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죽지세 (7)
싱거울 거 같았던 피닉스와의 3차전은 접전이었다.
3회까지 5-4.
피닉스의 투수 김민혁의 부진이야 모두가 예상한 바지만 한민석의 부진은 심각했다.
원래 좋지 않던 제구가 더 엉망이고 잘 들어간 직구마저 통타당했다.
3회까지 투구 수 일흔일곱 개.
함성훈 감독은 3회를 마친 후 한민석을 강판시켰다.
“하…….”
한민석은 바로 벤치 뒤로 나가 버렸다.
“우리 감독님 판단이 장난 아닌데?”
김정률의 말이었다.
송석현은 무슨 말이냐며 되물었다.
“하필 지금 딱 2군 선발 셋이 콜업됐잖아. 한창 팀이 잘나가던 시기에 선발만 셋 콜업. 뻔하지. 대체 선발을 찾겠다는 거 아냐.”
“근데 타이밍이 좀 위험하지 않나요? 가장 중요한 시즌 말인데.”
“보통은 일단 밀고 나가지. 아니면 불펜으로 때우든가. 지금은 있는 거 없는 거 다 끌어와서 때려 박는 시기잖아.”
“감독님이 참……. 어떤 의미에선 FM인거 같아요.”
“다른 의미로 FM이지. 알아도 할 수 없는 일을 그냥 해 버리니까. 눈치도 상당해. 민석이가 부진한 타이밍에 바로 콜업.”
“민석 선배는 괜찮겠죠?”
“포수가 가장 잘 알지. 공 어땠는데?”
“확실히 좀 무뎌졌어요.”
“어느 정도? 평상시가 100이라면 지금은?”
“70?”
“70이면 심하네.”
“그런데 시즌 중반 이후로 계속 들쑥날쑥했어요. 어떤 날은 110이었다가 어떤 날은 80이었다가.”
“원래 민석이가 롤코 스타일이긴 하지.”
“사실 창훈 선배도 좀 구위가 무뎌졌어요. 갑자기 두 사람만 그런 건 이상하지 않아요?”
김정률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상하긴 해도 아주 이상한 건 아니지. 둘 다 동갑인데다 공도 많이 던졌으니까 비슷한 시기에 퍼질 순 있지.”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 로테이션 빠지면 우리 진짜 힘들어지는데.”
“어떤 팀이든 시즌 초랑 시즌 말이랑 똑같은 전력으로 끝나는 경우는 아예 없어. 어떻게든 굴러가게 돼 있어. 그게 야구야.”
경기는 난타전으로 흘러갔다.
한민석이 내려간 후 파이어볼러 이백찬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구위만으론 리그 상위권의 투수지만 빗맞은 안타 하나, 실책 하나, 볼넷으로 흔들리더니 연이어 실점했다.
“후, 피지컬은 좋은데 멘탈이…….”
함성훈 감독이 혀를 찼다.
사람은 착한데 야구 선수로서의 멘탈이 약하다.
사람 착한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운동선수가 마냥 착하기만 하다면 써먹을 곳이 없다.
이백찬은 추가로 3실점을 더한 뒤 마운드를 내려왔다.
2.1이닝 5실점.
고트 타선이 추가 점수를 연이어 뽑지 않았다면 진즉에 강판됐을 성적이었다.
경기는 어느덧 8회.
점수판에는 12-11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 난타전이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고트가 잘할 거라곤 예상했지만 피닉스도 오늘 선전하네요.”
“양 팀 선발투수 모두 조기 강판될 정도로 맹렬한 타격전이었습니다.”
“한민석 선수가 최근 좀 부진한 거 같네요. 이러면 고트의 포스트시즌 예상이 어그러질 텐데요.”
“고트는 오늘 이기고 있지만 편치 않은 심정일 거 같습니다.”
“8회 초 선두 타자는 이지성 선수가 들어섭니다. 고트는 1번 타자부터 시작이니만큼 또 한 번 기회를 잡았습니다.”
피닉스의 불펜은 좌투수 양창현.
좌타자 상대로 좌투수를 올렸지만 이지성은 2루수 머리를 넘기는 단타로 1루로 출루했다.
2번 타자 설진일이 초구 직선타로 병살.
끊긴 흐름을 이어 간 건 김인환이었다.
“우측 담장! 넘어갑니다! 김인환의 솔로포! 잠시 주춤했던 고트 타선에 다시 불을 붙이네요.”
“김인환 선수가 직구는 아무리 빨라도 놓치지 않습니다. 직구 킬러예요.”
“김인환 선수의 홈런으로 13-11. 2점까지 점수를 벌립니다.”
“송석현 선수 대신 김인환 선수를 선택해서 승부한 건데 김인환 선수도 쉬운 선수가 아니죠.”
“KS포 아니겠습니까?”
피닉스 벤치에서 한숨을 새어 나온다.
