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31화 (131/201)

환영 인사

1루에 나선 이지성이 몸을 낮췄다.

반 발씩, 반 발씩.

이지성은 리드 폭을 넓히면서 강구일을 쳐다봤다.

“…….”

강구일은 숨을 죽였다.

이지성을 1루에 두고 경기해 본 적이 언제던가.

오래전 청백전 언제쯤이었던 거 같다.

외야 백업으로 밀린 후 이지성은 도루 기회 자체가 줄었다.

손목을 다친 이후론 도루도 자제했다.

예전에는 소닉이라는 별명이 있던 이지성이라지만 지금은……?

팡!

-세이프!

“강구일 선수가 견제구 하나를 던집니다.”

“발 빠른 주자가 있으면 견제구 한둘 정도는 어쩔 수 없죠.”

“이지성 선수가 투수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이지성 선수가 부상 이후엔 도루가 줄었지만 스피드가 준 건 아닙니다. 언제든 뛸 수 있는 주자예요.”

이지성이 몸을 낮췄다.

살금살금 리드 폭을 넓힌다.

포수 구승철이 타자에 집중하라고 사인을 보냈다.

‘스플리터.’

초구부터 변화구지만 설진일이기에 나쁜 선택은 아니다.

강구일의 스플리터에 설진일은 헛스윙 했다.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스플리터로 스트라이크를 잡는 강구일 선숩니다.”

“설진일 선수가 초구를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죠. 초구라고 스트라이크 잡을 생각 하고 쉽게 들어가면 설진일 선수의 먹잇감이 되기 딱 좋습니다.”

“설진일 선수의 초구 사랑은 대단하죠.”

“상대 투수들이 이를 역이용해서 초구에 변화구를 많이 던지는데 재밌는 건 말이죠, 설진일 선수는 변화구라고 해도 스트라이크존에서 벗어난 공을 기어이 때려 안타를 만든다는 겁니다.”

“설진일 선수의 컨택 능력이 수준급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많지 않습니까?”

“그럼요. 3할 타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선구안이 안 좋다는 평가도 많지만 워낙 공을 잘 치다 보니까 출루율도 4할이 넘어요. 이 정도면 선구안이 안 좋다고 말할 이유는 없는 거 같습니다.”

“고트에겐 복덩이 같은 선수죠. 이낙균 선수의 빈자리를 완전히 채우진 못했지만 2군을 전전하던 선수가 OPS 0.8 이상을 해내고 있거든요.”

카운트는 2-1.

설진일은 강구일의 연속 세 개의 스플리터 중 두 개를 골라냈다.

“…….”

포수 구승철이 입술을 모았다.

초구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놈은 아니다.

이제는 직구 타이밍.

강구일의 속구는 그리 빠르지 않고 설진일은 145km/h에 못 미치는 속구는 멀리 때려 낼 수 있는 타자다.

‘커브.’

한 번만 더 변화구로 간다.

한 번 더 꼰다.

강구일은 고개를 한 번 끄덕했다.

베테랑 포수 구성철에 대한 신뢰는 굳건했다.

강구일의 손을 떠난 공이 훅 가라앉기 시작한다.

설진일은 배트를 휘둘렀지만 타이밍이 빨랐다.

공은 배트를 지나 구성철의 미트로 들어왔다.

‘스트라이크!’

“아! 이지성 선수가 2루를 훔칩니다. 여유 있게 도루 성공하는 이지성 선숩니다.”

“이지성 선수가 완벽하게 타이밍을 훔쳤어요. 스타트도 빨랐는데 마침 커브 타이밍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측을 했을 수도 있겠네요. 같은 팀이었지 않습니까?”

“하하, 그랬을까요?”

포수 구성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잊고 있었다.

대구 소닉 이지성.

그래, 발은 참 빨랐었지.

“2-2. 이제 투수도 할 만해진 카운트죠?”

강구일의 선택은 스플리터.

이번엔 설진일의 배트가 돌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강구일 선수가 기어이 삼진을 뺏어 냅니다.”

“저게 강구일 선수죠. 저 날카로운 스플리터야말로 강구일 선수의 트레이트 마큽니다.”

“강구일 선수가 한시름 놓겠네요.”

설진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벤치로 돌아왔다.

“와, 좋네.”

“자 스플리터 장난 아이라니까.”

유선호의 말이 예언이라도 됐을까.

김인환은 4연속 스플리터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벤치로 돌아온 김인환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독하네. 스플리터만 던지나.”

“승철이 형이 집요해. 그러니까 너무 생각 마이 하지 말고 느낌 오는 대로 가는 게 나아.”

타석에 들어선 이는 송석현.

