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62화 (162/201)

배터리 (3)

8회 시작 전 페가수스 벤치.

투수코치와 김성훈이 한쪽 구석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더 던지겠다고?”

“네.”

“음…….”

투수코치가 김성훈을 위아래로 훑었다.

“웬일이냐?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 오랜, 아니 처음 보는 거 같다.”

“저도 아직 무실점입니다. 이런 경기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쪽은 노히트노런이라고 치고. 완봉하자고 계속 던지겠다고? 너 벌써 투구 수 아흔여덟 개야. 시즌 말미에는 몸 관리 더 철저히 해야 하는 거 몰라?”

“시즌 말일수록 1승이 더 소중한 거 아닙니까? 어차피 우리 팀이 한국시리즈로 직행하면 쉴 시간은 많습니다.”

“허, 참 나.”

투수코치가 머리를 긁적였다.

“목석같은 놈이 요새 무슨 바람이 불었나 몰라. 생전 안 던지던 몸 쪽 공을 던지질 않나, 코치의 말을 거절하질 않나.”

“부탁드립니다, 코치님.”

투수코치가 턱을 매만졌다.

김성훈은 입을 다문 채 투수코치의 대답을 기다렸다.

“푸우, 그래. 그런 승부욕, 좋아. 이런 말 그냥 하는 게 아니라 난 네가 포텐으로 따지면 진희보다 더 큰 놈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딱 하나 모자란 게 있었어. 근성. 넌 근성이 없어. 고집은 있는데 근성이 없었단 말이지……. 지금이라도 그런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면 난 좋다고 본다.”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그래, 해 보자.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붙어 봐야지. 네가 한민석이보다 못할 게 뭐 있어? 내가 감독님께 말씀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봐.”

김성훈이 마운드 위의 한민석을 쳐다봤다.

모자를 깊게 눌러써서 표정을 볼 수 없다.

“…….”

김성훈은 말없이 오른손의 손가락들을 엄지로 하나하나 매만졌다.

* * *

8회 말.

김성훈이 마운드에 올라오자 해설자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김성훈 선수도 다시 올라옵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 자존심 싸움으로 가나요? 평소 김성훈 선수는 투구 수를 관리하는 편인데, 오늘 이렇게 되면 100구를 넘기게 되겠네요.”

“김성훈 선수도 승리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느껴지네요.”

“이러면 더 흥미진진해지죠?”

김성훈이 손을 풀었다.

로진백을 들어 툭툭 매만진 후 바닥에 떨어뜨렸다.

로진 가루가 흩날리자 하얀 연기 속에서 첫 타자가 보였다.

“8회 말. 쉬운 승부는 아닐 겁니다. 이지성 선수거든요.”

“집요할 정도로 투수를 물고 늘어지는 선수죠. 장타력이 실종됐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스콜피언에선 대타, 수비 전문 요원으로 활용됐지만 고트에 와서는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장타가 없어도 워낙 컨택 능력이 좋다 보니 출루율이 4할 3푼까지 올라갔어요. 발 빠르고 수비 잘하고 출루 잘하면 리드오프로서 갖출 건 다 갖춘 셈이죠.”

“스콜피언에선 황기덕 선수에게 가려져서 빛을 못 봤는데, 선수 개인으론 고트로의 트레이드가 선수 경력의 전환점이 됐네요.”

“사실 국내에서 황기덕 선수와 비교해서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중견수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하, 그렇죠. 국내 최고를 넘어 역대 최고의 중견수로 언급되는 선순데요.”

“이지성 선수가 황기덕 선수에게 밀렸다고 해서 결코 쉽게 봐선 안 된다는 얘기죠. 특히 투수가 이렇게 지쳐 있을 때 이지성 선수 같은 타입은 참 골치 아프죠. 투수 입장에선 그냥 공 하나 주고 내보내고 싶을 거예요. 괜히 공 많이 던지고 출루를 내주면 뼈아프거든요.”

김성훈이 송진 가루를 입으로 후 불었다.

정용욱은 초구부터 몸 쪽 빠른 공을 요구했다.

팡!

-볼. 인사이드.

“공이 조금 빠졌네요. 김성훈 선수가 볼로 시작합니다.”

“경기가 길어지면 투수의 체력도, 집중력도 떨어집니다. 정교한 제구가 점점 어려워지죠.”

김성훈이 주먹을 한번 쥐었다 폈다.

‘포심. 인사이드.’

또 한 번 몸 쪽 공.

김성훈이 다리를 살짝 들어 올린 후 몸 쪽에 공을 붙였다.

탕!

