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죽지세 (6)
피닉스와의 2차전.
경기 시작도 전에 이미 고트의 우세승을 점치는 전문가와 팬들이 줄을 이었다.
고트는 이미 상승 가도다.
선발 라인업도 에이스 이창훈 대 방어율 6점대의 김우민.
경수인을 제외하곤 라인업에 희망이 없는 피닉스와 리그 최고의 클린업을 가진 고트.
경기가 시작되자 고트는 피닉스 선발 김우민에게 가차 없었다.
안타, 안타, 안타, 안타.
안타 네 개로 2점.
유선호의 병살이 아니었다면 타자 일순도 가능한 흐름이었다.
고트는 1회에 총 4점을 뽑으면서 선발투수 이창훈의 어깨를 가볍게 했다.
“이창훈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왔습니다.”
“FA로 고트로 온 후에 그야말로 FA 모범생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용병 투수가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자기 몫은 확실히 해 주고 있어요.”
“고트에 이창훈 선수가 없었다면 참 많이 곤란했을 거 같아요.”
“하하, 그렇죠. 그만큼 이창훈 선수는 좋은 선숩니다. 선발투수로 모든 걸 갖췄어요. 이닝 소화 능력, 안정감 다 좋아요.”
타자가 들어선다.
1번 타자 강영호.
중견수로서 수비는 좋은 편이지만 타격은 빈말로라도 좋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송석현은 1구로 포심 패스트볼을 요구했다.
이창훈은 외곽에 공 하나를 던졌다.
탁!
강영호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쳤지만 파울.
송석현의 눈이 3루 라인을 따라 공을 좇았다.
“1구 파울입니다.”
“투수의 구위에 밀렸죠?”
송석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강영호 같은 타자에게 1구부터 앞으로 나가는 파울을 내준다…….
평소의 이창훈이 아니다.
연습 투구부터 심상치 않더니 역시나다.
구위가 죽었다.
원래 구위로 찍어 누르는 파워 피처는 아니지만 타자 일순이 돌기 전까진 공략이 어려운 투수였다.
경기 전, 이창훈은 자기 손가락을 보여 주며 말했다.
“간단한 건초염이었어. 이제는 괜찮아. 별거 아냐. 그때 이후로 게임도 끊고 손을 애지중지하고 있으니까.”
건초염은 작은 문제였다.
이창훈의 구위 자체가 무뎌지기 시작한 게 큰 문제다.
건초염은 그저 도화선이었나.
‘체인지업.’
한 가닥 희망을 걸어 본다.
이창훈의 체인지업에 강영호는 헛스윙.
‘커브.’
커브에도 헛스윙 삼진.
송석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화구는 여전하다.
저번 경기 유독 날카로웠던 체인지업도 여전하다.
이 정도면 직구 구위가 좀 줄었다고 해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첫 타자 강영호 선수를 삼진으로 잡아내는 이창훈 선숩니다. 시작이 좋은데요?”
“피닉스 타자들은 큰 욕심을 버리고 우선 1루로 나갈 생각을 해야 합니다.”
‘포심.’
외곽에 다시 한번 포심을 요구한다.
이창훈의 공은 정확히 미트로 들어온다.
제구력도 여전하다.
송석현은 다행이라는 심정 반, 씁쓸한 심정이 반이었다.
제구력까지 괜찮다면 컨디션의 문제가 아니다.
컨디션의 문제라면 휴식을 하면 나아지는 법이다.
컨디션의 문제가 아니라면 정말 힘이 떨어진 거다.
시즌 후반이라 단순히 힘이 떨어진 건지, 노쇠화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직 시즌이 끝나려면 멀었다.
‘체인지업.’
이창훈의 체인지업은 뚝 떨어졌다.
피닉스의 2번 타자 김진필이 공을 건드리면서 땅볼.
4번 타자 경수인을 제외하면 가장 타격감이 좋은 타자가 김진필이다.
타격감이 좋은 덕에 헛스윙 대신 공을 맞춰서 땅볼이 됐다.
“후.”
송석현이 숨을 내뱉는다.
타석에 들어설 때보다 더 긴장된다.
구위가 떨어진 투수의 상태를 숨기면서 경기를 진행해야 한다.
오늘 이창훈의 직구는 좋게 말해도 괜찮다고 할 수 없다.
직구는 보여 주고 변화구로 승부한다.
“3번 타자 홍찬열 선수가 나옵니다. 일발 장타가 있는 선수예요.”
“타율을 떨어져도 한 방이 있는 타자, 무섭죠. 신중하게 상대해야 합니다.”
‘커브.’
선구안이 떨어지는 타자들은 보통 초구를 노리고 들어온다.
투수들은 초구 스트라이크에 대한 욕구가 큰 편이다.
타자들은 초구를 잘못 노렸다가 1구 만에 아웃을 당하면 낭패인지라 초구를 지켜보는 경향이 있다.
