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ed
주중 2차전, 고트 대 스콜피언의 경기.
경기 전 짧은 작전 회의가 있었다.
“어제 황기덕을 막은 건 정말 좋았어. 오늘도 황기덕의 출루를 막아야 해. 볼넷 신경 쓰고 시프트 믿고 과감하게 승부해. 알았지?”
“네.”
회의가 끝난 후 고트의 선발투수로 내정된 한민석이 입맛을 다셨다.
“황기덕, 황기덕. 귀에 딱지 앉겠네.”
송석현이 말했다.
“발 빠른 건 리그 최고니까 조심해야죠.”
“너도 어깨는 좋잖냐. 네가 잡으면 되지. 좀 오버하는 거 아니- 아!”
김정률이 한민석의 엉덩이를 때렸다.
“투수가 잘해야지. 포수 어깨한테 다 맡길 거야?”
“아, 형. 살살 해요. 아파요, 아파.”
“아프라고 때렸으니 아프지. 황기덕 내보내면 너도 머리 아픈 건데 뭐 그리 징징대냐?”
“너무 띄워 주니까 그렇죠. 도루 줘 봐야 2룬데 그냥 남은 타자 잡으면 되지 않아요?”
“자신 있다 이거지?”
“그 정도 프라이드는 있어야 선발 아닙니까?”
한민석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먼저 앞서갔다.
김정률은 송석현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오늘 빡세겠다, 송석현.”
“왜요?”
“쟤가 볼넷 하루 이틀 내주냐. 쟤가 저러는 거 밑밥 까는 거야. 주자 내보내도 지 탓 아니라는 거지.”
“쩝. 어제 스콜피언 뛰는 거 보니까 발 엄청 빠르던데. 황기덕 선배님은 더할 거 아니에요.”
“그냥 1루 보내면 놓쳤다고 생각해. 그게 마음 편하니까.”
“그 정도예요?”
“쟤는 퀵 모션도 그닥이잖아. 그냥 포기해. 그럼 편해.”
“으음.”
송석현이 미간을 좁혔다.
“그 정도로 빠른가?”
* * *
“결국 한두 점이야.”
스콜피언의 작전 회의 시간.
감독이 직접 나서서 선수단 앞에 섰다.
“어제 봐서 알겠지만 고트가 이제 만만한 팀이 아니야. 선발은 원래 괜찮았는데 불펜도 탄탄해졌어. 타선도 이제 신중하지 않으면 한 방 맞기 좋을 정도로 세졌어. 이런 경기는 결국 한두 점에서 갈린다. 한두 점 내려면 결국 발이 중요해. 황기덕.”
“네.”
“네가 포문을 열어야 돼. 한민석은 볼넷이 많은 타입이야. 침착하게 볼 골라.”
“네, 알겠습니다.”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야. 오늘은 안타보다 볼넷에 집중해. 한 점씩 뽑는다. 욕심내지 말고 한 점씩.”
감독은 하얀 칠판에 송석현이란 이름을 썼다.
“겁먹을 거 없어. 얘 어깨가 아무리 좋아도 투수가 한민석이다. 이창훈이랑은 달라. 분명 파고들 틈이 있어.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도루 실패해도 좋으니까 집요하게.”
“네, 알겠습니다.”
* * *
경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내야 관중석은 이미 만원이었다.
외야도 빠르게 팬들이 들어차고 있었다.
-플레이볼!
“경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벌써 매진의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주중 경기가 이렇게 빨리 매진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이번 스콜피언-고트전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거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제 수준 높은 투수전이 펼쳐졌고, 무엇보다 유선호와 이지성 선수가 친정 팀 상대로 첫 경기를 하는 날이라 야구팬들의 관심이 높았습니다. 어제 경기가 팽팽했기 때문에 스콜피언 팬도 고트 팬도 오늘 경기에 대한 기대가 커 야구장에 발걸음을 한 거 같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이지성 선수가 벌써 볼 두 개를 얻어 냅니다.”
“이지성 선수의 선구안이 좋아졌네요. 볼을 잘 고르고 있습니다.”
고트의 1번 타자로 나온 이지성은 스콜피언의 선발투수 조상웅의 바깥쪽 포심과 체인지업 두 개를 연달아 보냈다.
포수 구승철은 콧바람을 훅훅 내뱉었다.
“공이 보이나?”
“그냥 감이죠, 감.”
구승철의 질문에 대한 이지성의 답이었다.
구승철의 눈이 이지성의 무릎에 가 있었다.
체중이 앞다리에 많이 쏠려 있다.
