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우리를 막을 수 없다 (4)
김인환의 홈런이 그날 마지막 점수였다.
양 팀 모두 추가 득점 없이 경기를 끝냈다.
이날의 MVP는 단연코 정진오였다.
“이런 식으로도 리빌딩이 되긴 되네요.”
투수코치의 말이었다.
“내년에 천운이나 진오가 불펜으로 가면 더 좋은 팀이 될 겁니다. 내후년에는 수술한 애들도 재활을 끝내고 돌아올 테니 더 강해질 테고요.”
“생각만 해도 흐뭇합니다.”
“우리 2군이 그동안 비아냥을 너무 많이 받았어요. 1군에서 기회를 주지 않는데 2군 선수들이 어떻게 올라오겠어요? 제가 수코일 때 더 과감하게 2군을 올리자고 주장했어야 했는데……. 제 탓도 큽니다.”
“그거야 전임 감독님 스타일도 스타일이지만 우리 팀 성향이 또 그러니까. 코치님이 밀어붙였어도 통하긴 어려웠을 겁니다.”
“이제부터라도 바뀌어야죠. 프랜차이즈 스타 없이 강팀이 될 순 없거든요.”
그때 배터리코치가 두 사람 사이에 쑥 끼어들었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
“아, 그냥 별 얘기 안 했습니다.”
“오늘 아쉽지 않습니까, 페가수스가 졌으면 경기 수 줄이기 딱이었는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꼭 이렇다니까요. 거의 다 잡았다, 잡았다 싶으면 마지막 한 끗이 안 줄어요.”
“내일 경기까지 이기면 또 모르죠.”
“그렇겠죠? 폭스한테 5연승……. 아주 달달하네요, 달달해. 하하.”
* * *
폭스전 5연승.
언론에선 벌써 한국시리즈 예상 대결로 페가수스 vs 고트를 꼽았다.
역대 최고의 센터 라인 페가수스 vs 역대 최강의 클린업 고트.
수요일 저녁, SBC 스포츠 베이스볼 위드에선 오늘의 경기를 리뷰했다.
“고트가 고트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최희동 해설 위원의 말에 아나운서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고트가 고트했다. 그건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롭니다. 올 시즌 고트의 특징이라고 하면 기셉니다. 한번 연승을 하기 시작하면 무섭게 연승을 하고, 연패를 하기 시작하면 또 무섭게 연패를 합니다. 고트가 기세를 타기 시작하면 거침없단 얘기예요.”
“하필 폭스가 고트의 상승세 때 맞붙었네요.”
“고트의 장점이라고 하면 역시 KSY 클린업으로 대표되는 폭발력입니다. 송석현 선수가 없이도 3연승을 했는데 송석현 선수가 돌아왔으니 더 무서워지는 건 자명한 사실이죠.”
“그러면 내일 경기는 어떻게 보시나요?”
“내일도 한 6 : 4 정도로 고트의 우세승을 보고 있습니다.”
“6 : 4요? 폭스에게도 가능성이 높다고 보시는군요.”
“고트는 폭발력이 장점지만 동시에 안정성이라는 단점을 안고 있기도 해요. 1, 2군과의 갭이 가장 큰 팀이 고틉니다. 함성훈 감독이 연승에 힘입어 주전들에게 휴식을 부여하고 백업 선수들을 주로 기용하는데, 이게 언제 도화선이 될지 몰라요.”
“하지만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고트의 2군은 언제나 2군 리그 최강자 중 하나로 뽑히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1, 2군 갭이 크다고 하는 걸까요?”
“분명 고트의 2군은 강합니다. 강합니다만, 문제는 1군 경험이 적은 선수들이 태반이라는 겁니다. 다른 팀은 1군에서 부진한 선수들이 2군으로 내려오고, 2군에서 잘하는 선수들이 1군으로 올라갑니다. 이 말은 2군 선수단은 약해지고 1군 선수단은 강해진단 얘기죠. 고트는 그동안 반대였어요. 1군에서 뛰는 선수들은 특별한 부상이 아니라면 계속 1군에서 뛰었고 2군 선수들은 계속 2군에서 뛰다 보니 본의 아니게 2군 전력이 쭉 보전됐습니다. 2군에서 아무리 잘해도 1군 경험치와 2군 경험치는 다르거든요. 뒤늦게야 고트가 2군 선수들을 올려 보곤 있지만 오랫동안 묵혀 온 적체라 해결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군요. 백업 선수들의 경험치가 문제가 될 거란 말씀이시죠?”
“네. 공격도 공격이지만 결국 수비에서 탈이 날 거라고 봅니다. 사실 5연승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번 5연승 동안 고트에서 나온 에러만 네 갭니다. 위험했던 장면도 여러 개구요.”
