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66화 (166/201)

웬만하면 우리를 막을 수 없다 (3)

자정이 넘긴 시간.

송석현과 김인환은 바다가 보이는 카페로 가 마주했다.

“밤바다 좋다.”

“이 시간에도 사람 많네요, 여긴.”

“여름 바다잖아. 당연하지.”

“아쉽네요. 우리는 여름휴가가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김인환이 커피를 홀짝였다.

“바다 보니까 어때? 기분이 좀 풀려?”

“풀리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요. 그냥 기분이 묘했어요, 갑자기 우리 팀이 강팀이 된 거 같아서.”

“네가 없는데도 잘해서 심통 났냐?”

송석현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심통은 아니고…… 음…… 그냥 앞으로 나도 좀 쉬엄쉬엄해도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쉬엄쉬엄? 대충 하겠다?”

“에이, 그런 건 아니구요.”

“그럼 뭔데?”

“음…….”

송석현은 한참 말을 아꼈다.

“우리 팀이 내가 없으면 힘들다, 이런 생각은 해 본 적 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더 열심히 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해 왔고. 그런데 막상 내가 빠져도 우리 팀이 잘 돌아가니까 내가 그동안 너무 욕심부린 거 아닌가 싶어요.”

“그건 무슨 말이야, 대체?”

“일혁 선배님이 포수를 봐도 잘하잖아요. 내가 없어도 형도 있고 선호 선배님도 있고. 특히 일혁 선배는 올해 FA 받으려면 경기 일수가 중요한데 이제 경기도 많이 안 남았고……. 내가 너무 욕심내는 거 아닌가 싶어서 그래요.”

김인환이 크게 웃었다.

“아주 배부른 소리를 하네, 이놈이. 무슨 헛소리야, 그게? 프로는 무조건 열심히 잘해야지. 배려는 그렇게 하는 거 아냐. 아무리 친해도 경쟁은 경쟁이야. 그런 식으로 플레이하면 팀은 망하는 거야, 인마.”

“……그래요?”

“그럼. 실력이 없으면 물러나야지. 너도 나이 먹으면 물러나기 싫어도 물러나게 돼 있어. 부상 숨기고 억지로 뛰는 게 아니라면 네가 최선을 다해 버티는 게 팀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음.”

김인환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일혁 선배랑 좀 친해졌다고 안쓰럽게 보는 거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솔직히 나 때문에 FA 일수 밀린다고 생각하면 미안하긴 하죠…… 1년 차이로 FA 금액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건데. 일혁 선배 열심히 하고 실력도 있고 팀 스피릿도 좋잖아요. 일혁 선배 같은 사람이 팀에는 꼭 필요하긴 해요.”

“나도 가끔 까먹는데 역시 애는 애네. 순진해. 착한 것도 좋지만 프로는 실력만 프로가 아니라 마인드도 프로여야지. 하기야 아직은 순수할 때지. 네가 우리 팀이 개판 됐을 때를 몰라서 그래. 트레이드하면 친하게 지내던 형, 동생이 사라지질 않나, 감독이 바뀔 때마다 파벌이 갈리고 싸우질 않나. 이름만 팀이지 솔직히 개판이었어.”

“고트 소문이야 알고 있었지만 심했나 보네요.”

“그래. 너무 감정이입하면 다쳐. 친한 건 친한 거고 팀은 팀이야. 그러니까 넌 너 갈 길 가. 나도 너처럼 순진하던 때가 있어서 더 잘 알아. 마음 너무 많이 주면 다친다. 누구나 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해. 특히 우리 같은 프로는 더.”

“알겠어요. 조언 고마워요, 형.”

“이럴 때보면 스무 살은 스무 살이야. 세상 물정을 나보다 더 모른다니까.”

두 사람은 커피 한 잔을 다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 바닷바람을 쐬기 위해 해변을 걷는데 저 멀리 익숙한 인형(人形)이 보였다.

가장 먼저 발견한 건 김인환이었다.

“야, 저기.”

“어……?”

“맞지?”

“맞는 거 같아요.”

“우리가 피해 줘야겠다.”

“그러게요.”

두 사람은 해변가 산책을 그만두고 숙소로 돌아왔다.

김인환은 먼저 씻은 후 침대에 누워선 뒹굴거렸다.

“아, 부럽다.”

“알면서 뭐 부러워요.”

“부럽지. 선호 선배님까지 러브 러브 하고 계신데 안 부럽겠냐?”

“근데 그 옆의 여자는 누굴까요? 창훈 선배가 소개시켜 준다던 사람인가.”

“몰라. 모르지…… 푸우우.”

