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죽지세 (4)
“안녕하십니까, 야구팬 여러분. MBS 스포츠 캐스터 양범식.”
“해설 오동기입니다.”
“오늘 고트와 피닉스, 피닉스와 고트의 3연전 첫 경기가 대전에서 펼쳐집니다. 상승세의 고트와 꼴찌 팀 피닉스의 대결. 아무래도 고트의 우세를 점치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트는 탄탄한 선발, 안정적인 불펜, 폭발적인 타선. 삼박자가 골고루 맞아떨어지면서 그야말로 불같은 상승세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나 타선의 상승세는 뭐, 하하. 불스와의 3연전에서 몇 점이죠? 30점은 넘었을 테고 40점도 넘게 낸 거 같습니다.”
“한 경기에 10점 이상을 냈다는 건데, 아무리 야구라도 이런 큰 점수는 잘 안 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KS포에 이지성, 유선호까지 가세하자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아 준 셈이 됐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어요.”
“이러면 진지하게 포스트시즌의 주인공으로 고트를 거론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 상승세면 1위도 노려 볼 만하죠. 이전까지의 고트가 두루두루 큰 약점이 없었지만 확실한 장점도 없었다면, 지금의 고트는 확실한 약점을 찾기가 더 어렵습니다. 물론 전통의 강호이자 1위 팀인 페가수스도 선발, 불펜, 타선, 수비 모두 약점 없는 팀이라지만 고트의 폭발력은 뭐, 인정 안 할 수가 없죠.”
“피닉스 팬들은 오늘도 좌석을 꽉 채워 주고 계신데요. 피닉스 팬들에겐 보기 힘든 3연전이 될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피닉스 선수들이 힘내야죠. 팬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플레이볼!
마운드에 먼저 오른 건 피닉스의 선발 정광우.
용병마저 삐거덕거리는 요즘 피닉스의 유일한 대들보나 다름없었다.
최고 구속 150 가까이 찍는 우완 파이어볼러.
구위도 리그에서 손꼽는 데다 결정구인 포크볼까지 수준급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최근 방어율은 4점대.
한 번 공이 빠지기 시작하면 스트라이크존에 넣는 일도 쉽지 않는 투수였다.
그러나 반대로 한번 탄력받기 시작하면 타자들이 공략하기 어려웠다.
-스트라이크! 아웃!
“이지성 선수가 삼진을 당하네요. 좀처럼 삼진을 안 당하는 타잔데 심지어 직구에 헛스윙 삼진을 당합니다.”
“이게 정광우 선수의 매력이죠. 정광우 선수는 포크볼만 좋다고 생각하는 팬들이 많지만, 사실 정광우 선수의 시그니처는 저 직굽니다. 높은 쪽으로 들어가는 하이 패스트볼에 헛스윙 하는 타자들이 많아요. 그만큼 공이 더 살아간다는 거죠. 정광우 선수의 컨디션이 좋을 때 저런 직구가 많이 들어가는데, 오늘 고트 타자들 쉽지 않겠는데요?”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세 타자 연속 삼진! 정광우! 마운드에서 포효합니다!”
“설진일, 김인환 선수까지 삼진을 당했다는 게 큽니다. 최근 상승세가 무서운 타자들인데 정광우 선수의 포크볼은 공략이 어려운 거 같습니다.”
“낙차 큰 포크볼로 두 타자 연속 삼진. 정광우 선수의 컨디션이 오늘 아주 좋아 보입니다.”
김인환은 고개를 저으면서 벤치로 돌아왔다.
송석현이 공이 어떠냐고 묻자 김인환은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난 오늘 꽝이야. 답이 없다.”
1회 말.
마운드엔 고트의 선발 제임스 멕킨지가 올랐다.
미국에선 피네스 피처로 평가받았지만 한국에서는 정통파 피처.
최고 구속이 145를 넘지 않지만 한국에선 좌투수가 140만 넘어도 파이어볼러 대접을 해 준다.
트리플 A에서도 제구력 하나만큼은 A급으로 평가받는 투수가 140 초반의 구속, 지저분한 볼 끝을 지닌 채 한국에 들어왔다면?
-아웃!
-아웃!
-아웃!
“제임스 멕킨지 선수. 세 타자 연속 범타로 1회를 깔끔하게 마무리합니다.”
“제임스 멕킨지 선수를 상대로 정타를 치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죠. 타자들과 인터뷰를 해 보면 제대로 오는 공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커터와 체인지업만 잘 던지는 게 아니라 투심도 잘 던집니다. 보통 투수들이 포심 패스트볼을 기본으로 다양한 변화구를 던진다면, 멕킨지 선수는 투심 혹은 싱커를 기본으로 커터와 체인지업을 던집니다.”
“싱커와 커터는 정반대 성향의 공이라 두 구종 모두를 잘 던지는 투수는 드문 걸로 알고 있는데요.”
“보통은 그렇죠. 완벽한 싱커, 커터는 동시에 구사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멕킨지 선수는 투심이지만 싱커처럼 공이 들어갑니다.”
