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4)
“타박상이 끝인 거지? 뼈나 다른 데는 문제없는 거 맞지? 그래그래. 알았어. 알았어, 자세한 건 내일 얘기하지. 고생했어. 바로 집으로 가. 그래. 들어가.”
함성훈 감독이 전화를 끊었다.
“후우, 다행이다. 다행이야.”
자기도 모르게 웃어 버린다.
노히트노런.
대기록이 나왔다.
자신이 세운 기록은 아니지만, 자신이 감독일 때 나온 기록이다.
송석현의 부상으로 가슴이 철렁했지만 단순 타박상.
손목이 아니라 팔뚝 부근이라 통증은 심하겠지만 큰 부상은 아니다.
퍼펙트는 아니지만, 송석현이 안 다쳤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도 충분히 넘칠 만큼 좋지 아니한가.
“큰 선물 하나는 받았네.”
함성훈은 감독실 의자에 몸을 깊게 묻고 웃고 또 웃었다.
* * *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맞다니까…….”
“봐 봐. 이렇게 부었는데?”
“괜찮아. 원래 야구공에 맞으면 이런, 아! 아파, 아파! 그렇게 만지면 아프지!”
“미안…….”
자정을 넘긴 시간.
송석현과 김나영이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김나영은 송석현의 팔뚝을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눈을 떼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거렸다.
“진짜 아프겠다…….”
“원래 야구 선수들은 이 정도는 다 달고 살아.”
“진짜? 이렇게 야구공 자국이 선명한데?”
“빨라야 한 달이야. 이 정도 멍이면 한 달은 가.”
“와…… 이거 너무 아플 거 같아.”
“괜찮아. 그래도 다행이지. 슬라이더가 더 꺾였으니 망정이지 덜 꺾였으면 손목에 제대로 맞을 뻔했어. 어휴, 공이 얼마나 살벌하게 오던지.”
김나영이 입술을 쭈삣거렸다.
“포수는 진짜 너무 힘든 포지션 같아.”
“안 힘든 포지션이 어딨어? 다 힘들지.”
“하루에도 수백 번은 앉았다가 일어서잖아.”
“에이, 그 정도는 아니다.”
“포수 말고 다른 거 하면 안 돼? 지명타자 하면 되잖아.”
“벌써 지명타자 할 나이는 아니지……. 그리고 지명타자는 포지션이 없을 때 가는 자리야. 나는 주전 포수라고, 주전 포수.”
“……그래도 싫다. 만날 이렇게 다치는 거 진짜 싫어.”
송석현이 김나영의 볼을 두 손으로 잡았다.
“난 좋다.”
“뭐가 좋아?”
“네가 이렇게 걱정해 줘서. 네가 매일 이렇게 걱정해 주는데 이거 다치는 게 대수야?”
“난 싫어, 너 다치는 거.”
“귀엽기는.”
송석현이 김나영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야아, 누가 보면 어쩌려고.”
“좋을 때라고 생각하겠지.”
“너도 참…….”
가로등 주황 불빛이 김나영의 볼을 감쌌다.
“내가 미안해. 맨날 걱정만 시키고.”
“뭐가…….”
“데이트도 제대로 못 하고 너 볼 낯이 없다.”
“뭐래. 이게 데이트지. 데이트가 뭐 따로 있나?”
“원래는 내일 좋은 데 가야 하는데 팔이 이래서…….”
“괜찮아. 내일은 그냥 집에서 쉬어. 다친 사람이 어딜 가?”
“대신 이번에 시즌 끝나고 우리 여행 갈까?”
“여행……?”
퐁!
김나영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여행……?”
“일단 가까운 홍콩이나 대만, 일본 중에 하나 가 볼까?”
“해외여행? 그럼 자고 오는 거잖아.”
“응. 그럼 당일치기로 갔다 오려고?”
“그래도 그건…… 그게 벌써…… 그…… 되려나…….”
김나영이 말끝을 흐렸다.
송석현은 팔을 뻗어 김나영의 허리를 감아 잡아당겼다.
“왜 이렇게 부끄러워해?”
“왜 이래? 사람을 본다니까.”
송석현이 김나영의 눈을 보며 말했다.
“시즌 끝나면 부모님들한테 말씀드리자. 우리 진지하게 연애한다고. 응?”
“어? 어, 어. 그러자.”
“오늘 나 기 완전 빨렸거든? 엄청 힘들었어.”
“그랬어? 많이 힘들었어?”
“나 에너지가 하나도 없어.”
“응. 그럼 뭐라도 좀 먹을까? 많이 힘들어?”
송석현이 피식 웃었다.
“이럴 땐 나보다 더 눈치가 없네.”
“어?”
송석현은 김나영을 꽉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김나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감았다.
한참 후 송석현이 얼굴을 뗐다.
“충전이 필요하다고, 충전이.”
“……어.”
“으이구. 하여간 연애를 글로만 배웠어. 어쩜 그렇게 몰라. 하하.”
송석현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자. 데려다줄게. 이제 그만 가야지.”
