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 (1)
주중 3연전 고트와 스콜피언의 마지막 경기.
경기의 승자는 스콜피언이었다.
양 팀 모두 5선발이 나오면서 타격전을 예상했으나 결과는 3-2, 스콜피언의 신승.
고트가 9회에 2점을 내며 역전을 노려 봤으나 마무리 탁기덕의 벽은 높았다.
“쯧, 이겨도 이렇게 이기나.”
스콜피언의 이건후 감독은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도 밝은 표정을 짓지 못했다.
1승 2패. 루징 시리즈.
페가수스와의 경기는 2경기 차로 벌어졌다.
3연전 마지막 경기에 필승조까지 투입하면서 주말 3연전의 투수 운용이 조금 꼬였다.
주말 3연전 상대는 페가수스.
좋지 않은 흐름이다.
위안이 있다면 선발 로테이션이 1, 2, 3선발이라는 점이다.
“까다로운 팀이야, 고트.”
이건후 감독은 포스트시즌에서도 만날 고트를 상상했다.
선발투수를 제외하곤 장점 하나 없던 고트에 KS포가 장착됐고, 작전이 가능한 이지성과 KS포의 마지막 퍼즐 유선호가 추가됐다.
불펜에는 아직도 물음표가 많지만 김정률, 고진석, 정홍민이 잘해 주고 있다.
페가수스전을 앞두고 있지만 머리엔 고트와의 경기가 가득했다.
* * *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함성훈은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야구 경기가 끝나면 방영되는 하이라이트 방송이었다.
-네. 오늘 경기 웨일스가 피닉스에게 의외의 일격을 맞아 고트와 1경기 차로 따라잡혔습니다.
-웨일스의 상승세도 무서운데 고트는 더 무섭습니다. 페가수스와 스콜피언으로 이어지는 일정이라 고트가 어려울 거로 봤는데 오히려 양 팀의 발목을 제대로 잡았습니다.
-이러면 가을 야구의 향방은 더 오리무중을 가는 걸까요?
-최근 상승세를 본다면 고트가 포스트시즌 안착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발투수가 건재한 데다 1번부터 5번까지 타순이 아주 짜임새가 좋아요. 하위 타선의 타율도 2할 2푼대에서 최근 2할 4푼까지 올라왔습니다. 선순환이죠. 앞선 타자들이 뒤 타자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다 보니 시너지 효과가 나온 겁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정을 보면 고트보단 웨일스가 더 유리한 거 같습니다. 웨일스는 하위권 팀을 계속 만난다면 고트는 이번에는 울브스를 만납니다. 다음 팀은 불습니다. 일정만 본다면 1, 2, 3, 6위 팀을 연속에서 만나게 되는 겁니다. 불스는 오늘 6위로 떨어졌지만 지금 웨일스, 고트, 불스가 4위, 5위, 6위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계속 순위를 바꾸고 있거든요. 쉬운 일정이 아닐 거 같습니다.
-고트는 이번 울브스전까지 좋은 결과를 낸다면 4위는 따 놓은 당상입니다.
-울브스는 고트 덕분에 스콜피언과 페가수스와의 승차를 줄였는데 이제는 당사자를 만나게 되네요.
-잠실 라이벌이 피할 수 없는 승부를 하게 됐습니다.
-웨일스 얘기를 하다가 고트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됐네요. 하하.
-그만큼 고트가 지금 핫한 팀이라는 얘기죠. 얘기할 게 많거든요. 시간이 없는 관계로 다음 기회에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함성훈이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울브스의 선발투수는 수아레즈, 장계성, 김준기로 이어진다.
수아레즈도 좋은 투수지만 문제는 장계성, 김준기다.
이지성, 김인환, 유선호가 고정 타순으로 들어오면서 좌타자가 셋으로 불어났다.
장계성, 김준기 모두 좌완 투수.
특히 장계성은 좌타자에게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고 김준기도 우타자보단 좌타자에게 성적이 더 좋다.
마무리 진석남까지 좌완 파이어볼러.
하위 타선이 살아났다지만 어디까지나 죽을 쓰고 있다가 이제야 다른 팀 정도 치는 수준까지 올라왔을 뿐이다.
그마저도 유선호가 살아나면서 하위 타선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거지, 유선호가 맥을 못 춘다면 하위 타선과의 시너지마저 죽을 거다.
“역시…….”
믿을 건 송석현 하난가 싶다가도 고개를 젓는다.
송석현에게 정직한 승부를 할 리 없다.
송석현을 거를 확률이 높다.
이지성, 유선호가 스콜피언전에서 제 몫 이상을 해 줬다지만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잘 아는 팀이기에 활약했을 가능성도 높다.
울브스전까지만 잘 넘긴다면 이후엔 불스, 피닉스, 폭스로 이어지는 하위권 팀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 12 경기에서 무조건 4위 안에 들어간다.
베스트는 3위와 2경기 차까지 줄이는 거다.
이제 목표는 포스트 시즌이 아니다.
최고는 리그 1위지만 이건 쉽지 않다.
현실적인 베스트는 리그 2위.
준플레이오프를 하느냐, 안 하느냐는 천지 차이다.