“투심이라고 하면 생각보다 변화가 큰 구종은 아닌데 멕킨지 선수의 투심은 유독 변화가 큰 거 같습니다.”
“그게 멕킨지 선수의 장점인 거죠. 싱커로 불러도 무방한 무브먼트를 가진 투심이 있으니 타자들이 혼동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공이 오른쪽으로 올지, 왼쪽으로 올지 감을 못 잡는 거죠.”
“이렇게 들으면 멕킨지 선수가 단점이 없는 선수 같은데 성적을 보면 정통파 우완 투수인 마이클 피시 선수보단 조금 떨어집니다. 이유가 있을까요?”
“멕킨지 선수 같은 타입은 한번 타자들이 말리기 시작하면 계속 말리지만, 반대로 공이 맞아 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맞는 타입입니다. 땅볼을 유도하는 선수들은 수비가 중요하거든요. 본인의 컨디션이 별로라거나 수비가 불안해지면 아웃이 될 공도 안타가 되면서 꼬이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래서 그라운드 볼러가 아무리 잘해도 정통파 파이어볼러의 몸값이 더 비싼 겁니다.”
“마이클 피시 선수가 역대 최고 몸값을 자랑하는 용병인 것처럼요?”
“그렇습니다.”
“오늘 양 팀 선발투수 모두 세 타자 연속 아웃으로 편안하게 출발하네요.”
2회 초, 첫 타자는 송석현.
정광우는 초구부터 힘을 실은 직구를 던졌다.
바깥쪽 보더 라인에 박히는 빠른 공.
송석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트라이크!
“직구로 스트라이크. 정광우 선수가 송석현 선수를 상대로도 과감합니다.”
공도 빠르지만 미트에 박히는 소리가 찰지다.
단순 구위만 본다면 어떤 투수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제구만 잡힌다면 단숨에 리그 에이스가 될 거다.
정광우의 제2구는 포크볼.
송석현은 헛스윙 했다.
“명불허전. 송석현 선수에게서도 헛스윙을 이끌어 내는 포크볼입니다. 여간해선 헛스윙을 잘 안 하는 선순데요.”
“그만큼 공이 좋다는 얘기죠.”
송석현은 타석 밖에서 숨을 한번 고른다.
확실하게 예측하지 않으면 정광우의 포크볼을 치기 어려울 듯싶다.
포크볼의 완성도만 보자면 국내에선 이미 경지를 이뤘다.
일본에서도 먹힐 수 있는 완성도이니만큼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후우.”
송석현이 타석에 들어섰다.
사인을 주고받는 투수가 연신 고개를 젓는다.
정광우의 자신감이라면 직구를 던지고 싶을 테고, 포수는 투 스트라이크니 포크볼을 더 던져 보자고 할 거다.
어차피 구종이라곤 직구와 포크, 단둘.
노릴 것도 직구와 포크, 단둘.
투수는 선택지가 많을수록, 타자는 선택지가 적을수록 유리한 법이다.
송석현은 선택지를 하나로 좁혔다.
바깥쪽 직구만 걷어 낸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 직구와 포크볼을 구분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바깥쪽 포크볼이 들어올 확률이 7할 이상.
나머지 3할 중에 바깥쪽 직구가 있다.
바깥쪽 직구만 걷어 내자, 걷어 내자.
마음을 굳히고 투수의 공을 기다렸다.
“정광우 선수가 신중하게 공을 고르는데요. 사인을 마치고…… 와인드업.”
정광우가 공을 던졌다.
송석현의 배트도 돌아갔다.
송석현이 기다린 바깥쪽 직구는 없었다.
포크볼도 아니었다.
자로 잰 듯 스트라이크존 한가운데의 직구.
조금 늦은 타이밍이었지만 송석현은 공을 가볍게 때려 냈다.
“좌측 담장! 넘어가나요? 넘어가나요? 넘어갑니까~~~ 넘어! 갔습니다! 외야수 글러브에 아슬아슬하게 못 미치면서 담장을 넘기는 홈런! 송석현 선수가 솔로 홈런으로 투수의 어깨를 가볍게 합니다. 1-0. 고트가 2회 초부터 앞서갑니다.”
송석현은 홈런을 치고도 얼떨떨했다.
손이 아리다.
타이밍이 조금 느리긴 했어도, 배트 조금 안쪽에 맞았어도 정확히 맞은 공이다.
바람이 아니었다면 홈런도 어려웠을 거다.
확실히 정광우의 공엔 힘이 실려 있다.
이 구위에 포크볼.
오늘 경기는 어려울 듯싶다.
정광우가 볼넷만 남발하지 않는다면 피닉스로부터 많은 점수를 뺏어 오기는 어려울 거 같다.
송석현이 홈을 밟고 벤치로 돌아갔다.
선수들이 나와 송석현을 맞았다.
“오늘은 세리머니 안 하네?”
“축하한다.”
“잘했어.”
