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고트
“솔직히 말해 보자. 우리 이런 일 한두 번 아니지?”
김정률의 물음에 선수들이 우물쭈물 서로 눈치 봤다.
“시즌 초에는 치고 나가다가 후반부에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기자들은 여름에 약한 고트, 떨어질 팀은 떨어진다, 고트 이번에도 또! 이런 기사 써 대기 시작하잖아. 난 딱 이맘때가 아, 이제 여름이 끝나 가는구나. 곧 가을이 오겠다, 싶어.”
선수들이 피식 웃었다.
고트로 입단해 고트에서 성장해 온 선수들은 크게 웃지도 못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딱 이맘때야. 우리 감독 바뀌는 건가? 다음 감독은 누구지? 외부 영입인가? 내부 승진인가? 어떤 코치가 실세지? 누구 줄을 타야 하지? 아, 감독 안 바뀌면 줄 잘못 잡았다가 × 되는 거 아냐? 다들 대갈빡 엄청 굴리잖아. 안 그래?”
“크흠.”
“그만하자, 우리. 감독이 바뀌고 자시고. 언론이 지랄을 하든 말든. 왜 야구에 집중을 못 하고 자꾸 딴짓을 해, 딴짓을.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 우리가 강팀이냐? 우리가 우승 후보야? 우리 최근 우승한 게 언제냐? 20년도 넘어, 20년도. 포스트시즌 자주 갔다고 해서 강팀인 건 아니야. 돈 처발라서 겨우 포스트시즌 턱걸이하면 광탈. 또 돈 처발라서 포스트시즌 턱걸이하면 광탈. 하이고, 지겹다, 지겨워.”
김정률은 손뼉을 두 번 쳤다.
“질 수도 있어. 이길 수도 있고. 야구잖아. 그런데 이기든 지든 간에 쪽팔리진 말아야지. 야구 할 시간에 핸드폰 붙잡고 어딜 그렇게 통화를 해, 통화를. 프런트 애들을 왜 그렇게 들들 볶아. 걔들 옆구리 찔러서 정보 얻고 싶어? 설령 니들이 줄 잘 잡았다고 쳐. 니들이 실력이 떨어지는데 줄 잘 잡아서 주전 자리 꿰찼다고 치자고. 그럼 안 쪽팔릴 거 같아? 우리 야구 선수야. 누가 야구 잘하는지, 못하는지 모르겠냐? 니들은 팀 동료한테 눈칫밥 먹으면서 야구 하고 싶냐? 잘하면 나가는 거고, 못하면 못 나가는 게 프로야. 감독이 바뀌고 자시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기자들이 떠들든 말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야구를 잘하냐, 못하냐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니냐?”
서일혁이 대꾸했다.
“그래, 맞는 말이야.”
김정률이 말없이 선수들을 훑었다.
“우리 감독이 문제라서 우리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어? 우리 감독이 불펜 어깨를 갈아 넣었냐, 아니면 신인들한테 기회를 안 줬냐? 그것도 아니면 주전 박아 놓고 휴식 한 번 없이 쭉쭉 빨아먹었냐? 아니지? 감독이 삽질하는 게 아니라면 결국 성적은 선수가 하는 만큼 나오는 거야. 내가 미리 말해 두는데 니들 언론이랑 인터뷰하는 새끼들 나오면 내 손에 뒈지는 거야. 니들 지금 친한 기자들한테 전화 오지게 올 거야. 씹어. 니들 구린 거 터뜨린다고 해도 감수해. 우린 팀이야. 팀이 무너지면 혼자 난리 부르스를 쳐도 아무것도 안 된다. 내가 해 봐서 알아. 이 팔 세 번 갈아먹어 봐서 안다. 니들이 김영훈같이 미친놈이 아니라면 무너진 팀으로는 혼자서 지랄 발광해도 소용없어.”
김정률이 숨을 가다듬었다.
“우린 우승 후보는 아니지만, 우승 가능성이 있어. 내가 여태 뛰었던 시즌 중에 가장 우승 가능성이 높아. 짬 찬 놈들은 알 거야. 타이밍은 한번 지나가면 영영 안 와. 아, 내년에 어떻게 또 잘해 보지, 뭐. 개소리야. 꼭 그렇게 생각하면 내년은 더 엉망이야. 생각을 바꿔. 올해 어떻게든 잘해 보자. 올해가 마지막이다. 니들한테 나처럼 어깨 갈아 버리라는 말 안 해. 오버 페이스하란 얘기 아니야. 하지만 야구에 관해선 완전히 불 태워 버려. 시즌이 끝났을 때, ‘아, 그때 조금 더 잘해 볼걸.’ 이딴 생각 하면 이미 늦었어. 다음 시즌에도 똑같아. 그렇게 어영부영 지내다가 어영부영 은퇴하는 거야. 우리 팀을 봐라.”