“울브스, 울브스…….”
상대 전적으로 보자면 페가수스, 스콜피언보다 더 지독한 상대.
함성훈은 서울로 가는 내내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 * *
“자, 짠.”
“무슨 짠이에요, 짠은.”
“쓰읍. 인마. 이걸로라도 짠을 해야 할 거 아이가.”
유선호와 이지성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잔을 부딪쳤다.
“크으, 시원하다. 아주 속이 시원하네.”
유선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비우고선 마카롱 하나를 입에 물었다.
“꿀맛이다, 꿀맛.”
“형, 제 것도 남겨 둬요.”
“여 있다. 누가 뺏어 묵을까 봐?”
이지성은 마카롱을 한입 베어 물곤 오물거렸다.
“여태 본 얼굴 중에 오늘이 가장 형 얼굴이 밝네요.”
“그래? 그라나?”
유선호가 껄껄 웃었다.
“그럼 안 좋을 게 있나. 이건후 앞에서 제대로 보여 줬다 아이가, 내가 아직 안 죽었다는 거.”
“그런 셈이죠.”
“니도 잘했다 아이가.”
“저는 그냥 열심히 한 거예요. 이 감독 앞에서 무력시위하고 그런 건 아니고.”
“기덕이보다 잘할라꼬 애 쓰는 거 다 보였는데 그짓말하는 거 보소.”
“기덕이만큼 하려고 한 거지, 기덕이보다 잘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제가 기덕이랑 비교할 수 있겠어요? 이제 기덕은 저~만큼 앞서갔는데.”
“사나이 아이가, 사나이. 사나이가 그리 약한 소리 해서 되나.”
“약한 소리가 아니라 사실이니까요.”
이지성이 커피를 쭉쭉 빨아 마셨다.
“형은 여기 온 거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천만다행이지. 여 아니면 은퇴했다 아이가.”
“저도 대구 떠나기 싫었는데 막상 서울 오니까 좋네요.”
“어디든 다 사람은 적응하고 살게 돼 있다니까.”
“전 솔직히 형이 적응 못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와?”
“5번 타자잖아요. 형 자존심이 있지. 양철이 형한테도 4번 줄 때 끙끙 앓았잖아요.”
“뭐 끙끙 앓노, 끙끙 앓긴.”
“형이랑 친해진 건 여기 와서 더 친해졌지 그 전에는 사실 그렇게 친하진 않았잖아요. 그때 제가 보기엔 형이 엄청 자존심 상해하는 거 보였거든요.”
유선호가 커피 대신 얼음을 씹어 먹었다.
“별수 있나. 나이 묵으면 뒤로 물러나야지.”
“형은 정말 만족해요, 5번?”
“좋지. 석현이 뒤에서 먹으니 을매나 좋노.”
“그럼 다행이구요.”
“짜슥이. 니가 내 걱정을 할 처지가?”
“이번에 대구에서 경기하면서 이런 생각했어요. 어쩌면 고트가 한국시리즈까지 갈 수도 있겠다.”
“갑자기?”
“뭔가 딱딱 잘 물려서 돌아가더라구요. 인환이랑 석현이가 워낙 잘하니까 나만 삽질 안 하면 해볼 만하겠다, 이런 거.”
“니는 고트가 이길 수 있다고 보나?”
“한국시리즈 우승이요?”
“그래.”
“글쎄요……. 페가수스한테 스윕 따내는 거 보면 해볼 만하기도 하고.”
“스콜피언도 페가수스한테 번번이 미끄러졌는데 그게 되겠나?”
“상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혹시 또 모르죠, 페가수스가 고트한테는 약할 수도 있고.”
“모르겠다, 내는 항상 페가수스가 어려워가.”
두 사람은 이후에 말이 없었다.
머릿속에 한국시리즈에서 페가수스를 만난 상상을 하고 있을 터다.
도루하고 홈런 치는 상상.
그저 다시 주전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좋아했는데 어쩌면, 만약이지만 어쩌면 큰 꿈을 꿀 수 있지도 않을까?
페가수스전, 스콜피언전을 치르면서 두 사람의 가능성을 봤다.
강팀으로 도약할 가능성.
“이제 일어나자. 너무 늦게 자면 안 된다 아이가.”
“네. 일어나시죠.”
두 사람은 카페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포스트시즌까지 이제 겨우 두 달.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시간이다.
“뭐, 우리라고 한국시리즈 우승 못할 거 있나?”
유선호의 농담에 이지성이 웃었다.
* * *
울브스와의 주말 3연전.
고트의 성적이 가파르게 올라오면서 잠실에는 암표까지 나돌았다.
잠실 라이벌, 주말 3연전.
두 단어만으로도 잠실은 경기 시작부터 만원이었다.
양 팀 팬들은 서로 선수들의 등번호가 달린 야구복을 입고 속속 잠실로 향했다.
울브스 팬들의 등에 가장 많이 쓰인 이름은 강제관과 장계성이었다.
울브스의 1선발 좌완 파이어볼러 장계성은 데뷔 때부터 스타였고 강제관은 잠실에서 30홈런을 때려 낸 울브스 토종 거포였다.
