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죽지세 (5)
정홍민이 홈런 하나를 허용했으나 하반기 특급 불펜임은 확실했다.
홈런에 분풀이라도 하는 양 삼진 두 개를 곁들이며 이닝 종료.
8회 초, 고트의 타선은 2번 타자 설진일부터 시작됐다.
“정광우 선수가 마운드에서 내려간 후 심오기 선수가 바통을 이어받았는데 고트 타선이 쉽게 공략을 못 하네요. 똑같은 포크볼이라 그런가요?”
“심오기 선수의 포크볼이 평소와 달리 더 날카로운 거 같습니다. 비록 고트가 하위 타선을 냈다지만 잘 막아 냈어요.”
“고트의 클린업도 과연 잘 막아 낼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심오기는 설진일에게 초구로 포크볼을 던졌다.
설진일은 포크볼을 퍼 올렸으나 중견수 플라이 아웃.
김인환은 초구 몸 쪽에 바짝 붙는 직구를 쳐서 3루수 직선타 아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공 두 개로 아웃 카운트 두 개를 뺏는 피닉습니다.”
“오늘 고트가 무기력하네요. 너무 크게 이겨서 기운이 빠진 건가요? 아쉽습니다.”
송석현이 배트를 쥐고 타석에 들어섰다.
오늘 정광우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정광우가 내려간 후 고트 선수들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급했다.
포크볼러이기 때문에 빠른 카운트에 공략한다는 전제는 맞았으나 피닉스 상대로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도 무시할 수 없었다.
팡!
-스트라이크!
“심오기 선수가 존에 포크볼을 하나 넣습니다. 송석현 선수는 일단 지켜보네요.”
“포크볼을 존에 넣는 건 확실히 위험하긴 합니다만, 그만큼 다양한 베리에이션을 구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조심해야죠.”
심오기가 로진백을 만진다.
송석현이 타석에서 조금 물러나 있는데도 존이 좁아 보인다.
포수는 바깥쪽에 미트를 가져다 댄다.
피할 수 없으면 힘으로 이겨 내는 수밖에 없다.
팡!
-볼. 아웃사이드.
1-1.
포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다 떨어지는 포크.
팡.
-볼. 로우.
송석현이 공 하나를 지켜본다.
피닉스의 포수 김창현이 쓴웃음을 짓는다.
정석적인 레퍼토리는 다 읽고 있다 이건가.
그렇다고 레퍼토리를 꼬아서 낼 생각은 없다.
김창현은 자신의 롤을 잘 알고 있었다.
공을 잘 잡는 캐처.
볼 배합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포수는 아니다.
최대한 투수의 컨디션에 맞춰서, 정석대로 투수를 리드한다.
낮은 쪽 포크볼을 보여 줬으니 높은 쪽 패스트볼.
알더라도 신경이 아래쪽에 쏠려 있는 만큼 높은 쪽엔 약할 수밖에 없다.
팡!
-볼. 하이.
“송석현 선수가 볼 세 개를 골라냅니다. 피닉스도 신중하게 가네요.”
“볼넷은 감안하고 진행하는 거 같네요.”
팡!
-볼. 볼넷. 타자 주자 1루.
송석현이 볼을 고르곤 1루로 걸어갔다.
포수나 투수나 아쉬운 기색은 없었다.
해 볼 만큼 해 본 거다.
“송석현 선수를 거르고 유선호 선수를 상대합니다.”
“어차피 타자는 한 명만 잡으면 끝이죠? 포크볼로 계속 신경 건드리면서 타자의 미스를 유도할 겁니다. 유선호 선수도 볼넷으로 내보내면 다음 타자는 최재완 선수거든요. 최재완 선수 이후로는 충분히 할 만하죠. 아, 물론 상대적으로 말하는 겁니다.”
피닉스는 단순하게 선택했다.
풀카운트 접전 끝에 볼넷.