김정률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우리 팀 베테랑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랑 일혁이 둘이야. 우리 둘 나이면 다른 팀에선 고참 수준이야. 우리 선배들이 어떻게 됐는지 다 봤을 거야. 우리 팀은 나이 먹고 애매한 선수들한테 가차 없어. 그렇다고 우리 팀을 떠난 선배들이 다 잘됐을까? 주전으로 뛰다 은퇴한 선배들 없어. 고트에서 뛴다는 건 다른 팀보다 선수 생명이 몇 년은 더 짧다는 얘기야. 니들 수준이 어중간하면 더 짧아질 거고. 그러니까.”
선수단에 침묵이 감돌았다.
“한 경기, 한 경기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라고 생각하고 뛰자. 우리 팀은 여름 되면 내려가는 팀이 아니라, 그저 잠깐 주춤한 거라고 보여 주자. 그리고 한국시리즈에 가서 우승해 버리자. 올해는 가능성 있잖아. 우리 투수들이 좀만 버텨 주면 얘네들이 멱살 잡고 우승시켜 줄 거야. 안 그래?”
김정률이 송석현과 김인환을 가리켰다.
열중쉬어 하던 송석현이 당황해선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제가요?”
“우승 못 하면 네 탓이야. 알지?”
김정률이 한쪽 눈을 찡긋하곤 송석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송석현이 어버버거리자 선수들이 크게 웃었다.
“제일 어린 막내도 입 꾹 닫고 저렇게 열심히 뛰는데 선배라는 사람이 후배 보기 쪽팔려서야 되겠냐? 안 그래?”
“네!”
“우리 쪽팔리진 말자. 어?”
* * *
페가수스와의 주말 3연전 잠실 경기.
고트는 용병 멕킨지를 앞세웠지만 3-2 석패했다.
4연패.
5위와도 1경기 차.
언론에선 기다렸다는 듯이 고트의 하락을 점쳤다.
페가수스와의 3연전, 선발은 조진희와 김성훈.
고트는 최근 페이스가 떨어진 이창훈과 한민석.
무엇 하나 고트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목요일 저녁.
송석현은 퇴근을 준비하다 발걸음을 멈췄다.
“지금 공을요?”
“어, 가능할까?”
송석현의 퇴근을 막은 이는 한민석이었다.
“모레 선발인데 오늘 공 던지시려고요? 아까 불펜에서 몸 안 푸셨어요?”
“조금 풀다 말았어. 뭔가 해 볼 게 있어서. 도와줄 수 있어?”
“어…… 네. 알겠습니다.”
송석현이 다시 장비를 차려입고 실내 연습장으로 향했다.
한민석은 송석현을 기다리며 눈을 감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송석현이 한민석의 얼굴을 바라봤다.
며칠 전보다 볼살이 조금 홀쭉했다.
“선배님, 왔습니다.”
“어, 그래. 늦은 시간에 미안하다.”
“아닙니다.”
격세지감.
오만불손할 정도로 당당하던 한민석이 몇 주 사이에 달라졌다.
머리도 짧아졌고 살도 빠졌다.
최근 부진이 단순 컨디션 난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다른 선수나 관계자들도 걱정할 정도니 본인도 모르지 않았을 거다.
“내가 요새 폼을 바꾸고 있거든.”
“시즌 중에요?”
“어, 더는 안 될 거 같아서 손을 좀 내렸어.”
“아아.”
송석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구가 안 좋은 선수들의 마지막 선택지는 릴리스 포인트를 낮추는 거다.
릴리스 포인트가 낮아지면 좌우 균형을 맞추기 쉽고, 좌우 불균형이 줄어들면 제구가 용이해진다.
다만 손이 아래로 내려가는 만큼 아래로 떨어지는 변화구 위력이 약해진다거나 구속이 줄어드는 위험이 있어 제구를 잡기 위한 마지막 방편쯤으로 미뤄 두는 수단이었다.
“코치님과 상의하신 겁니까?”
“아직. 아마 반대하시겠지.”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시즌 중인데.”
“그래도 해 봐야지. 고집만 부릴 순 없잖아.”
한민석이 덤덤하게 말했지만 송석현은 뼈아팠다.
차라리 짜증을 내고 욕을 하는 게 마음이 더 편할 거다.
“내가 예전에 안 해 본 건 아니야. 좀 하다 말았거든. 요 며칠 다시 해 보니까 생각보다 괜찮은 거 같더라고.”
“그럼 지금 던지시겠습니까?”
“그래, 부탁 좀 할게.”
“네, 편하게 던지십쇼.”
송석현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포수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을 거다.
굳이 자신을 잡고 부탁하는 건 자신이 어리거나 만만해서가 아닐 거다.
