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연승 (4)
“넘어간다, 넘어간다, 넘어간다! 좌측 담장! 좌측 담장을 넘기는 스리런! 오늘 스리런의 날입니까? 최재완도 스리런을 만들어 냅니다! 6-3! 고트가 3점을 앞서갑니다!”
“여기서 최재완의 홈런이 나올 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초구를 벼락같이 노려서 쳤어요.”
홈런을 친 당사자는 얼빠진 얼굴로 담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넘어간다고?
몸 쪽으로 오기에 걷어 내려고 확 잡아당긴 건데?
“야.”
포수가 자신을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최재완이 1루로 뛰었다.
“와아아아아아!”
“최재완! 최재완! 최재완!”
“승리의 고트! 달려라 고트! 진격하라, 고트!”
응원가가 쏟아진다.
꿈인가 생신가 싶다.
홈런을 친 지가 얼마나 됐지……?
아니, 잠실에서 담장을 넘긴 게 몇 개나 되지?
1루 베이스를 밟고, 2루 베이스를 밟고, 3루, 홈 베이스를 밟는 동안 최재완의 머릿속엔 오로지 하나, ‘왜 홈런이 나왔을까?’라는 궁금증이었다.
“형, 축하해요.”
“어, 어. 그래.”
송석현의 축하에 최재완이 숨을 돌리고 벤치로 들어갔다.
“쨔샤! 잘했어! 너 잘할 줄 알았어!”
“오늘 네가 MVP다! 최고야!”
“승리 요정 최재완~ 오오오~.”
최재완은 자신의 방망이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김인환이 자신의 배트를 탐내 가져간 후 자신은 김인환의 배트를 대신 가져갔다.
가벼운 방망이를 써 보라는 유선호의 제안으로 잡아 보긴 했지만 영 어색했다.
손맛도 없고 배트가 너무 예민해 오히려 공을 제대로 치기 어려웠다.
업그레이드가 어렵지 다운그레이드는 쉽다고, 막상 가벼운 거로 바꾸다 보니 채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적응했다.
배트가 가벼워지니 여유가 생겼고, 홈런에 대한 부담을 덜자 침착해졌다.
잘 맞추기만 하자, 나는 주연이 아니다, 1인분만 하자.
마음을 비운 배트는 자신의 생각보다 더 빨랐다.
말 그대로 벼락같은 스윙이었다.
“후우.”
한숨을 돌린 후에야 웃음이 찾아온다.
최재완이 제 볼을 만졌다.
실감이 난다.
나도 홈런을 칠 수 있구나.
덩치가 아까운 허깨비가 아니구나.
“투수 교체가 이어집니다.”
“울브스가 빠르게 투수를 교체하네요. 오늘은 확실히 이기겠다는 심산으로 보입니다.”
“불펜에서 나오는 선수는…… 장대희 선숩니다. 장대희 선수가 다음 투수로 올라오네요.”
3회에 김준기를 내리는 건 뼈아프지만, 지금은 1승이 간절한 때다.
지금은 관리가 아니라 스퍼트를 내야 한다.
울브스의 두터운 뎁스는 조금 무리하게 힘을 내더라도 버텨 줄 체력이 될 거다.
“음.”
함성훈 감독은 침음을 흘렸다.
벌써 승부를 건다…….
선발투수 김준기를 내릴 수 있다는 저 자신감이 부러울 뿐이다.
“조재진, 조석주 오늘 컨디션 괜찮나요?”
“네, 2군에서도 성적이 괜찮게 잘 나왔습니다.”
“상황 봐서 저희도 조기 투입을 염두에 두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송석현은 기지개를 켰다.
마운드 위의 장대희가 연습 투구를 보여 준다.
공은 여전히 빠르고 매섭다.
스무 살에 1군 콜업이라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불펜이 조금 더 기회가 많다지만 장대희처럼 1년 차에 필승조는 드문 일이다.
“쩝.”
왜 장대희가 자신에게 악을 써 가며 발목을 붙잡는지 어느 정도 가늠이 된다지만, 이젠 덤덤해지고 있다.
장대희 하나를 마음에 두기엔 송석현은 이미 너무 높은 자리에 와 있다.
라이벌도 아니고 질투할 대상도 아니다.
송석현은 음료수 하나를 집어 마시면서 눈으론 장대희를 바라봤다.
두 눈으로 똑똑히, 똑바로.
* * *
-아웃!
“오진영 선수가 땅볼을 치면서 물러갑니다. 몸 쪽 공이 먹혔어요.”
“장대희 선수의 빠른 공이 쉽지 않습니다. 150km/h가 넘는 공이에요.”