선구안이 떨어지는 타자들은 이를 역이용해 초구를 노려서 친다.
팡!
-스트라이크!
“헛스윙! 큰 커브에 헛스윙이 나옵니다.”
“이창훈 선수의 커브 각은 이미 정평이 나 있죠. 노리지 않으면 공략 어려워요.”
‘포심, 인사이드.’
한 방 있는 타자에게 몸 쪽 빠른 공.
위험한 선택이지만 오늘 계속 직구를 보여 주기 용도로만 쓸 순 없는 법이다.
상대가 이창훈의 직구 구위가 별로라는 걸 인지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몸 쪽에 빠지는 공을 보여 주면서 타자가 아예 직구를 노리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강타자 상대로 몸 쪽을 노릴 만큼 직구 구위가 괜찮다는 인식을 심어 줘야 한다.
팡!
-볼, 인사이드.
“홍찬열 선수가 깜짝 놀라네요. 너무 깊었어요.”
“저 정도면 위협구 같은데요……. 타자를 일부러 맞힐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 그런 행위는 자제하는 게 좋죠.”
많이 깊었지만 타자에게 충분한 위협이 됐다.
다음 공은 외곽의 체인지업.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헛스윙 삼진이 나옵니다.”
“안쪽에 빠른 공 하나 보여 준 다음에 바깥쪽에 떨어지는 변화구. 정석적인데 이게 통합니다.”
“고트는 1회 세 타자로 이닝을 마무리하네요. 역시 에이스 이창훈입니다.”
이창훈은 벤치로 돌아오자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송석현이 옆에 자리 잡았다.
“오늘 직구가 좀 겉도네.”
송석현에게 들으라는 듯 은근한 목소리.
투수 본인도 자신의 상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럼 오늘은 변화구 위주로 가시죠. 오늘 변화구 좋은데요?”
“건초염이 아직 다 안 나았나……. 후유증이 있나 봐.”
“뭐든 후유증이라는 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검지를 들고 던져야 하나?”
투수는 자존심으로 먹고사는 존재다.
자신의 구위가 떨어진 걸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컨디션 탓으로 돌린다.
송석현은 고개를 들어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오늘 페가수스나 스콜피언 같은 팀과 경기를 했다면 1회를 넘기기가 어려웠을 거다.
고트가 1회부터 파죽지세로 밀고 나가는 바람에 경기 흐름이 고트로 넘어왔다.
피닉스 선발 김우민은 구속도 빠르지 않았고 제구도 좋지 않았으며 결정구도 밋밋했다.
어제 정광우에 눌려 있던 타선의 대폭발.
2회 초, 김우민은 3실점 추가했다.
피닉스 벤치에서 투수코치가 나와 마운드를 방문했지만 또 2실점.
“피닉스에선 그대로 김우민 선수를 밀고 나가려나 보죠? 교체는 없습니다.”
“이미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진 터라 오늘 경기에서 김우민 선수에게 기회를 주는 거 같습니다.”
“2회까지 9득점. 고트의 타선이 정말 무섭긴 무섭네요.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KS포를 빼면 타선의 무게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습니까?”
“선순환이죠. 중심 타선이 잘하다 보니 투수들이 승부를 피하게 되고, 앞뒤 타자들에게 좋은 기회가 많이 가는 겁니다.”
2회 말.
피닉스의 선두 타자는 경수인.
송석현이 커브 사인을 냈다.
도리도리.
이창훈이 거절했다.
본인이 낸 사인은 직구.
경수인과 승부해 보겠다는 심산이다.
‘직구, 아웃사이드.’
큰 점수 차에 투수가 한번 해보겠다는데 말릴 필요는 없다.
홈런 하나 맞아도 1점.
초구를 잘 노리지 않는 경수인이라면 초구부터 포심을 던지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팡!
-스트라이크!
송석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이 정도 제구라면 직구 구위가 조금 무뎌졌어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이래서 정통파 투수가 귀한 건가.
젊었을 적엔 구위로 찍어 누르고, 나이가 먹어선 제구와 레퍼토리로 버틴다.
-체인지업.
경수인을 상대로도 체인지업이 버틸 수 있는지 시험해 본다.
-부웅!
-스트라이크!
“이창훈 선수가 경수인 선수를 상대로 빠르게 카운트를 잡아냅니다. 오늘 이창훈 선수의 어깨가 가볍네요.”
“이렇게 큰 점수를 얻어 내면 투수의 등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죠. 기운이 펄펄 솟을 겁니다.”
체인지업이 업그레이드된 게 확실하다.
전화위복이라고 하던가.
건초염으로 제대로 공을 던지지 못하면서 궁여지책으로 던진 체인지업이 이창훈의 결정구가 됐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지니고 있지만 확실한 결정구는 없던 투수다.
경수인이 고개를 흔들 정도의 체인지업이라면 확실하다.