정직한 승부는 없었다.
타자 한 명만 잡으면 이닝은 끝난다.
9회에는 7, 8, 9번으로 이어지는 하위 타선.
1번 이지성도 장타력이 없으니 무서울 거 없는 타순이다.
“작전이 괜찮네…….”
함성훈은 피닉스 벤치를 바라봤다.
전력은 약하지만 운영은 무난하다.
줄 건 주고 지킬 수 있는 건 지킨다.
송석현, 유선호 거르고 최재완과의 승부.
좋은 선택이다.
확률적으로는.
탕!
“좌중간! 좌중간을 꿰뚫는 안타! 2루 주자는 홈으로! 홈으로! 홈으로 세입! 1루 주자까지 홈으로 들어옵니다. 2타점 적시타를 때려 내는 최재완 선숩니다!”
“포크볼을 제대로 노려서 쳤습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었죠? 존 안에 넣는 포크볼은 위험하다. 방금도 존 안에 포크볼 하나 넣어 본 건데 최재완 선수가 욕심을 버리고 가볍게 받아쳤습니다.”
함성훈이 벤치로 들어오는 선수들을 맞는다.
최재완은 2루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최재완이 확실히 달라졌다.
불스와의 3연전에서 한 경기도 빠짐없이 안타를 치고 홈런까지 신고한 이후로 스윙이 적극적으로 변했다.
큰 거 한 방을 노리던 스윙에서 공을 받아 놓고 치는 자세로 바뀌었다.
원래 펀치력이 있는 선수라 그런지 힘을 빼고 쳐도 2루타는 쉽게 나온다.
욕심을 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욕심을 버리는 거다.
욕심을 버린다는 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다.
운동선수가 한계를 인정한다…….
아이러니하지만 99.99%의 사람들에겐 실력과 욕망이 일치하지 않는다.
욕망보다 실력이 모자라기 마련이다.
욕망과 실력의 간극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간극이 너무 크면 노력 대신 좌절을 택한다.
세상을 탓하고 환경을 원망한다.
자아를 지키기 위한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내가 못났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자아도 상처를 받을 테니까.
노력하는 사람보다 인정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 그건 노력보다 인정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최재완이 큰 스윙을 버리고 안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건, 스스로 인정했다는 얘기다.
아직 자신의 실력과 욕망의 간극이 크기에 단숨에 이를 채울 수 없다.
욕망과 실력의 간극이 줄어야 다시 노력할 마음이 생긴다.
최재완의 눈높이가 송석현, 김인환이라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모두가 송석현만큼 치면 좋겠지만, 그건 욕심도 아닌 망상이다.
최재완은 아직 유망주다.
선수가 자랄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송석현 때문에 눈높이가 높아진 게 흠일 뿐, 최재완의 잘못이 아니다.
8회 초 3-1로 이닝이 끝났다.
안타 하나를 맞으며 역전을 허용했지만 피닉스는 추가 실점을 내주지 않았다.
8회 말.
정홍민은 특급 불펜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 주며 무실점.
9회 초엔 고트의 상위 타순까지 타순이 이어졌지만 설진일의 병살로 이닝 종료.
9회 말.
마운드에는 여전히 정홍민이 서 있었다.
“고트가 정홍민 선수를 내리지 않습니다. 3이닝을 맡길 셈인가요?”
“이게 고트의 스타일입니다. 웬만하면 불펜을 잘 바꾸지 않습니다. 불펜을 제2의 선발처럼 활용합니다. 짧게, 짧게 운용하지 않는다는 거죠.”
