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라는 벽 (2)
1회 말.
마운드에는 임진필.
1번 타자는 폭스의 박찬희.
송석현은 타석의 박찬희를 위아래로 훑었다.
스트라이드가 좁고 무게중심도 앞으로 쏠려 있다.
전형적인 컨택에 집중한 타자.
파이어볼러라면 몸 쪽 공 한두 개만 던져도 구위에 밀리기 일쑤일 테지만 오늘 투수는 임진필이다.
구속도 구위도 특별할 게 없다.
‘커브.’
변화구 하나로 타자를 체크해 본다.
팡!
-스트라이크!
“임진필 선수가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고 들어가네요.”
“커브가 괜찮네요. 각도가 괜찮아요.”
송석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상무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이유가 있다.
변화구의 완성도가 2군 수준을 넘었다.
‘포심.’
바깥쪽의 포심 패스트볼.
커브 이후에 빠른 공은 전형적이지만 커브가 눈이 익은 타자는 대처가 쉽지 않다.
나이 먹어서 구속이 떨어진 선발투수가 커브를 아끼는 이유다.
탕!
박찬희가 어깨를 돌리면서 공을 그라운드에 밀어 넣었다.
2루수가 몸을 날렸지만 공을 잡진 못했다.
“박찬희 선수가 안타를 신고합니다.”
“잘 노려 쳤네요. 좋은 코스로 들어온 공이었는데 욕심 없이 잘 친 거 같습니다.”
임진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송석현은 방금 상황을 복기했다.
좋은 코스에 좋은 공이 들어왔는데 타자가 쳐 냈다…….
박찬희가 맞추는 기술이 좋은 편이지만 파워는 부족한 유형이다.
그런 박찬희에게 1회부터 공을 맞는다는 게 영 불안하다.
“타석에는 2번 타자 김형남 선수가 들어옵니다. 강한 2번 타자죠?”
“예, 요새 맹타를 휘두르는 타잡니다. 폭스의 상승세를 이끄는 타자죠.”
김형남은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스트라이드를 넓게 잡았다.
강하게 칠 자신이 있단 얘기다.
‘슬라이더.’
송석현의 사인에 임진필이 외곽으로 슬라이더를 던졌지만 김형남은 배트를 내지 않았다.
“…….”
송석현이 미간을 좁혔다.
방금 슬라이더는 잘 미끄러져 들어왔다.
배트를 내지 않았다는 건 초구 변화구를 예상했든가, 초구를 두고 볼 심산이었단 얘기다.
노련한 타자다.
‘포심.’
송석현이 타자의 몸 쪽에 붙어 앉았다.
팡!
-볼. 인사이드.
김형남은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조금 깊었네요. 볼입니다.”
“김형남 선수가 오늘 공을 잘 고르네요. 역시 잘 치는 선수들은 공도 잘 골라요.”
“빠른 주자를 1루에 두고 볼 두 개. 이제 주자가 뛸 타이밍이 나옵니다.”
임진필의 퀵 모션은 괜찮은 편이다.
1루 주자 박찬희가 투수의 타이밍을 재느라 아직 뛰지 않았지만 이제는 슬슬 뛸 타이밍을 잡을 때가 왔다.
‘체인지업.’
주자와 타자가 노리는 건 바깥쪽 직구일 거다.
한 번 더 꼬아서 체인지업.
임진필이 던진 공이 김형남의 배트에 맞았다.
“2루수! 2루수가 잡고 토스! 유격수가 베이스 밟고 1루로! 4-6-3 병살이 나옵니다!”
“좋은 기회를 병살로 날리네요. 폭스는 이게 아쉽죠. 병살이 많습니다.”
“고트는 위기를 기회로 살리네요.”
투수가 야수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잘 빠진 공을 잘 잡았다.
“정동규 선수의 수비는 역시 발군이네요. 방금은 빠질 거라고 봤거든요.”
“고트에서 드래프트 1라운드로 뽑은 선수 아닙니까. 입단하자마자 1군으로 데뷔하고 주전까지 꿰찬 선수죠. 요새 2루수에 공격력이 출중한 선수들이 등장해서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수비가 안정적인 알토란같은 선숩니다.”
병살을 잡아냈지만 송석현의 표정은 어두웠다.
방금 체인지업은 애매했다.
정석적인 체인지업이지만 낙폭도 구속도 특별할 게 없다.
김형남이 직구 타이밍에 쳐서 병살을 만들긴 했지만, 정동규의 수비 덕에 위기를 넘겼을 뿐이다.
“후우.”
다르다.
이창훈, 한민석 같은 투수의 공을 받다가 임진필의 공을 받아 보니 위기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임진필의 구위는 컨디션 안 좋은 한민석과 비슷하다.
다행인 것은 한민석보단 제구가 더 좋다는 점 정도.
정천운이 5선발로 안착하면서 2군에서 잘하면 1군에서도 통하는구나, 쉽게 생각했는데 1군과 2군의 차이가 이 정도였나 싶다.