타순은 송석현, 유선호.
감독은 송석현에게 승부하라는 사인을 냈다.
솔로 홈런을 맞는 게 낫지, 여기서 또 장작이 쌓여 점수 차이가 벌어지면 흐름이 넘어간다는 판단이었다.
이제 8회다.
흐름을 넘겨주면 되찾을 방법이 없다.
탕!
“우측 담장! 우측 담장! 또 넘어갑니다! 송석현의 솔로 홈런! 14-11. 3점 차로 벌리는 고틉니다.”
“송석현 선수에게 너무 정직한 승부를 했어요. 저렇게 정직하게 들어오는 직구는 송석현 선수에게 맛 좋은 먹잇감이죠.”
“병살로 끊긴 흐름을 KS포가 다시 이어 줍니다.”
“이러면 고트가 오늘 경기에서 조금 안심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다음 타자 유선호가 2루타로 출루한 뒤 최재완의 2루타로 득점.
점수는 15-11.
야금야금 한 점씩 도망가는 고트에 피닉스 감독은 눈가를 매만졌다.
고트에선 필승조 고진석을 8회 말부터 올리면서 확실히 잠그는 걸 택했다.
경기 결과는 15-12.
고진석이 경수인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했으나 그 이상의 실점은 없었다.
경기는 치열했으나 마지막 승자는 고트였다.
“피닉스와의 3연전 스윕에 성공하면서 고트가 4위를 넘어 단독 3위로 치고 올라갑니다. 이렇게 되면 1위 페가수스, 2위 스콜피언, 3위 고트, 4위 울브스가 됩니다. 1위부터 4위까지 4경기 차밖에 되지 않는 촘촘한 순위표가 완성되네요.”
“이제는 누가 잘하느냐보다 누가 덜 못하느냐가 될 겁니다. 여기서 실수하는 팀, 한마디로 연패에 한 번 빠지는 팀은 다시는 4위권 안에 못 들어올 수 있어요.”
“한때 6위까지 처졌던 고트가 단독 3위로 올라서면서 한국시리즈 직행의 가능성도 열렸습니다.”
“다음 주가 고트에게 중요한 한 주가 될 거 같습니다. 폭스와 페가수스거든요. 다음 주마저 이렇게 스윕 두 번을 해 낸다면 단독 1위도 가능합니다.”
“1위 팀을 잡게 되면 1위 팀이 되는 거죠.”
“모든 게 다 잘 풀리네요, 고트. 파죽지세를 막을 팀이 없어 보입니다!”
* * *
“후우.”
다음 날 아침.
월요일이라 야구 팀이 쉬는 날인데도 함성훈은 잠실 야구장에 출근해 있었다.
한민석이 어제 새벽 허리를 다쳐 응급실을 방문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지만 1~2주의 휴식을 권고받았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전화로 부상을 알리는 한민석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괜찮아. 이참에 푹 쉬고 올라와. 2주 풀로 채워. 포스트시즌 준비한다고 생각해.”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은 후 함성훈이 한숨을 쉬었다.
운영 팀장 김학인은 함성훈의 눈치를 보며 커피를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함성훈은 커피를 받아 들고 쓴웃음을 지었다.
“뭐,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쉬는 게 낫지.”
“아이고, 참. 하필 지금 중요한 시기에.”
“술 먹고 사고 안 친 게 어딥니까? 이 정도면 건전한 사고죠.”
“이거 기사 날까 봐 제가 다 겁이 납니다. 배팅볼 치다가 미끄러져서 허리 다치는 건 또 뭡니까, 투수가?”
“후, 본인도 답답했나 보죠.”
“이거 참. 감독님께 제가 다 면목이 없네요.”
“김 팀장님이 면목 없을 게 있나요.”
김학인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계속 함성훈의 눈치를 봤다.
“무슨 할 말 있으세요?”
“……음, 흠흠.”
“하세요. 숨기시지 마시고.”
김학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감독님도…… 들으신 걸로 압니다.”
“감독 물색하는 거요?”
“……네, 들으셨죠?”
“제 귀에 안 들어올 수 있습니까? 물밑으로 조용히 진행하는 것도 아닌 거 같던데.”
“죄송합니다. 감독님께는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위에서 지시가 내려와서.”
“할 거면 아예 숨겨서 하든지. 저야 어차피 올해 끝나면 잘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소문이 나면 팀 운영이 되겠습니까? 제가 좋자고 하는 게 아니라 제 권위가 떨어지면 팀 운영이 어려워지는 건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성적이 좋아진 건 감독님 덕이 큰데 사장님이나 단장님이나 그런 건 생각하지 못하는 거 같네요. 그래도 감독님, 감독님께서 성적을 내시면 프런트에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한국시리즈 우승이 아니더라도 1, 2위 안에만 든다면 저희가 언론 쪽에 잘 흘려 보겠습니다.”