“불펜 투수은 원래 역할이 다양하지 않습니까? 원 포인트부터 숏, 롱까지 다양하게 세분화된 게 현대 야구의 특징인데 길게 끌고 가는 건 어떤 스타일이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한국 야구가 예전에는 선발이 아주 길게 끌고 가는 게 특징이었지만, 90년대에 들어서는 반대로 아예 불펜 혹사가 문제가 될 정도로 불펜 투수 활용이 늘었거든요? 이건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불펜 혹사가 많지만 그래도 파트를 세분화시켜서 한 선수에게 과부하되는 걸 완화하는 데 초점을 두고 발전했습니다. 이에 반해 함성훈 감독의 스타일은…… 글쎄요. 딱 꼬집어서 어떤 스타일이라고 꼽긴 어렵습니다. 메이저리그 프런트로 일했던 만큼 미국 야구에 정통한 함성훈 감독일 텐데…….”
“그렇다면 저렇게 불펜을 길게 이어 가면 좋은 점이 있을까요?”
“그럼요. 불펜 투수라도 쉬는 텀이 길어지면 투수 체력 관리에 용이합니다. 물론 같은 3이닝을 던지더라도 다양한 투수가 던질수록 타자가 투수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후자가 실점 확률을 더 줄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트가 다득점을 하면서 가려져서 그렇지, 불펜 실점이 적은 팀은 아닙니다.”
“신기하네요. 고트가 불펜 투수 영입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불펜을 지나치게 아낀다는 지적이 항상 따릅니다.”
“그건 확실히 좀 그렇죠.”
불펜에는 고진석 혼자 몸을 풀고 있다.
다른 불펜 투수들은 아예 휴식.
배짱이라면 배짱이지만 불펜 투수가 쉴 땐 확실하게 쉬게 만드는 게 함성훈의 원칙이었다.
한국 야구를 경험하면서 함성훈이 뼈저리게 느낀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뎁스.
한국에도 훌륭한 타자, 투수가 있었다.
메이저급 혹은 트리플 에이급 선수는 해마다 수급되고 있다.
문제는 좋은 선수일수록 빨리 사라진다는 거다.
한국 야구의 뎁스가 얇으니 특정 선수 의존도가 높아지고, 잘할수록 혹사로 무너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특히 투수 혹사는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다.
메이저리그도 혹사가 심하다지만 뎁스가 다르다.
성적이 떨어지면 더 잘하는 선수에게 자연스럽게 밀려나고, 다시 휴식을 갖다가 올라온다.
한국은 뎁스가 부족하다 보니 잘하는 선수가 혹사로 망가져도 그보다 잘 던지는 선수가 없다.
잘하는 선수는 골수까지 쪽쪽 빨려 수술로도 재기하기 힘들 만큼 망가진다.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기 위해선 결국 뎁스가 필요하다.
좋은 선수들을 저축하듯 쌓아야 한다.
투수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한국 야구는 뎁스가 부족한데 좋은 투수는 더더욱 부족하다.
실력이 좋은 투수일수록 더 많이 쓸 게 아니라 반대로 지나칠 정도로 아껴 줘야 한다.
좋은 투수가 흘러넘쳐 2군도 꽉 채울 정도가 되면 미국처럼 한 선수가 과부하가 걸릴 경우 자연스럽게 강등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2군에서 올라온 선수가 1군에서 실력 발휘를 할 수 있게 되고, 과부하된 1군 선수는 2군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뎁스를 채우지 않는다면 우승은 그저 운이요, 왕조 건설은 망상일 뿐이다.
2군을 키우는 목적이 1군에서 혹사하기 위한 제물 양성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프런트가 자신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평생 야구 감독을 할 기회가 또 있겠는가?
이미 임기가 정해졌기에 하고 싶은 야구를 밀고 나갈 수 있는 거다.
감독에 대한 욕심이 없기에 가능한 야구.
함성훈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
인맥 없이, 사단 없이 감독을 하는 건 불가능하니 지금 이순간만을 즐기자.
탕!
“가운데 담장! 아, 잡았습니다! 이지성의 슈퍼 캐치! 이닝 종료. 고트가 이지성의 슈퍼 캐치로 3-1의 승리를 지켜 냅니다.”
