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34화 (134/201)

최선

2회 초 고트의 공격.

고트의 하위 타선은 물 오른 조상웅의 공을 감당하지 못했다.

“조상웅 선수의 공이 오늘 아주 위력적입니다. 이번 이닝 삼진을 두 개나 솎아 내네요.”

“조상웅 선수의 저 짧고 예리한 변화구는 명불허전이죠.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타자들이 속수무책입니다.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알 도리가 없거든요.”

“고트는 1회에 식어 버린 방망이가 2회까지 이어지면서 분위기를 반전시키지 못합니다.”

“이러면 선발투수의 어깨가 무거워지죠. 지금 함성훈 감독의 머리도 복잡할 겁니다. 불펜을 언제 가동시킬지가 관건이거든요. 한민석 선수가 최대한 많은 이닝을 끌어 주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2회 말.

스콜피언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타자 일순으로 황기덕부터 시작한 타순.

한민석은 첫 타자부터 볼넷을 내줬다.

다음 타자 강균승에게도 볼넷.

함성훈 감독의 한숨이 깊어졌다.

“연속 볼넷입니다. 이러면 무사 주자 1, 2루에 3번 타자가 나오게 됩니다. 4번 타자 조양철 선수까지는 무조건 이어진다는 얘기예요.”

송석현이 자리에서 일어서 마운드로 걸어갔다.

한민석은 모자를 벗어 땀을 닦았다.

“왜?”

“선배님.”

“뭐, 인마.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잔소리하고 싶어서 올라왔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존에 욱여넣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려가.”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한민석이 이마를 확 구겼다.

“지금 어차피 뭘 해도 제구 안 되는데 던지고 싶은 대로 마음껏 던지시죠.”

“……뭔 말이야, 그건?”

“저쪽도 카운트 몰리기 전까진 기다릴 거 아닙니까? 카운트에 몰리기 전까진 선배님 공을 보고 있을 테니 직구든 변화구든 던지고 싶은 거 던지세요.”

한민석이 코웃음 쳤다.

“뭔 개소리야?”

“선배님은 맞춰 잡는 스타일 아니시잖아요. 삼진 잡아 달란 얘깁니다. 전력으로 던져서 삼진 잡아 주세요.”

“삼진, 좋지. 말이야 좋지. 지금 그게 되냐?”

“선배님 구위라면 안될 건 없죠.”

송석현은 마운드를 내려갔다.

한민석은 모자를 다시 쓰곤 로진백을 움켜쥐었다.

“어디서 이상한 거나 보고 와 가지곤 훈계를 하네, 훈계를.”

한민석은 1루와 2루를 번갈아 봤다.

황기덕과 강균승.

둘 다 리그에서 손꼽는 주자다.

안타 하나면 1, 2점은 쉽게 준다.

“삼진. 그게 내 마음대로 됐으면 좋겠다.”

타석에는 정대한이 올라왔다.

한민석은 눈을 크게 뜨고 포수의 미트를 노려봤다.

송석현은 체인지업 사인을 냈다.

존 한가운데로 체인지업.

“새끼.”

한민석은 힘을 빼고 가볍게 스윙했다.

정대한은 초구를 그대로 지켜봤다.

-스트라이크!

정대한은 한복판 체인지업에 입맛을 다셨다.

“정대한 선수, 일단 초구는 지켜봅니다.”

“제구가 흔들리는 투수의 초구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공을 보면서 타이밍을 재는 게 좋아요.”

한민석이 손을 풀었다.

힘이 들어갔을 땐 변화구로 힘을 빼는 게 주효하다.

평소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마운드에 올라가면 자주 잊어버린다.

송석현은 변화구를 유도하면서 한민석이 굳은 어깨를 풀어 줬다.

“꼴에 포수라고.”

한민석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다음 공은 빠른 공.

정대한이 쳤지만 뒤로 가는 파울이었다.

“150km/h이 넘는 공이 들어왔습니다. 타자가 스피드를 못 따라가네요.”

“확실히 오늘 공 자체는 좋습니다. 문제는 제구지 공이 나쁜 건 아니에요.”

정대한이 손목을 빙빙 돌렸다.

손목이 아릴 정도로 구위는 여전하다.

한민석은 또 한 번 빠른 공을 던져 파울.

결정구는 슬라이더였다.

팡!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한민석 선수가 여기서 삼진을 잡아냅니다. 큰 고비 하나를 넘어가는 한민석 선수.”

“하지만 뒤 타자는 조양철 선숩니다. 스콜피언의 4번 타자, 홈런왕이죠.”

조양철이 타석에 들어서자 공기가 무거워진다.

김인환의 등장 전 프로야구 최고의 장사는 조양철이었다.