탕!
탕!
“안타! 안탑니다! 연속 안타를 허용하는 임진필 선수. 폭스의 타격이 역시 만만치 않네요.”
“김경심, 최재국 선수가 폭스의 KS포죠. 여기에 오충진 선수까지 더하면 리그 수준급 클린업이 됩니다.”
“병살을 잡자마자 실점 위기로 몰리는 고틉니다.”
폭스의 클린업은 예상대로 강력했다.
임진필의 포심이 타자의 배트를 이겨 내지 못한다.
임진필의 변화구는 좋은 편이지만 투수는 구종의 절반 이상이 포심이다.
포심이 안 통한다는 건 50%를 잃고 시작하는 거나 다름없다.
탕!
“중견수 머리 뒤로! 뒤로! 뒤로! 잡아냅니다! 이지성의 슈퍼 플레이! 담장 앞에서 기어이 잡아내고 맙니다!”
“오늘 고트의 수비가 견실하네요. 그저 방망이만 좋은 팀이 아닙니다. 공수 모두 균형이 잡혀 있는 팀이에요.”
“폭스가 득점 기회를 잡고도 득점을 하지 못합니다. 아쉽겠어요!”
공수 교대.
고트의 선두 타자는 송석현.
투수 최영경은 송석현에게 초구로 몸 쪽 빠른 공 하나를 보여 줬다.
-스트라이크!
“송석현 선수에게 초구를 잡고 시작하는 최영경 선숩니다. 오늘 컨디션이 좋아서 그런지 공도 시원시원하게 던지네요.”
폭스의 포수 박진환이 입을 열었다.
“오늘 영경이 공이 좋아. 쉽지 않을걸.”
“네, 오늘 쉽지 않네요.”
송석현의 김빠지는 대꾸에 박진환이 입맛을 다셨다.
‘스플리터.’
최영경의 결정구, 스플리터.
몸 쪽 빠른 공 다음에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처럼 잘 먹히는 레퍼토리는 없다.
자신감이 붙은 최영경은 지체 없이 공을 던졌고, 송석현도 가볍게 배트를 내밀었다.
탕!
“좌중간을 꿰뚫는 안타! 송석현 선수는 1루를 밟고 2루까지 넉넉하게 달립니다.”
“스플리터가 잘 떨어졌거든요? 분명 볼인데 송석현 선수가 이걸 쳐 내네요.”
“떨어지는 공에 유난히 강한 송석현 선숩니다.”
박진환이 한숨을 쉬었다.
이걸 친다고? 볼을?
이 정도면 노려서 쳤다고밖에 볼 수 없다.
노림수가 읽힌 건가?
폭스는 유선호를 볼넷으로 1루로 보내고 최재완과 승부했다.
‘포심. 몸 쪽.’
초구부터 몸에 바짝 붙는 공.
-스트라이크!
“최영경 선수가 오늘 구속도 잘 나오고 구위도 좋습니다. 비록 안타와 볼넷을 내줬지만 망설임 없이 공을 던지네요.”
“최재완 선수도 요새 컨디션이 좋거든요. 최영경 선수가 신중하게 상대해야 할 겁니다.”
제2구는 커브로 스트라이크.
제3구는 스플리터로 삼진.
최재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타석에서 물러섰다.
“우리가 아는 최영경 선수가 맞나 싶네요. 오늘은 에이스라고 불러도 무방하겠어요.”
“커브 하나 추가했을 뿐인데 타자들이 맥을 못 추네요. 이러면 오늘 고트, 쉽지 않겠는데요?”
다음 타자 오진영이 커브를 쳤지만 병살.
공수 교대였다.
“후.”
함성훈 감독이 입맛을 다셨다.
폭스도 5선발 최영경이니만큼 오늘 경기는 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운에 기대고 싶을 때면 꼭 더 험난한 일정이 기다리는 법이다.
폭스는 내일부터 용병 두 명이 연달아 선발로 나온다.
폭스전 목표는 최소한 1승 2패.
폭스전 1승을 노린 건 바로 오늘 경기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오늘 최영경이 최고의 컨디션으로 올라오다니.
“타석에는 장성구 선수가 들어옵니다. 요새 잘 치고 있죠?”
“무서운 6번 타잡니다. 하위 타선이라고 만만하게 볼 수 없는 타자예요. 성적만 보면 클린업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송석현은 좌타자 장성구의 발을 바라봤다.
타석에 붙어 리듬을 타고 있다.
몸 쪽 공에 자신 있다는 얘기다.
좌타자를 상대하기 위해 우투수가 던질 수 있는 변화구는 체인지업이나 커브.
체인지업은 밋밋하니 패스한다면 남는 건 커브 하나.
문제는 폭스도 임진필의 체인지업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을 거란 사실이다.
포심 구위로 찍어 누르지도 못하는데 남는 변화구는 커브 하나.
어떤 사인을 내야 할지 머리가 아프다.
