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45화 (145/201)

파죽지세 (2)

“한민석 선수가 길었던 1회를 마치고 내려갑니다.”

“1회에만 투구 수가 마흔두 개. 타자 일순했습니다.”

“굉장히 힘들었던 1회지만 점수는 4점이었습니다. 위기를 잘 넘겼다고 볼 수 있을까요?”

“최악은 막았지만 좋다고 보긴 힘듭니다. 이러면 긴 이닝을 못 던지는 건 확실해지죠.”

한민석이 땀을 뻘뻘 흘리며 벤치로 돌아왔다.

안타, 안타, 안타.

치는 족족 안타가 된다.

한민석은 제구가 좋은 타입이 아니다.

구위로 찍어 누르는 투수가 구위가 나오지 않으니 타자들에겐 배팅볼이나 다름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잘 맞은 타구가 아웃이 되면서 7점, 8점이 줘도 이상하지 않을 흐름에서 4점으로 마쳤다는 거다.

“선배님.”

송석현은 말 대신 음료수를 가져다줬다.

“그래.”

한민석은 손을 떨면서 음료수 뚜껑을 열었다.

구속을 줄여 제구를 하는 건 미신에 가깝다.

제구는 좋아질지 몰라도 밸런스와 구위가 확 무너진다.

한민석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할 만큼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 거다.

“미안하다.”

한민석의 말에 송석현이 귀를 의심했다.

한민석이 사과를 한다고?

“후, 오늘 공이 영 거지 같네.”

“다음 이닝은 더 쉬워질 겁니다.”

“내 공이 눈에 익었는데 어떻게 더 쉬워져?”

“선배님이 감을 잡으셨을 테니까요.”

한민석이 피식 웃는다.

“감은 무슨. 오늘은 그냥 내 공이 쓰레긴데.”

“제가 점수 벌어 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그건 달콤하네. 네가 점수를 낸다고 하면 뭐, 믿을 만하지.”

고트의 1번 타자는 이제 고정이나 다름없다.

이지성.

불스의 투수는 정진웅.

스물네 살의 유망주이지 불스의 토종 좌완 선발.

좌완 선발이란 귀한 자원이지만 방어율은 5점대, 그것도 후반.

140km/h를 겨우 넘는 구속, 평범한 구위와 제구.

좌완이라는 장점이 없었다면 선발 로테이션에 끼기 어려웠다.

이런 투수가 팀 내에서 세 번째로 성적이 좋은 투수라는 건 그만큼 불스의 마운드가 낮다는 얘기였다.

탕!

“안타. 이지성 선수가 우중간으로 안타를 쳐 냅니다.”

“받쳐 놓고 쳤네요. 정진웅 선수의 직구가 너무 한가운데로 들어갔어요.”

좌투수를 상대로 발 빠른 주자가 1루에 섰다.

통상 좌투수가 1루 주자 견제에 더 쉬운 건 상식이었다.

정진웅은 이지성의 눈을 보며 타자에게 공을 던질 준비를 마쳤다.

타다다닥.

정진웅의 눈이 이지성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지성은 바로 2루로 뛰었다.

정진웅의 구종은 포심 패스트볼.

포수가 공을 잡자마자 2루로 던졌지만 세입이었다.

“넉넉한 타이밍의 세입이었습니다.”

“그만큼 주자의 스타트가 빨랐어요.”

“이지성 선수, 이러면 투수가 노이로제에 걸리겠어요. 초구부터 적극적입니다. 성적을 살펴보니까 초구부터 도루 시도를 하고 있어요.”

“어지간한 포수의 어깨와 투수의 퀵 모션으론 이지성 선수를 잡을 수 없습니다. 이마저도 이지성 선수가 벤트 레그 슬라이딩으로 들어갔으니 망정이지 헤드 퍼스트로 들어갔다면 상대 배터리가 진땀 꽤나 흘렸을 겁니다.”

정진웅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자신이 눈으로 보고 있는 와중에 주자가 2루로 뛰었다.

차라리 우투수였으면 주자가 빠르구나 하고 치부하면 될 일이지만 좌투수이다 보니 도루를 빼앗긴 사실에 할 말이 없어진다.

흔들, 흔들.

이지성이 2루에 가서도 리드를 넓힌다.

설마 하니 3루로 갈까 싶다가도 자신을 도발하는 듯 잔발을 치는 걸 보자니 정진웅의 가슴이 울컥한다.

주자를 무시하고 공을 던지자 설진일은 좌중간으로 안타.

“2루 주자는 홈인. 타자 주자 2루까지. 쉽게, 쉽게 득점하는 고틉니다.”

정진웅이 로진백을 든다.

손에 로진을 묻히면서도 머리로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 쉽게 실점해도 되나 싶다.

주자 2루에 타자는 김인환.