“파울. 3루수를 지나치는 파울입니다.”

“이지성 선수가 아쉬워하네요. 이지성 선수가 몸 쪽 공, 빠른 공에 조금 약한 편인데 저렇게 아쉬워할 정도라면 충분히 칠 수 있었다는 판단인 거 같아요.”

“공에서 힘이 빠졌다는 얘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김성훈은 체인지업 하나를 보여 준 후 외곽에 빠른 공을 꽂았다.

탕!

이지성이 친 공은 1루수와 2루수 사이, 땅볼로 굴러갔다.

“안타. 이지성 선수가 기어이 안타를 쳐 냅니다. 8회 말. 1번 타자가 1루를 밟네요.”

“발 빠른 주자가 1루에 있으면 신경 쓰이죠. 그것도 이지성 선수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주루 센스가 보통이 아니거든요.”

2번 타자 설진일이 나오자 페가수스 벤치가 분주해졌다.

포수 정용욱의 사인이 현란해졌고, 야수들이 한 발씩 몸을 옮겨 갔다.

“설진일 선수가 초구에 강하다는 걸 모르는 선수는 없죠. 발 빠른 주자와 초구를 좋아하는 타자의 조합. 고트도, 페가수스도 작전을 쓰기 좋은 타이밍입니다.”

“지금 타석이 오늘 경기 분수령이 될 수 있겠네요?”

“예. 하지만 고트도 역으로 갈 수 있어요. 상대의 작전을 유도해 카운트를 유리하게 가져간 후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결국 수 싸움인가요?”

“예, 수 싸움이죠. 수 싸움으로 간다면 최성연 감독이 조금이라도 더 유리할 겁니다.”

초구를 존에 집어넣을 건가, 피할 건가.

주자는 달릴 건가, 말 건가.

타자 설진일은 1루 주자 이지성을 바라봤고, 주자 이지성은 투수 김성훈을, 투수 김성훈은 포수 정용욱을 바라봤다.

스타트를 끊은 건 이지성이었다.

페이크인지 진짜인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2루 도루 시도를 보여 줬다.

동시에 김성훈은 포수를 향해 공을 던졌다.

설진일은 허리를 돌리면서 스윙.

탁.

배트 끝을 맞힌 공이 힘없이 유격수에게 향했다.

발 빠른 이지성은 2루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유격수 김형우가 앞으로 달려가 공을 잡아 2루로 던졌다.

동시에 이지성은 벤트 레그 슬라이딩.

2루수 최영석은 2루를 밟으면서 점프와 동시에 몸을 틀어 1루에 공을 던졌다.

-아웃!

-아웃!

“병살! 병살이 나옵니다! 여기서 병살이 나오네요!”

“고트에서 작전을 쓴 거 같은데 김성훈 선수의 슬라이더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설진일 선수는 직구라고 생각해서 스윙한 거 같은데 슬라이더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8회까지 아웃 카운트 하납니다. 김성훈 선수가 9회까지 올라올 수도 있겠는데요?”

“하지만 아직 몰라요. 다음 타자는 김인환 선숩니다. 홈런 하나면 오늘 경기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예요.”

-볼넷. 타자 주자 1루로.

페가수스는 김인환을 거르고 서일혁과 승부했다.

서일혁은 삼구 삼진.

공수 교대였다.

“…….”

함성훈이 벽을 한 손으로 짚은 채 눈을 감았다.

9회 초.

김욱이 공격전에 페가수스 선수들을 모았다.

“공 딱 하나만 노려. 딱 하나만. 다 치려고 하지 말고 딱 하나만 노려서 제대로 쳐. 쟤도 힘 빠졌어. 정타만 나오면 무조건 장타야.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직구면 직구, 슬라이더면 슬라이더 딱 하나만 노리자. 쟤한테 노히트노런 줄 거 아니지?”

“네!”

-아웃!

-아웃!

-아웃!

“또 세 타자 삼진! 세 타자 연속 삼진이 나왔습니다! 노히트노런까지는 정말 딱 한 걸음이 남았어요!”

“10회까지 가는 일만 없다면 노히트노런이 나올 텐데……. 지금 김성훈 선수의 페이스도 보통이 아니거든요.”

세 타자 연속 삼진의 후유증은 컸다.

페가수스 벤치에서는 대화가 실종됐다.

선수들이 겨우 한마디를 꺼냈을 때 공통된 단어가 있다면 하나.

슬라이더.