함성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갈 사람이고 팀장님이나 프런트 직원들은 여기서 쭉 계실 분들인데 윗분들 심기를 건드릴 필요 있나요.”
“그래도 이건 아니죠. 아무리 사장님, 단장님이 야구를 잘 모르셔도 그렇지 상도덕에도 어긋납니다.”
“저를 위로하시려고 하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저는 감독 한번 해 본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것도 프로야구 최고 인기 팀 아닙니까? 이 정도 커리어면 평생 만족하고 살 수 있습니다.”
김학인이 구레나룻을 긁적였다.
“정말 괜찮으세요? 안 서운하세요?”
“서운하죠. 저라고 그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래도 이 나이 먹었으면 순리대로 살아야죠. 안 되는 일에 부딪치고 싸울 정도로 제가 여유 있는 건 아니라서요.”
“후.”
“그러니 제 걱정 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리 언론에 잘 흘려 놓겠습니다. 사장님, 단장님이 찍어 누르신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저희도 저희 선에서 최선을 다할 겁니다. 좋은 감독님을 놓칠 순 없죠.”
“말만이라도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우린 성인이잖습니까. 말랑말랑한 의리나 선의에 밥줄을 걸 나이는 아니죠.”
김학인은 한숨을 쉬었다.
“이거 참. 그릇이 너무 크십니다, 너무 크셔. 후우.”
“일단 닥친 것부터 생각하시죠. 민석이 부상당한 거 잘 포장해서 내 주세요. 배팅볼 치다가 미끄러져서 허리 삐끗했다. 쪽팔리잖아요. 구단도, 민석이도.”
김학인과 헤어진 후, 함성훈은 집으로 돌아갔다.
대체 선발을 미리 올려놨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임진필, 주판석, 정진오 중에 한민석을 대체할 사람은 없을 거다.
한민석은 어느 팀이든 3선발은 가능한 자원이다.
3선발감 선발투수가 2군에서 뚝딱 나온다면 투수로 골머리를 썩을 구단은 없다.
완벽한 대체는 안 된다.
부족함을 채우는 수준만 돼도 만족이다.
셋 중에 하나라도 건질 수 있을까?
파이어볼러 주판석이라면, 한민석의 스물한 살 때보다 더 낫다는 주판석이라면 기대를 걸어 볼 수 있을까?
야구를 안 하는 날이야말로 야구로 가장 많은 생각을 하는 날 같다.
야구하지 않는 날에는 야구 생각 없이 푹 쉬어야 제대로 리프레시 되는 건데…….
선수들도 자기처럼 머리 싸매고 고민할까?
* * *
“괜찮다니까,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월요일 휴일을 맞아 송석현은 역사적인 첫 데이트를 기대했으나 김나영과 함께 간 곳은 만화방이었다.
“그래도 좀 좋은데 가지. 놀이동산도 가고 싶다며.”
“그런데는 너 알아보는 사람 많아서 안 돼.”
“알아보면 어때. 내 여자 친구나 이렇게 예쁘다 자랑하고 좋지.”
나영이의 볼이 빨개진다.
“뭔 소리야.”
“첫 데이튼데 그래도 좀 화사하고 그런 데를 가지 굳이 이런 데를…….”
“여기도 좋아. 나 이게 꿈이었어. 같이 누워서 만화책 보고 하는 거.”
“이게 꿈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아?”
“난 좋다니까. 그리고 벌써 너 기사 뜨고 그래 봐야 좋은 게 뭐 있겠어? 지금은 야구에만 집중할 때잖아.”
“뭐야. 벌써 내조해?”
“내조가 아니라 나 때문에 괜히 너 구설수 올라가는 거 싫어.”
“구설수는 무슨. 사귀는 게 구설수야? 그리고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연예인보다 네가 더 기사 많이 뜨는 건 알고 있어?”
“내가?”
“본인만 모르지. 으이구.”
김나영이 송석현의 볼을 꼬집었다.
송석현은 슥 주변을 보더니 김나영의 볼을 잡고 입을 맞췄다.
“뭐야?”
김나영이 놀라서 되묻자 송석현이 배시시 웃었다.
“여기 굴방이 좋긴 하네. 커튼도 있어서 안 보이고.”
“야, 그래도 사람 다니는 덴데 뭐 하는 거야?”
“여자 친구랑 뽀뽀 좀 한 거 가지고 뭘.”
김나영의 얼굴을 빨갛다 못해 터질 거 같았다.
“다음엔 놀이동산도 가고 단풍 구경도 가고 그러자. 스캔들이고 그런 게 뭐가 대수야.”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내가 야구 선수지 연예인인가? 그래도 스캔들 나면 어때. 우리가 그냥 연애만 하고 그럴 사이도 아니잖아. 안 그래?”
펑!
김나영의 붉은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친구 송석현이 아닌 남자 친구 송석현은 직구다.
몸 쪽 꽉 찬 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