탕!
“안타. 경수인 선수가 바깥쪽 공을 밀어서 우전 안타를 만들어 냅니다.”
“경수인은 경수인이네요. 카운트가 몰려도 기어이 치고 나갑니다.”
“무사 주자 1루. 피닉스도 기회를 잡네요.”
5번 타자는 포수 김창현.
송석현은 초구로 바깥쪽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김창현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배트를 내밀었으나 배트 끝에 맞으면서 땅볼.
“4-6-3. 병살이 나옵니다.”
“피닉스가 좋은 찬스를 살리지 못하네요. 여기서 병살이라뇨.”
송석현은 여기서 또 전화위복을 떠올렸다.
체인지업은 좋아졌는데 슬라이더는 애매해졌다.
슬라이더의 낙폭이 줄었다.
커터도 아니고 슬라이더도 아닌 중간……?
“오늘 볼 어때?”
벤치로 돌아오기 무섭게 이창훈이 묻는다.
본인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는 눈치지만 솔직하게 묻진 못한다.
“좋아요.”
경기 중인 투수한테 솔직하게 공이 별로라곤 말할 수 없다.
팩폭도 상황을 봐 가면서 해야 하는 법이다.
“슬라이더가 조금 애매한 거 같은데…….”
“오늘 검지 많이 안 쓰시죠?”
“그런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의식한 건 아닌데 그런 거 같네. 왜? 공이 좀 달라?”
“약간 좀 다른 거 같아요.”
“그런가.”
이창훈이 자기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한다.
어떤 선수도 100% 컨디션으로 경기를 하는 경우는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김우민 선수가 3회에는 기어이 강판을 당하네요. 3회까지 11점. 좀 심하긴 했죠.”
“고트의 타선이 잘한 것도 있지만 피닉스의 마운드가 약한 게 더 큰 거 같습니다. 오늘로서 김우민 선수의 방어율이 8점이 넘었어요. 선발투수가 시즌 초도 아니고 방어율 8점은 좀 그렇죠.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프로는 성적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고트의 파죽지세는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고트와 붙을 팀들은 각오 단단히 해야겠어요.”
야구가 선수 개개인의 능력이 가장 중요한 팀 스포츠다.
다른 팀 스포츠의 경우 개인 능력이 떨어져도 팀의 유기적 플레이로 이를 극복할 수 있으나 야구는 개인 능력이 팀 성적으로 직결된다.
개인이 잘해야 팀도 잘한다고 하지만 팀이 못하면 선수 개인으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피닉스가 딱 그랬다.
경기 분위기가 확 기울어 버리자 타석에서든 수비에서든 선수들의 사기가 뚝 떨어졌다.
무기력한 타선 덕에 이창훈의 성적은 7이닝 무실점.
이마저도 공 여든네 개밖에 안 던졌지만 감독이 일찍 내린 덕이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노진환 선수가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으면서 14-1. 14-1로 고트가 대승을 거둡니다.”
“고트라는 태풍이 대전도 휩쓸어 버리네요.”
“요새 고트의 별명이 허리케인이라는데 딱 들어맞지 않나요?”
“네. 정말 무서운 허리케인입니다. 휩쓸리면 견딜 수가 없겠어요.”
* * *
경기가 끝난 후.
송석현은 숙소에서 함성훈 감독과 독대했다.
함성훈 감독의 요청이었다.
“오늘 고생 많았어.”
“감사합니다.”
“오늘 경기 어땠어?”
“잘 풀린 거 같습니다, 다행히도.”
“다행히도……. 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송석현은 머뭇거렸다.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창훈이 공 어땠어? 어떤 거 같아?”
송석현은 그제야 함성훈도 눈치챈 거 아닐까, 생각했다.
“변화구는 더 좋아진 거 같습니다. 특히 체인지업은 더.”
“직구는 그다지야?”
“시즌 말미라 그런지 힘이 좀 떨어진 거 같습니다.”
“그래…… 포수도 그렇게 느꼈단 말이지.”
함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폭스랑 3연전 있는 거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폭스 3연전 선발은 임진필이나 주판석, 정진오가 될 거야. 1경기나 2경기 정도 선발로 설 거야. 그러니 너도 투수들을 잘 도와줬으면 좋겠어.”
“1, 2경기를요?”
시즌, 그것도 시즌 막바지가 다가오는데 2군 투수를 선발로 실험한다고?
“우리 선발투수들이 그동안 고생 많이 했잖아. 비도 별로 안 와서 쉬지도 못했는데 5선발 로테이션이 계속 돌아갔으니 이때쯤 한 턴 쉬어야지. 대체 선발도 발굴할 필요도 있고.”
“……네. 그럼 언제 콜업입니까?”
“내일 콜업 될 거야.”
“네, 잘 알겠습니다.”
“그래. 언제나 그렇지만 너한테 제일 고맙다. 힘내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