선수들은 슬라이더 얘기를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페가수스는 10회까지만 끌고 가도 나쁠 건 없습니다. 불펜 싸움으로 가면 페가수스가 유리하거든요. 게다가 이번 타순은 5번 유선호 선수부터 시작입니다. 6번, 7번 타순은 조지호, 강하영이거든요. 안 그래도 약한 고트의 하위 타순인데 오늘은 더더욱 약점이 도드라지는 타선입니다.”

유선호는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정용욱에게 말을 건넸다.

정용욱은 유선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니 설마 내 내보낼 끼가?”

정용욱의 선택은 볼넷이었다.

“와…….”

유선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1루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페가수스가 대놓고 거르네요. 유선호 선수를 1루에 세워 둡니다.”

“뭐, 어쩌면 당연한 전략이죠. 유선호 선수는 무서운 타자지만 발 느린 주잡니다. 다음 타자인 조지호 선수는, 파워는 리그에서도 꽤 좋은 축이지만 컨택이나 선구안 모두 부족해 일찌감치 대타, 백업 요원으로 물러난 선숩니다. 병살을 노리기 딱 좋은 찬스에요.”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고틉니다. 대타 카드가 없어요.”

“그나마 대타로 서일혁 선수가 종종 나오긴 하지만 지금은 서일혁 선수도 송석현 선수 대신 교체돼서…….”

* * *

병원에 도착한 송석현은 응급실 대신 차 안에 있었다.

코치는 빨리 병원에 들어가자고 보챘지만 송석현은 차에서 안 내리고 버텼다.

“이제 다 끝났잖아요. 저 뼈 다치고 그런 건 아니에요. 괜찮아요. 경기 결과만 듣고 갈게요.”

“빨리 응급처치를 하고 들어야지.”

“코치님, 제발. 이제 5분도 안 남았어요. 차 조금 밀렸다고 생각하면 되죠.”

“하, 이럴 거면 앰뷸런스를 태웠어야 했는데…….”

“코치님, 이것만. 이것만 들을게요.”

-투 스트라이크. 공 두 개로 김성훈 선수가 투 스트라이크를 잡습니다.

-조지호 선수가 감을 못 잡아요. 아, 본인도 자책하지만 참 안타깝네요.

송석현이 오른 주먹을 꽉 쥐었다.

조지호.

힘으로 따지자면 고트 팀 내에서도 잠실 담벼락을 넘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강타자지만 존재감은 미미하다.

낮은 타율, 떨어지는 선구안, 고만고만한 수비 실력.

로테이션 멤버 혹은 백업 정도가 최대치인 선수.

송석현과도 별다른 접점이 없는 선수였다.

타고난 힘 하나 때문에 구단에서 버리지 못해 여태 끌고 왔다는 말 말곤 설명할 말도 없는 선수.

송석현도 코치도 기대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병살만은 면하길.

-……쳤습니다!

“아!”

“아!”

코치와 송석현 동시에 탄식을 내뱉었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 투수가 던지는 공이 좋은 코스로 들어갈 리 없잖은가.

-하늘 높이! 하늘 높이! 하늘 높이! 뜬 공!

“떴어?”

“……!”

듣던 코치도 놀라 라디오 볼륨을 올렸다.

-좌측 담장~~~ 좌익수가 손을 들었습니다!

“제발! 제발!”

“놓쳐라, 놓쳐. 제발 놓쳐.”

-좌익수! 넘어갔습니다! 좌익수가 점프했지만 글러브에 닿지 못했어요! 홈런! 홈런입니다! 투런이 나옵니다!

-정말 잠실 담장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간 공입니다. 이건 바람이 도왔어요. 바람이 아니었다면 못 넘어갔어요.

-끝내기 투런! 끝내기가 나옵니다! 고트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오네요!

“우아아아아아아!”

“이겼다! 이겼어!”

-오늘의 MVP는 단연코 한민석 선수지만 제 마음의 MVP는 조지호 선숩니다. 끝내기 홈런. 끝내기 투런 홈런. 한민석 선수의 노히트노런을 달성해 내는 홈런이자 팀의 연승을 이끄는 홈런입니다.

-오늘 대기록이 나왔습니다. 한민석 선수의 노히트노런이 나오면서 고트가 2-0으로 페가수스에게 위닝시리즈를 달성합니다.

“이겼어요! 이겼…… 아아아!”

“야! 거기서 박수를 치면 어떡해?”

“이제 응급실 들어가요. 아파, 아파. 아오, 엄청 아프네.”

“가자, 빨리.”

“아, 노히트노런 하는 현장에 나도 있어야 되는데.”

“아, 빨리 나와. 이제는 들어가야지.”

“알았어요. 갑니다, 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