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고트 (3)
칼을 갈았다.
다른 선수도 아닌 송석현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정용욱은 혀로 볼을 밀었다.
‘포심. 가장 센 거. 몸 쪽. 높은 쪽.’
도발에 도발로 나온다면 이쪽은 더 큰 도발로 간다.
조진희는 정용욱의 사인에 기꺼워했다.
다름 아닌 송석현 아닌가.
메이저리그를 갈 자신이 이제 갓 데뷔한 신인에게 발목이 잡혀서는 체면이 서지 않는다.
오늘도 포수 후면석에는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확실하게 보여 준다.
에이스란 무엇인가.
조진희가 다리를 힘차게 올렸다.
키킹 후 화살처럼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조진희의 손을 떠난 공이 송석현의 몸 쪽을 파고들었다.
탕!
“좌측 담장! 아! 파울! 좌익 선상을 벗어나는 파울입니다.”
“정말 벼락같은 타구였습니다.”
“조진희 선수의 구속이 158km/h까지 나왔네요.”
“158km/h의 직구를 파울로 만들어 내네요. 과연 창과 방패의 대결답습니다. 백중셉니다.”
파울을 맞은 조진희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은 그대로지만 입만 웃고 있다.
정확하게 제구 된 몸 쪽 공이었다.
“살살 좀 하자, 이놈아.”
정용욱이 투덜댔다.
제대로 들어온 몸 쪽 공을 이렇게 파울로 쳐 버리면 다음 공을 뭐로 요구해야 할지 고민스러워진다.
“저희 팀 사정 아시잖습니까? 살살 할 형편이 아닙니다.”
“너도 진희 체면을 좀 봐줘라. 저렇게 스카우터가 바글바글하게 와 있는데 대한민국 대표 투수 체면 좀 살려 줘야지.”
“조진희 선배야 제가 아니더라도 에이스잖아요. 국대 에이스.”
‘슬라이더. 아웃사이드.’
“그래도 너 같은 천적이 생기면 좋지 않지. 적당히 좀 해 줘. 우리 볼넷으로 퉁칠까?”
조진희가 공을 던졌다.
송석현은 몸을 흔들다 스윙했다.
옆구리에 바짝 붙인 오른쪽 팔꿈치와 왼쪽 겨드랑이는 끝까지 돌지 않았다.
팡!
“후아.”
송석현이 배트를 멈추고 타석에서 물러섰다.
정용욱이 바로 심판을 봤지만 심판의 스트라이크 콜은 없었다.
“아…….”
아쉬움에 정용욱이 입맛을 다셨다.
노 스윙 판정.
“송석현 선수가 참아 냅니다. 슬라이더를 참아 내네요.”
“굉장히 좋은 슬라이더였는데 저걸 참네요. 와, 저걸 어떻게 참죠?”
“1-1. 이러면 타자와 투수가 다시 똑같은 위치에 서게 됩니다.”
송석현이 손을 털었다.
바깥쪽 낮은 쪽 슬라이더를 의식했기에 겨우 참아 낼 수 있었다.
송석현의 노 스윙에 페가수스 벤치보다 고트 벤치가 더 들썩거렸다.
“저걸 어떻게 참아?”
“아니 스윙이 돈 거 같았는데 어떻게 저기서 멈추지?”
“뭐야, 저거. 이제 무섭다, 무서워.”
대기 타석의 유선호만이 송석현의 노 스윙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본 상하체 분리 자세 중에 최고 수준이다.
타격이 이뤄지기 위해선 하체가 먼저 돌면서 회전력을 만들어 줘야 상체가 돌면서 스윙이 시작된다.
송석현이 스트라이드가 넓은 편이 아님에도 강한 스윙이 가능한 건 저 말도 안 되는 허리 유연성과 탄력 덕이다.
스트라이드가 넓지 않으니 스윙이 나오는 길이가 짧고, 스윙이 나오는 길이가 짧으니 공을 더 오래 볼 수 있다.
김인환이 송석현을 따라 하다 결국 다시 자기만의 폼으로 돌아간 이유도 저기에 있다.
힘은 김인환이 송석현보다 한 수 위일지 몰라도 저 유연성, 탄력, 반사 신경은 송석현이 탈인간계다.
투수로도 국내 고교야구 원톱이었다고 하니 운동신경이야 타고났을 테지만, 이쯤 되면 너무한 거 아닌가 싶다.
컨택, 선구안, 파워 뭐 하나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 루키임에도 OPS가 1이 넘는다.
리그에 적응한 내년에는 어떤 성적을 찍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마누라라도 못생겨야 할 텐데.”
저 성적에 마누라가 못생길 리 없겠지만, 마누라까지 예쁘면 자괴감에 빠질 거 같다.
정용욱과 조진희가 사인을 교환했다.
송석현을 거르고 유선호를 상대할 건가, 아니면 송석현과 정면 승부할 건가.
조진희의 선택은 정면 승부였다.
국가 대표 1선발 에이스의 자존심.
다시 한번 몸 쪽에 최고 구속의 직구를 꽂는다.