극단적인 콘택트 스탠스다.
“니 그래가 내야 넘길 수나 있겠나?”
이지성은 그저 한 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포심, 인사이드.’
앞다리에 체중이 많이 실리면 정확도가 높아질지언정 파워는 많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뒷다리의 체중을 앞으로 옮기면서 타격하는 건 힘을 얻기 위함인데 이미 체중이 앞에 많이 가 있으니 스윙에 힘을 싣기 어렵다.
어제의 안타가 떠올랐지만 지금 타격 자세에선 몸 쪽 공에 취약하다는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투수, 와인드업.”
조상웅이 다리를 들어 공을 던졌다.
우투수가 던지는 좌타자 몸 쪽을 파고드는 속구.
이지성은 한 발 뒤로 빼 물러섰다.
-스트라이크!
“조상웅 선수가 투 볼 이후 스트라이크 하나를 꽂아 넣습니다.”
“지금은 투 볼 상황이라 공 하나를 노렸어야 했는데 몸 쪽 공이 깊게 들어와서 피한 거 같습니다. 판정에 아쉬운 표정인데 저 정도면 깊긴 해도 들어왔다고 봐도 무방할 거 같네요.”
이지성이 몸 쪽 공에 꼼짝하지 못했다.
구승철은 다시 한번 몸 쪽 사인을 냈다.
팡!
“이번에는 볼입니다.”
“좀 깊었네요. 이러면 3-1. 투수가 좀 불리해지죠?”
조상웅은 바깥쪽에 포심을 꽂아 넣었으나 이지성은 삼유간으로 공을 밀어내면서 1루로 나갔다.
“쓰읍, 까다로워졌어.”
구승철이 입맛을 다셨다.
고트의 2번 타자는 설진일.
스콜피언 벤치에서 사인이 나왔다.
바깥쪽 포심.
이지성의 도루를 견제하기 위한 사인이었다.
조상웅의 초구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포심.
이지성은 움찔하더니 1루로 귀루했다.
“방금은 스콜피언에서 공 하나를 뺐습니다. 이지성 선수의 발을 확인해 보려는 심산 같습니다.”
“이지성 선수가 부상 이후 도루가 줄었다고 해도 발은 여전히 빠릅니다. 조심해야죠.”
이지성이 리드를 넓히면서 투수와 포수를 번갈아 본다.
조상웅은 어깨를 움츠리며 이지성을 곁눈질했다.
조상웅이 포수의 사인을 읽었다.
슬라이더.
바깥쪽으로 공 하나를 빼면서 여차하면 2루까지 쏠 수 있는 공이다.
조상웅이 공을 던지려는 순간, 이지성의 몸이 2루로 기울었다.
팡!
-스트라이크!
“설진일 선수가 헛스윙하네요. 명불허전, 조상웅 선수의 슬라이더답습니다. 날카로워요.”
“외곽으로 빠지는 저 슬라이더야말로 조상웅 선수의 트레이트 마크나 다름없습니다. 각이 작아서 오히려 더 구분하기 어려운 공입니다.”
헛스윙을 끌어냈지만 구승철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2루로 뛰는 척, 페이크만 걸었다.
도루를 할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혹시 타이밍을 읽고 참은 건지 알 수가 없다.
부상 이후 도루가 준 건 확실한 데 계속 거슬린다.
부상을 당할까 봐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도 잘 안 하는 주자다.
그런데도 자꾸 눈이 가는 건 왜일까?
‘체인지업.’
뛸 생각이 없다면 병살을 만든다.
발이 빠르더라도 저 정도 리드면 충분히 병살을 만들 수 있다.
조상웅이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고 공을 던지려는 찰나 이지성이 뛰었다.
이번엔 진짜였다.
탁!
설진일이 공을 쳤지만 먹힌 공, 느린 땅볼.
2루수가 달려들면서 공을 잡았다.
유격수가 자신에게 던지라고 손을 들었다.
포수와 투수는 1루를 가리켰지만 2루수는 2루로 던졌다.
촤아아악!
이지성은 벤트 레그 슬라이딩으로 2루에 들어갔다.
유격수는 2루 베이스를 밟고 1루로 던졌다.
-세이프!
-세이프!
“주자가 둘 다 살았습니다! 세이프! 세이프예요!”
“지금은 뭐랄까요…… 병살 타이밍이긴 했는데 애매했습니다.”
“이지성 선수가 참 발이 빠르네요. 아웃 타이밍 아니었나요?”
“이지성 선수의 탄력은 알아주죠. 저는 아웃을 줘도 무방하다고 봤는데 이번엔 심판이 이지성 선수의 손을 들어 줬습니다.”