김나영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뭐 해? 가야지.”
김나영이 고개를 들어 송석현을 바라봤다.
“석현아.”
“응?”
“그럼 넌 연애를 뭐로 배운 거야? 뭐로 배워서 그렇게 잘 알아?”
송석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응?”
“너…… 나 모르게 만나던 여자가 있던가?”
“무슨 소리야? 에이, 너도 알면서. 그런 거 없지. 그런 거 없는 거 알면서. 하하. 장난도 참. 뭐 해. 아우 추워. 춥다. 빨리 들어갈까?”
“열대야야. 한여름에 왜 추워?”
“그래? 몸이 으슬으슬해서 그런가. 내가 오늘 컨디션이 별로라서. 크흠크흠.”
“석현아, 너 정말 아니지? 솔직하게 말해 봐. 내가 정말 궁금해서 그래.”
“에이, 정말 아니라니까. 네가 모르는 내 사생활이 어딨냐?”
“그렇지? 맞지?”
“그럼. 어, 전화 왔다. 잠깐만. 전화 좀 받을게. 네, 감독님. 송석현입니다. 네, 네. 잘 들어갔습니다.”
송석현은 김나영을 보고 한번 웃어 보이곤 멀찍이 떨어져서 전화를 받았다.
“네, 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감독님. 네.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네, 네. 네.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아, 감독님. 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네? 아무튼 감사합니다. 무조건 감사한 거죠. 항상 감독님께 감사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네, 네. 들어가십쇼.”
전화를 끊은 송석현이 다시 한번 김나영을 보며 웃었다.
“이제 들어갈까?”
* * *
[노히트노런 대기록 탄생!]
[고트, 연승과 노히트노런으로 상승세]
[주전 포수 송석현, 큰 부상은 아니라고 밝혀]
[후반기 돌풍 고트, 다시 시동 거나]
주말 3연전 후 월요일.
야구가 없는 휴일이니만큼 한 주의 야구 소식은 월요일에 집대성되는 법이다.
포스트시즌이 가까워지는 만큼 순위에 민감한 이들이 온라인, 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희망과 절망을 냉온탕처럼 번갈아 왕복하기 마련이지만 월요일 최대 관심사는 셋이었다.
하나는 스콜피언 중견수 황기덕의 사이클링 히트.
또 하나는 한민석의 노히트노런.
마지막은 송석현의 건강이었다.
여의도 ×× 식당 앞.
밥을 다 먹고 식당을 나온 와이셔츠 맨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길을 걸었다.
“와, 석현이가 쓰러질 때 나도 뒷목 잡고 쓰러지는 줄 알았어.”
“나도, 나도. 가슴이 철렁했다니까.”
“솔직한 말로 석현이 없으면 우리 포스트시즌 안 돼. 안 되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송석현 없이 포스트시즌을 어떻게 치르려고.”
“이최강 셋 빠지고 나도 솔직히 고트에 희망 버렸었다. 말도 안 되잖아. 주전 타자 셋이 빠지고 어떻게 포시를 가냐고. 우리가 2군 애들이라도 잘 키우면 몰라. 완전히 노답이었지, 노답. 석현이가 없었으면 우리 폭스, 피닉스랑 놀고 있었을 거야.”
“끔찍하네.”
“끔찍하지.”
“하지만 우리에겐 석현이가 있지.”
“……포시 가면 가능할까?”
“김영훈만큼은 아니어도 석현이면…….”
“다른 건 몰라도 울브스보다 잘했으면 소원이 없겠네.”
“나도. 울브스라도 이겼으면 소원이 없겠다.”
“아, 빨리 야구 보고 싶다. 내가 한여름에 야구 보고 싶어 한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
“나도. 빨리 퇴근하고 싶다.”
“나도.”
“나도.”
* * *
송석현의 일과는 짧고 빠듯했다.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찜질을 한 후 김나영과 영화관 데이트를 즐겼다.
김나영은 한사코 푹 쉬어야 한다고 거절했지만 송석현의 고집을 이길 순 없었다.
저녁을 먹은 후엔 한민석을 만났다.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노히트노런. 제가 못 본 게 한입니다.”
“팔을 괜찮냐?”
“네. 선배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
“어, 나도 괜찮아. 하, 나 너 쓰러졌을 때 꿈인 줄 알았어.”
“괜히 엄살 피워서 죄송합니다. 순간 너무 아파서 뼈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선배님 공이 보통 빠르고 세야 말이죠.”
한민석이 하하 웃었다.
“아무튼 죄송합니다, 선배님.”
“뭐가?”
“제가 나가리만 안 됐어도 선배님이 퍼펙트도 하실 수 있었을 텐데.”
“됐어, 인마. 퍼펙트나 노히트노런이나 또이또이지.”
“그래도 퍼펙트랑 노히트는 다르잖습니까?”
“이겼으면 됐어. 어차피 방어율은 똑같아. 너 멀쩡하고 나 승리 따고, 팀 이겼으면 된 거지. 그리고 나도 사인 착각해서 슬라이더 던진 거잖아. 내 잘못도 있지.”
