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2)
관중석에서 팬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낮췄다.
고트 팬들도 페가수스 팬들도 숨을 죽였다.
마운드 위 한민석은 미동이 없었다.
“타석에는 김성현 선수가 들어섭니다.”
“김욱 선수도 참 까다로운 선수지만 어떤 의미에선 김성현 선수야말로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운 타자일 겁니다. 1년에 홈런 스무 개를 칠 수 있는 능력도 있지만 10년 연속 3할을 칠 만큼 정확도에선 리그 수위권인 타잡니다. 통산 타율이 3할이 넘는다는 건 대단한 일인 거죠.”
“힘과 정확도를 갖춘 타자라는 말씀이시네요.”
“신기록 달성이 코앞이지만 쉽지 않네요. 고트의 배터리가 신중한 승부를 해야 할 겁니다.”
신기록.
송석현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타석에 들어선 김성현이 자세를 잡았다.
‘포심. 아웃사이드.’
오늘 경기, 한민석은 고개를 한번 젓는 일이 없었다.
빠르게, 빠르게.
한민석이 다리를 들어 올리자 김성현도 다리를 들어 올렸다.
탕!
시원한 소리와 함께 공이 벼락같이 날아갔다.
“파울! 우익 선상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갑니다.”
“방금은 상당히 멀리 나갔어요.”
“파울이지만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공이 벗어났습니다.”
“파울볼이 뒤로 가느냐 앞으로 가느냐, 이거 중요합니다. 공이 뒤로 가는 건 공에 힘이 있다는 뜻이지만 공이 앞으로 가는 건 타자의 타이밍이 안 맞았다는 얘기거든요. 한민석 선수의 파울볼이 계속 앞으로 나가고 있어요.”
“어느덧 8회입니다. 힘이 떨어질 때가 됐죠.”
한민석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포수가 던져 주는 공을 받아 글러브에 넣고 숨을 한번 고르는 게 다였다.
‘포심. 아웃사이드.’
송석현이 미트를 들어 올린다.
한민석과 김성현이 함께 다리를 들어 올렸다.
팡!
공은 그대로 미트에 박혔다.
송석현은 공을 잡은 채 그대로 가만있었다.
‘볼. 아웃사이드.’
“아슬아슬하게 볼이 됐네요.”
“살짝 빠진 공인데 아쉽겠어요. 방금 공이 스트라이크가 됐다면 신기록 수립까진 9부 능선을 넘은 거나 다름없었거든요.”
“1-1. 투수와 타자 모두 유리한 카운틉니다.”
“역시 김성현 선수예요. 저 정도 코스의 공에 웬만하면 배트가 딸려 나올 텐데 저걸 참습니다. 참 골치 아픈 타자죠? 그만큼 실력 있다는 얘깁니다.”
제3구는 다시 한번 바깥쪽 코스.
김성현이 배트를 휘둘렀다.
-스트라이크!
“스윙! 1-2! 2 스트라이크를 뺏어 내는 한민석 선숩니다.”
“체인지업 좋네요. 이 타이밍에 저 코스의 체인지업. 명품입니다. 이야, 떨어지는 각도는 크지 않았지만 참 시의적절한 체인지업이었어요.”
김성현이 타석에서 벗어나 장갑을 고쳐 맸다.
송석현은 눈을 감았다.
“1-2. 김성현 선수가 쉽게 물러설 거 같지 않습니다.”
“그럼요. 투수의 신기록이라는 게 타자에겐 반갑지 않죠. 오늘 신기록이 나온다면 김성현 선수는 두고두고 계속 자신의 이름이 언급될 겁니다. 또 다른 신기록이 나오기 전까진 해마다 삼진 장면이 기록으로 남아 자료 화면에 나올 거예요.”
김성현이 타석 앞에 붙어 섰다
송석현이 잠시 사인을 망설였다.
“바깥쪽 코스에만 세 개의 공을 던졌습니다. 빠른 공, 빠른 공, 체인지업. 이번에는 어떤 공이 들어갈지 궁금하네요.”
송석현이 미트를 내밀었다.
한민석이 던진 공이 그대로 미트를 파고들었다.
팡!
송석현이 미트를 꼼짝 않고 들고 있었다.
‘볼. 인사이드.’
“2-2. 쉽지 않네요. 쉽지 않아요.”
“방금은 깊었어요. 몸 쪽 공을 제대로 던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나 봅니다.”
“2-2. 타자와 투수 모두 어려운 싸움을 이어 갑니다.”
송석현이 숨을 내뱉었다.
“좋았던 한민석 선수의 제구가 조금씩 어긋나고 있네요. 이제 공 하나하나가 굉장히 중요한 타이밍입니다.”