떨어지는 공에 약하니 변화구를 던져야겠다 싶은데 김인환의 눈을 보자 손이 얼어붙었다.

김인환이라는 타자가 저렇게 여유가 넘쳤나?

흥분한 비글처럼 타석에서 공만 기다리던 김인환은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던 김인환 대신 숨을 고르며 게슴츠레 눈을 뜬 김인환이 보인다.

-볼, 로우.

“스트레이트 볼넷. 정진웅 선수가 승부를 피합니다.”

“승부를 피한 건지 아니면 제구가 안 된 건지 모르겠네요. 공이 많이 빠졌어요.”

“김인환 선수를 피하고 송석현 선수를 선택한 건 역시 병살 작전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김인환 선수 대신 송석현 선수를 택한 이유가 없겠죠.”

불스의 감독 박종철이 눈을 깜박거린다.

투수코치가 감독에게 가 말한다.

“제가 한번 올라갈까요?”

“벌써? 아냐. 저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감독의 만류에 투수코치가 입맛을 다신다.

역시 외부에서 온 감독은 내부 사정에 너무 어둡다.

진성철은 정진웅이 입단할 때부터 봐 왔다.

정진웅은 멘탈이 그리 강하지 못하다.

저렇게 흔들릴 때 한번 엄하게 다잡아 줘야 한다.

유망주라고 무조건 기회만 주면 클 거라고 생각하는 감독이 내심 못마땅하다.

생각이 저렇게 나이브하니 하위권을 맴도는 성적에도 관리라는 명목하에 분위기를 너무 풀어 준다.

“타석에는 잠실의 왕, 송석현 선수가 들어섭니다.”

“스무 살 선수에게 왕이라는 호칭을 붙일 줄 몰랐습니다, 하하.”

“성적만 보면 왕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스무 살 포수가 타율 3할, 출루율 4할, 장타율 6할인데요.”

“스무 살이 아니라고 해도 잠실에서 이 성적을 거두는 건 대단하긴 하죠. 대표적인 투수 친화 구장 아닙니까?”

송석현이 나오자 박신언의 손가락이 바쁘다.

송석현도 박신언도 홈플레이트 앞에선 말이 없다.

박신언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간다.

송석현은 침착한 타자다.

풀카운트에서도 자기 스윙을 한다.

공을 여러 번 보면서 타이밍을 잡는다.

초구는 지켜보는 경향이 있지만 때론 초구도 적극적으로 노린다.

투수가 연달아 볼을 던지는 상황에서 보통의 타자들은 공 하나를 지켜본다.

송석현도 지켜볼까?

송석현을 상대로 초구를 존에만 넣으라는 사인을 내보내도 될까?

순간 송석현을 내보내고 유선호와 상대할까, 유혹이 들었다.

좌타자 상대로 좌투수가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김인환도 송석현도 발이 느린 주자는 아니다.

유선호의 안타 하나로 싹쓸이가 가능하다.

쉽진 않아도 송석현 타석에서 승부해야 한다.

어설픈 변화구는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역으로 찌른다.

정진웅의 결정구는 커브다.

제구가 흔들리는 지금, 커브는 송석현의 의표를 찌르면서 밸런스도 잡을 수 있는 선택이다.

커브로 카운트 하나 잡고 외곽에 직구 하나로 투 스트라이크를 잡는다.

삼진이 가능할진 모르지만 우선 투 스트라이크만 생각한다.

‘커브. 존 안으로.’

투수가 긴장한 티를 숨기지 못한다.

존 안으로 커브를 던져라.

정진웅의 커브는 12to6, 정통파 커브다.

공을 던질 때 타자가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손동작이 크다.

물론 커브를 알아본다고 다 친다면 타율이 가장 낮은 구종이 커브일 리 없다.

너클볼을 빼고 변화구 중에 가장 궤가 다르기에 알아도 정타가 힘든 공이 커브다.

정통파 커브를 던진다는 건 타자에게 구종을 알려 주고 던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커브가 통할까?

정진웅은 마른침 한 번을 삼키곤 공을 던졌다.

타앗!

손을 떠난 공이 회전을 먹기 시작한다.

손가락 끝의 감은 좋다.

기분 좋은 회전이다.

이 정도 회전이면 제대로 떨어진다.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노리는 것만 아니면 치기 쉽지 않을 거다.

구속도 빠르지 않고 제구도 특출하지 않은 정진웅이 불스의 선발투수 자리를 꿰찬 데는 커브라는 확실한 결정구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커브 하나만큼은 평균 이상이다.

노리지 않으면 못 친다.

“후우.”

송석현이 숨을 짧게 내뱉는다.

박신언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설마, 아니겠지.

초구 커브를 노린 건 아니겠지, 설마.

송석현의 허리가 돌아간다.