온몸이 근육질이라거나 체중이 많이 나가는 타자도 아닌데 정타만 맞히면 담장을 넘기는 예삿일이었다.

타고난 골격, 소위 통뼈라고 말하는 탄탄한 몸은 투수와 포수 모두에게 경각심을 일깨웠다.

‘포심, 인사이드.’

송석현의 사인에 한민석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이거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맛이 있어야지.

야구는 힘과 힘의 싸움이다.

팡!

우타자 몸 쪽을 찌르는 빠른 공.

조양철은 배트도 내지 못한 채 숨을 내뿜었다.

-스트라이크!

“몸 쪽으로 들어가는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공격적으로 나가는 한민석 선숩니다.”

“한민석 선수가 칼을 갈았나요? 포수와 얘기를 나눈 이후 공이 다시 한번 살아납니다.”

“하하, 마운드에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 궁금해지네요.”

‘포심, 인사이드.’

다시 한번 몸 쪽 빠른 공.

한민석은 망설이지 않았다.

팡!

-스트라이크!

“연속 공 두 개를 몸 쪽으로 꽂아 넣는 한민석 선숩니다. 이러면 조양철 선수가 쫓기는 입장이 되나요?”

“한민석 선수가 이제야 몸이 풀린 거 같습니다.”

‘포심, 아웃사이드.’

다음 공은 바깥쪽 빠른 공.

한민석이 공을 던지자 조양철은 움찔했다.

배트는 나가지 않았고 송석현의 미트엔 공이 꽂혔다.

살짝 앞으로 나가 있는 미트.

심판의 콜이 조금 늦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또 삼진을 잡아냅니다. 한민석 선수, 제대로 피치를 올렸네요.”

“이러면 야구 모릅니다. 점수 차이가 커도 이제 2회거든요. 따라갈 수 있는 점숩니다. 선발이 버텨 주기만 한다면 오늘 경기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바깥쪽 직구에 루킹 삼진. 조양철 선수가 많이 아쉬운가 봅니다. 계속 고개를 젓습니다.”

“타자 입장에선 멀어 보였을 거예요. 타이밍상 또 변화구 타이밍이라 방심한 측면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벤치로 돌아온 조양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점마 손장난 잘 치네요.”

“뭐, 쫌 하데.”

“이러면 피곤한데.”

“그래도 천하의 조양철인데. 오늘 한 방 크게 또 날려야지.”

포수 구승철이 조양철의 등을 두드렸다.

송석현의 프레이밍은 공 한 개 빠진 코스를 스트라이크로 만들 만큼 수준급은 아니다.

하지만.

포수를 10년, 20년을 해도 스트라이크가 될 공도 덮어 버린다거나 빼 버리는 포수들이 허다하다.

야구팬들에겐 기본도 못하는 포수라고 손가락질받는 이들이 지천에 널린 게 프로야구다.

팬들 눈엔 오는 공 받는 게 뭐 그리 어려워서 스트라이크도 볼로 만드냐고 성화지만, 150km/h에 육박하는 투수의 공을 받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미트를 껴도 손은 짜르르 울린다.

혹여 미트 끝에 공이 걸린다면 손가락이 꺾이기도 한다.

스트라이크를 스트라이크로 잡는 프레이밍만 해도 이미 수비형 포수라고 불릴 만하다.

송석현은 여기에 한 발 더 나가 공 반 개에서 한 개 정도는 상황에 따라 스트라이크로 만든다.

여기까지만 해도 리그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는 프레이밍 실력이다.

“벌써 연기력이 저 정도란 말이지…….”

포수가 미트질을 할 때 공을 받고 나서 스트라이크존으로 살짝 끌어당기면 되는 게 뭐가 어렵냐는 사람도 많다.

심판은 자신의 존이 방해받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포수의 미트질은 심판에겐 눈엣가시다.

미트질을 티 나게 하는 포수에겐 심판의 볼 판정에도 사심이 섞인다.

티를 내지 않으면서 살짝 빠진 공을 스트라이크로 만드는 능력이야말로 진짜 프레이밍.

송석현의 프레이밍은 범위는 넓지 않아도 자연스럽다.

프레이밍만 보면 자신과 박신언에게 한 끗 차이까지 따라왔다.

정용욱 같은 괴물은 공 한 개, 한 개 반 빠진 것도 스트라이크를 만들 때도 있다.

그건 손만 움직여서 될 일이 아니다.

공을 받기 전 잔발로 미리 공이 올 곳에 맞춰 몸을 움직여 비스듬히 앉는다.

공을 받으면서 비스듬히 틀어진 몸을 바로 하면 존 밖으로 빠져 잡은 미트가 자연스럽게 존에 들어온다.

말로는 쉽지만 메이저리그에서도 그 정도의 포수는 흔치 않다.

