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46화 (146/201)

파죽지세 (3)

3회 말.

잠실 경기장 점수판에는 11-6이라는 점수가 찍혀 있었다.

불스의 선발투수 정진웅은 이미 강판되고 사이드암 투수 윤기진이 올라왔지만, 또 실점.

3회에 올라온 투수가 벌써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오늘 잠실에서 이렇게 화끈한 타격전이 벌어질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추세라면 오늘 양 팀 합쳐서 30점 이상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아요.”

“1회 초, 선발투수 한민석 선수가 무너지면서 오늘은 불스에 승기가 가나 싶었는데 1회 말 고트의 공격이 더 매서웠습니다.”

“한민석 선수가 3회까지 6실점. 선발투수로 결코 좋은 성적이 아닌데 고트의 불펜은 아직 한가합니다.”

“우선 점수 차이가 크다는 점도 중요할 테고, 한민석 선수의 투구 수가 2회부터 많이 줄었다는 것도 주효한 거 같습니다. 안타는 많이 내주지만 안타에 비해 점수를 덜 내주고 있어요.”

“잠실이라는 이점을 보고 있다고 봐도 되겠죠?”

“그렇죠. 그건 부정할 수 없죠.”

“불스의 투수들도 잠실을 등에 두고 던지고 있습니다만 고트의 타자들은 잠실의 담장을 그리 무서워하지 않는 거 같습니다.”

탕!

“간다! 간다! 우측 담장! 넘어갔습니다! 김인환 선수의 투런 포가 터지네요. 13-6. 점수가 더블스코어까지 벌어집니다.”

“네, 고트가 또 달아납니다.”

“고트에선 홈런만 세 개째. KS포가 오늘 아주 쉴 틈 없이 가동되네요.”

다른 구장에선 벌써 7회까지 진행되고 있는데 잠실에서만 아직도 3회다.

역대급 불쇼에 잠실 경기로 채널을 돌리는 야구팬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불스는 원래 저런 애들이라고 치고, 고트는 왜 저럼? 한민석 맛탱이 간 거 아님?

-오늘은 배팅볼이네, 배팅볼이야.

-쟤들은 야구공이 아니라 탱탱볼 가지고 치는 거 아니냐? 뭐 치기만 하면 홈런이야?

-× 됐다. 포시에 고트 올라오면 이거 답도 없겠는데? KSY 누가 막음?

-S는 원래 잘했다 치고 K, Y는 왜 잘하는데?

-제발, 웨일스 새끼들아. 좀 잘해 봐라. 고트 못 올라가게 발목 좀 잘 잡아 봐. 니들이 천적이잖아.

-×××들아, 니들이 우리한테 승점 좀 퍼 주든가.

-불스 관중석 벌써 일어나는 거 실화? 오늘 경기 포기냐?

-오늘은 피닉스보다 더하네.

4회 초.

한민석은 처음으로 무실점으로 이닝을 끝냈다.

투구 수는 벌써 여든여덟 개.

함성훈 감독은 다음 투수를 준비시켰다.

“죄송합니다.”

한민석은 투수코치 연우식에게 고개를 숙였다.

투수코치도 한민석이 오늘 부진한 이유쯤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같이 그라운드를 뛴 선수였다.

연우식이 한민석의 속사정을 모를 리 없고, 한민석도 연우식이 자신의 사정을 안다는 걸 모를 리 없다.

“잘하자, 어?”

한민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역대급 타선 지원을 등에 업고도 5회 전에 내려왔다.

투구 수를 감안하면 5회까진 던질 수 있었으나 한민석은 조기 강판에 반발하지 않았다.

자신의 공으로 여태 꾸역꾸역 막은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고트의 타선이 터지지 않았다면 한민석이 먼저 터졌을 거다.

탕!

탕!

고트의 타자들이 뭘 해도 되는 날이었다.

하위 타선까지 쉴 틈 없이 안타를 쳐 내면서 또 불펜 투수가 바뀌었다.

고트에서도 불펜을 올리면서 맞불을 놨다.

서로 큰 점수 차이 때문에 승리조 불펜이 아닌 추격조를 내면서 또 양 팀 모두 점수를 냈다.

18-9, 22-10.

최종 스코어는 22-11.

고트의 더블스코어 승리.

고트와 불스의 경기가 가장 늦게 끝나는 바람에 전 야구단의 팬들이 잠실 대첩을 구경했다.

야구팬들은 잠실 대첩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불스의 타선이 강하다는 것.

고트의 타선은 더 강하다는 것.

