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라는 벽 (3)
2013년 8월 13일.
사직, 폭스 vs 고트 6회 초.
점수는 15-4.
부산 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흥에 겨워 노래를 불렀다.
이에 반해 고트 팬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아, 오늘 고트가 참 힘든 날이네요. 선발도 불펜도 전혀 먹히질 않습니다.”
“대체 선발로 나온 임진필 선수가 무너진 게 너무 큽니다. 이래서 선발이 중요합니다. 선발투수는 함부로 바꾸는 게 아니에요.”
“2군에선 좋은 성적을 냈는데 1군의 벽이 높은 걸까요?”
“2군 성적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죠. 1군과 2군은 확실히 다릅니다. 2군 성적은 맛보기에 불과해요.”
“임진필 선수에 이어 주판석 선수까지 무너지면서 고트 마운드가 오늘 완전히 붕괴했습니다. 주판석 선수도 오늘 많이 아쉬웠죠?”
“공은 빨랐지만, 공이 빠른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폭스 타선의 공격력은 아무리 짜게 줘도 리그 평균 이상입니다. 제구가 안 되는 빠른 공은 폭스 선수들에겐 어렵지 않아요.”
고트의 벤치엔 임진필, 주판석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연신 한숨만 푹푹 쉬었다.
두 사람이 합쳐서 오늘 내준 점수만 11점.
주판석은 만루 홈런까지 내주면서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뒤이어 나온 불펜 이백찬마저 연이어 실점.
최종 스코어는 22-6.
고트의 대패였다.
* * *
“아이고, 죽겠다.”
샤워를 마친 김인환이 허리를 두드리며 나왔다.
송석현은 TV를 보고 있었다.
“안 씻어?”
“이것만 보고 씻게요.”
TV에선 오늘 야구 경기인 고트와 폭스의 하이라이트가 방영되고 있었다.
“넌 뭐 저런 걸 봐?”
“지금 안 보면 언제 본다구요.”
“그래도 오늘 같은 날 저걸 보냐?”
TV에선 임진필과 주판석이 폭스 타자에게 혼쭐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하이라이트는 주판석의 만루 홈런.
세상을 다 잃은 듯 고개를 돌려 공을 보는 장면이 클로즈업됐다.
“오늘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더했어요.”
“나는 대충 예상했어. 오늘 위험하구나, 하고.”
“왜요?”
“왜긴. 진필이랑 판석이는 아직 1군 깜냥이 아니야. 내가 타격 폼을 바꾸기 전에도 할 만한 수준이었는데, 뭘.”
“그래도 두 사람 다 2군에서도 잘하고 있고, 나름 장점도 있는데.”
“그건 다 그래. 2군에서 두각 한번 안 내 본 애가 몇이나 있겠냐? 1군에 올라온 애들은 다 2군 한 번은 쓸어 주고 올라온 애들이라고. 그런 애들도 1군에 와선 어버버 하다가 묻히는 게 다반사야. 그렇게 1, 2군 몇 번 왕복을 해야 나중에 1군에 적응하는 거지, 처음부터 1군에 적응하는 사람은……. 아, 너 같은 놈도 있긴 하네.”
“좋은 말도 있는데 왜 놈이에요, 놈은?”
“아무튼. 우리 팀 2군은 빛 좋은 개살구야. 2군 리그에서 성적이 좋으면 뭐 하냐. 1군에서 써먹을 애가 너무 없어. 특히 투수는 심하지. FA 보상 선수로 죄다 투수를 가져가니 괜찮은 투수가 남아 있을 리 있나.”
“왜 투수만 가져가요? 우리 팀 타자들이 그렇게 별론가?”
“어느 팀이든 투수는 항상 모자라니까. 한국에선 타자보다 투수지.”
송석현이 팔짱을 낀 채 TV에 시선을 돌렸다.
“폭스 타선이 진짜 장난 아니에요. 와, 오늘 무섭던데. 내일이랑 모레도 쉽지 않겠어요.”
“내일은 진오 나온다며?”
“네, 진오 선배가 요새 성적이 좋대요. 최근 성적은 셋 중에서 제일 낫다던데.”
“감독님도 대단하시네. 나 같으면 천운이랑 피시 바로 넣을 거 같은데. 폭스에서 2승은 챙겨 가야지.”
“밀어줄 때 확실히 밀어주실 생각인 거 같아요.”
“내일도 사직 불바다겠구만. 사직 불바다~ 이 바람에 실린~.”
“아, 진짜, 형. 불길하게.”
“네가 내일 만루 홈런을 한 여섯 개만 치면 이길 수 있어. 석현이 파이팅!”
송석현은 샤워를 마치고 숙소를 나와 걸었다.
고개를 숙인 채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누군가 송석현에게 아는 체를 했다.
“너 여기서 뭐 해?”
“음? 선배님은 여기서 뭐 하세요?”
송석현에게 말을 건 사람은 정진오였다.
“나는 그냥…… 뭐……. 넌?”
“저도 그냥 걷고 있었어요.”
