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60화 (160/201)

배터리

“쉬이이.”

“조용해, 조용해.”

“입 다물자, 우리.”

고트 벤치에선 서로 눈치를 봤다.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면서 서로를 째려봤다.

선수들 사이에서 한민석은 물을 마셨다.

“아, 자꾸 열이 올라오네. 후아.”

“…….”

한민석은 졸린 듯 풀린 눈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우리 지금 득점은 했나?”

“…….”

“왜 다들 말이 없어?”

그제야 송석현이 입을 열었다.

“아직 없어요.”

“그래도 나 있을 때 득점이라도 좀 해 봐. 그래야 내가 내려가도 덜 미안하지.”

“오늘 김성훈 선배님이 선발이라 쉽지 않네요.”

“아, 성훈이. 성훈이였지…….”

한민석이 물에 적신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이제 나가야지.”

“네.”

“아이고, 삭신이야. 온몸이 다 쑤시네.”

한민석이 마운드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고트 선수들도 글러브를 챙겨 뒤를 따랐다.

평소 하던 파이팅도 없었고 잡담도 없었다.

“아, 석현아.”

“네.”

한민석이 송석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심플하게 가자. 많이 던질 체력이 안 될 거 같다.”

“알겠습니다.”

4회 초.

첫 타자는 페가수스의 리드오프 최영석이었다.

초구는 몸 쪽 빠른 공.

최영석이 타석에서 발을 빼며 물러섰다.

-스트라이크!

“한민석 선수가 빠른 공으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냅니다. 오늘 공격적으로 나가네요.”

“평소에도 공격적이었는데 오늘은 뭔가 다르네요. 카운트를 빠르게 잡아서 승부합니다.”

“제2구도 스트라이크. 또 빠른 공이었습니다.”

“바깥쪽에 꽉 찬 공. 저런 공 참 쉽지 않죠.”

제3구는 백도어 슬라이더.

최영석은 배트를 내지 못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최영석을 공 세 개로 돌려세웁니다. 스탠딩 삼진. 한민석 선수가 거침없네요.”

“지금 열 타자 연속 아웃입니다. 아직까진 퍼펙트예요.”

“그렇습니까? 열 타자 연속 아웃. 퍼펙트까진 열일곱 개의 아웃이 남긴 했지만 현재 페이스가 좋네요.”

2번 타자 심창규는 바깥쪽 직구를 노려 쳤지만 플라이 아웃.

3번 타자 김한성에겐 초구 몸 쪽 직구로 땅볼 아웃.

“한민석 선수가 공 일곱 개로 이번 이닝을 끝냅니다.”

“시원시원하네요. 정말 빠르게 승부를 합니다.”

한민석은 벤치로 들어오자마자 물을 한껏 들이켰다.

벤치에 앉은 한민석은 물에 적신 수건으로 눈을 덮었다.

선수들도 코치들도 말을 아꼈다.

어쩌면 오늘…….

“4회 말. 선두 타자는 송석현 선수가 나옵니다.”

“아까 첫 타석에 워닝 트랙에서 잡힌 공은 정말 아쉬웠죠. 다른 구장이었다면 홈런이 됐을 텐데 역시 잠실은 잠실이에요. 웬만한 공으론 홈런이 어렵습니다.”

팡!

김성훈이 초구부터 몸 쪽에 빠른 공을 찔렀다.

152km/h.

송석현이 타석에서 한번 물러섰다.

정용욱이 말을 걸었다.

“고맙다, 석현아.”

“뭐가요?”

“네 덕에 성훈이가 업그레이드됐거든.”

송석현이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몸 쪽 공이 좋네요.”

“몇 번 사고가 나서 안 던지던 놈인데 다 네 덕이지.”

“왜 제 덕이에요?”

“이 바닥이 상대를 봐줘 가면서 살살 하는 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거든.”

김성훈의 2구는 바깥쪽 빠른 공.

-스트라이크!

송석현이 입맛을 다셨다.

“아…… 멀다, 멀어.”

“성훈이 코너웍이야말로 예술이지.”

“메이저를 성훈 형이 가야겠어요.”

“에이, 큰일 날 소리. 성훈이까지 빠지면 우리 팀은 어쩌라고.”

김성훈이 제3구를 던졌다.

팡!

-스트라이크! 아웃!

송석현의 헛스윙.

바깥쪽에서 빠지는 슬라이더였다.

“후.”

송석현이 입을 오므리며 타석에서 물러섰다.

바깥쪽에서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

송석현이 벤치로 와 한숨을 푹 쉬었다.

“빡세다, 빡세.”

김인환이 물었다.

“오늘 성훈 선배 진짜 살벌하지 않냐? 완전 몸 쪽에 팍팍 붙여서 던지는데 오늘 장난 없네.”

“직구도 직군데, 저 슬라이더는 진짜 우타자 입장에선 답도 없어요. 밖으로 휘는 게 무슨 사이드암처럼 휘니 원.”