난타전 덕에 투수들의 부진은 소리 없이 묻혔다.

* * *

“후.”

경기가 끝난 후.

함성훈 감독은 감독실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승리를 했어도 찝찝한 경기다.

최근 들어 고트의 타선에 불이 붙는 건 경사스러운 일이나 여태 문제없이 잘 지키던 선발투수들이 하나둘 사고를 치기 시작한다.

에이스 투수라고 해도 한 시즌을 전부 QS를 하긴 어려운 법이다.

에이스라도 25경기를 한다고 가정하면 15경기는 제 실력을 발휘할 거고, 5경기는 그저 그럴 것이고, 5경기는 실망스러울 거다.

이창훈, 한민석이 부진한 게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동갑내기 선발투수의 나이는 올해 서른.

한국에서 서른 넘어서까지 A급 선발로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자기관리에 대한 인식이 아직까지도 부족한 게 한국 프로야구다.

담배를 피우거나 씹는 선수들은 물론이거니와 시즌 중에도 새벽까지 술 마시고 클럽에 가는 이들은 상수처럼 존재한다.

아직도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면 몸이 굳어진다고 믿는 선수들도 있는 게 현실이다.

이창훈, 한민석도 자기관리라는 트렌드가 생겨나기 전부터 뛰던 선수다.

특히 한민석은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해서 자주 술로 물의를 일으켰다.

FA로 영입돼 3년 가까이 A급 선발로 뛰어 준 건 오히려 기적과도 같았다.

FA가 생긴 이래로 A급 선발이 FA로 풀린 경우는 드물었고, 있더라도 대부분 먹튀로 전락했다.

대한민국에서 투수란 학창 시절부터 혹사를 당하고 프로에 와서도 혹사를 당하다 보니 FA를 신청할 땐 이미 퇴물 취급을 받기 일쑤다.

이창훈, 한민석은 건강한 체질이라 여태 버텨 준 거나 다름없다.

나이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두 사람이 오늘 당장 하락세를 보여도 특별할 게 없다.

기우이면 좋겠지만, FIP만 봐도 작년에 비해 확연하게 상승 중이다.

이런 추세라면 포스트시즌에 제 몫을 할지도 의문이다.

“지금 선발을 발굴할 시간이 되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대체 선발을 찾아내야 한다.

문제는 기존에 5선발 후보로 있던 투수들인 전상흠, 조재진, 조석주는 대체 선발은커녕 5선발도 어려운 투수라는 데 있다.

불펜 투수를 빼자니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다.

2군에서도 뚜렷한 활약을 보여 준 투수가 없으니 가슴에 큰 돌이라도 얹은 것처럼 답답할 따름이다.

이창훈, 한민석의 부진이 기우가 아니라면 포스트시즌의 전망은 밝지 못하다.

함성훈 감독이 파일첩에서 고트 선수단 기록을 꺼냈다.

방법이 없어도 찾아야 한다.

선발투수들에게도 한 텀 휴식을 줘야 할 때가 왔다.

방망이에는 사이클이 있기 마련이다.

언제나 오늘처럼 타선이 불탈 거라 믿는 건 희망 사항이다.

* * *

탕!

탕!

쾅!

“좌측 담장!”

“우측 담장!”

“넘어갔습니다!”

불스와의 2차전.

고트의 타선은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어제의 투수 정진웅보다 한 단계 아래로 취급받는 강광수는 불타오른 고트의 방망이를 막을 수 없었다.

1회에 3점, 2회에 2점, 3회에 2점.

불스는 3회에 선발을 내리는 강수를 냈지만 KSY포가 5타점을 올리면서 4회까지 세 명의 투수가 올라오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불스가 어제, 오늘 선발투수 때문에 속앓이가 심하네요.”

“어제도 조기 강판, 오늘도 조기 강판. 벌써 어제, 오늘 올라온 투수들만 다 합쳐도 일곱 명입니다. 불펜이 과부하된다는 얘기죠.”

“선발이 무너지면 불펜의 부담이 커지고, 불펜마저 무너지면 더는 희망이 없는 거 아닙니까?”

“감독 입장에서도 이럴 땐 골치가 아프죠. 사실 가장 이성적인 판단은 이런 경기에 전력을 아끼는 거죠. 1점 차로 지나 10점 차로 지나 똑같은 1패거든요. 하지만 어제도 대패를 당했었죠? 오늘까지 대패를 당한다……. 팀 분위기는 물론이고 감독 본인의 자리까지 신경 써야 할 겁니다.”