“내일은 푹 쉬었던 주전 선수들을 올리지 않을까요? 폭스 5연전 동안 주전 선수들이 많이 쉬었잖아요.”
“글쎄요. 제가 감독이라면 내일 경기에서 지더라도 내일까진 휴식을 줄 겁니다.”
“왜죠?”
“주말 3연전의 상대는 스콜피언이거든요. 스콜피언이 3위로 밀려있지만 언제 또 치고 올라갈지 몰라요. 서로 맞붙었을 때 승차를 벌려 놔야 고트도 한숨을 돌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려면 역시 스콜피언전에는 최강의 전력을 꺼내야 하는 게 맞구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경기 선발을 살펴볼까요?”
* * *
폭스와의 주중 3연전 마지막 경기.
사직 구장 곳곳에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팀 말아먹는 상백이는 나가라!]
[무능한 김영식은 사퇴하라!]
[마!]
진행 요원들은 현수막을 펄럭이는 팬들을 추격했고, 팬들은 도망치거나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며 싸웠다.
주변의 다른 팬들도 한목소리로 거들거나 거친 욕을 쏟아 내니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사직엔 전운이 감돌았다.
“쯧쯧. 또 저래, 또.”
“우리보다 더하지, 쟤들은.”
“폭스 팬들도 불쌍하다. 폭스는 피닉스보다 더 의지가 없냐.”
“피닉스는 못하는 거고, 폭스는 지랄맞은 거지.”
3루석의 고트 팬들은 한바탕 난리가 난 사직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경기는 시작됐다.
방송국 카메라에 간헐적으로 폭스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담기면서 캐스터와 해설 위원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1회 초. 고트의 공격은 무득점으로 돌아갑니다.”
“정정국 선수의 빠른 공이 존에만 들어간다면 쉽게 공략하기 어렵죠.”
“한때 160km/h를 던지면서 폭스의 특급 선발로 낙점됐지만 제구가 발목을 잡고 말았어요. 그래서 제구를 잡는다고 구속을 늦췄지만 제구는 원하는 대로 잡히지 않고 구속만 낮아졌습니다. 그래도 낮춘 구속이 150km/h라 타자들이 경기 초반부터 공략하긴 쉽지 않아요.”
1회를 마친 정정국이 벤치로 돌아가 앉았다.
포수 박진환이 정정국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좋아. 오늘 공 좋은데?”
“후, 마지막에 인환이한테 들어간 몸 쪽 공 덕에 삼진이 나온 거지 그거 몰렸으면 대형 사고 났을걸요.”
“그래도 공 잘 들어갔잖아.”
“하, 미치겠네. 대체 제구를 어떻게 잡아야 하지?”
“그건 경기 끝나고 생각해. 지금은 오로지 힘, 힘으로 밀어붙여. 네 공은 가운데로 와도 못 친다니까?”
“다음 타자가 송석현인데요?”
“음…….”
박진환이 팔짱을 꼈다.
“송석현은 볼넷으로 내보내야지. 그게 정석이야.”
“…….”
1회 말 폭스의 공격.
마운드에는 피시가 올라왔다.
피시는 두 타자 연속으로 삼진을 잡아낸 후 세 번째 타자에겐 좌익수 플라이를 허용했다.
“유선호 선수, 가볍게 손을 들어서…… 어! 놓쳤어요! 공을 놓쳤네요!”
“아, 너무 쉬운 공이었는데 아쉽네요. 저런 건 잡아 줬어야죠.”
“공이 라이트에 들어간 걸까요?”
“글쎄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저런 공을 놓친 건 너무 아쉽습니다.”
유선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관중석으로 돌렸다.
벤치로 돌아가려던 피시가 하늘을 보며 무어라 욕설을 내뱉었다.
2사 주자 1루.
타석에는 4번 타자 최재국이 들어섰다.
“피시 선수가 침착해야 합니다. 2사거든요? 타자 하나만 잡으면 아웃입니다. 흥분하면 안 됩니다.”
서일혁이 초구 커브를 요구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유인구.
피시가 공을 던졌으나 공은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탕!
“좌측 담장! 좌측 담장! 좌측 담장!!!! 넘어갑니다! 최재국의 투런 포. 시작부터 투런 포로 기선 제압을 시도하는 폭습니다.”
“방금은 최재국 선수가 제대로 노려서 쳤습니다. 타이밍이 완벽했어요.”
“이렇게 되면 유선호 선수의 실책이 뼈아프게 됐네요. 에러가 바로 2실점으로 연결됩니다.”
“야구는 멘탈 스포츱니다. 에러를 단순하게 보면 안 돼요. 에러 하나가 악순환의 시작인 경우가 많거든요.”
“오늘 고트의 출발은 좋지 못합니다.”
