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고트 (4)
5회 말.
점수판에는 2-2라는 점수가 적혀 있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삼진입니다! 조진희가 오늘 벌써 삼진만 일곱 개를 뽑았습니다.”
“5회 말. 조진희 선수가 삼진으로 이닝을 끝내면서 잠시 쉬어 가는 시간이 오겠네요.”
“저런 투구를 하는 조진희 선수가 2점을 줬다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인데 이창훈 선수도 이에 질세라 단 2점만 내주면서 페가수스 타선을 잘 막아 내고 있습니다.”
“어제의 패배로 고트가 4연패에 빠졌었는데 오늘 경기는 최근 경기 중에 가장 내용이 좋은 경기네요.”
“페가수스가 하락세의 고트를 만나 한껏 반겼을 텐데 경기 내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 * *
클리닝 타임.
양 팀 선수들은 벤치로 들어와 잠시 숨을 돌렸다.
간식을 먹는 선수도 있었고 눈을 감고 명상하는 선수도 있었다.
송석현은 포수 마스크를 벗고 앉아 바람을 쐬었다.
“오늘 리드 좋다?”
선발투수 이창훈이 송석현 옆에 앉았다.
“선배님 공이 좋으신 거죠. 오늘 체인지업은 알아도 못 치겠던데요?”
“뭐, 리드가 좋은 덕이지.”
“공이 좋은 덕이죠.”
둘은 너 나 할 거 없이 파하하 웃었다.
“6회까지 갈 수 있을까? 아까 홈런도 욱이 형이 타이밍만 맞췄는데 넘어갔잖아, 잠실에서.”
“지금 투구 수로 보면 7회, 8회도 되죠. 홈런이야 어쩔 수 없구요.”
“공이 내 마음대로 안 가네. 꽉꽉 눌러 주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창훈이 자기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꼭 힘으로 눌러야 맛이 나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변화구로 농락당하면 타자 멘탈이 더 깨진다니까요. 멘탈이 깨지면 경기 운영하기 훨씬 쉽죠.”
“그러냐?”
이창훈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신기하지. 살다 보니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고,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게 있네. 공이 시원찮아졌는데 체인지업이 이렇게 좋아질 줄 누가 알았어? 그것도 하루아침에. 진작 이런 체인지업을 던졌다면 FA 때 최소 10억 이상 깔고 갔을 텐데.”
“욕심도 많으시네요. 이미 벌 만큼 다 버셨잖아요. 평생 놀고먹어도 3대가 먹고살아도 남는 돈 버셨으면서. 전 부럽습니다, 선배님.”
“어이구, 니가?”
뒤에서 바나나를 오물거리던 유선호가 송석현 뒤에 앉았다.
“인마, 니는 못해도 100억이야, 100억. 요새 물가 오르는 거 보면 니는 150억 받아도 머라 칼 사람 하나도 없다.”
“인생은 모르잖습니까? 저는 무사히 FA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괜히 FA 때 아프거나 부진하고 그래서 헐값에 계약하면 너무 힘들 거 같아요.”
“그러니까 몸을 애껴. 야구라는 게 그래.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너무 열심히 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게을러도 안 돼. 적당히. 열심히는 하지만 오버는 아닌 정도로.”
“그게 더 어려워요. 애매한 거.”
“인생에 정답이 없으니까 다 어려운 거야. 니처럼 어린놈이나 나처럼 늙다리 아자씨나 사는 게 어려분 건 다 똑같다, 똑같아.”
클리닝 타임이 끝나 가자 이창훈이 고개를 돌려 유선호를 바라봤다.
“선배님.”
“와?”
“저 오늘 승리 하나 따고 싶습니다. 선배님도 홈런 하나 쳐 주셔야죠.”
“와 나한테 그라노? 야한테 해라, 야한테. 뭐 내는 치기 싫어 안 치나.”