좌투수가 우타자 몸 쪽에 크로스로 꽂는 공.
송석현의 허리가 돌아가면서 배트가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내려꽂혔다.
송석현의 몸이 뒤로 젖혀지면서 팔과 배트가 180도에 가깝게 벌어졌다.
쾅!
“와…….”
캐스터가 할 말을 잊었다.
공은 맞자마자 저 하늘을 유영했다.
밤하늘을 유유히 날아오른 공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공이…… 공이…….”
캐스터와 해설자가 공을 찾았다.
아직 어둠이 가라앉지 않은 어슴푸레한 하늘이라 하얀 공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저기! 저기!”
관중석 상단의 관중이 수군거렸다.
공이 아직도 떠 있다.
잠실야구장의 끝이 코앞인데 아직도 공이 가라앉기엔 너무 높았다.
“…….”
공이 하늘 높이 날아갔다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공을 제대로 본 사람들은 적었다.
송석현은 배트를 옆으로 집어 던지고선 1루로 천천히 뛰었다.
조금 늦게야 심판이 홈런이라면서 손을 휙휙 돌렸다.
“홈런! 홈런입니다! 대형 홈런이 나왔습니다! 역대 최장거리 홈런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 지금 자료 화면이 나오네요. 공이…… 아, 여기로 갔군요. 가운데 담장에서 조금 좌측으로 갔습니다. 공이 쭉쭉 가다가 담장을 넘고 장외까지 넘어서 갔습니다. 정말 먼 거립니다. 송석현 선수가 오랜만에 장외 홈런, 잠실에서 장외 홈런을 때려 내네요. 그것도 조진희 선수를 상대로 말이죠.”
“이건…… 와…… 할 말이 없네요. 제가 투수였다면 바로 마운드에서 내려올 거 같습니다. 저건 상상할 수도 없는 홈런이에요. 심지어 조진희 선수 아닙니까? 구속도 160km/h가 나왔거든요. 메이저리그라면 모를까 국내에서 160km/h 직구, 그것도 몸 쪽 직구를 홈런으로 만드는 타자? 제가 알기론 송석현 선수 하나 빼곤 모르겠어요. 이건 정말…… 와…….”
뒤늦은 홈런 콜에 뒤늦은 함성.
고트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오, 고트의 송석현. 팔방미인 송석현. 장외 홈런 송석현. 날! 려! 버! 려!”
“잠! 실! 의! 왕! 송! 석! 현! 날! 려! 버! 려!”
페가수스 선수들은 한발 떨어져서 베이스를 밟는 송석현을 지켜봤다.
김욱은 3루를 지나는 송석현을 보곤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라이벌로 여겨서 미안하다, 야.”
송석현은 웃음이 나왔지만 선배 앞에서 차마 웃을 수 없어 꾹 참았다.
홈에서 김인환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손뼉을 마주쳤다.
“나이스!”
“나이스!”
송석현이 벤치로 돌아오자 선수들은 평소 하던 세리머니 대신 자리에서 서서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짝.
짝짝.
송석현은 코를 긁적이면서 선수들을 지나쳤다.
송석현은 벤치 끝단에 앉아 숨을 골랐다.
“하, 짜식.”
김인환이 송석현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걸 치냐?”
“쳐야죠. 쳐야 이길 거 아니에요.”
“징글징글한 놈. 저 공을 어떻게 친 거야?”
“지성 선배랑 같이 한 훈련이 도움 된 거 같아요. 특히 파워 클린이랑 파워 스내치 같은 거. 제 생각보다 스윙 스피드가 더 빨랐어요.”
“그냥 네가 미친놈 아닐까? 나도 하이풀 하는데 왜 안 되지?”
“형은 그렇게 무겁게 하이풀 하느니 그냥 파워 클린이라도 해요. 형이라면 나보다 훨씬 더 빨리 파클 무게를 늘릴 수 있는데 왜 하이풀만 해요?”
“어려워. 쇄골 다칠까 걱정도 되고.”
“그러니까 연습해야죠, 잘 얹을 수 있게. 웬만한 역도 선수만큼 드시는 분이 너무 약한 소리 하는 거 아닙니까?”
“나도 좀 해야 하나…….”
송석현에게 홈런을 맞은 후 조진희는 좌절하기는커녕 더 눈에 불을 켜고 피치를 올렸다.
좌타자에게 강한 조진희가 피치를 올리자 유선호는 꼼짝도 못 하고 삼진.
공수 교대였다.
“오늘 잠실 경기 아주 재밌게 흘러갑니다. 1회부터 송석현 선수의 아름다운 홈런이 나오면서 2-0으로 고트가 앞서갑니다. 지난 4연패를 깔끔하게 씻어 버리는 초대형 홈런이었습니다. 잠실에서 장외 홈런도 드문데 저 정도 장외 홈런은 제 야구 인생에서 처음 보는 홈런이었습니다. 아마 이 정도 홈런이면 역사로 남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 야구공을 잡으신 분이 있다면 정말 대단한 행운이겠는데요?”
