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연승 (1)
“고생이 많다.”
유선호의 얘기에 송석현은 눈을 깜박였다.
“제가요?”
“그래. 이래저래 속 마이 썩지?”
“아뇨. 제가 뭘요.”
“뭘 안 썩어. 니는 죽어라 해쌌는데 아들은 따라오지 못하고 속 안 터지고 버틸 수 있나?”
“뭐…… 다들 열심히 하는데요.”
유선호는 송석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자들이 억수로 열심히 하고 있거든? 오히려 내가 고마하고 집에 가라고 말리느라 힘들 정도다.”
“시즌 중에 그렇게 하면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 텐데.”
“체력 떨어지는 거보다 더 힘든 게 멘탈이다, 멘탈. 자들도 안 답답하겠나? 대놓고 약점 취급을 당하는데.”
“…….”
“그래도 뭐든 사이클이 있는 기야. 바닥을 함 찍으면 다시 올라가게 돼 있어. 내가 이런 말 하기에 조금 남사시러분 것도 있지만 너도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니 요새 말수 없어진 거 아나?”
송석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랐습니다.”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마. 그러면 더 빨리 지쳐.”
“네.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스트레스 받지 말고오. 알았제?”
“네.”
집으로 돌아온 송석현이 차가운 물로 샤워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다.
“푸우우우.”
샤워를 마친 송석현이 거울을 보며 제 뺨을 툭툭 쳤다.
“단순하게 하자, 단순하게.”
* * *
울브스와의 3차전.
잠실 3연전에서 처음으로 매진을 달성하지 못한 날이었다.
고트의 허약한 빈타에 고트 팬들의 발길이 멈췄다.
어제 경기 이후 스포츠 기사까지 팬들의 속을 박박 긁어 놓은 것도 주효했다.
[송석현과 아이들?]
[물에 젖은 고트의 방망이]
[잠실 에이스 맞대결의 승리는 장계성]
[외로운 송석현. 누굴 믿고 가야 하나]
“안녕하십니까, 야구 팬 여러분. 오늘도 잠실 3연전 SP 스포츠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참 싱거운 승리였죠?”
“네. 어제는 울브스의 완승이었습니다. 고트의 마운드는 나름 제 몫을 해 줬지만 역시나 문제는 타선이었습니다. 엊그제부터 침체에 들어간 타선이 좀체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 페가수스, 스콜피언을 완파하면서 매서운 상승세를 보여 주던 타선이었는데. 그저 잠깐의 슬럼프일까요?”
“타격에는 사이클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상승세가 가팔랐던 만큼 하락세도 극적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 좌투수에 약하다는 약점도 두드러진 거 같습니다.”
“어제 이지성, 김인환, 유선호 세 선수의 부진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세 선수 모두 고트의 상위 타순이고 중요한 역할을 맡은 타자들인데 장계성 선수에게 꼼짝을 못 했습니다. 원래 장계성 선수가 좌타자에게 강하긴 하지만 유독 맥을 못 춘 느낌이 있었습니다. 조진희 선수한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계속 이런다면 아마 표적 등판도 피하기 어려울 겁니다.”
“오늘도 선발투수로 좌투수 김준기 선수가 내정돼 있습니다.”
“김준기 선수와 장계성 선수는 다른 타입입니다만…… 김준기 선수도 좌타자에게 강하거든요. 기교파 선수답게 공만 잘 던지는 게 아니라 공을 잘 숨겨서 던지는 거로 유명합니다. 특히 좌타자에게 공을 잘 숨기죠. 어쩌면 장계성 선수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 고트는 여러모로 어려운 경기가 되겠군요. 하지만 오늘은 이창훈 선수가 선발 등판하지 않습니까? 고트의 기둥 같은 선수란 말이죠.”
“선발의 무게감으로 치자면 이창훈 선수가 김준기 선수보다 더 낫다고 보지만 결국 타선입니다. 울브스는 전체 구단 중에서 가장 뎁스가 두텁기로 유명합니다. 레귤러급 선수들이 많다는 얘기예요. 이에 비해 고트는 좋은 선수들은 있지만 뎁스는 얇기로 유명합니다. 올해 주전으로 도약한 최재완, 오진영 선수의 경우 아예 1군 풀타임이 한 번도 없죠. 최대규, 이낙균, 강문규 선수가 그대로 있고 유선호, 이지성 선수가 추가됐다면 상황에 맞춰서 선수들을 넣었다 뺐다 할 수 있을 텐데 고트는 이지성, 유선호, 김인환 선수를 뺄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결국 실력으로 밀고 가야 하겠군요.”
“네. 그렇죠.”
“오늘 경기는 울브스의 우세라고 보시나요?”