“안 자?”
“잠이 안 와서요.”
“왜 잠이 안 와?”
송석현이 볼을 긁적였다.
“글쎄요. 좀 분해서? 오늘 같은 날은 내가 투수도 아닌데 속에서 열불이 나더라구요.”
“뭐…… 후…… 오늘은 투수들도 할 말이 없지.”
“아, 아니에요. 선배님들 뒷담화하는 거 아닙니다. 진짜요.”
“누가 뭐래? 나도 오늘 심란했어. 차라리 내일 경기 안 나갔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코치님은 나보고 나가라고 하네. 하.”
정진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군 마운드에 서는 게 이렇게 싫을 줄은 몰랐다.”
“선배님은 잘하실 거예요. 최근 성적 좋잖아요.”
“2군에서 아무리 잘해도 1군이랑 다른 거 같아. 진필이나 판석이가 2군에선 에이스 아니냐. 근데 둘이 그렇게 터질 줄 알았나.”
“최근 성적은 선배님이 더 좋잖아요.”
“그거야 운이지, 운. 아, 맞아.”
정진오가 손가락을 튕겼다.
“나 네 덕 많이 봤다.”
“제 덕요?”
“어, 너클 커브가 되게 잘 먹히고 있어. 네가 너클 커브로 던져 보라고 했잖아.”
“아아, 너클 커브가 잘 먹혀요?”
“2군에선 백 프로. 아예 감을 못 던데?”
“오오, 축하해요. 확실한 결정구를 만들었네요.”
“그러니까. 네 공이 크다. 내가 한번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널 봐야 말이지. 내가 1군에 올라와야 네게 감사 표시라도 할 거 아니냐.”
송석현이 웃었다.
“그 정도도 가지고 감사는요. 구종은 선배님이 개발한 거지, 제가 한 거 아니잖아요.”
“그래도 그게 도움이 많이 됐어. 긴가민가할 때 네 말 한번 믿어 보자 하고 해 봤거든.”
“확실한 결정구가 생겼으면 내일 기대해 볼 만하겠네요.”
“그래도 모르지. 1군이랑 2군이랑 다르니까. 내가 보기에 내 너클 커브 각이 별로 큰 거 같지도 않은데 애들이 생소해서 당한 거 같기도 하고, 그래.”
“오늘 최영경 선배 봤잖아요. 저번에는 우리 타자들이 쉽게 공략했는데 커브 들고 오니까 우리 타자들이 되게 어려워했잖아요. 좋은 커브는 웬만한 변화구 다 쌈 싸 먹는다니까요.”
“내가 최영경 선배만큼 던질 수 있으려나……. 그 선배는 2군에 있을 때부터 아주 2군 폭격하고 1군에서도 불펜 에이스까지 했던 사람이잖아. 나랑은 다르지.”
“길고 짧은 거 대봐야 알죠. 그리고 형은 좌완이잖아요. 야구에서 좌투수는 일단 먹고 들어가는 거 아닙니까? 하하.”
두 사람은 짧은 산책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가기 전 정진오가 송석현을 불렀다.
“내일 딱 3점만 내줘. 나머진 내가 해 볼게.”
“좋아요, 3점. 해 볼게요.”
“믿는다, 킹 오브 잠실.”
“아이, 그 별명 부르지 말라니까요.”
“사직에서도 한 방 부탁해.”
* * *
2차전 선발로 정진오가 예고되자 고트 팬들은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볼멘소리를 해 댔다.
“아니, 지금 시국이 어느 땐데 선발 콘테스트를 하는 거야?”
“감독 대행이라고 생각나는 대로 막 하는 거지.”
“주판석도 터지고, 임진필도 터지고, 우리 속도 터지고. 아오, 우린 왜 선발투수가 안 나오냐?”
“김정률 이후로 뚝 끊겼어. 선발이 씨가 말라 버렸어.”
“우리는 역시 사서 써야 하나?”
“이번에 FA 선발 나오는 애 있나?”
“없지. 불펜만 좀 나오고 없어.”
“사서 써도 안 되네. 이창훈, 한민석 다음도 준비해야 하는데.”
“그런데 정진오는 누구야?”
“몰라. 주판석도 뚜까 맞는 판에 이름도 없는 애를 올려서 뭐 하겠다는 거야?”
경기 시작 전.
송석현은 정진오의 공을 미트로 잡아내곤 활짝 웃었다.
어쩌면 오늘은…….
-플레이볼!
경기 시작과 함께 정진오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오늘도 고트는 대체 선발을 내세웁니다. 원래라면 마이클 피시 선수가 올라와야 하는데 함성훈 감독은 내일 올린다고 하네요.”
“오늘, 내일 피시, 멕킨지로 갔으면 고트가 위닝 시리즈도 노릴 만했을 텐데 함성훈 감독이 뚝심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예정대로 그냥 갑니다.”
“오늘 선발 정진오 선수는 콜업 된 세 명의 투수 중 2군 성적이 가장 떨어집니다. 대신 최근 성적은 좋아요. 컨디션이 좋은 거 같습니다.”