송석현이 들어서자 구승철은 침음을 흘렸다.

전력 분석 보고서엔 떨어지는 변화구를 잘 친다고 쓰여 있다.

강구일의 변화구는 스플리터와 커브.

모두 아래로 떨어지는 변화구다.

송석현이 아래로 떨어지는 변화구를 잘 친다고 해서 변화구를 모두 안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커브.’

송석현은 초구를 잘 치지 않는 타자다.

공을 오래 보면서 타이밍을 잡는다.

투 스트라이크를 먹더라도 안타를 칠 자신이 있으니 가능한 일일 터다.

송석현 같은 타자를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잘 던지지 않는 구질로 초구 하나를 먹고 들어가는 게 좋다.

‘오케이.’

강구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팡!

-스트라이크!

송석현은 초구 커브를 지켜봤다.

구승철은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자 자신감을 얻었다.

‘포심.’

이럴 땐 역으로 꼬아 줘야 한다.

바로 앞 타자 김인환에서 연속 네 개의 스플리터를 던졌다.

머릿속에 스플리터가 각인됐을 테니 직구처럼 오는 공 하나 정도는 거를 가능성이 높다.

이때 직구 하나로 허를 찌른다.

강구일이 바깥쪽 코너로 직구를 던졌다.

예쁘게 제구된 공.

강구일이 구속을 잃었어도 팀의 3선발을 맡을 수 있는 건 제구가 월등하게 좋아졌기 때문이다.

탕!

“좌측 담장! 좌측 담장! 좌측! 담장! 넘어갔습니다! 홈런! 송석현의 투런이 터집니다!”

“이건 완전히 노려서 쳤네요. 저 코스로 스플리터가 많이 들어갔는데 송석현 선수는 오히려 타이밍을 제대로 잡아서 쳐 냈네요.”

“송석현 선구가 대구 팬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이게 고트의 4번 타자다. 내가 송석현이다!”

구승철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망설임 없이 돌아간 배트였다.

“……읽혔어.”

침착한 타자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스윙할 줄은 몰랐다.

허를 찌르려다 자신이 허를 찔렀다.

“오오오오!”

“석현이, 굿굿!”

“잘했어!”

송석현이 선수들의 환호를 받으며 벤치로 돌아왔다.

하이 파이브의 끝에 김인환의 포옹이 있었다.

“야, 너 어떻게 직구랑 변화구 구분한 거야? 난 도저히 모르겠던데.”

김인환은 신기하다는 듯 송석현에게 물었다.

“형한테 스플리터 많이 던졌으니까 확률상 나한테는 직구를 던지지 않을까, 생각했죠.”

“왜 나한테는 스플리터만 주구장창 던지는 거야, 짜증 나게. 직구 하나라도 왔으면 덜 억울하지.”

“통하니까 던지죠. 형도 공 한두 개는 그냥 지켜봐요.”

“그래야 되나?”

송석현의 홈런이 터진 후지만 스콜피언 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홈런을 축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스콜피언의 레전드, 프로야구의 레전드 유선호를 맞는 박수였다.

짝짝짝짝.

짝짝짝.

어떤 함성도 없이 박수만 가득했다.

유선호는 헬멧을 벗어 두 팔을 크게 들었다.

박수 소리는 한참 이어졌다.

이건후 감독은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유선호를 쳐다봤다.

“니는 뭐 연락도 안 하나?”

유선호가 타석에 들어서자 포수 구승철이 핀잔을 줬다.

“내도 뭐 바쁘다 아이가.”

“바쁘긴. 개~뿔.”

강구일은 유선호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유선호도 강구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거 하나 줘 봐.”

“좋은 거는 개~뿔.”

구승철은 몸 쪽 빠른 공 사인을 냈다.

강구일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포수의 결정을 따랐다.

팡!

-스트라이크!

한 발 뒤로 물러선 유선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얍샵하구로.”

“스트라이크 들어온 거 못 봤냐? 니 노안 왔나? 퍼뜩 병원 가라.”

유선호가 타석에 바짝 붙어 섰다.

“몸 쪽 하나 더 줘 봐라, 함 쌔려 갈기 뿌게.”

“알았다. 하나 줄 끄마.”

구승철은 말을 하면서도 사인 내길 주저했다.

유선호에게 두 번의 요행을 바랄 순 없다.

구승철은 스플리터로 유선호의 헛스윙을 노렸지만 유선호가 골라냈다.

“몸 쪽 하나 달라니까 왜 안 주는데?”

“실투다, 실투.”

“실투는 무슨.”

구승철은 외곽의 속구를 요구했다.