김인환은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다들 연애하는데 나만 왜 이러나 몰라. 아, 설마 너도 하는 거 아니지?”

송곳 같은 질문에 송석현이 버벅이자 김인환은 벌떡 일어섰다.

“야! 너도?”

“아, 아뇨. 아닌데요.”

“아냐. 한 박자 늦었어. 뭐, 있구만. 그치?”

“아니, 그게…….”

“야 야, 누군데? 솔직히 말해. 누구야? 저번에 봤던 네 친구? 나영이?”

송석현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떻게 알아요, 그걸?”

“맞아? 와! 와! 와!”

김인환이 베개를 들고선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와, 네가 제일 나빠. 네가 제일 나쁜 놈이야.”

“왜요……. 제가 뭘…….”

“됐다, 됐어. 아오, 빌어먹을 세상. 다 엿 먹으라고 해. 아, 짜증 나.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아니 형도 인기 많으면서 뭘 참. 형한테 연락 오는 사람들 많잖아요.”

“됐어. 됐다고. 나 잔다. 불 꺼라.”

“……알았어요.”

송석현이 불을 끄고 누웠다.

눕자마자 잠이 솔솔 오는 찰나 진동이 울렸다.

“부럽다, 부럽다. 새벽에 문자 할 사람도 있고.”

“이거 스팸인데요.”

“됐어. 그냥 해. 누가 그런 거 가지고 뭐라고 할까 봐?”

“진짜예요.”

“후, 알았다.”

김인환은 한참을 구시렁거리다 잠에 들었다.

밤이 지나고 아침 해가 뜨자 송석현이 몸을 뒤척였다.

정오 전에는 일어나 준비를 마쳐야 한다.

송석현이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는 찰나 김인환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대체 괜찮은 여자는 어떻게 만나는 거야?”

“깜짝아! 아, 형.”

“나는…… 하.”

김인환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 이상한 메시지만 오고 괜찮은 여자는 연락이 없어.”

“네? 이상한 메시지요?”

“하.”

김인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꾸만 나한테 자재.”

“네?”

“웬 누나, 아줌마가 자꾸만 이상한 메시지 보낸다니까. 자기 몸을 찍어서 보낸 사람도 있어.”

“에에? 뭐야. 진짜요?”

“그래. 미치겠다니까. 왜 난 이런 여자들만 꼬이냐고오오!”

“그, 글쎄요. 제가 뭐 알 수 있는 나이는 아니라서. 정률 선배한테 상담을 하시는 게…….”

“정률이 형은 백 프로 나 놀릴 건데 어떻게 말하냐?”

“저도 이런 문제는 젬병이라…….”

그때였다.

어디선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오, 김인환. 역시 밤의 황제답네.”

익숙한 목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형이…… 뭐예요?”

문 앞에는 김정률이 있었다.

“김인환이. 그러니까 내가 문단속 잘하라고 했잖아. 아침 먹고 왔다고 꼭 티를 내더라. 이 층에 우리밖에 없다고 해도 문단속은 기본 아니냐?”

“아, 아…….”

김인환이 말을 어버버했다.

“우리 인환이가 역시 인기가 많아. 밤의 황제라는 소문이 뜬소문이 아니었어.”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저 그런 놈 절대 아니거든요.”

“하긴, 우리 인환이가 누님들이 좋아할 강쇠 스타일이지. 어깨 넓지, 목 두껍지, 허벅지 두껍지, 힘 좋지. 아우, 그냥 누님들이 환장할 스타일이야. 그래서, 사진의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되십니까?”

“아, 형.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생긴 것만 순박하지 이거 영 음란한 놈이라니까. 음란마귀 김인환. 그동안 혼자 그런 거 보느라 좋았어요?”

“아니…… 하! 저는 그냥 순수하게 연애를 하고 싶은 건데 자꾸 이상한 사진을 보낸다니까요. 저는 절대 일절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여태 음란하게 놀고선 무슨. 하여간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그동안 재미 좀 보셨겠네?”

“아니에요, 진짜.”

김인환이 울 거 같은 표정을 짓자 그제야 김정률은 놀리는 걸 멈췄다.

송석현은 삐진 김인환을 달래기 위해 다른 얘기를 꺼냈다.

“형, 그러면 형이 먼저 대시를 해요.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 형이 먼저 메시지를 보내면 되잖아요.”

“……내가?”

“네. 형 정도면 인지도도 있겠다 인기도 많겠다 걱정할 것도 없을 텐데 뭘 그렇게 사려요?”

“내가 먼저 해도 될까……?”

“왜 안 돼요?”