“선발의 무게감이나 타선의 컨디션, 불펜까지. 모두 울브스가 고트에게 뒤질 게 없는 상황입니다. 6 : 4 정도로 울브스의 우세를 점칩니다.”
“6 : 4. 야구에선 결코 만만찮은 숫잔데요. 고트의 타격감이 오늘은 되살아날 수 있을지, 울브스는 어제의 기세를 살릴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경기 시작 전.
이창훈은 불펜에서 공을 몇 개 던지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를 본 투수코치가 다가가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픈 건 아닌데 조금 불편해요.”
“어디가 불편해?”
“손가락 첫째 마디요.”
“아픈 거야? 그냥 불편한 거야?”
“조금 아픈 거 같기도 하고…….”
“하, 많이 안 좋아?”
“아뇨. 그 정도는 아니에요.”
투수코치가 송석현을 불렀다.
“석현아, 얘 오늘 공 어떠냐?”
“나쁘진 않은 거 같습니다.”
“좋은 거 같지도 않아?”
송석현이 이창훈의 눈치를 봤다.
투수코치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래, 알았다.”
투수코치가 불펜에서 나갔다.
이창훈은 글러브로 자기 얼굴을 가리곤 한숨을 쉬었다.
“괜찮으세요, 선배님?”
“그래, 괜찮아.”
“어디 다치신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닌데……. 아, 게임을 많이 해서 그런가. 손가락 마디가 아픈 건 처음이라 당황스럽네.”
“게임이요? 게임한다고 손가락이 아파요?”
“나도 몰라. 아플 이유가 없으니까. 마우스 클릭 많이 한다고 손가락이 아프나? 환장하겠네.”
“많이 안 좋으신 거예요?”
“그건 아냐. 그 정도는 아니야.”
“네…….”
이창훈이 손을 탁탁 털었다.
“아, 진짜. 짜증 나게.”
-플레이볼!
경기가 시작됐다.
이창훈은 공을 만지작거리면서 미간을 좁혔다.
울브스의 1번 타자는 김하균.
발 빠르고 타율도 좋은 전형적인 리드오프.
타율에 비해 출루율은 부족한 타자지만 컨택이 좋고 발이 빨랐다.
‘포심, 인사이드.’
송석현은 장타력 없는 리드오프에게 과감한 승부를 요구했다.
이창훈이 손가락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한 만큼 긴 이닝을 기대하기 어렵다.
팟!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포수의 미트에 정확하게 향했다.
탕!
타자가 배트로 공을 맞혔다.
“유격수 정면! 아웃! 김하균 선수가 제대로 노려서 쳤는데 운이 나빴습니다. 야수 정면으로 갔네요.”
“초구를 노리고 나온 거 같네요.”
초구 아웃이지만 배터리의 표정이 굳었다.
벤치의 감독과 코치들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상태가 별로 안 좋긴 안 좋나 보네요.”
함성훈 감독의 말에 투수코치가 마른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관리를 잘했어야 했는데.”
“시즌 내내 베스트 컨디션은 유지할 수 없으니 이해는 합니다만…… 초구부터 김하균한테 정타가 나온 건 심상치 않네요.”
“말씀하신 대로 불펜 대기시켰습니다. 급하면 3회에도 올릴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5점까진 두고 보시죠.”
“5점이요? 우리 타선을 생각하면 5점은…….”
“다음 주부터 불스, 피닉스전입니다. 설령 오늘 지더라도 불펜 아껴서 불스, 피닉스전에서 4승 2패를 가져가는 게 좋다고 봅니다. 이길 경기는 확실히 가져가야죠.”
투수코치는 콧바람을 뿜었다.
“울브스전입니다. 오늘까지 지게 되면 우리 팀 사기도 그렇고 팬들 반응이나 윗분들 심기도 안 좋을 텐데요.”
“그래도 순리대로 해야죠. 애초에 선발이 흔들리면 잘해 봐야 승률이 4할입니다. 울브스한테 이기나 불스, 피닉스한테 이기나 똑같은 1승이에요. 야구도 일종의 투잡니다. 승률이 낮으면 낮게 베팅하고 승률이 높으면 높게 베팅해야죠.”
투수코치는 한숨을 내뱉었다.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얘긴데 야구에선 쉽지 않은 결정인 거 같습니다.”
“저야 임시 감독이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욕 좀 먹고 물러나면 그만이죠, 허허.”
“그러면 오늘 경기는 버리는 겁니까?”
“버리다뇨. 어떤 경기든 승리 확률은 있어요. 5점 정도면 작게나마 기대해 볼 만한 베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타선이 한번 불이 붙으면 또 무섭잖아요?”
이창훈은 2번 타자에게 볼넷, 3번 타자에게 안타를 내주며 1사 1, 3루에 처했다.