주전 포수의 인정.
배터리의 호흡은 그라운드 안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팡!
한민석이 가볍게 공을 던졌다.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지만 미트로 파고드는 힘이 제법이었다.
“좋습니다.”
“미트 가져다 대 줘. 내가 거기다 던질 테니까.”
“네, 우선 가운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송석현이 미트를 정 가운데에 놨다.
한민석의 릴리스 포인트는 사이드암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었다.
팡!
팡!
구속은 110km/h 언저리였지만 미트에 박히는 소리가 우렁찼다.
“어때? 구속 좀 올려 볼까?”
“모레가 경긴데 무리하진 마시고 천천히 올려 보시죠.”
“오케이.”
한민석이 구속을 점차 올렸다.
공은 미트가 가는 대로 따라왔다.
구속이 130km/h를 넘자 점점 빠지는 공이 나왔다.
한민석은 그럴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다시 공을 던졌다.
퍽!
아예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이 나오자 한민석이 손을 허리에 대곤 한숨을 쉬었다.
“자꾸 빠지네.”
“선배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해. 뭐든 좋으니까 해 봐.”
송석현이 마스크를 열고 일어섰다.
“구속이 올라가니까 선배님의 중심축이 자꾸 기웁니다.”
“기운다고? 어떻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서 던집니다.”
“아…… 그래?”
“릴리스 포인트를 억지로 높이려고 몸이 기우는 거 같습니다.”
한민석이 제 머리를 툭툭 쳤다.
“후, 역시 무린가, 단시간에는……. 무의식적으로 그러나 보네.”
“릴리스 포인트를 밑으로 내리는 건 신경 쓰지 마시고 조금 더 릴리스 포인트를 앞으로 끌어당기는 건 어떠세요?”
“그게 더 어렵고 시간 오래 걸리잖아?”
“릴리스 포인트를 당기지 못해도 그 느낌만으로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민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송석현은 배트를 쥐고 타격 자세를 잡았다.
“타격이든 피칭이든 비슷합니다. 결국 회전과 직선 운동인데 최적의 스윙은 타원형입니다. 타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정확도가 높아집니다. 이건 본능이라서 끈 달린 돌멩이 같은 걸 정확하게 던지라고 하면 사람들은 원형으로 돌리다가 던질 때는 꼭 타원형으로 던집니다.”
송석현이 배트를 놓고 공을 잡았다.
“피칭의 정확도를 높이는 것도 이와 똑같은 메커니즘입니다. 공을 쥔 손의 궤적이 타원형에 가까울수록 정확도는 높아집니다. 궤적을 타원형으로 만들기 위해선 스트라이드가 길어야 하고 릴리스 포인트가 최대한 앞에 있어야 합니다.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스트라이드와 릴리스 포인트 모두를 늘리기는 건 단기간에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릴리스 포인트를 낮추지 않고 최대한 앞에 두고 던진다는 느낌만 가져가도 결국 궤적이 타원형을 그리게 돼서 제구에 도움이 될 거라고 봅니다.”
“타원형…….”
한민석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들은 대로 야구 박사구나.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냐?”
“그냥 이것저것 주워들은 겁니다. 하지만 저도 고등학교 때 제구를 늘리려고 써먹은 방법이라 선배님한테도 도움이 될까 싶어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게 되는 거야? 방법이 있을 거 아냐?”
“기본으로 가야죠. 우선 벽을 보고 서서 릴리스 포인트가 될 지점을 찍어 놓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에다 수건을 묶어서 정확히 포인트를 수건으로 치는 겁니다. 수건의 궤적이 퍼져 나오면 스윙이 퍼져 나온다는 증거예요. 수건이 창으로 찌르듯이 나가야 제대로 스윙하는 겁니다.”
“하, 시즌 중에 섀도 피칭이라.”
“선배님 에이밍 향상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에이밍은 뭔데?”
“골반이 돌아가기 전에 상체가 피칭 준비를 마치고 고정된 자세를 말합니다. 에이밍을 수정하는 건 쉽지 않지만 타원형 스윙을 하다 보면 확실히 좋아집니다.”
한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 해 보지, 뭐. 지금보다 나빠질 것도 없는 거 같은데.”
“우선 코치님과 상의한 후에 진행하시는 걸 추천합니다. 코치님은 더 디테일한 훈련을 제시해 주실 거예요.”
“후, 그래. 그래야지. 여태 코치님 말을 쌩 깐 게 있어서 좀 그렇긴 하지만…….”
“연 코치님 성격 아시잖습니까? 그런 거 개의치 않으실 거예요.”
“그래……. 그래도 네가 말한 섀도 피칭 어떻게 하는지만 알려 줘 봐, 오늘 연습 좀 해 두게.”
“네, 어떻게 하냐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