“삼진 하나면 신기록입니다.”
사인을 내는 송석현의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한민석은 지금 사인을 주고받을 상황이 아니다.
투구 템포에 몸이 반응하는 수준이다.
그 말인즉슨, 포수인 송석현이 생각할 시간이 없단 얘기다.
바로바로 사인을 내야 한다.
원래 사인을 빨리 내는 송석현이지만 절체절명의 순간, 고민할 시간도 없다는 게 어깨를 짓눌렀다.
“한민석, 와인드업!”
송석현의 사인을 보자마자 투수가 다리를 높이 들었다.
하얀 로진 가루가 휘날리며 공이 쏘아졌다.
다리를 든 김성현이 주춤거렸다.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애매한 코스.
“……?”
존 바깥으로 오던 공이 갑자기 휘었다.
눈으론 봤지만 몸이 반응할 시간이 없었다.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백 도어 슬라이더.
제구가 좋지 않은 투수기에 우타자 상대로 백 도어 슬라이더를 구사한다는 선택지는 지워 놨다.
퍽!
-스트라이크!
……퍽?
김성현이 뒤를 돌아봤다.
“포수, 공을 놓쳤어요! 공을 놓쳤습니다!”
머리로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몸은 반응했다.
김성현의 다리가 1루를 향해 뛰었다.
“아이 씨……!”
송석현이 몸을 일으켰다.
공은 포수 뒤쪽에 빠져 있었다.
송석현은 몸을 날려 공을 잡은 후 1루를 바라봤다.
주자는 2/3 정도에 가 있었다.
-아웃.
“아웃! 아웃입니다! 아웃이 나왔어요!”
“퍼펙트를 지켜 내네요. 송석현 선수가 퍼펙트를 지켜 내요.”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김성현 선수가 아쉬워할 만해요.”
“아, 그런데 송석현 선수가 손을 듭니다. 어디 부상이 있는 거 같은데요.”
트레이닝코치가 그라운드로 나왔다.
송석현이 왼팔을 감싸 쥔 채 인상을 찌푸렸다.
“왜? 어디야?”
“손목이요. 제대로 맞은 거 같아요. 손에 힘이 안 들어가요.”
“손목?”
코치가 송석현의 손목을 만졌다.
“아!”
“손목 맞은 거야?”
“네.”
“손목 많이 부었네. 일단 나가자. 교체해야겠다.”
송석현이 손목을 부여잡고 벤치로 향했다.
한민석은 멍한 눈으로 송석현을 바라봤다.
“뭐야? 뭔데?”
함성훈이 다급하게 묻자 코치가 손목을 가리켰다.
“공이 손목에 맞았어요.”
“손목?”
“사인 미스인 거 같아요.”
“뼈는? 뼈는 괜찮고?”
“검사해 봐야죠.”
“알았어. 일단 바로 병원으로 보내.”
“네, 알겠습니다.”
“일혁아. 서일혁!”
“네. 지금 옷 입고 있습니다.”
“바로 준비하자.”
고트 선수들이 송석현에게 우르르 몰렸다.
송석현은 연신 ‘괜찮다.’를 반복하곤 코치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트레이닝코치와 함께 병원으로 가는 차 안.
코치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급하게 사인을 낸다고 했는데 사인 미스가 나온 거 같아요.”
“아까 슬라이더 같던데.”
“저는 직구를 낸다고 냈는데 아무래도 서로 여유가 없다 보니…….”
“후, 그래서 손목으로 그걸 막아 낸 거야?”
“저는 미트로 잡을 수 있다고 봤는데 공 꺾이는 각도가 너무 날카로워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도 그러면 안 돼. 손목 같은 데 다치면 살이 없는 부분이라 크게 다칠 수 있어. 예후도 안 좋고 말이야.”
“퍼펙트잖아요. 그걸 어떻게 깨요?”
“……후.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만.”
“라디오 좀 켜 주세요. 어떻게 됐나 좀 듣고 싶어요.”
“잠깐만. 오늘이 어디 방송국이더라…….”
코치가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를 켜자마자 해설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볼넷! 볼넷입니다! 퍼펙트가 깨졌어요!
코치도 송석현도 탄식을 내뱉었다.
* * *
한민석은 넋이 나간 얼굴로 자기 손을 바라봤다.
스트레이트 볼넷.
관중석이 들썩거렸다.
“안 돼. 흐름이 끊겼어. 망했어.”
“아…… 거기서 볼넷이 나오냐.”
포수 서일혁이 마운드로 걸어왔다.
한민석과 서일혁이 눈을 마주쳤다.
