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35화 (135/201)

달구벌 소닉

“볼넷. 또 볼넷입니다.”

“조상웅 선수의 신중한 승부가 제대로 꼬였어요. 김인환, 송석현 선수가 공을 잘 골라냅니다.”

“이러면 만루에서 유선호 선수가 들어오거든요.”

3회 초.

조상웅은 모자를 벗어 땀을 닦았다.

클린업을 상대로 어려운 승부를 이어 갔지만 결과는 대실패.

타석엔 유선호가 들어섰다.

툭툭.

유선호가 배트로 발을 두 번 치곤 자세를 잡았다.

유선호와 구승철 모두 말을 아꼈다.

사담을 나눌 타이밍이 아니다.

조상웅은 초구로 슬라이더를 던졌지만 유선호는 치지 않았다.

“…….”

구승철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9회말 2사 만루 풀카운트에서도 공을 고르는 타자, 유선호.

타고난 침착함에 연륜이 더해지면서 타석에서 서두르지 않는다.

타자가 여유롭다는 건 투수의 변화구가 잘 먹혀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포심, 아웃사이드.’

어쩔 수 없다.

힘 대 힘으로 가야 한다.

조상웅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때론 알아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배터리의 사인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노련한 유선호 선수라 배터리 입장에선 정말 까다로울 겁니다. 평생을 함께 같이한 선수들이다 보니 유선호 선수도 그렇고 조상웅 선수도 그렇고 서로를 잘 알거든요. 서로에 대한 데이터가 많으면 투수보단 타자가 더 유리하죠.”

“오늘 만루가 많이 나오네요.”

“그렇네요. 양 팀 선발투수들이 모두 수준급 선수들이거든요? 투수들의 컨디션도 컨디션이겠지만 오늘은 타자들이 잘하는 거 같습니다.”

조상웅의 손을 떠난 공이 존 안으로 들어왔다.

유선호의 배트는 정확히 공의 가운데를 때렸다.

탕!

“우중간! 우중간을 가르는 안타! 3루 주자 홈인! 2루 주자까지 무난하게 홈으로 들어옵니다! 유선호 선수의 2타점 적시타가 터지네요.”

“역시 유선호 선숩니다. 들어온 공은 놓치지 않아요.”

2점.

겨우 2점일 뿐이다.

조상웅은 다시 로진백을 만지작거렸다.

유선호만 지나면 뒤 타자들은 물타선이나 다름없다.

탕!

탕!

“안타! 안탑니다! 삼연속 안타가 나옵니다. 이렇게 되면 고트가 이번 이닝에만 4점을 뽑아냅니다..”

“이번 이닝은 고트의 이닝이네요. 최재완, 오진영 선수가 오랜만에 연속 타점을 올려 주는 거 같습니다.”

“끈질깁니다. 고트, 끈질겨요. 고트가 원래 이렇게 끈질긴 팀이었나요?”

함성훈이 손뼉을 치며 벤치로 돌아오는 선수들을 맞았다.

타격 코치 강연태가 감격에 젖은 듯 말했다.

“애들이 달라졌네요. 끈끈해졌습니다.”

“확실히 지성이랑 선호가 살아나니까 짜임새가 좋네요.”

“이 정도면 상위 타선은 어느 팀이랑 비교해도 안 뒤지는 거 같습니다.”

“페가수스, 스콜피언 상대로 이 정도면 포스트시즌에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할 만하겠어요.”

3회 말.

고트의 추격은 4점에서 그쳤다.

흔들리는 조상웅을 도운 건 2루수 강균승의 슈퍼 캐치.

스콜피언 선수들은 벤치로 돌아와 한숨을 돌렸다.

“승철아.”

스콜피언의 배터리코치가 구승철을 불렀다.

“네, 코치님.”

“이제부터 지성이 잘 봐둬. 지성이 출루하면서 스텝이 꼬인 거 같으니까 확실하게 잡는 쪽으로 가. 도루도 쉽게 주지 말고.”

“네. 주의하겠습니다.”

“너도 알지, 지성이 발은 아직도 쓸 만하다는 거?”

“네. 그럼요.”

소닉.