“오늘 점수 빼기 어렵겠네.”

“오늘 같은 날 빨리 점수를 빼야 하는데…….”

“그러게 말이다.”

두 사람의 눈이 한민석에게 향했다.

한민석은 수건을 눈에 올려놓고 쌕쌕거렸다.

탕!

유선호가 김성훈의 빠른 공을 쳐 2루로 나갔다.

김성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6번 타자 조지호 선수가 나옵니다. 최근에는 백업으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최재완 선수 성적이 서서히 오르면서 조지호 선수의 입지도 애매해졌죠. 1루, 3루 수비도 가능하지만 좋다고 보기도 어려워요. 확실한 자기 포지션이 없는 게 주전 경쟁에선 치명적입니다.”

“말씀드리는 사이 초구 스트라이크가 나왔습니다.”

“조지호 선수의 스윙을 보니 타이밍이 많이 늦네요. 배트가 못 따라간다는 얘기죠.”

“최근 타율이 2할 1푼 1리……. 성적이 많이 아쉽네요.”

김성훈의 직구에도 배트가 따라오지 못하니 슬라이더는 말할 것도 없었다.

삼구 삼진.

다음 타자는 강하영은 공 네 개로 땅볼 아웃.

“오늘은 투수전으로 가고 있네요. 양 팀 모두 득점이 없습니다.”

5회 초.

한민석은 눈을 끔벅거렸다.

“지금 몇 회야?”

“5회요.”

“벌써? 나 공 몇 개 안 던졌는데.”

“선배님, 일단 나가시죠. 공수 교댑니다.”

“벌써? 나 얼마 안 쉬었는데?”

5회 초 선두 타자는 4번 타자 김욱.

김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타석으로 들어섰다.

“오늘 쟤 아프다고 안 했냐?”

“오늘내일해요.”

“그러면 장례식장을 가야지 여길 왜 왔대?”

“마지막 소원 같은 거죠.”

“소원 무섭네. 오늘 쟤 공 왤케 빡세?”

“오늘내일하는 사람 공도 못 치면 안 되죠, 홈런왕 되실 분이.”

팡!

-스트라이크!

몸 쪽을 파고드는 빠른 공.

김욱이 혀를 내둘렀다.

“장난 없네. 아픈 게 아니라 초사이언 된 거 아니냐?”

“에이, 민석 선배님 지금 잠결에 던지시는 거나 다름없어요.”

“몽유병이야?”

팡!

-스트라이크!

김욱은 공이 지나간 후 돌아간 자신의 배트를 바라봤다.

전광판에 찍힌 속도는 152km/h.

“무슨 160km/h는 되는 줄 알았네. 공 하나만 좀 줘.”

“네, 네. 그럼요.”

송석현이 사인을 내자 한민석은 지체 없이 던졌다.

김욱은 스윙했고 공은 미트에 들어갔다.

-스트라이크! 아웃!

“삼구 삼진! 바깥쪽 높은 공에 헛스윙 하는 김욱 선숩니다.”

“방금은 높은 공이라 위험했지만 코스가 좋았습니다. 살짝 빠지는 공이라 타자들이 안 좋아할 수 없는 코스죠.”

김욱이 벤치로 돌아와 혀를 내둘렀다.

“오늘 직구 장난 아니야. 와, 저놈 아픈 거 맞아? 더 공이 좋아지는 거 같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삼진! 오늘 K! K! K! 쇼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김욱, 김성현, 정용욱 세 타자 연속 삼진! 오로지 직구 하나로 타자를 윽박지릅니다. 이게 한민석이죠. 이게 한민석의 직굽니다.”

“노림수에 관해선 최고의 타자 김욱, 10년 연속 3할 타자 김성현, 리그 최고의 포수 정용욱까지. 리그에서 내로라하는 타자 셋을 연속으로 삼진을 잡는다? 와, 이건……. 오늘 한민석 선수의 공은 다릅니다. 평소보다 더 좋은 거 같아요.”

한민석은 삼진을 잡은 후 바로 벤치로 돌아왔다.

물을 마시고 물에 적신 수건을 눈에 대고 털썩 주저앉았다.

5회까지 퍼펙트.

한민석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헤, 하고 입만 벌렸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김성훈 선수까지 세 타자 삼진! 오늘 두 투수의 용쟁호투가 대단합니다. 어느 누구 하나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김성훈 선수야 국대 우완 에이스로 불리던 선수지만 한민석 선수의 오늘 활약은 놀랍네요. 평소에도 기복 있는 실력을 보여 줬지만 오늘은 평소에 좋았던 실력보다 더 좋은 거 같습니다.”

“분명 오늘 경기 전에 한민석 선수가 몸살감기 기운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하하. 저도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정말 가벼운 몸살 감기였나 봅니다.”