투런 포 이후 피시는 볼넷 하나, 안타 두 개를 내주면서 3-0으로 1회를 마쳤다.
“1회 말 피시의 투구 수는 스물여섯 개. 1회부터 많은 공을 던졌습니다.”
“피시 선수가 독보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성격이 다혈질인 게 흠입니다. 한 번 흥분하기 시작하면 가라앉히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오늘 고트와 포스전은 기존 다섯 경기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네요.”
2회 초.
마운드에는 정정국.
선두 타자는 송석현.
정정국은 송석현을 보며 로진백을 들었다.
“후, 네가 최고라는 거지?”
포수 박진환이 초구부터 커브 사인을 냈다.
땅으로 떨어지는 유인구.
피해 가자는 사인이었다.
팡!
-볼. 로우.
송석현은 꼼짝하지 않았다.
포수에게 공을 건네받은 정정국이 한숨을 쉬었다.
“너도 내가 피해 가는 걸 안다는 거냐?”
제2구도 커브, 제3구는 체인지업, 제4구는 체인지업.
“볼넷. 볼넷입니다. 송석현 선수가 1루로 향합니다.”
“정정국 선수가 대놓고 피해 갔어요. 사실 저건 어쩔 수 없죠. 오늘 정정국 선수의 제구가 썩 좋지 못하거든요. 송석현 선수에게 정면 승부를 하다 장타를 맞는다……. 원래라면 주자가 없을 때 승부하는 게 맞지만 웬만하면 피해 가고 싶은 게 투수의 마음일 겁니다.”
정정국이 눈으로 송석현을 살폈다.
1루의 송석현은 리드를 짧게 잡고 서 있었다.
그러나 정정국이 공을 던지려는 순간 리드를 넓혔다.
팡!
-볼. 로우.
“초구, 또 커브를 던집니다.”
“커브가 나쁜 선수는 아니지만 커브를 많이 보여 주네요. 커브는 빠른 공과 조합됐을 때 좋은 공이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빠른 공이 너무 안 나오고 있어요.”
송석현이 다시 리드를 좁혔다.
정정국은 로진백을 집어 들었다.
‘포심. 아웃사이드.’
포수의 사인에 따라 정정국이 빠른 공을 던졌다.
포수는 사인의 반대로 오는 공에 화들짝 놀라 미트를 옮겼다.
탁!
“유격수! 유격수가 잡고 2루로! 2루수는 1루로! 병살! 6-4-3병살이 나옵니다!”
“여기서 병살이 나오네요. 유선호 선수가 공을 쳤지만 공이 좋았어요. 자로 잰 듯한 몸 쪽 공이었습니다.”
“에러에 이어 병살까지. 오늘 유선호 선수의 수난 시댑니다.”
“이러면 흐름이 완전히 끊겨 버리네요.”
유선호의 병살 이후 삼진.
정정국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선호가 벤치로 돌아오자 피시는 유선호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쩝.”
함성훈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
“세금을 미룰 순 있어도 피할 순 없네요.”
수비코치가 헛기침했다.
“흠흠. 죄송합니다, 감독님.”
“아닙니다, 안 코치님. 각오하고 쓰는 건데요. 세금 낼 건 내야죠.”
“선호가 수비가 나쁜 건 아닌데 꼭 쉬운 걸 하나씩 놓치더라구요.”
“아무래도 내년에는 인환이가 외야 수비를 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인환이 외야 수비도 해 보지 않았나요?”
“해 봤죠. 많이는 안 해 봤는데 운동신경이 좋아서 그런가 나쁘지 않아요.”
2회 말.
피시는 두 타자 연속 볼넷을 내주며 위기를 자초했지만 병살 하나와 삼진을 엮어 내며 이닝을 마무리했다.
함성훈 감독은 투수코치를 불러 물었다.
“오늘 불펜 컨디션, 누가 괜찮죠?”
“오늘은 다 나쁘지 않습니다.”
“롱으로 뛸 수 있는 친구는?”
“진환이나 김진석 정도면 무난하죠.”
“오늘은 경기가 쉽게 안 풀릴 거 같아요. 롱 두 명 다 올려야 할 수 있습니다.”
“퀵 후크도 염두에 두시는 겁니까?”
“이왕이면 이길 수 있을 때 이겨야죠. 필승조 넷은 남겨 두고 나머지는 전부 다 투입할 수 있게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연승은 기세다.
기세란 쉽게 꺾이지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오늘까지 연승한 후 스콜피언전까지 위닝시리즈 이상을 노린다.
“스콜피언까지 잡아내면 1위가 코앞인데…….”
1위는 어렵다고 봤지만, 1위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욕심이 났다.
상대 투수는 정정국.
평균 방어율이 5~6점을 오가는 투수다.
오늘이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