“야구공이 어디까지 날아갔을지 궁금하네요.”
송석현의 홈런 한 방은 단숨에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페가수스 타자들은 이창훈의 직구를 노리며 들어왔지만 연신 헛스윙, 땅볼을 반복했다.
한 타순이 다 돈 후에야 김욱이 주장으로서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내가 보기엔 쟤 체인지업이 하나가 아니야. 속도만 줄인 체인지업이랑 속도 줄이고 낙차 키운 체인지업 두 개가 있어. 특히 저 낙차는 내가 보기엔 조절할 수 있는 거 같아.”
“그게 되나……?”
선수들이 내일 선발투수로 예고된 김성훈을 바라봤다.
김성훈은 말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체인지업 전문이 아니라.”
“아무튼 직구가 시원찮다고 너무 덤벼들지 마. 지켜보자. 어차피 직구 구위는 맛탱이 갔어. 카운트 몰려도 충분히 칠 수 있으니까 이번 타순에선 최대한 공 많이 보면서 투구 수 늘리고 적응하자고.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좋아, 좋아. 스윕 가자!”
“스윕!”
3회 초.
페가수스의 1번 타자 최영석이 초구 커브를 지켜봤다.
송석현은 미동도 없는 최영석을 보더니 몸 쪽 직구를 요구했다.
팡!
-스트라이크!
몸 쪽 직구에 최영석이 고개를 한번 갸웃하곤 다시 타석에 바짝 붙었다.
송석현은 씨익 웃더니 바깥쪽에 미트를 가져다 댔다.
-체인지업.
이창훈은 흠칫 놀랐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바깥쪽으로 들어가는 134km/h 체인지업.
최영석은 배트를 내려다 멈췄다.
팡.
-스트라이크!
“삼구 삼진! 1번 타자 최영석 선수를 삼구 삼진으로 잡아냅니다.”
“오늘은 최영석 선수가 전혀 힘을 못 쓰네요. 저런 선수가 아닌데 이상하네요.”
낙차 없이 스피드만 느린 직구.
누구보다 눈이 좋은 최영석이기에 스윙을 하려는 순간 공이 조금 느린 거 같다고 생각해 배트를 멈췄다.
다른 선수들이라면 잡아낼 수 없는 찰나의 감각이지만 감이 좋은 최영석이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예민한 감이 항상 좋은 결과로 이끄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야 아셨나 보네.”
송석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투수와 사인을 교환했다.
초구 직구 사인.
타자가 들어오기 전부터 사인을 내 버린다.
포수의 확신.
상대 팀이 뒤늦게 이창훈의 체인지업이 까다로운 걸 알고 공을 지켜보기로 전략을 짰다는 확신이 들었다.
자신이라도 당연히 그렇게 했을 거다.
투수가 새로운 구종을 들고 왔다면, 심지어 그게 위력적인 변화구라면 당연히 아웃 카운트를 잃더라도 오래 봐 놔야 다음에 칠 거 아닌가.
상대 팀의 전략을 안다면 대응은 더 쉽다.
상대가 전략을 바꿀 때까지 집요하게, 치사할 정도로 판다.
팡!
-아웃!
팡!
-아웃!
“두 타자 연속 삼진! 두 타자 연속으로 커브에 삼진을 당합니다.”
“이창훈 선수의 커브에 오늘 타자들이 힘들어하네요. 이창훈 선수 커브가 저렇게 좋았나요?”
“이창훈 3회까지 삼진 5개. 오늘 무시무시하네요. 닥터 K라고 불러도 되겠습니다.”
체인지업을 염두에 둔다?
그렇다면 다른 구종만 던지면서 체인지업만 노리는 걸 포기하게 만들면 된다.
커브를 결정구로 쓴다면 상대가 커브에 반응하기 시작할 거다.
상대가 커브에 반응한다는 건 상대의 선택지가 늘어난다는 얘기다.
투수는 선택지가 많을수록 좋고, 타자는 선택지가 적을수록 좋다.
커브에 초점을 두는 순간 이창훈의 140km/h 초반의 직구는 최소 5km/h 이상 더 빠르게 체감될 거다.
“저 약은 놈.”
정용욱은 송석현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예상했지만 그렇다고 팀의 전략을 바꿀 순 없었다.
타자는 생각이 복잡해질수록 불리해지는 생물이다.
전략을 한 번, 두 번 바꾸기 시작하면 머릿속이 꼬인다.
설령 자신이 포수라도 팀 차원에서 전략을 낼 때까지는 참아야 한다.
다만…… 자신이라면 커브를 노리고 들어갈 거다.
아니, 역으로 자신한테는 체인지업을 던지지 않을까?
같은 포수끼리 자존심이 있으니 역시 체인지업을…….
아니면 역의 역으로 그냥 커브로 승부를……?
“아…….”
정용욱은 자신도 늪에 빠졌다는 걸 자각했다.
한번 잡념이 시작되면 막을 수 없다.
정용욱은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명상, 명상.
생각을 비워야 한다.
“형! 뭐 해요? 안 나가요? 공수 교대잖아!”
“아,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