“여태 한 번 해 봤는데 아예 대답도 못 듣고 까였거든.”

“그게 언젠데요?”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그때랑 지금은 형 위상이 다른데 한번 대시해 봐야죠. 이렇게 우는 소리 해 봤자 여자들이 형 알아줘요? 형이 확 대시해야죠.”

“……또 차이면? 그럼 소문날 거 아냐, 나 또 차였다고.”

“그게 무서우면 대시하면 안 되죠.”

“……나는 나 좋다는 여자 없는 건가.”

김정률이 키득거렸다.

“얀마, 남자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맛이 있어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골라 가려고 그러냐? 아, 잠깐. 너 누구한테 대시했는데?”

“한가연이요.”

“한가연?”

“한가연이요?”

송석현과 김정률은 서로 고개를 저었다.

“천하의 한가연을 노려? 미친놈이네.”

“형, 꿈이 너무 큰 거 아니에요?”

“딱 내 스타일이거든. 아담하고 귀엽고.”

“걔한테 고백하다 까인 애들만 백은 되겠다. 으이구, 눈은 높아 가지곤.”

김인환이 송석현과 김정률을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후, 그냥 군대 갔다 와서 맞선 보고 결혼하는 게 빠르겠어요.”

“궁상맞게 굴지 말고 빨리 준비해서 나와! 갑자기 여자 타령이야, 여자 타령은.”

* * *

소문은 바람보다 빨랐다.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김인환의 ‘밤의 황제’라는 별명은 주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퍼졌다.

오로지 본인만 모르는 본인의 별명이었다.

폭스와의 주중 2차전은 예상외의 박빙이었다.

정진오가 6이닝 2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를 끊어 줬지만 폭스의 에이스 신규원도 만만찮았다.

7이닝 3실점으로 에이스의 역할을 마치고 내려갔다.

“3-2. 오늘 경기는 참 치열하네요.”

“그렇습니다. 신규원 선수의 호투는 예상 범위였지만 정진오 선수가 이렇게 잘해 줄지는 몰랐습니다.”

“고트는 올해 정말 되는 팀의 전형인 거 같습니다. 정천운, 정진오 두 명의 선발투수가 갑자기 이렇게 1군에서 두각을 나타내 줄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동안 고트가 2군의 최첨단 시설에 비해 육성이 부족하다고 비난을 많이 받아 왔는데 올 시즌은 전혀 다릅니다. 송석현, 정천운, 정진오. 무려 세 명의 신인이 1군에서 큰 활약을 해 주고 있습니다.”

“타석에는 김인환 선수가 나옵니다. 오늘 출루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은 슬럼프인 거 같아요.”

폭스의 투수는 전병섭.

직구와 슬라이더를 던지는 우완 투수였다.

폭스의 포수 박진환이 초구부터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팡!

-스트라이크!

“김인환 선수, 크게 돌리지만 헛스윙. 오늘 김인환 선수의 스윙이 크네요.”

“욕심이 많은 건가요? 원래 스윙이 시원시원하지만 저렇게 무턱대고 돌리는 건 좀 아닌 거 같습니다.”

제2구도 슬라이더 헛스윙.

포수는 제3구도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볼. 아웃사이드.

김인환이 배트가 나오다 말았다.

포수가 입맛을 다셨다.

‘슬라이더.’

다시 한번 슬라이더를 요구했으나 볼.

2-2였다.

이번에도 김인환의 몸이 움찔했다.

‘슬라이더.’

또 슬라이더.

이번에는 투수가 고개를 저었다.

-포심. 아웃사이드.

바깥쪽 공 하나 보여 주고 슬라이더로 엮을 생각으로 빠른 공을 요구했다.

투수가 공을 던졌고 타자는 배트를 휘둘렀다.

스트라이크존보다 조금 빠진 공.

배트 끝에 맞은 공이 허공에 떴다.

“우익수! 우익수! 우익수! 넘어갔습니다! 넘어갔어요! 홈런! 홈런입니다! 달아나는 솔로포를 터뜨리는 김인환 선수!”

“방금은 그냥 잡히는 줄 알았는데 사직에서 저런 공이 넘어가네요. 대단합니다, 김인환 선수. 엄청난 힘이에요.”

“바람이 불었던 걸까요? 무난한 플라이로 보였던 공이 담장을 넘기면서 고트가 달아나는 점수를 추가합니다. 점수는 4-2, 4-2입니다.”

김인환이 홈런을 치고 돌아오자 선수들이 모두 기립해 박수를 보냈다.

“역시.”

“역시.”

“역시.”

뒷말을 붙이지 않는 ‘역시’.

김인환은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뭐가 역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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