“함성훈 감독의 뚝심이 통했네요. 정홍민 선수가 조금 위험한 순간을 겪었지만 끝끝내 점수를, 점수를 지켜 냈습니다.”
“이렇게 고트가 연승을 이어 가면서 후반기 돌풍의 주인공으로 떠오릅니다. 고트를 막을 팀이 과연 있을지가 궁금하네요.”
“이러면 가을야구는 모릅니다. 고트가 한국시리즈로 직행할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페가수스, 스콜피언, 울브스 모두 긴장해야 할 겁니다.”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이 하이 파이브를 하며 벤치로 돌아왔다.
정홍민은 몸서리치며 송석현 엉덩이를 두드렸다.
“형, 엄청 쫀 거 아냐?”
“왜요?”
“벤치를 보니까 불펜 애들이 죄다 쉬고 있는 거야. 와, 나 실점하면 × 되겠구나 싶었다니까.”
“진석 선배님 계셨잖아요.”
“그래도 느낌이 다르지, 느낌이. 내 뒤에 남은 투수가 딱 하나라는 거랑, ‘그래도 우리 불펜 애들이 어떻게든 해 주겠지.’랑은 전혀 다르다니까.”
나의 실투가 팀의 패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긴장감.
불펜이 풍부한 웨일스에서 성장한 정홍민에게 고트의 불펜 운영은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승리 후에 선수들은 숙소로 돌아갔다.
함성훈 감독은 투수코치 연우식과 머리를 맞댄 후 전화기를 들었다.
“네, 감독님. 지금 문자 보냈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함성훈 감독이 보낸 문자엔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임진필, 주판석, 정진오.
2군에서 선발 수업을 받고 있는 세 선수.
“세 명 중에 한 명 정도는 건질 수 있을까요?”
함성훈의 물음에 연우식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임진필은 2군에서는 레귤러 선발투수지만 1군에서 통할 결정적 한 방이 없다.
구위가 좋다거나 결정구가 확실하다거나 하다못해 자신만의 장점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도 판석이하고 진오는 한번 기대해 볼 만합니다. 판석이는 딱 민석이 신인 때 모습을 빼다 박았습니다. 공도 빠르고 슬라이더도 나쁘지 않고…….”
“2군에서조차 볼넷이 많은 선수네요.”
“그거조차 민석이랑 닮았습니다.”
“공이 빠르다면야…… 일단 한번 긁어 볼 만하죠.”
“진오도 폼이 특이해서 깜짝 픽으론 괜찮습니다.”
“최근 2군 성적이…… 음…… 이상할 정도로 좋네요. 이닝은 적긴 하지만 4.1이닝 무실점. 삼진 다섯 개에 볼넷도 하나 없고. 그런데 경기 기록이 비는 구간이 있네요.”
“제가 확인했는데 진오가 투구 폼도 바꾸고 있고, 컨디션도 별로 안 좋아서 개별 훈련을 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경기 기록이 빈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겁니다.”
“영상으로 봤을 땐 확실히 좀 특이하긴 하더군요.”
“실제로 타석에 서면 더 공이 잘 안 보이는 타입입니다.”
“그래요…….”
함성훈이 턱을 매만졌다.
“이창훈, 한민석이 언제 부진할지 몰라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두 선수의 빈자리를 다 메우진 못해도 충격은 최소화시킬 수 있어야 해요.”
“리그 후반기에 가니까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 걸 겁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러면 다행이죠. 그래도 우리가 포시에 간다고 가정한다면 조커 픽이라도 한두 번 써먹을 선발은 필요합니다.”
포시에서 3연승으로 이길 방법 같은 건 없다.
용병 둘로 2승을 노리고 나머지 1승은 투수 총력전으로 밀어붙인다.
이창훈, 한민석은 상수가 아니라 변수로 놓고 진행해야 한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네? 뭐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우리에게 확실한 상수는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