“석현이한테는 그냥 볼넷 줘 버리고 말잖아요. 선배님, 한 방 부탁드립니다. 무조건 선배님한테 승부하는데 찬스는 선배님한테 나겠죠. 이번 공격도 딱 인환이부터 아닙니까.”
“그러면 인환이한테 치라 카믄 되지.”
“그래도 인환이보단 선배님이죠. 선배님이 홈런 하나 치시면 제가 소원도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됐다, 뭔 소원. 그리고 내도 진희한테 홈런은 자신 없다. 쟈 오늘 이 악물고 던지는 거 안 보이나?”
“흠흠, 제 사촌 동생이 주윤흰데 혹시 아세요?”
주윤희라는 말에 유선호의 눈이 번뜩했다.
“그 주윤희? 내가 아는 가 맞나?”
“네. 윤희가 주변에 예~쁜 친구들이 참 많은데……. 예쁘고 심성도 고운 애들이 많데요.”
“윤희가 아이고 친구?”
“뭐, 마음에 안 드시면 어쩔 수 없지만 윤희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야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선배님이랑 자리 한번 마련하면 어떨까 싶었거든요.”
유선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홈런 말고 타점은 안 되나?”
“에이, 선배님. 제가 윤희 친구들 얼굴 다 봤어요. 윤희가 평균이에요, 평균. 윤희보다 예쁜 애들도 있다니까요. 겨우 타점 가지고 되겠어요?”
“그래, 함 해 보자. 니 그 말 구라로 하는 거 아이제?”
“그럼요, 그럼요. 아, 석현이도 홈런 하나 더 치면 형이 책임지고 자리 만들어 줄게. 너도 찬스가 나면 쳐.”
송석현은 어색하게 한번 웃고는 포수 마스크를 집었다.
“가시죠. 일단 막아야 역전을 할 거 아닙니까?”
“그래, 가자. 막으러 가자.”
6회 초.
선두 타자는 1루수 김한성.
온몸이 근육으로 덮인 남자였다.
“김한성 선수 오늘 성적이 별로 안 좋죠?”
“네. 오늘 이창훈 선수의 변화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힘 하면 김인환 선수와 더불어 리그에서 손꼽는 최고의 거포인데 오늘은 타구가 제대로 뻗어 가는 게 없네요.”
“페가수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죠. 김인환 선수와는 동갑내기로 고교 시절에는 라이벌이었지만 김인환 선수가 조금 더 1인자에 가까웠죠. 프로로 진출한 이후엔 정반대, 김인환 선수는 적응을 하지 못했지만 김한성 선수는 그야말로 라이징 스타로 리그를 휩쓸었습니다. 페가수스 왕조의 일원으로 승승장구하면서 두 동갑내기의 차이가 영영 벌어지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김인환 선수가 성큼 성장했습니다.”
“1루수, 3번 타자,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 좌타자와 우타자라는 차이를 빼곤 공통점이 많은 선수들입니다. 두 선수들의 라이벌전도 오늘 경기의 키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거 같아요.”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김한성 선수가 또 삼진을 당하네요.”
“저 체인지업 오늘 심상치 않습니다. 정말 좋아요. 뚝 떨어집니다.”
“다음 타자는 김욱. 오늘 동점 투런을 칠 만큼 컨디션이 좋습니다.”
송석현은 김욱에게 대놓고 볼넷을 내줬다.
김욱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에이, 후배님. 홈런왕 밀어준다면서 왜 이래?”
“오늘 창훈 선배님 제구가 안 좋나, 왜 저럴까요?”
“넉살은.”
김욱을 1루로 보낸 후 5번 타자 김성현에게 초구로 바깥쪽 빠른 공.
-스트라이크!
김성현은 다리가 풀려 고개를 떨어뜨렸다.
“김성현 선수가 좋은 공을 놓쳤네요.”
“바깥쪽 코스가 오늘 페가수스 타자들에겐 난젭니다. 직구가 빠르게 들어온다면 어쩔 수 없지만 오늘 이창훈 선수의 직구가 140 초반이거든요. 충분히 칠 수 있는 직군데 체인지업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으니까 자꾸 배트가 늦어집니다. 저렇게 스트라이크를 먹으면 더 기운이 빠지죠.”