“과연 오늘 고트가 폭스의 타선을 잠재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폭스의 1번 타자는 박찬희.
초구 바깥쪽 높은 공을 쳐서 플라이 아웃.
2번 타자 김형남도 초구 몸 쪽 높은 공을 쳐서 플라이 아웃됐다.
“공 두 개로 2아웃을 뺏는 정진오 선숩니다. 오늘 출발이 좋네요.”
“하지만 지금 제구가 안 되고 있어요. 공이 자꾸 높게 가거든요. 이러면 위험합니다. 타자들도 높은 공이 오니까 배트를 내다 타이밍이 안 맞아서 플라이가 되긴 했지만 오늘 공이 내내 저렇게 높다면 고트는 크게 낭패를 볼 거예요.”
3번 타자는 1루수 김경심.
거포는 아니지만 선구안, 컨택, 장타 모두 균형 잡힌 밸런스형 타자였다.
‘포심. 하이볼.’
초구는 또 높은 쪽 포심 패스트볼.
김경심은 어깨를 움찔했지만 배트를 내진 않았다.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공이 높게 들어가네요.”
“이런 건 안 좋아요. 공을 낮게, 낮게 제구해야죠.”
“제구력 난조일까요?”
“폭스에는 강타자가 많습니다. 조심해야 돼요.”
제2구는 바깥쪽 낮은 코스.
김경심이 헛스윙했다.
-스트라이크!
송석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은 낮은 코스로 들어가는 체인지업이었습니다.”
“좋아요. 저렇게 낮게, 낮게 가야죠.”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에 몰린 김경심이 배트를 짧게 잡았다.
출루라도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정진오가 던진 공은 이번에도 높은 쪽 코스.
김경심이 스윙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삼구 삼진! 삼구 삼진이 나옵니다!”
“방금은…… 타자가 마음이 조급했던 거 같습니다. 커브가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왔는데 너무 마음이 급했어요.”
마운드에서 내려온 정진오가 송석현을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송석현은 주먹을 부딪치면서 엄지를 세웠다.
“거봐요. 통한다니까요.”
“그러게, 하하.”
1회 초 고트의 공격.
마운드에는 폭스의 선발투수 브렌트 나이브.
1번 타자는 이지성이었다.
“최근 폭스의 상승세에 기여하는 투수죠? 브렌트 나이브 선수가 선발로 나왔습니다.”
“직구도 빠르고 릴리스 포인트도 높아서 폭스 팬들이 많은 기대를 했는데 생각보다 성적이 너무 안 나왔었죠. 최근에 경기 내용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썩 좋은 성적은 아닙니다.”
“어제는 최영경 선수가 잘해 줬는데 오늘 나이브 선수가 폭스의 위닝 시리즈를 만들어 줄지가 관건이네요.”
이지성은 나이브에게 볼넷을 얻어 1루로 나갔다.
1루로 나간 이지성이 잔발을 놀리며 도루 시도를 하자 나이브는 연이어 견제.
네 번째 견제 때 공이 빠지면서 이지성은 2루까지 진루했다.
“아, 안 좋아요. 이러면 병살은 어렵게 되죠.”
“나이브 선수가 이게 문젭니다. 좋은 공을 가지고 있지만 자꾸 다른 게 발목을 잡아요.”
탕!
“안타! 안탑니다! 2루 주자는 홈으로! 타자 주자는 2루까지! 선취점 득점하는 고트!”
“설진일 선수의 벼락같은 스윙이었어요. 초구 좋아하는 선수한테 저렇게 높은 코스의 직구는 배팅볼이나 다름없어요.”
나이브는 다음 타자 김인환을 상대로 풀카운트 승부 끝에 삼진을 뺏어 내며 포효했다.
송석현이 타석에 들어서자 이번엔 포수 박진환은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포심. 인사이드.’
송석현을 거를 순 없어도 겁을 줄 순 있다.
나이브의 제구가 안 좋은 만큼 몸 쪽 공이 빠져도 그러려니 할 거다.
나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트를 향해 공을 힘껏 던졌다.
탕!
“좌측 담장! 좌측 담장! 좌측 담장~~~~ 넘어! 갔습니다! 송석현의 투런 포! 1회부터 3점을 뽑아내는 고트! 송석현의 투런 포로 오늘은 고트가 상큼한 출발을 신고합니다.”
“너무 한복판이었어요. 송석현 선수를 상대로 저런 공은 전혀 이해가 가질 않네요.”
포수 박진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내저었다.
송석현은 벤치로 돌아가 정진오를 보고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정진오도 활짝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냈다.
“오늘은 해볼 만하겠는데요?”
고트의 투수코치 연우식의 말에 함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경기는 끝까지 가 봐야 알죠.”
“진오가 의외로 공이 괜찮은 거 같습니다. 석현이가 좋다고 한 이유가 있었네요.”
“145km/h도 안 나오는 구속으로 하이 패스트볼을 구사한다……. 모험이지만 통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