울브스의 장태섭 감독은 입맛을 다셨다.
하위 타선인데 선발투수 김준기를 내린 게 못내 아쉽다.
빠른 선발 강판이었지만, 확실하게 끊어 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분위기가 넘어가기 전에 끊어야 한다.
이제는 고트의 하위 타선이라고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
고트의 상위 타선이 불타기 시작하면 하위 타선도 제법 따라갈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끊을 땐 확실하게.
장태섭 감독의 철칙이었다.
다음 타자는 2루수 정동규.
수비는 괜찮지만 통산 타율이 2할 5푼을 겨우 넘는 타자다.
출루율도 장타율도 눈에 띌 게 없다.
장대희도 정동규를 상대론 정면 승부.
바깥쪽에 빠른 공을 밀어 넣는다.
탁!
탁!
연속 파울 2개.
힘에 밀린다.
정동규가 입술을 깨문다.
고등학교 때까진 그야말로 5툴 플레이어였다.
프로에 와서도 유망주라고 고트에서 애지중지 키웠다.
2년 차에 1군에 올라와 시나브로 주전으로 안착했다.
상무에서도 부동의 주전 2루수로 대활약했다.
승승장구.
모든 게 다 잘 풀릴 거라 생각했다.
제대 전까진.
고트에 복귀했을 때 다시 1군 주전을 거머쥐었다.
거기까지였다.
견실한 수비까진 어느 팀에서도 주전급으로 평가받았으나 그 외 모든 게 성장이 멈췄다.
유격수 수비와 3루, 1루 수비까지 가능한 유틸리티 내야 자원이라는 장점은 있지만, 주전 2루수로서 달갑지 않은 평가였다.
답 없는 고트 하위 타선이라는 카테고리에 최재완, 오진영, 정영수와 함께 묶이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는데 오늘 최재완의 홈런을 보자 눈앞이 어질했다.
최재완도 자신처럼 성장이 끝난 그저 그런 평범한 선수라고 생각한 지 오랜데 오늘 홈런은 남달랐다.
잠실 담벼락을 제대로 넘기는 홈런.
자신은 꿈에도 못 꿀 대형 홈런.
또 뒤처진다.
또 뒤처지긴 싫다.
나도 한때는 스타였다.
겉절이 취급받는 건 질색이다.
탁.
“기습 번틉니다! 장대희 선수가 잡아서, 잡아서, 아~ 못 던집니다. 엉덩방아를 찍고 말았어요. 정동규 선수의 기습 번트가 성공합니다.”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기습 번트……. 이건 사실 예상하기 힘들죠. 벤치의 작전은 아닌 거 같은데요. 정동규 선수의 독자적인 판단인 거 같습니다.”
정동규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전력 질주하다 하마터면 쥐가 날 뻔했다.
숨이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후우, 후우.”
1루에 선 정동규가 몸을 낮춘다.
홈런을 못 치더라도 야구에선 할 수 있는 게 많다.
예를 들어……
-세입!
“장대희 선수가 견제구 하나를 던져 봅니다.”
“정동규 선수의 리드가 길었어요.”
정동규가 다시 리드를 잡는다.
타격이 안 되면 발이라도 쓰면 된다.
2루 수비를 위해 그동안 체력을 아낀다고 몸을 사렸다.
이지성처럼 자기 키보다 긴 리드는 잡지 못하더라도 투수의 신경을 거스를 만큼은 나도 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체력을 크게 쓰지 않는다.
“…….”
장대희가 자신을 신경 쓰는 게 느껴진다.
그래.
나한테 신경을 써.
나도 발 그렇게 느린 놈이 아니니까.
장대희가 공을 던진다.
바깥쪽에 빠른 공, 정직한 승부.
정동규가 2차 리드를 길게 가져간다.
탁!
파울.
예상했던 바다.
정영수는 그리 좋은 타자가 못된다.
장대희 같은 파이어볼러의 공을 그리 쉽게 쳐 낼 리 없다.
정동규는 다시 야금야금 리드를 넓혔다.
팡!
-세입!
“장대희 선수가 또 견제구를 던지네요.”
“신경 쓰인다는 거죠. 득점권에 주자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거죠.”
정동규가 몸을 낮추고 무릎을 살짝 좌우로 흔든다.
장대희는 콧바람을 훅 내뱉는다.
대놓고 신경 쓰인다고 광고하는 셈이다.
장대희의 제2구는 바깥쪽 빠른 공.
정영수가 힘껏 배트를 돌렸다.
탁!
배트에 빗맞는 소리.
공이 땅볼로 흘러간다.
유격수가 공을 잡고 2루로 던진다.