“2루수가 2루에 공을 던지면서 타자 주자는 살았습니다.”
“공이 먹혀서 느리게 갔거든요. 설진일 선수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발도 빠른 선숩니다.”
“고트의 1, 2번 타자가 모두 출루하면서 김인환 선수 앞에 두 명의 주자가 생겼습니다.”
“이러면 부담되죠. 김인환, 송석현, 유선호. 생각만 해도 벅찬 라인업이죠.”
2루수 강균승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이지성의 발을 간과했다.
보통 주자라면 쉽게 병살을 만들 타구였지만 주자가 이지성이다.
한때 스콜피언에서 가장 발이 빨랐고 리그에서도 손꼽는 주자였다.
스타트가 빨랐다면 1루로 공을 던지는 게 맞았다.
욕심이 앞섰다.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김인환!”
김인환이 들어서자 고트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포수 구승철은 쉽사리 사인을 내지 못했다.
이지성, 설진일의 발을 생각하면 장타 한 방에 최소 싹쓸이다.
어제 선발로 뛰었던 강구일처럼 각 큰 스플리터가 있다면 모를까, 조상웅의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은 모두 각이 작고 날카롭다.
컨디션이 좋을 땐 배트 끝을 맞추며 범타를 유도하기 좋지만 커터나 싱커처럼 배트를 부숴 버릴 정도도 아니다.
애매하게 들어간다면 타자가 힘으로 그라운드에 욱여넣을 수 있단 얘긴데 김인환의 힘이라면 불가능할 거 같진 않다.
그렇다면…….
‘슬라이더, 인사이드.’
우투수가 좌타자 몸 쪽에 슬라이더를 던지는 경우는 드물다.
변화구를 몸 쪽에 던진다는 건, 그것도 김인환 같은 거포에게 몸 쪽 변화구를 던진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지만 투수가 조상웅이다.
각이 작은 슬라이더가 배트 안쪽에 맞으면 제대로 먹힐 가능성이 있다.
주자를 3루까지 보내고 병살.
이게 최선이다.
“푸우우우.”
조상웅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김인환에게 몸 쪽 변화구.
투수에게 쉬운 결정이 아니다.
자세를 잡은 조상웅이 공을 던졌다.
퍽!
공이 배트에 먹히는 소리가 들렸다.
김인환이 눈에 뻔히 보이는 공에 스윙 했다.
포수의 예측대로 병살이 나오는 시나리오였다.
평범한 타자였다면.
“유격수! 유격수가 놓쳤습니다! 2루 베이스로 빠지는 공! 주자는 그대로 달리고! 달리고! 달려서! 홈까지 뛰어갑니다! 김인환! 1타점 적시타! 오늘도 고트의 1회는 뜨겁습니다!”
“방금은 먹힌 타구였는데 김인환 선수가 스윙을 끝까지 잘 가져갔습니다. 공이 멀리 가진 못했지만 내야를 벗어나기엔 충분했네요.”
“김인환 선수가 초구를 제대로 노려서 타점을 올립니다. 이러면 스콜피언은 또 1회부터 점수를 내주면서 분위기도 고트에게 내주고 맙니다.”
구승철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놈 아냐, 저거.”
먹힌 공이었다.
김인환이 던진 배트가 살짝 부러진 게 보였다.
먹힌 공을 부러진 배트로 억지로 그라운드에 밀어 넣었다.
이게…… 된다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김인환 선수도 김인환 선수지만 저 짧은 안타 하나에 홈까지 뛰어든 이지성 선수도 대단하네요.”
“과감한 것도 과감했지만 주루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합니다. 김인환 선수가 공을 치자마자 달렸거든요. 아웃이 될 수 있는데도 달렸다는 건 무모할 수도 있지만 저렇게 판단력이 앞선다면 클래스가 다른 주루를 보여 줄 수 있는 거죠.”
“대구 소닉이라는 별명이 정말 잘 어울리는 선숩니다.”
함성훈 감독이 벤치에서 나와 손을 내밀었다.
이지성은 감독과 하이 파이브 했다.
“잘했어.”
함성훈이 미소 지었다.
방망이에는 기복이 있어도 발에는 기복이 없는 법이다.
타격에 부침이 있다 해도, 도루가 줄었다고 해도 이지성의 주루 센스가 상수라면 큰 경기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
“오오, 고트의 송석현. 팔방미인 송석현. 장외 홈런 송석현. 날! 려! 버! 려!”
그리고 타자는 송석현.
투수가 벌써 땀을 훔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