한민석은 선수들의 발소리에 수건을 눈에서 치웠다.

“벌써 나가야 돼?”

“아니에요. 쉬고 계세요. 아직이에요.”

“아, 그래?”

한민석은 다시 수건을 눈에 덮었다.

클리닝 타임엔 벤치가 소란스럽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절간이나 다름없었다.

선수들은 발소리를 죽여 가며 움직였고, 이마저도 다른 선수들의 눈치에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아이 씨…… 1점은 내야 하는데.”

“미치겠네. 오늘 무조건 이겨야 하는데…….”

당사자인 한민석은 태평한데 타자들이 조바심이 들어 발을 동동 굴렀다.

함성훈 감독은 투수코치에게 물었다.

“오늘 김성훈도 완투할 거 같죠?”

“5회까지 공 예순두 개라 완투도 가능할 거 같습니다.”

“후, 민석이를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도 없고…….”

“퍼펙트 중인데 내리는 건 말도 안 되죠.”

“열은 어때요?”

“아까 재 보니까 36.9도. 정상 범윕니다.”

“그런데 쟤는 왜 저래요? 아직도 몸살 기운이 남아서 그런 건가?”

“글쎄요. 아무튼 열은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습니다.”

“일단 가 보는 데까지 가 보죠. 퍼펙트…… 직접 보고 싶은 마음도 있네요.”

클리닝 타임이 끝난 후 송석현이 한민석의 무릎을 툭툭 두 번 쳤다.

한민석은 말없이 수건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아함, 가자.”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마운드로 올랐다.

페가수스에선 작전을 바꿔 투구 수를 늘리기 위해 배트도 짧게 잡고 밀어 치기로 일관했으나 소용없었다.

페가수스의 하위 타선은 한민석의 달아오른 직구를 막지 못했다.

삼진.

삼진.

삼진.

여섯 타자 연속 삼진.

페가수스의 최성연 감독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감독의 심기는 그대로 벤치에 전해졌다.

페가수스 선수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봤다.

“후우, 재밌네.”

페가수스 벤치에선 오직 한 명, 김성훈만이 맞은편 고트 벤치를 보고 웃었다.

-아웃!

-아웃!

-아웃!

김성훈이 세 타자 범타 처리를 하자 한민석이 올라와 세 타자 연속 삼진을 잡았다.

“아홉 타자 연속 삼진! KPBL 기록까지 단 하나가 남았습니다!”

“한민석 선수가 페가수스를 상대로 신기록을 세울 수 있을지 벌써 손에 땀이 나기 시작하네요.”

“게다가 오늘 경기는 아직까지 퍼펙틉니다.”

“오늘…… 기자들이 잠실을 주목해야겠어요.”

김성훈은 7회 말에 올라와 안타 두 개를 내주며 핀치에 몰렸다 싶었지만 이후 삼진 두 개를 섞어 아웃 카운트를 늘렸다.

8회 초.

한민석이 마운드에 오르자 그라운드에 긴장감이 흘렀다.

아직까지 퍼펙트게임.

한 명만 삼진을 잡으면 연속 탈삼진 타이기록.

한 개를 더 추가하면 신기록.

수비하는 고트 선수들이나 공격하는 페가수스 선수들이나 입술이 바짝 말랐다.

8회 초 선두 타자는 김욱.

김욱은 송석현에게 농담조차 건네지 않았다.

한민석은 김욱이 들어서자마자 공을 던졌다.

삐이이이이이익!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공이 좌측 담장을 넘었다.

“파울! 파울입니다. 아슬아슬하게 폴대를 벗어나는 파울이 나왔습니다.”

“방금은 위험했습니다. 김욱 선수가 제대로 노려서 친 거 같아요.”

“타이기록까진 한 타자가 남았습니다.”

한민석의 다음 공은 바깥쪽 빠른 공.

김욱이 배트를 휘둘렀으나 공은 이미 미트에 들어갔다.

“154km/h! 오늘 최고 구속이 8회 초에 나옵니다.”

“한민석 선수의 최고 구속 아닌가요? 한민석 선수의 최고 구속은 150 언저리로 알고 있는데요.”

“김욱 선수가 타석에서 물러나 숨을 고릅니다.”

김욱은 배트를 쥔 손을 풀었다.

가볍게, 가볍게.

몸에 힘을 빼고 공만 보고 친다.

공만 보고-.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삼진입니다! 연속 타자 탈삼진 타이기록이 나왔습니다!”

“방금 저 체인지업은 대체 뭐죠? 갑자기 136km/h 체인지업이 한복판으로 날아갔습니다.”

김욱은 한민석 대신 송석현을 쳐다봤다.

“이, 요망한 자식.”

김욱은 피식 웃곤 타석을 벗어났다.

송석현도 웃어넘겼다.

퍼펙트까진 아웃 카운트 다섯 개.

신기록까진 아웃 카운트 한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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