허리는 돌아가도 어깨가 열리지 않는다.

평소보다 한 템포 늦은 스윙.

박신언은 아뿔사, 싶어 등골이 오싹했다.

직구를 노리다 커브를 치는 게 아니다.

초구 커브를 노린 거다.

쾅!

송석현의 배트가 아래에서 위로 공을 퍼 올린다.

팔꿈치는 몸통에 붙이고 고개는 공을 향해 고정돼 있다.

“좌측 담장!”

볼 것도 없었다.

맞자마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친 공이 쭉쭉 뻗어 나간다.

좌익수는 이미 쫓아가길 포기했다.

고개를 숙인 투수 뒤로 2루에 있는 설진일이 박수 한 번을 치고 3루를 향해 달렸다.

“홈런! 홈런입니다! 1회 말 송석현의 스리런이 터집니다! 잠실 구장 관중석 상단을 때리는 초대형 홈런이 터졌습니다!”

“방금은 너무 높이 떠서 플라이가 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대로 담장을 넘어가네요.”

“1회에 뺏긴 4점을 바로 뒤쫓아 가는 고트. 과연 잠실의 왕이라고 부를 만하네요. 잠실에서 가장 강한 타자, 송석현 선숩니다.”

“여기가 잠실이 맞는지 궁금합니다. 잠실의 담장이 저렇게 낮았나요?”

1회 초 침울했던 고트 팬들은 어디로 갔는가.

1루 관중석의 고트 팬들이 맥주 캔을 부딪치며 응원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오오, 고트의 송석현. 팔방미인 송석현. 장외 홈런 송석현. 날! 려! 버! 려!”

불스 벤치는 조용했다.

송석현이 2루를 밟고 3루를 밟고 지나가는 걸 지켜만 봤다.

홈에 도착한 송석현은 카메라를 보더니 흠칫했다.

잠시 망설이던 송석현은 검지와 중지를 모아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대더니 뽀뽀를 했다.

“꺄아아아!”

집에서 TV를 보던 김나영이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랐다.

“아니, 얘가 왜 이래?”

나영의 어머니가 달려와 나영을 살폈다.

나영이는 그새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

“아니, 석현이가 홈런을 쳐서.”

“생전 야구 안 보다가 오늘 갑자기 보더니 오버는. 석현이가 홈런 친 게 그렇게 좋아?”

“좋지. 친구가 홈런 치면 좋지.”

“싱겁긴.”

TV에선 송석현의 홈런을 리플레이로 보여 주고 있었다.

김나영의 광대가 들썩들썩했다.

“석현이가 잘하는 거 보니 보기 좋네. 석현이네도 이제 잘 풀렸으니 다행이야.”

“응, 응.”

“그래. 너도 가끔 이렇게 좀 쉬고 해야지. 공부도 좋지만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고 그러면 너 몸 상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저녁은 집에서 먹으려고. 독서실에 너무 오래 있으니까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그래.”

“그래그래. 공부도 적당히 해야지. 너무 많이 하는 것도 안 좋아. 운동도 좀 하고 그래야지.”

“알았어, 알았어. 나 TV 보면서 운동하려고.”

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런지를 했다.

눈은 TV에 고정돼 있었다.

나영의 어머니는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만날 죽상이더니 웬일이래.”

TV에서 벤치의 송석현을 보여 줬다.

송석현은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나영의 눈엔 그저 송석현 얼굴만 보여 싱글벙글, 광대가 내려오질 않았다.

“야, 너 뭐야? 아까 그 닭살은.”

“뭔가 세리머니가 필요한 거 같아서.”

“무슨 그런 세리머니가 있어?”

“그냥 이번에 한번 만들어 봤어요.”

“너 이 새끼, 여자 친구 생긴 건 아니고?”

“아니에요. 제가 여자 만날 시간이 어딨다고…….”

“갑자기 이상한 세리머니 하면 99프로가 여자 친구던데…….”

송석현은 선배들에게 둘러싸여 추궁을 당했지만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 하루 사귄 여자 친구의 부탁이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탕!

탕!

송석현의 홈런 이후 유선호, 최재완의 연속 안타.

불스의 어린 투수 정진웅은 결국 무릎에 손을 올리곤 고개를 떨어뜨렸다.

박신언이 마운드로 올라가 정진웅에게 조언을 건넸지만,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타자 일순.

투 아웃에 톱타자 이지성이 타석에 들어섰다.

“아직도 1회 말입니다. 점수는 7-4, 7-4입니다. 오늘 정말 화끈한 타격전으로 가네요.”

“저는 선발투수 간의 싸움이라고 봤는데 양 팀 선발 모두 너무 일찍 무너져서 이제는 타격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잠실은 용광로나 다름없네요. 뜨거워요. 아주 뜨겁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