“그 슬라이더 때문에 삼진 잡은 건데요.”
“공 안 빠진 게 어디냐? 네가 잘 막았어.”
“그래도 그거 잡았어야 했는데…….”
“됐어. 지나간 거 너무 신경 쓰지 마. 노히트노런으로도 대만족이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구요. 영 마음에 걸렸거든요, 저 때문에 퍼펙트 깨진 거 아닌가 싶어서.”
“내가 그렇게 옹졸하디?”
“아뇨. 그게 아니라…….”
한민석이 송석현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내가 고맙다.”
“선배님이요?”
“그래, 너 아니었으면 노히트노런은 고사하고 2회나 넘겼겠냐? 네가 잘 리드해 줬어. 아니, 그 전에 네가 나 등판하게 한 거 베스트 초이스였어.”
“아아, 사실 저도 선배님이 그렇게 잘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무슨 신들린 사람처럼 던지시는데, 어휴.”
“나도 그땐 신이 좀 들렸던 거 같아. 무슨 생각으로 던졌나 몰라.”
“앞으로도 그 신이 자주 오셨으면 좋겠는데…….”
“만날 그렇게 던지면 내가 메이저를 가야지.”
“못 갈 건 없죠. 선배님이 그렇게 던지시면야 사이영이 문제겠어요?”
“비행기 태우긴.”
“그런데 선배님, 인터뷰 일정 많지 않으세요? 노히트노런. 하, 스포츠 뉴스만이 아니라 9시 뉴스에까지 나오는 거라 인터뷰 엄청 요청했을 텐데.”
“많아. 많아서 죽겠다.”
한민석이 인상을 찌푸리게 과장되게 몸을 떨었다.
“그런데 저랑 이렇게 커피 마셔도 돼요? 인터뷰 일정 소화하셔야죠.”
“쉬는 날엔 쉬어야지.”
“그래도 이럴 때 스포트라이트를 즐기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민석이 고개를 저었다.
“너한테 얘기도 할 겸 너 상태도 볼 겸, 겸사겸사.”
“저요?”
“그래, 너한테 꼭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거든.”
“저한테…… 음…….”
송석현이 눈을 깜박였다.
“그동안 내가 애처럼 굴었어.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어른스럽게 이끌어 줘서.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내가 애처럼 굴면 네가 포수답게 한마디 해.”
“스읍…… 제가요?”
“그래, 배터리잖아. 나이 신경 쓰지 말고 네 뜻대로 해. 이번에도 네가 밀어붙여서 노히트노런 나온 거잖아.”
“그거야 우연이죠.”
“로또도 한 장이라도 사야 나오는 거다. 로또 사라고 한 친구가 없었으면 로또 당첨이나 됐겠어?”
“음……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앞으로도 네가 주관을 갖고 밀어붙여. 너도 틀릴 때도 있고 나도 틀릴 때가 있겠지만 서로 조율해 보자. 내 말에 네, 네 할 필요 없다고.”
“아니요.”
“어……?”
송석현이 씨익 웃었다.
“네, 네 할 필요 없다면서요.”
“하, 하하. 뭐야, 그 썩은 개그는?”
“선배님 말씀은 잘 새겨듣겠습니다.”
“그래, 앞으로 잘해 보자. 올 시즌 한번 일 내 봐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더 가 봐야 하지 않겠어?”
“그럼요. 저도 욕심내 볼 생각입니다.”
“반지 하나 끼자. 나도 반지 끼고 은퇴하고 싶다.”
“저도 반지 컬렉터 하고 싶습니다.”
“내 약속할게. 우리 한국시리즈 우승하면 너한테 차도 뽑아 줄 용의가 있어.”
“앗……! 너무 감사한데 우리 팀이 이기는 건데 왜 제가 차를 받죠?”
“우리 팀이 이기면 네가 잘한 덕분일 테니까.”
송석현이 눈알을 굴렸다.
“선배님, 너무 궁서쳅니다.”
“내가 진지하거든. 잘하자. 내가 외제 차 라인까지 봐줄 수 있어.”
“진짜요?”
“응. 아, 물론 중고차 말고 신형으로.”
“설마 중고차……. 와, 중고차 생각하고 계셨어요?”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선배님 배포…… 새삼 놀랍네요…… 거기서 중고차를 생각하시다니.”
“아니라니까. 형이 좋은 거 하나 뽑아 줄게. 홈런만 빵빵 쳐라.”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보자. 너 며칠은 못 나오지?”
“네, 팔뚝이 부어서 미트랑 배트 잡을 때 힘이 좀 덜 들어가요. 며칠은 쉬어야 할 거 같아요.”
“너무 길게 쉬지 말고. 이왕이며 나 등판할 땐 꼭 나와라.”
“노력하겠습니다.”
“오냐오냐.”
두 사람은 헤어졌다.
한민석도, 송석현도 옅은 미소를 품은 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