이지성의 별명이었다.

달구벌 소닉 이지성.

WBC 같은 국가 대항전에서도 이지성의 발은 미국, 일본을 비롯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통했다.

발도 빠르지만 투수의 타이밍을 뺏는 데 일가견이 있다.

“후우.”

같은 팀에 있을 땐 몰랐다.

이지성이라는 주자의 가치.

유선호라는 베테랑의 가치.

스콜피언에 있을 땐 계륵 같던 선수들이 고트에 가자 퍼즐의 조각처럼 딱 맞아떨어진다.

“힘들다, 힘들어…….”

3회부터 좁혀진 점수 차이는 양 팀 선발투수들의 승부욕을 불태웠다.

다시 제 페이스를 찾은 한민석은 스콜피언에게 더는 출루를 허용하지 않았다.

조상웅도 범타를 유도하면서 아웃 카운트를 늘렸지만 이지성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흐름이 끊겼다.

“다시 이지성 선수가 1루에서 리드를 넓힙니다.”

“오늘 이지성 선수가 공격적으로 주루를 하거든요. 스콜피언 배터리가 굉장히 신경 쓰일 겁니다.”

이지성이 몸을 낮췄다.

조상웅의 견제.

이지성은 서서 귀루했다.

조상웅은 연이어 두 번을 더 견제했다.

그리고 던진 공은 바깥쪽 빠른 공.

탕!

설진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힘껏 스윙했다.

“우측 담장! 우측 담장! 우측 담장을 때리는 큼지막한 안타! 담장은 넘지 못했지만 2루타를 때리는 설진일 선숩니다. 발 빠른 1루 주자가 홈까지 들어오기에 충분한 안탑니다.”

“오늘 투수전이 아니라 타격전이 되고 있습니다. 경기 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흐름인데요.”

“이어지는 타선은 KS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상웅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벌써 공을 많이 던졌다.

오늘은 5회까지만 던져도 다행인 날이다.

1회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왜 이렇게 일진이 꼬인 걸까?

오늘 내 공이 시원찮나?

조상웅은 김인환을 타석에 세워 두고 자신의 공에 믿음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빠른 공으론 김인환을 이겨 낼 자신이 없다.

떨어지는 공에 헛스윙만 돌리던 김인환이 전 타석엔 볼넷을 골랐다.

빠른 공도 변화구도 먹히지 않는다.

대체 뭘 던져야 하지?

불안은 번뇌로 번졌다.

김인환에게 볼넷.

구승철은 그대로 마운드로 걸어 올라갔다.

“마, 뭐 하노.”

“네? 아, 죄송합니다.”

“그냥 미트만 보고 던져. 맞으면 내 탓이고 잡으면 니 덕이야. 알았어?”

“……네.”

“생각 버리고 집중, 집중. 알았지?”

“네.”

집중.

조상웅이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었다.

집중해서 일구, 일구에 전력을 다한다.

그렇다면 초구는 가장 자신 있는 공, 각이 작은 슬라이더로 간다.

“이번엔 구승철 선수가 마운드를 방문했는데요. 저번 이닝에는 송석현 선수가 마운드를 방문한 이후에 한민석 선수가 달라진 모습을 보였잖습니까? 이번에는 스콜피언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까요?”

“조상웅 선수가 오늘 볼넷이 많습니다. 제구력이 좋은 선순데 오늘은 흔들려요. 자기 공을 던져야 합니다. 포수도 이 부분을 지적했을 겁니다. 어려워도 투수는 자기 공을 던져야 합니다.”

조상웅이 송석현을 노려봤다.

무서운 타자임에는 분명하지만 아직 경험이 적은 신인 선수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타자 몸 쪽을 파고드는 각이 작은 슬라이더.

국내에 우타자 몸 쪽에 슬라이더를 집어넣을 수 있는 투수는 몇 되지 않는다.

그중에 조상웅이 있다.

땅볼을 유도하기 좋은 공이다.

그 말은 먹히기 좋은 공이란 얘기다.

각이 작은 만큼 직구와 구분하기 더 어렵다.

“후우우.”

숨을 얕게 내뱉었다.