‘포심. 아웃사이드.’
포수가 흔들리면 투수도 흔들린다.
송석현이 바깥쪽에 미트를 가져다 댔다.
자신 있게 직구를 던지라는 사인이었다.
팡!
-볼. 아웃사이드.
임진필의 공이 빠진다.
오늘 제구가 좋은 임진필이다.
다시 한번 포심을 요구해 본다.
팡!
-볼. 아웃사이드.
연달아 빠지는 공.
송석현은 이게 무슨 뜻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투수도 알고 있는 것이다.
오늘 자기 공으로 폭스 타자들을 이기기 힘들다는 걸.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타자를 피해 가는 거다.
‘커브.’
-볼. 로우.
‘커브.’
-볼. 로우.
“스트레이트 볼넷. 임진필 선수가 선두 타자에게 볼넷을 내줍니다.”
“제구가 흔들리는 걸까요? 터무니없는 공을 던지고 있습니다.”
송석현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투수가 겁을 먹었다.
고작 1이닝 만에 투수의 기가 꺾였다.
1군의 벽을 온몸으로 체감한 거다.
프로 무대에선 뚜렷한 약점이 없는 선수보다 확실한 강점이 있는 선수가 선호되는 법이다.
아쉽게도 임진필에겐 1군에서 내세울 강점이 부족했다.
볼넷.
볼넷.
임진필은 뒤 타자들에게 연속 볼넷을 내주면서 무사 만루를 만들었다.
송석현이 마운드로 올라갔다.
“어차피 9번 타자예요. 여기서 승부 안 하면 앞으로 더 힘들어요.”
“어, 어.”
“2점은 준다 생각하고 플레이하시죠.”
“그래.”
임진필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다음 타자는 9번 포수 박진환.
포수로서 수비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는 타자였지만 타격은 달랐다.
탕!
“좌익수 뒤로! 뒤로! 뒤로! 완전히 빠지는 안타! 3루 주자, 2루 주자, 1루 주자까지! 싹쓸이 2루타가 나옵니다!”
“이게 박진환 선수의 매력이죠. 일발 장타가 있는 포수. 장타력은 보장된 포숩니다. 1년에 홈런 열 개 이상은 칠 수 있는 포수예요. 최근에 워낙 좋은 포수들이 나오다 보니 박진환 선수가 가려져 그렇지, 이 정도 장타력 있는 포수는 귀합니다.”
“박진환의 싹쓸이 2루타로 폭스가 3-0으로 먼저 앞서가기 시작합니다. 오늘도 타격전이 될까요?”
“벌써 타격전의 가능성이 보입니다. 오늘도 사직이 아주 뜨거울 거 같네요.”
임진필은 이후 1실점을 추가하며 2회 말을 끝냈다.
무사 만루에서 4점.
벤치로 돌아온 임진필은 한쪽 구석에 앉아 수건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
고트의 벤치가 오랜만에 침묵에 휩싸였다.
그동안 마운드가 부진하면 방망이가 멱살을 잡고 점수를 만들어 냈지만 오늘은 쉽지 않았다.
3회 초, 최영경에게 볼넷 하나만 얻어 낸 게 전부.
결국 3회 말, 임진필은 연달아 볼넷 2개를 내주고 강판됐다.
“판석이로 가시죠.”
임진필은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벤치 밖을 나갔다.
마운드에는 주판석.
최근 구속이 더 올라 150km/h도 쉽게 찍는다는 얘기도 있는 투수였다.
“고트가 오늘은 쉽지 않습니다. 마운드도 타선도 부진하네요.”
“임진필 선수가 폭스의 타선에 결국 발목이 잡혔습니다. 역시 폭스의 타선이 만만치 않아요.”
“지금 올라온 주판석 선수는 고트가 애지중지하는 비밀 병기라고 하네요. 150km/h을 넘게 던지는 투순데요.”
“임진필 선수와는 전혀 다른 유형이죠. 힘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입니다. 폭스 타자들에겐 오히려 주판석 같은 선수가 잘 통할 거 같습니다.”
팡.
팡.
연습 투구부터 송석현의 미트를 울리는 공.
주판석의 구위는 달랐다.
제구는 들쑥날쑥하지만 이제 갓 스물한 살의 투수에게 제구까지 완벽하길 바라는 건 무리다.
“타석에는 4번 타자 최재국 선수가 들어옵니다.”
“최재국 선수도 힘이 어마어마한 선수죠? 김인환 선수 정도를 빼면 힘으로는 더 강하다고 볼 선수가 마땅치 않을 겁니다.”
“150km/h를 던지는 파이어볼러와 4번 타자의 대결. 재밌겠는데요?”
송석현은 주판석에게 바깥쪽 포심 사인을 냈다.
주판석은 다리를 힘차게 들고 공을 던졌지만 한가운데.
최재국은 공 하나를 지켜봤다.
-스트라이크!
송석현은 미트에 박힌 공을 빼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이 정도 제구가…… 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