송석현이 투수와 사인을 교환했다.
이번에도 바깥쪽 코스.
아까보다 살짝 빠져 들어가는 코스라 타자가 배트를 멈췄다.
-스트라이크!
-132km/h.
“또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체인지업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습니다.”
“타자들이 머리가 아프겠네요. 이러면 확실하게 하나 노리고 쳐야겠는데요?”
김성현이 심판을 한번 보곤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자 심판이 김성현을 한번 째려봤다.
송석현은 뒤를 보지도 않았지만 미묘한 기류를 눈치채곤 심판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존 잘 보이시죠? 제가 조금 더 가운데로 갈까요?”
“잘 보여. 괜찮아.”
송석현은 바깥쪽 체인지업 하나를 요구했다.
타자가 가까스로 참아 내며 1-2.
타자가 타석에 바짝 붙어 눈에 불을 켰다.
제4구는…….
탁!
“유격수 잡아서 2루로, 2루수는 1루로! 6-4-3 병살이 나옵니다. 공수 교대. 고트가 병살로 이닝을 끝내네요.”
“몸 쪽 빠른 공에 타이밍이 늦었어요. 공의 구속이 빠르지도 않은데 타자의 반응이 느렸습니다.”
김성현이 배트를 쥐고 벤치로 걸어 들어갔다.
김욱은 김성현의 엉덩이를 손으로 툭툭 쳤다.
“송석현이 마스크 쓸 땐 아무 생각 하지 마. 괜히 생각했다가 머릿속만 꼬이니까.”
“아까 빠진 거 스트라이크라고 외치지만 않았어도, 하.”
“쟤도 저 정도 미트질은 하는 놈이야. 말리면 안 된다니까.”
6회 말.
김인환이 선두 타자로 나왔다.
조진희는 초구 바깥쪽 빠른 공을 던졌지만 김인환이 단타로 1루 출루.
송석현은 대놓고 볼넷.
유선호가 타석에 들어섰다.
“노아웃 1, 2루. 타석에는 유선호 선수가 들어섭니다.”
“땅볼, 삼진, 플라이. 오늘 유선호 선수는 단 한 개의 안타도 없습니다. 좌타자에 강한 조진희 선수라지만 유선호 선수 같은 베테랑이 썩 기분이 좋을 리는 없을 겁니다.”
유선호가 헬멧을 깊게 눌렀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얕게 내뱉었다.
“뭐 그리 긴장해? 어차피 못 치는 거 편히 치지.”
포수 정용욱의 도발에 유선호는 고개를 저었다.
정용욱은 몸 쪽에 미트를 가져다 댔다.
조진희는 망설이지 않고 초구 몸 쪽 공.
탕!
“우익 선상을 빠져나갑니다. 파울이지만 굉장히 빠른 타구가 나오네요.”
“유선호 선수가 공격적으로 나오는데요?”
정용욱은 유선호의 벼락같은 스윙에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리 선호 아직 안 죽었네. 허리가 아직 살아 있어.”
“내 허리는 웬만한 어린아보다 훨씬 좋다 아이가. 이 허리 때문에 내한테 매달린 가시나들이 몇인 줄 아나?”
“그러면 뭐 해, 써먹질 못하는 거.”
‘슬라이더. 로우.’
조진희가 지체 없이 공을 던진다.
유선호의 스윙.
-스트라이크!
“굉장히 큰 스윙이었습니다. 유선호 선수가 아쉬워하는데요?”
“유선호 선수가 아예 공격적으로 나갈 참인가 본데요? 굉장히 스윙이 큽니다. 아까와 다른 전략이에요.”
정용욱이 키득거렸다.
“야 야, 허리 나가. 조심해, 인마. 너도 어린 나이가 아냐, 이제.”
“됐다. 이 정도는 까딱없다 아이가.”
“짜식이 허세는.”