타격 자세만 보면 정대한과 비슷한데 비거리는 체감상 2배는 더 나가는 거 같다.

던질 곳이 마땅치 않다면 치라고 던지는 공으로 범타를 만들어야 한다.

1루와 2루를 한번 번갈아 본다.

두 손가락을 모은 후 던진 공.

공에 회전이 제대로 먹혔다.

탕!

송석현의 배트가 나오고 공이 배트와 만났다.

하늘로 날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지는 공.

원하는 대로 땅볼로 유도된 공이었다.

“2루수 강균승 선수가 잡지 못합니다! 안타! 설진일 선수까지 홈으로! 홈으로 달립니다! 우익수가 공을 잡아서 송구하지만 세이프. 그사이에 김인환 선수는 3루까지. 송석현 선수가 타점을 올립니다.”

“방금은 강균승 선수를 탓할 수 없는 타구였습니다. 땅볼이었지만 너무 빠른 공이었어요. 강균승 선수가 잡기에는 어려운 타구였습니다.”

“오늘 양 팀이 타격전으로 갈 거라는 걸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정말 화끈한 타격전입니다.”

“팬들에게는 이런 경기가 재밌죠. 엎치락뒤치락하는 경기야말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즐거움이죠.”

조상웅은 넋 나간 얼굴로 하늘을 봤다.

뭐가 잘못된 걸까?

스콜피언의 감독 이건후는 눈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타이밍을 놓쳤다.

기세가 넘어가기 전 선발투수를 과감하게 내렸어야 한다.

이미 역전을 당했고 분위기도 고트로 넘어갔다.

홈런을 쾅, 쾅 맞았으면 오늘 구위가 안 좋다고 결론 내리고 빠르게 바꿨을 텐데 구위가 괜찮아 보여 마운드에게 계속 올려놓은 게 탈이었다.

조상웅의 구위는 나쁘지 않지만 오늘 고트 타자들의 방망이가 심상치 않다.

방망이에 불이 붙었다.

KS포만 조심하면 된다던 고트가 아니다.

1번부터 5번까지 짜임새가 빈틈없다.

“감독님…….”

수석코치가 다가와 이건후의 눈치를 살폈다.

투수가 흔들리고 있다.

더 점수 차이가 벌어지기 전에 교체해야 하지 않느냐는 눈치였다.

“100구 채워.”

“……네.”

이건후는 패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기세가 오른 고트의 방망이를 잠재우기 위해선 스콜피언에서도 필승조를 내보내야 한다.

설령 필승조로 고트의 방망이를 막는다고 해서 다시 페이스를 찾은 한민석을 상대로 추가 점수를 쭉쭉 뽑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투자 대비 소득이 적다……. 그렇다면 정석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선발투수가 한계구까지 던지고 상황에 따라 필승조나 추격조가 나온다.

지금 승부를 걸기엔 오늘 고트의 방망이가 매섭다.

탕!

유선호까지 안타를 치면서 고트는 또 타점을 올렸다.

이건후의 한쪽 볼이 떨렸다.

아직 늙지 않았다고 시위라고 하고 싶은 셈인가.

그렇다고 아쉽지는 않다.

온몸에 부상을 덕지덕지 입은 노장, 수비 안 되는 지명타자를 내보내고 리그 A급의 좌익수이자 홈런왕을 얻었다.

머지않아 이낙균은 돌아온다.

유선호를 버린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 * *

“클리닝 타임이 지나는 동안 양 팀 팬들의 응원 소리가 대단했습니다.”

“오늘 같은 경기는 팬들의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죠. 점수도 많이 나는데 그렇다고 일방적인 독주도 아닙니다. 양 팀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6회, 점수는 9-8. 이제 양 팀 모두 선발이 내려가고 불펜이 올라옵니다.”

“양 팀 감독 모두 선발투수를 계속 끌고 가는 고집을 보였습니다. 불펜을 빨리 올리진 않았어요.”

“재밌는 게 말이죠. 오늘 양 팀 선발투수 모두 삼진을 다섯 개, 일곱 개씩 잡았어요. 성적만 보면 좋았단 얘깁니다.”