송석현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세리머니.”
세리머니를 깜박했다는 사실은 금세 잊혔다.
정광우는 송석현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한 후 볼넷을 내주며 흔들리나 싶었으나 병살 후 삼진으로 이닝 종료.
송석현은 숨 돌릴 틈도 없이 포수 마스크를 써야 했다.
“피닉스에선 선두 타자로 경수인 선수가 나옵니다. 이제는 리빙 레전드죠? 국가 대표 4번 타자이자 우타자의 기록을 하나둘 갱신하는 타잡니다.”
“유선호 선수를 가리켜서 기록의 사나이라고 하는데 경수인 선수도 뒤지지 않습니다. 아마 누가 더 오래 선수 생활을 하느냐에 따라 기록 갱신이 어떻게 될지가 갈릴 거 같습니다.”
경수인 같은 타자는 오히려 볼 배합이 쉽다.
선구안 좋고, 인내심이 높으며, 욕심 없는 타자.
유리한 카운트나 불리한 카운트나 자기 스윙을 하는 타자에겐 투수가 잘 던지는 공을 유도하는 게 최선이다.
팡!
-스트라이크!
초구는 빠른 공.
경수인이 입맛을 다신다.
제2구는 체인지업.
경수인의 헛스윙.
투 스트라이크.
멕킨지의 제3구도 체인지업.
경수인은 체인지업을 참아 냈다.
제4구는 우타자 바깥쪽에서 바깥쪽으로 흘러가는 투심.
경수인은 배트를 내려다 참아 냈으나 심판의 판정은 스트라이크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경수인 선수 삼진. 경수인 선수가 삼진을 당합니다.”
“이 삼진은 큽니다. 경수인 선수가 꼼작도 못 했어요. 타자를 기준으로 바깥쪽에서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은 정말 멀어 보이거든요. 심판이 저 코스를 잡아 준다면 오늘 피닉스 타자들은 꽤 힘든 싸움을 해야 할 겁니다.”
한때 고트의 타선이 송석현과 아이들 소리를 들었다지만 피닉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피닉스 타선은 오랫동안 경수인과 난쟁이들 소리를 들어 왔다.
그 정도로 피닉스에는 경수인을 제외하고 제 몫을 해내는 타자가 없다.
경수인을 삼진으로 잡아낸 후 안타 하나를 맞았지만 바로 병살로 이닝 종료.
2회 말.
점수는 1-0.
고트의 기세는 좋았으나 3회, 4회, 5회까지 점수를 내지 못했다.
한창 기세를 올리던 고트의 타선도 정광우의 포크볼에 맥을 못 췄다.
피닉스 타자들은 멕킨지를 상대로 안타를 종종 뽑아냈으나 5회까지 병살 세 개로 자멸.
양 팀 투수들은 6회까지 공을 던지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7회 말.
고트의 마운드엔 정홍민이 올라왔다.
“고트가 투수를 바꿉니다. 멕킨지 선수가 공을 여든한 개밖에 안 던졌는데 과감하게 바꾸네요.”
“1점 차 승부 아닙니까? 타이트하게 가려는 생각 같습니다.”
“정홍민 선수. 올 시즌 웨일스의 라이징 스타로 떠올랐으나 이제는 고트의 철벽 불펜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최근 5경기 좌타자 상대론 방어율 0. 우타자에게도 방어율 2.12. 원래 좌타자에게 강하고 우타자에게 약한 투수였는데 우타자에게도 강하고 좌타자에겐 더 강한 투수가 됐습니다.”
“어떤 특별한 비결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휴식이죠. 웨일스가 불펜 활용도가 높은 팀 아닙니까? 고트는 반대로 선발투수가 강한 팀이구요. 그런데 고트가 불펜 투수도 많이 영입하면서 불펜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강행군을 이어 온 정홍민 선수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니까 당연히 성적에도 영향이 있는 거겠죠.”
피닉스의 선두 타자는 유격수 김현우.
유격수답게 수비는 괜찮았지만 방망이는 시원찮은 선수였다.
정홍민은, 초구는 가볍게 직구로 카운트를 잡으려 했다.
탕!
김현우는 초구를 노리고 방망이를 돌렸고, 외야로 향한 공은 그대로 담장까지 넘었다.
홈런.
친 타자도, 맞은 투수도 당황했다.
“홈런! 홈런이 나옵니다! 피닉스가 따라가는 홈런을 치며 1-1 동점을 만듭니다.”
“김현우 선수의 홈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선수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홈런을 때리네요.”
“정홍민 선수가 씁쓸한 표정을 짓습니다. 동점 홈런을 허용하는 정홍민. 피닉스가 이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포부를 보여 주네요.”
송석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방금 전 직구는 빠르지도 않았고, 심지어 존에 몰렸다.
오늘은 타자도 투수도 전반적으로 긴장감이 풀려 있다.
세 경기 연속 대승을 한 여파일까?
상대가 피닉스지만 오늘은 쉽지 않을 거란 예감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