강구일이 세심하게 던졌으나 살짝 빠진 공.

미트를 당겨 스트라이크존에 넣었으나 유선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

심판의 콜이 없다.

구승철은 아쉬움에 미트를 계속 내밀고 있었지만 여전했다.

“누가 팔에 깁스라도 했는 갑다.”

유선호의 농에 구승철이 팔을 내렸다.

“유선호 선수가 공을 골라냅니다.”

“유선호가 치지 않으면 볼이다, 라는 말이 있죠. 선구안에 있어선 리그 최고라고 해도 무방한 타잡니다. 심판들도 유선호 선수가 신경 쓰일 겁니다. 유선호가 가만히 있는데 스트라이크를 내준다? 이거 심판도 상당히 부담 가는 일이거든요.”

“유선호 선수가 또 공을 고르네요. 2-1.”

“스콜피언도 신중하게 경기를 운영합니다.”

유선호는 기어이 볼넷을 얻어 1루로 걸어갔다.

구승철은 혀로 볼을 쑥 밀어냈다.

“자슥이. 하여튼 공 보는 건 징글징글하다.”

2사지만 주자 1, 2루.

다음 타자 최재완은 강구일의 스플리터에 헛스윙을 남발하며 삼진.

강구일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미안타, 내가 공을 하나 더 빼야 캤는데.”

구승철의 위로에 강구일이 고개를 저었다.

“괘안습니다. 제 공이 빌빌거린 잘못인데요, 뭐.”

양 팀의 뜨거웠던 1회가 지나자 신기할 정도로 서로 득점이 없었다.

고트의 이창훈과 스콜피언의 강구일은 왜 에이스라 불리는지를 보여 주며 6회까지 무실점으로 끌고 갔다.

먼저 움직인 건 고트였다.

이창훈의 호투에도 7회에 필승조를 올리며 잠그기에 나섰다.

스콜피언도 투수를 바꿔 올리며 추격에 나섰지만 타선이 따르질 못했다.

초반부터 불태운 양 팀은 1회 송석현의 2점 홈런을 마지막 점수로 경기를 끝냈다.

“오늘은 고트가 먼저 승리를 따내면서 주중 3연전을 기분 좋게 시작합니다.”

“오늘 점수 자체는 적게 났지만 굉장히 수준 높은 경기였습니다. 투수는 호투했고 야수는 호수비를 했어요.”

“송석현의 1회 홈런이 결승타점이 돼 버렸네요.”

“이렇게 투수진의 수준이 높을 때는 1, 2점이 승리의 향방을 가르는 결승타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경기 이지성 선수와 유선호 선수가 나름 제 몫을 해 주면서 스콜피언의 속을 쓰리게 했습니다.”

“스콜피언 입장에선 반반일 거 같아요. 두 선수 모두 출루가 많았지만 장타는 없었거든요? 이 정도는 스콜피언도 충분히 예상했던 그림입니다. 이에 반해 스콜피언은 이낙균이란 대어를 얻었으니 크게 아쉬울 건 없을 거 같습니다.”

“고트가 승리했지만 아슬아슬한 승리였습니다. 내일과 모레에도 치열한 경기가 이어질 거 같습니다.”

“네. 내일 경기도 기대가 큽니다.”

* * *

경기는 이겼지만 함성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신승(辛勝).

송석현의 홈런이 아니었다면 연장까지 갔을 경기였다.

오늘 투수진이 베스트였기에 망정이지 한 점이라도 내줬다면 경기의 향방이 어떻게 됐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1회 이후 1점도 못 냈다는 게 신경 쓰였다.

스콜피언의 철벽 불펜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명불허전.

이지성, 유선호가 나름 제몫을 해 주고 있지만 다른 팀 타선과 비교하면 역시 손색이 있다.

둘 다 컨디션이 완전히 올라오지 않아 기복이 크다.

설진일, 김인환은 최근 성적이 좋지만 몰아치는 스타일이다.

결국 핵심 타선에서 꾸준히 잘하는 타자는 송석현 하나.

김인환이야 이만큼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타자라면 유선호는 아직 자기 클래스를 다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설마…… 아니겠지.”

함성훈이 고개를 저었다.

컨디션을 끌어 올리는 중일 거다.

에이징 커브가 돼선 안 된다.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몰아치는 타자들로는 포스트 시즌 이후를 기약하기 어렵다.

핵심은 유선호다.

송석현, 유선호가 팀 타선에서 꾸준히 제 몫을 해 줘야 다른 선수들의 기복이 심해도 균형을 맞출 수 있다.

“보여 줘라, 선호야, 유선호. 아직 안 죽었다는 거 보여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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