‘슬라이더. 아웃사이드.’
“자 자, 우리 선호 허리가 얼마나 좋은지 함 볼까?”
조진희 손을 떠난 공이 좌타자 바깥쪽으로 쏘아진다.
유선호가 스윙을 하자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
유선호가 이를 꽉 물고 스윙을 멈췄다.
“후!”
유선호가 배트를 다시 뒤로 돌리자 정용욱이 일어나 손가락을 휘휘 돌렸다.
심판은 스트라이크 콜을 하지 않았다.
“아니…….”
정용욱은 바로 한마디를 쏘아붙이려다 가까스로 참았다.
심판과 싸워도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후. 아쉽네, 아쉬워.”
유선호가 허리를 톡톡 두드리며 다시 타석으로 돌아왔다.
“선호야, 너 그러다 허리 나간다.”
“그라믄 저런 공 던지지 말라고 카든가.”
“니가 알아서 조심해야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 부상 없이 은퇴하는 게 최고 아니냐?”
‘포심. 인사이드.’
“그럼 살살 던지는 공 하나 주든가.”
“오케이, 오케이. 이번 공은 꼭 쳐라. 꼭.”
조진희가 이를 꽉 문 채 앞다리를 쭉 뻗었다.
몸통이 돌아가면서 팔이 휙 지나갔고 동시에 하얀 공이 유선호의 몸 쪽으로 박혔다.
탕!
유선호는 이번에도 풀 스윙이었다.
“우측 담장~~~~~ 우측 담장을~~~~ 넘어! 갔습니다! 유선호의 스리런! 유선호가 6회 말, 동점 상황에서 쐐기를 박는 스리런을 터뜨립니다! 경기는 5-2. 오늘 경기의 분수령이 되는 순간입니다!”
유선호가 배트를 집어 던지더니 정용욱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 허리 아직 쓸 만하거든?”
유선호가 1루로 달리자 투수 이창훈이 자리에 서서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
짝짝.
유선호는 박수 세례를 받으며 벤치로 돌아왔다.
유선호는 말없이 이창훈을 바라봤고, 이창훈은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허리 쓰러 나갈라다 허리 나갈 뻔했네.”
유선호가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3점을 뺏긴 조진희는 그대로 강판됐다.
홈런 두 개로 5점.
조진희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벤치 뒤로 나가 버렸다.
함성훈이 투수코치를 불러 물었다.
“오늘 누구, 누구 있죠?”
“정률이랑 백찬이 가능합니다.”
“백찬이 바로 올리게, 먼저 몸 풀게 하고 준비 해 주세요.”
“네.”
페가수스는 7회에도 올라온 이창훈에게 점수를 뺏지 못했다.
이창훈은 7이닝을 마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7이닝 2실점.
이창훈 뒤에 올라온 이백찬은 김정률이 마운드로 올라올 기회를 주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이백찬 선수의 세이브! 9회 말은 없었습니다. 이백찬 선수가 151km/h의 직구로 삼진을 잡으면서 오늘 고트가 4연패를 끊고 페가수스로부터 1승을 뺏어 옵니다. 이러면 다시 4위, 5위 격차가 혼전으로 접어들겠네요.”
“오늘의 MVP는 유선호 선수가 되겠네요. 호쾌한 스리런이었습니다.”
유선호는 데일리 MVP 인터뷰에서 감사 인사를 전하라는 말에 이창훈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저를 믿어 주고 응원해 준 창훈이에게 공을 돌리겠습니다.”
유선호의 인터뷰 하나로 바로 스포츠 기사가 쏟아졌다.
[4연패를 끊은 고트. 패배를 이기는 건 팀워크였다]
[베테랑의 품격, 유선호. 선발투수에게 공을 돌리는 여유까지]
[서로 응원하는 팀이 된 고트. 어떻게 이런 변화가?]
오랜만의 승리에 고트 선수들이 다시 미소를 찾았다.
단 한 사람, 내일 선발투수로 내정된 한민석을 제외하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