2루수가 베이스를 밟고 1루로 던진다.
-아웃!
장대희가 마운드에서 내려가려다 멈칫한다.
“정동규 선수가 2루에선 세입이 됐습니다. 병살이 아닙니다.”
“유격수가 심판에게 어필해 보지만 심판은 세입이라는 판정입니다. 동 타이밍이라고 봤는데 정동규 선수가 조금 빨랐나요?”
정동규가 가슴팍의 흙을 털며 일어섰다.
도루는 못해도 주루는 열심히 해야 하는 법이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슬라이딩을 한 덕을 봤다.
“아니……하…….”
유격수가 심판에게 더는 따지지 못했다.
비슷하면 아웃 아니던가?
설령 정동규가 조금 빨랐다고 해도 이 정도면 아웃을 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정영수 선수가 친 공이 좀 느렸던 거 같네요.”
“이렇게 되면 병살로 끝날 이닝이 계속 이어지죠? 다음 타자는 1번 타자 이지성 선숩니다. 상위 타순으로 이어져요.”
이지성은 장대희의 구위를 이겨 내지 못했다.
중견수 플라이 아웃.
정동규의 헌신에도 이닝은 그렇게 끝났다.
정동규가 털레털레 벤치로 돌아오는 길.
감독이 직접 나와 정동규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파인플레이. 굿.”
정동규는 당황했지만 감독의 주먹에 주먹을 부딪쳤다.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열정도 전염성이 있다.
송석현이 피어올린 불씨가 김인환에게 번졌지만 더는 커지지 못했다.
한 사람만으로 팀을 바꾸긴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이지성과 유선호가 오자 불씨가 더 커졌다.
이지성, 설진일, 김인환, 송석현, 유선호.
타선의 반절 이상이 활활 타오르자 이제는 다른 선수들에게도 번진다.
감독이나 코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울브스처럼 뎁스가 두터운 팀이라면 치열한 경쟁 때문에 없던 열정도 생기겠지만 고트처럼 1, 2군 간의 차이가 크고 팀워크가 부족했던 팀은 언감생심이다.
감독이 할 수 있는 건 좋은 선수들을 모아 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부채가 불씨를 키울 순 있어도 없는 불씨는 만들지 못하는 법이니까.
타선이 살아난 게 아니다.
선수들이 경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갑시다!”
이창훈이 마운드로 오른다.
“가자, 가자, 가자!”
“이기러 가자!”
선수들도 목소리를 높인다.
이창훈은 이후에도 2실점을 내줬지만 공 아흔한 개로 6회까지 채우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2실점 모두 솔로 홈런 두 개.
무모할 정도로 몸 쪽에 붙인 공은 홈런의 제물이 됐지만, 마음 급해진 울브스 타자들이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달려들면서 승부가 빨라졌다.
“넘어간다! 넘어간다! 넘어간다~~! 김인환의 솔로 홈런이 터집니다!”
“좌측 담장! 또 넘어갑니다! 백 투 백! 송석현의 백 투 백 솔로 홈런이 터집니다!”
8회에는 김인환, 송석현의 백 투 백이 터졌다.
솔로 홈런 두 방이지만 승부의 쐐기를 박기엔 충분했다.
점수는 11-7.
고트도 적지 않은 점수를 내줬지만 타선이 폭발했다.
고트는 모든 타자가 안타를 치는 기록을 세우며 남다른 타격감을 과시했다.
다음 날은 월요일, 쉬는 날이지만 선수들을 좋아하기보다 아쉬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지금 바로 불스랑 붙어야 하는데, 왜 하필 내일 쉬냐.”
“이 타격감 그대로 가져가야 하는데.”
“아깝다, 아까워.”
페가수스, 스콜피언, 울브스라는 1, 2, 3위 팀 상대로 7승 2패.
죽음의 9연전 속에 거둔 대승으로 웨일스를 제치고 4위 등극.
벌써 고트의 가을 잠바 예약이 폭발했다.
연예인들도 가장 시구하고 싶은 팀으로 고트를 뽑았다.
팀 순위는 4위지만 현재 최고의 인기 팀, 흥행 몰이가 고트라는 건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웠다.
현재 리그에서 가장 폭발력 있는 클린업.
헐크 김인환.
잠실의 왕 송석현.
타격의 신 유선호.
월요일 스포츠 뉴스의 50%가 고트에 관한 뉴스였다.
그 50% 중 절반은 송석현에 관한 얘기였다.
대한민국의 스타가 된 송석현이지만 아직 스무 살이었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쉬는 월요일.
송석현은 정미남, 김영석과 영화관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