고트 팬들의 등에 달린 선수 이름 중 가장 많은 건 송석현이었다.
이제 송석현은 라이징 스타, 떠오르는 신성, 장외 홈런의 사나이 같은 별명을 뛰어넘었다.
최근 송석현의 별명은 하나로 귀결됐다.
잠실의 왕.
울브스 팬들조차 잠실의 왕이라는 단어에 왈가왈부하지 못했다.
타석에 송석현이 들어서면 자신들도 숨을 죽이게 되니까.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 법이다.
상대 전적에서 울브스가 고트에게 뒤진 적이 언제던가.
울브스는 고트를 밟고 1위로 도약할 욕심이었다면 고트는 울브스의 멱살을 잡아끌어 단독 4위로 올라갈 셈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야구 팬 여러분. SP 스포츠의 캐스터 윤중현.”
“해설 윤상후입니다.”
“오늘 주말 3연전 잠실은 벌써 팬들로 가득 차고 있습니다.”
“양 팀 팬들의 기대가 대단합니다. 그동안 한쪽으로 기울어졌던 잠실 라이벌전이 다시 한번 팽팽해지기 시작했거든요.”
“고트의 메가 히트 상품이죠. KS포. KS포가 살아난 이후 고트는 리그에서 가장 무서운 클린업을 갖췄습니다.”
“괴력의 김인환, 정점의 송석현, 베테랑 유선호. 어디 하나 거르기 힘든 타선이죠.”
“특히 송석현 선수가 핵심 아니겠습니까? 이 선수에게 슬럼프라는 단어가 있나 모르겠습니다.”
“요새 팬들은 송석현 선수가 홈런을 안 치면 슬럼프라고 하더라구요.”
“하하하, 그럼 안타를 쳐도 슬럼픈가요?”
“송석현 선수에 대한 기대치가 그만큼 높다는 얘기죠.”
“보통 잠실의 다른 타자들은 잠실을 벗어나 원정에서 더 성적이 좋은데 송석현 선수는 반댑니다. 잠실에서 더 강해요.”
“물론 그렇다고 원정에서 약한 건 아닙니다. 원정 OPS가 0.892. 홈 OPS 1.103. 그냥 홈에서 더 잘 하는 겁니다.”
“신인 포수가 잠실을 홈으로 쓰면서 OPS 1이 넘는다. 이게 말이 되는 걸까요?”
“그러니 잠실의 왕 아니겠습니까?”
“잠실의 왕. 스무 살의 선수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도 되나 모르겠습니다. 보통 왕자 이런 단어를 붙이지 않습니까?”
“왕자라고 하기에는 송석현 선수보다 잠실에서 더 잘하는 선수가 없으니까 왕이 되는 거죠.”
“지금보다 더 잘하면 황제가 되는 걸까요?”
“지금보다 더 잘하는 게 가능할까요?”
-플레이볼!
경기 시작과 함께 마운드에 고트의 선발투수 마이클 피시가 들어섰다.
울브스는 김하균, 정수영, 정인하로 이어지는 타선.
세 타자 모두 타율 3할이 넘는 타자들이었지만 마이클 피시의 150km/h를 상회하는 강속구에 속절없이 당했다.
“고트의 삼자 범퇴. 울브스가 1회에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마이클 피시는 어느 팀을 가든 1선발을 할 수 있는 투숩니다. 이런 투수는 공을 많이 보면서 빨리 마운드에서 내릴 생각을 해야지 초반부터 승부 볼 생각을 하면 안 돼요.”
1회 말.
울브스의 마운드에는 베너드 수아레즈가 들어섰다.
“마이클 피시와는 다른 유형의 선발투수죠? 직구 속도는 140km/h을 조금 넘는 정돈데 상대한 타자들 말로는 돌직구라고 합니다. 구속은 느리지만 구위가 좋은 타자예요. 제구도 훌륭하고요.”
수아레즈는 1번 타자 이지성에게 땅볼 아웃, 설진일에겐 안타를 허용했다.
3번 타자 김인환이 나오자 울브스 벤치에서 사인이 나왔다.
승부!
송석현과 승부하는 것보다 김인환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김인환은 떨어지는 공에 약점이 있지 않은가.
송석현은 당최 약점조차 알 수 없는 타자다.
‘오케이.’
수아레즈의 초구는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
김인환이 움찔하다 놓쳤다.
-스트라이크!
원 스트라이크 이후 낙차 큰 커브.
김인환이 헛스윙 했다.
-스트라이크!
“연속 투 스트라이크! 수아레즈 선수가 유려한 제구를 뽐냅니다.”
“김인환 선수가 꼼짝을 못하네요.”
김인환이 타석에서 물러나 몸을 풀었다.
역시나.
스트라이크 하나를 뺏기니 유인구가 이어진다.
김인환이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체인지업.’
변화구 하나를 더 보여 준 후 승부한다.
투 스트라이크 하나 보여 준 후 떨어지는 공.
정석적인 볼 배합이었지만, 김인환이 기다린 공이었다.
탕!
김인환이 골프 스윙하듯 공을 아래에서 위로 걷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