함성훈 감독은 불스의 벤치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선발이 무너지면 불스처럼 되기 마련이다.

불스의 타선도 폭발력이 있다지만 선발이 무너지면 경기가 넘어가고, 경기가 넘어가면 타선이 힘쓸 기회조차 없어진다.

고트의 막강한 타선에도 근심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시원시원하네.”

타선은 사이클이 있다던데 고트에는 예외 사항인 듯싶다.

울브스전에 잠시 주춤한 걸 제외하곤 내내 불타오르고 있다.

1, 2, 3위 팀을 상대하다 6위 팀, 그것도 선발은 피닉스와 견주는 투수를 상대하다 보니 더 쉽게 느껴지는 이유도 있을 터다.

어느덧 5회 초.

점수는 14-3.

-스트라이크 아웃!

“정천운 선수가 또 삼진을 잡습니다. 오늘만 네 개째. 땅볼을 잘 유도하는 선수라는 이미지와 달리 은근히 삼진이 많아요.”

“공이 지저분하다 보니 타자들이 애매한 공에는 배트를 아끼게 되고, 그러다 보니 카운트에 몰려 마음이 급해진다. 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애매한 공은 뭔가요?”

“제구가 잘된 공. 보더 라인에 잘 걸치는 공이죠. 정천운 선수의 구속은 느리지만 정타가 안 나오니까 확실한 스트라이크가 아니면 배트가 잘 안 나온다는 거죠.”

“그렇군요.”

탕!

-아웃!

“정천운 선수가 이번 이닝에는 주자 한 명도 내보내지 않고 이닝을 마무리합니다.”

“정천운 선수가 승리 조건을 채웠네요. 정천운 선수가 정말 복덩입니다. 5선발투수 중엔 최고의 5선발투수라고 생각합니다. 큰 실점 없이 이닝을 소화하는 거야말로 5선발투수에게 바라는 최선이죠.”

함성훈이 벤치 밖으로 나가 정천운을 맞았다.

정천운마저 없었다면 가슴이 철렁할 뻔했다.

5선발투수는 포스트시즌에 의미가 없다 해도 시즌을 치르는 데 믿을 만한 5선발투수는 조커나 다름없다.

어떤 팀이든 용병 두 명과 토종 선발 1~2명으로 시즌 계획을 세운다.

5선발은 신인에게 기회를 주는 자리, 기존의 투수들을 시험하는 자리다.

감독도 팬도 팀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 자리다.

하지만 5선발에서 승리를 따낸다면 남들보다 반보는 더 앞서가는 셈이다.

남들에게는 버리는 패가 내겐 승리를 따 줄 때, 그렇게 쌓아 가는 반보가 시즌이 끝나면 결정적인 한 걸음이 되기 마련이니까.

1, 2군의 차이가 큰 법인데 정천운은 2군이나 1군이나 비슷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볼넷도 적고 삼진도 적은데 1, 2군 성적이 비슷하다는 건 땅볼 유도에 능하다는 얘기다.

1군 타자도 정천운의 공을 띄우는 데 애를 먹고 있다.

이날의 경기는 17-5로 마감했다.

일찌감치 고트가 앞서가면서 불스의 추격 의지를 꺾어 버렸다.

다음 날 3연전 마지막 경기.

고트의 1선발 마이클 피시와 불스의 5선발 나영수의 맞대결.

선발의 무게감도 무게감이지만 2연속 대패에 불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버렸다.

3연전 첫 번째, 두 번째 경기에 불펜을 당겨 쓴 불스는 세 번째 경기에도 대패를 면치 못했다.

스윕.

고트의 대승은 곧 불스의 대패였다.

스윕도 가슴이 아프건만 세 경기 내내 대패.

고트와의 3연전이 불스의 박종철 감독의 마지막 경기였다.

불스는 이례적으로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감독을 내리는 초강수를 뒀다.

3일 연속으로 타격전이 벌어지면서 경기 시간이 길어진 게 결정적이었다.

야구팬들은 자기 팀 경기가 끝나자 잠실 경기로 채널을 돌렸다.

전국의 야구팬들이 3일 연속 불스의 대패를 지켜봤다.

스포츠 기사에선 연신 불스의 부진을 꼬집었다.

구단 고위층에서도 더는 박종철 감독을 감싸지 않았다.

3연전 마지막 경기마저 승리한 후 고트는 대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전 피닉스와의 원정 경기.

고트 선수들은 이미 승리를 직감한 듯 들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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