송석현은 타석에 들어오는 4번 타자 강제관을 바라봤다.
리그 최고의 3루수.
잠실 30홈런 타자.
3할 타율, 4할 출루율, 5할 장타율의 표본.
40홈런을 넘겨 본 페가수스의 김욱이나 스콜피언의 조양철보다 임팩트는 작지만 OPS형 타자의 완성형이라 불리는 타자.
기복 없고 약점 없는 타자가 득점권 찬스에 들어설 때만큼 간담이 서늘한 경우는 드물다.
투수의 컨디션마저 정상이 아니라면 더더욱…….
‘커브.’
송석현은 초구로 존에 들어오는 커브를 요구했다.
이창훈이 던진 공은 홈플레이트에 바운드 됐다.
“오우, 송석현 선수가 빠르게 블로킹을 했습니다.”
“방금은 커브가 좀 빠진 거 같습니다. 공이 너무 빨리 떨어졌어요.”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습니다.”
송석현이 숨을 골랐다.
빠른 공도 시원찮은데 변화구 제구도 시원찮다.
송석현의 눈이 대기 타석의 정병수에게 향했다.
힘 하나만큼은 리그에서도 손꼽는 타자지만 선구안에 문제가 많다.
게스 히터이니 만큼 볼 배합만 잘하면 병살로 이닝을 마칠 수 있다.
‘체인지업, 로우.’
계산이 끝난 송석현은 강제관을 피해 가기로 했다.
승부는 정병수 타순에게 건다.
이창훈은 송석현의 요구대로 체인지업을 던졌다.
다만 코스는 존 아래가 아니라 존 한복판이었다.
탕!
“좌측 담장! 시원하게 넘어갑니다! 강제관의 스리런!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홈런을 이어 가는 강제관 선숩니다!”
“송석현 선수를 뒤에 세워 두고 어제, 오늘 제대로 실력을 과시하네요. 잠실의 왕이라는 칭호, 쉽게 뺏길 수 없다는 거죠.”
“1회부터 이창훈 선수가 흔들립니다. 고트가 오늘 갈 길이 머네요.”
이창훈이 눈을 질끈 감았다.
송석현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강제관이 홈으로 돌아오는 사이, 누군가 소리쳤다.
“자 자, 3점 주고 우린 4점 가져오면 돼! 가자, 가자!”
“원래 잘하는 쪽이 핸디캡 가져가는 거야. 안 그래?”
먼저 말을 한 건 2루수 정동규였고, 이어서 말을 받은 건 유격수 정영수였다.
이창훈은 눈으로는 앞을 보고 있었지만 귀로는 두 사람의 얘기를 들었다.
“형, 대충 던져. 내가 다 잡아 줄게.”
“오늘 내가 슈퍼맨 해 줄게.”
“형, 여기 잠실이에요. 그냥 욱여넣어요. 홈런만 아니면 다 잡을 수 있어요.”
“자, 파이팅, 파이팅.”
정동규, 정영수, 최재완, 김인환이 투수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키웠다.
이창훈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곤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송석현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홈런은 지나간 일이고 이제는 타자만 생각해야 한다.
연타석 홈런이 나오면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간다.
정병수에게만큼은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먼저 커브로 공 하나를 빼고 바깥쪽에 포심이나 슬라이더로 타자의 배트를 한 번 빼는 게 베스트.
‘커브.’
송석현의 커브 사인에 이창훈이 고개를 저었다.
‘체인지업?’
‘슬라이더?’
이창훈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포심?’
이창훈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웃사이드 포심.
송석현은 근육질의 정병수를 보며 숨을 죽였다.
괜찮을까?
이창훈은 공을 던졌고 정병수는 공을 쳤다.
“우측 담장! 우측 담장! 아, 잡혔습니다. 우익수 설진일의 슈퍼 플레이! 담장 바로 앞에서 저걸 잡아냅니다.”
“방금은 정병수 선수가 욕심을 많이 냈습니다. 바깥쪽으로 좀 빠진 공인데 억지로 잡아당겼어요. 결대로 밀어 쳤어도 충분했던 공 같은데 욕심이 앞섰던 거 같습니다.”
“이제 투아웃입니다. 다시 한번 숨을 돌리는 고트. 연타석 홈런의 기회가 무산되는 울브습니다.”
이창훈이 로진백을 손에 툭툭 털었다.
잠시 잊은 게 있다.
여긴 잠실이다.
홈런?
홈런 레이스에서 치라고 던져도 5할도 넘기지 못하는 게 홈런이다.
아무리 컨디션이 별로라고 해도 잠실을 홈으로 쓰는 투수는 구속 5km/h는 더 가지고 던지는 셈이다.
“후, 어떻게든 막으면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