“왜 넋이 나가 있냐?”
“어?”
“정신 차려, 인마. 입 가리고.”
서일혁은 한민석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한민석은 그제야 글러브를 들어 입을 막았다.
“뭐 하는 거야?”
“몰라. 나 지금 정신이 들었어.”
“어?”
“나 퍼펙트 하는 중이었네.”
“……이제 알았냐?”
“어. 오늘 그냥 잘되는 날이구나, 그렇게만 생각했거든.”
“웬일로 태평하네.”
“그러게. 이렇게 생각 없이 맘 편히 던진 거 오랜만이네. 아니, 처음인가?”
“퍼펙트는 깨졌어도 아직 노히트노런은 안 깨졌어. 할 수 있겠어?”
“내 공 어때? 구위 괜찮아?”
“노히트노런이잖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던져야지. 안 던질 거야?”
한민석이 피식 웃었다.
“그러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던져야지.”
“다음 타자 김형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어차피 좌타자야. 깔끔하게 잡고 이닝 마무리하자.”
“오케이, 오케이. 알았어.”
서일혁이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한민석이 로진백을 집어 들었다.
“노히트……. 내가 노히트를 한다고……?”
경기가 재개됐다.
타석에는 유격수 김형우.
“한민석 선수의 노히트노런 기록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볼넷을 내주면서 흔들리고 있지만 이번 타자는 김형우 선숩니다. 좌타자, 한민석 선수에겐 좋은 기회죠.”
“하지만 마냥 쉽게 볼 선수가 아니죠. 김형우 선수는 대한민국 유격수 계보를 잇는 선숩니다. 수비도 수비지만 3할 타율로 골든 글러브도 딴 선수죠.”
“쉽진 않겠지만 밀어붙어야죠. 페가수스 타선에서 약한 고리는 없습니다. 홍성욱, 송민준 선수 모두 일발 장타가 있는 선수들이에요. 두 선수와 상대하는 것보단 김형우 선수와 맞붙는 게 낫습니다. 김형우 선수는 잠실에서 홈런을 기대하긴 어려운 선수거든요.”
한민석의 초구는 포심 패스트볼.
김형우가 공 하나를 지켜봤다.
“거의 한복판으로 공이 들어오네요. 타자는 공 하나를 보냈습니다.”
“투수가 스트레이트 볼넷을 허용했잖습니까. 이럴 땐 공 하나를 지켜봐야죠. 이제부터 진짜 승붑니다. 투수가 존에 욱여넣기 시작하면 타자도 공격적으로 나가야죠.”
한민석이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포수의 사인은 슬라이더.
한민석이 눈을 한번 감았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무의식중에 던져서 노히트노런까지 왔다.
상대 타자를 어떻게 상대할지 고민해선 안 된다.
자신은 구위로 윽박지르는 투수다.
제구만 잘된다면 이후의 일은 자신의 손을 떠난 거다.
아무 생각 없이, 툭.
한민석이 슬라이더를 던졌다.
“……!”
공이 존 한복판으로 향한다.
제구가 중요한데, 역시 제구가 문제다.
김형우의 스윙.
한민석이 자기도 모르게 눈을 찌푸린다.
팡!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투 스트라이크가 나옵니다.”
“슬라이더가 정말 예리했죠? 휘어지는 각도가 정말 좋았습니다.”
“저건 타자가 안 속을 수가 없네요. 어떻게 저렇게 꺾일까요?”
서일혁은 슬라이더를 잡아채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평소보다 슬라이더가 더 예리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지점보다 공이 두세 개는 더 빠졌다.
예측 불가.
슬라이더 사인을 내고도 슬라이더를 놓칠 뻔했다.
‘슬라이더. 아웃사이드.’
좋은 슬라이더가 있다면 숨길 이유가 없다.
-스트라이크! 아웃!
타자의 헛스윙.
“삼진! 삼진입니다! 삼진으로 이번 이닝 셧아웃! 아직 노히트노런이 진행 중입니다!”
“대단하네요. 대단합니다, 한민석 선수. 오히려 더 힘이 나는 거 같아요. 마치 면도날 슬라이더 같습니다. 예리해요. 정말 예리합니다.”
“8회 초 한민석 선수가 볼넷을 하나 내줬지만 다음 타자 삼진을 잡아내면서 0-0의 균형이 이어집니다.”
“고트 선수들 힘들겠네요. 한 점이라도 내줘야 할 텐데, 하필 이럴 때 일발 장타가 가능한 4번 타자가 빠졌습니다.”
“노히트노런과 0-0. 균형이 언제 무너질지 야구팬 여러분들이 숨죽이면서 봐야 할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