WBC에서 정용욱이 주목받은 데는 괜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잔발을 놀리면서도 심판 눈에는 걸리지 않게 상체는 고정돼 있어야 하고, 공을 받을 때도 어깨는 고정하면서 골반만 살짝 움직인다.

수비형 포수라고 자부하는 자신도 정용욱의 프레이밍과 비교하면 한 끗 이상 뒤진다.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재능의 문제다.

수비로도 정점을 찍은 포수가 공격도 A급을 상회하니 S급 포수로 인정받는 거다.

한데 스무 살짜리 신인 포수가 이미 프레이밍으론 자신의 턱밑까지 쫓아왔다.

공격으론 S급인 포수가 수비로도 A급인 셈이다.

어쩌면 공수 모두 완벽한 포수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한민석 선수의 연속 세 타자 삼진이 나오면서 2회 말이 끝납니다. 한민석 선수가 위기를 자력으로 헤쳐 나가네요.”

“고트의 저력이 만만치 않네요. 스콜피언에게 6점을 내주고도 쉽게 물러나지 않습니다.”

“다음 이닝엔 고트도 상위 타선으로 이어집니다. 기세가 살아난 고트가 3회에는 과연 점수를 낼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구승철이 포수 장비를 차고 일어섰다.

흔들리던 투수가 포수와 대화를 한 뒤 연속 삼진을 잡아냈다.

애초에 한민석의 삼진 능력이야 타고난 바지만 저 지랄 같은 한민석의 성질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자신도 궁금했다.

“아오. 어린 놈의 새끼가 인간미가 없어, 인간미가.”

심술이 난다.

스무 살에 저런 재능, 저런 실력, 저런 성적.

서로 비슷한 실력으로 맞대결하는 게 올해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 자, 깔끔하게 막고 가자!”

“파이팅!”

“파이팅!”

3회 초 선두 타자는 이지성이었다.

조상웅은 빠른 공 두 개로 스트라이크 두 개를 잡아냈다.

순조로운 출발이었지만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탁!

탁!

탕!

탁!

“조상웅 선수가 땀을 닦아냅니다. 벌써 9구째 승붑니다.”

“스트라이크 두 개를 뺏겼는데도 이지성 선수가 쉽게 안 물러나네요.”

“이지성 선수의 약점이 몸 쪽 빠른 공이라고 하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은 거 같습니다. 정타는 없지만 계속 파울을 만들어 냅니다.”

“조상웅 선수의 장점이 낙폭은 작아도 각은 날카로운 변화군데요. 직구와 변화구 구분이 힘들어서 삼진을 잘 잡아내는 구종인데 이지성 선수처럼 짧게 치는 선수들에겐 오히려 역효괍니다. 비슷하면 배트를 내서 맞추니까 삼진을 잡을 수 없어요. 안타도 안 맞지만 아웃을 잡아내기도 힘듭니다.”

포수 구승철이 콧바람을 훅 내뿜었다.

아까 송석현부터 지금 이지성까지.

거슬린다. 짜증 난다.

분명 1회부터 큰 점수를 냈는데 왜 경기가 자꾸 말리는 거지?

팡!

-볼, 로우.

“볼넷. 볼넷입니다. 조상웅 선수의 체인지업이 낮았다는 판정이에요.”

“삼진 욕심에 공을 많이 떨어뜨린 거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이지성 선수가 골라내네요.”

“이러면 무사 주자 1루. 1루에는 발 빠른 주자 이지성 선수가 들어섭니다. 고트 입장에선 최고의 상황입니다.”

2번 타자 설진일.

초구 덕후.

구승철은 몸 쪽에 사인을 냈다.

노리는 건 역시 병살.

투수가 공을 던지자 설진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를 휘둘렀다.

부웅.

부웅?

공보다 한참 위쪽을 지나간 배트와 함께 이지성이 2루로 뛰었다.

구승철이 공을 잡아 2루로 던졌으나 설진일의 몸에 가려 주춤하는 사이 이지성은 2루로 안착했다.

“이지성 선수가 도루에 성공합니다. 1회부터 공격적인 주루를 보이는 이지성 선숩니다.”

구승철이 입술을 깨물었다.

2루를 쉽게 내줬다.

발 빠른 주자가 있으니 2루 노리는 건 당연한 건데 왜 방심했을까?

이지성이 도루를 잘 안 한다는 게 머리에 인이 박혀서 그랬을까?

설진일을 삼진으로 잡았지만 께름칙했다.

경기가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다.

1사 주자 2루에 타자는 김인환.

다음 타자는 송석현, 유선호.

가슴이 얹힌 듯 답답하다.

크게 이기고 있는데 왜 턱밑까지 쫓기는 기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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