선수가 무사 주자 1루를 만들면서 고트가 좋은 기회를 잡았습니다.”

“다음 타자는 강하영 선숩니다. 설진일 선수의 등장으로 백업으로 밀렸죠. 하지만 고트의 외야 옵션 중에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선숩니다. 특히나 선구안이 좋아요.”

정정국은 초구로 바깥쪽 빠른 공을 택했다.

탕.

“투수 머리 위를 지나간 공! 안타! 안탑니다! 중견수가 잡았지만 강범재 선수는 3루까지 들어갑니다! 강범재 선수의 발이 정말 빨랐네요.”

“방금은 너무 정직했어요. 정정국 선수가 주자를 신경 써서 바깥쪽 빠른 공을 던졌거든요? 보통 발 빠른 주자가 나가면 바깥쪽 빠른 공으로 포수가 송구하기 좋은 상황을 만들긴 하지만 그만큼 투구 패턴이 단순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정정국 선수가 오늘 제구가 좋았다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공은 솔직히 몰린 공이었습니다.”

“고트도 만만치 않네요. 주전을 빼고 나선 이유가 있습니다.”

“고트가 폭스전에서 백업 선수들을 대거 기용했지만 클린업만큼은 건들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점수를 내겠다는 얘기거든요.”

“타석에는 헐크 김인환 선수가 들어섭니다.”

김인환이 타석에 들어서자 고트 벤치에서 선수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야황! 야황! 야황! 야황!”

“야황 파이팅!”

김인환의 관자놀이에 핏줄 하나가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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