“하지만 볼넷도 삼진만큼 많았습니다. 볼넷이 화근이었죠.”

“그만큼 상대 타선이 부담스러워서 피해 간 거 아닐까요?”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고트와 스콜피언 타선은 어떤 투수든 부담 가질 만하죠.”

“6회 초 고트의 공격은 또 이지성 선수부터 시작입니다. 오늘 이지성 선수가 선두 타자로 자주 나옵니다.”

불펜 투수 서성구는 초구부터 빠른 공으로 이지성의 몸 쪽을 노렸다.

연속 몸 쪽 공 두 개에 이지성은 스트라이크 두 개를 뺏겼으나 끝끝내 풀카운트 승부 끝에 볼넷으로 1루에 나갔다.

“또 이지성 선수가 1루로 나갑니다.”

“오늘 이지성 선수의 발에 물이 올랐습니다. 스콜피언 배터리는 머리가 아플 겁니다.”

발 빠른 주자가 1루로 나가면 투수는 바깥쪽 빠른 공을 던지고 싶어 한다.

여차하면 포수가 도루 저지를 쉽게 할 수 있게 공을 던지려는 셈이다.

서성구도 다르지 않았다.

초구부터 바깥쪽 슬라이더를 던졌다.

타다다닷!

이지성은 초구부터 달렸다.

구승철은 공을 잡자마자 2루로 던졌다.

이번엔 확실히 배터리의 계획대로였다.

팡!

2루수가 공을 잡자마자 태그했으나 이지성의 손은 이미 베이스에 닿아 있었다.

세이프!

“도루 성공! 또 도루에 성공하는 이지성 선숩니다. 오늘 이지성 선수의 발이 무섭습니다. 정말 발이 빠르네요.”

“오늘 황기덕 선수도 좋은 활약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지성 선수는 더 좋은 활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리드오프의 대결에서 이지성 선수가 밀리지 않아요.”

“황기덕 선수의 백업이었던 이지성 선수가 오늘 경기에선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구승철은 포수 마스크를 위로 올려 이지성을 바라봤다.

달구벌 소닉.

발이 예전보다 더 빨라진 거 같다.

서성구는 빠른 공을 앞세워 설진일을 삼진으로 잡았으나 김인환에게 볼넷을 내줬다.

구승철이 마운드로 올라가 맞더라도 볼넷은 내주지 말라고 말했지만 송석현에게도 볼넷.

1사 만루에서 올라온 유선호는 초구 정직하게 들어온 높은 코스의 빠른 공을 힘껏 잡아당겨 우측 담장 위로 보냈다.

“우측 담장! 우측 담장! 우측 담장! 터졌습니다! 유선호의 그랜드 슬램! 유선호가 승부에 쐐기를 박아 버립니다. 대구 팬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만루 홈런!”

“결국 볼넷입니다. 볼넷으로 무너진 거예요. 지금의 고트는 예전과 달라요. 김인환 선수를 피하면 송석현 선수가 있고 송석현 선수를 피하면 유선호 선수가 있습니다. 승부하지 않으면 대가는 더 크게 돌아옵니다.”

“오늘 이 경기를 이긴다면 MVP는 누가 받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유선호 선수일까요? 아니면 이지성 선수? 스콜피언에서 트레이드된 두 선수가 오늘 최고의 컨디션을 보여 줍니다.”

스콜피언의 이건후 감독이 벤치 뒤로 나갔다.

경기가 8할은 넘어갔다.

뒤집기 힘들다.

미친 선수가 한 명이라도 나오면 그날 경기는 그 선수에 의해 결정되는 법이다.

고트는 오늘 그런 선수가 두 명이나 있다.

이지성과 유선호.

팀에 있을 땐 그저 계륵이었는데, 밖에 나가니 눈엣가시다.

“후우.”

담배 연기가 씁쓸하다.

경기는 16-11.

고트의 승리였다.

고트는 큰 점수 차이에도 필승조 정홍민까지 내면서 승리의 의지를 확고히 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스콜피언은 점수를 내면서 뒤를 쫓았다.

승리했지만 고트 선수들은 스콜피언의 저력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날의 MVP는 이지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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