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29화 (129/201)

전통의 강호 스콜피언

감독의 브리핑이 끝난 후엔 투-포수조와 야수조가 나눠서 회의를 가졌다.

투수코치 연우식이 하얀 칠판에 펜을 들어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너희도 잘 알겠지만 스콜피언의 1번부터 4번은 리그 최강이다. 황기덕, 강균승, 정대한, 조양철까지. 황기덕은 도루왕, 강균승은 통산 3할 타자, 정대한은 작년과 올해 OPS 0.9를 넘긴 타자, 조양철이야 말할 것도 없이 홈런왕. 그나마 약점이라면 5번이고, 6번 타자 조철웅도 다른 팀에선 3, 4번은 맡을 수 있는 타자야. 다행이라면 하위 타선이 약하다는 건데……. 이렇게 보면 알겠지만 1번부터 4번까진 최강이고 6번까지 쳐도 페가수스랑도 크게 밀리지 않아.”

연우식이 칠판에 쓴 숫자는 1, 3, 5였다.

“결국 중요한 건 1회, 3회, 5회를 어떻게 넘기느냐. 이거야. 이 정도 타선을 상대하면서 아예 점수를 안 줄 수는 없어. 베스트는 역시 6회까지 3점이지만 조금 넓혀서 6회까지 4점, 8~9회까지 5점 정도를 막는 걸 염두에 두고 플랜을 짜는 게 좋아.”

연우식은 황기덕 세 글자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제일 까다로운 건 역시 황기덕이야. 애를 내보내면 사실상 도루를 거의 내주는 거나 다름없어. 이번 시즌 도루 성공률이 8할이 넘는 놈이야. 몸 쪽 공 위주로 공략하고 내야고 외야고 조여서 수비한다. 이런 놈한테는 단타를 줘도 어차피 2루타나 마찬가지야. 장타 내줄 각오 하고 출루 자체를 막는 방향으로 갈 거야. 강균승도 발이 빠르긴 하지만 황기덕에 비하면 할 만해. 둘 다 막는 건 너무 희망 사항이고, 황기덕의 출루를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가자. 정대한, 조양철 상대로는 볼넷 각오하고 승부 어렵게 가면 5번 타자 고원성 쪽에서 막을 기회가 생겨. 6번 조철웅은 거의 고정 타석이니까 5번은 누가 들어오든 할 만하니까 이거 염두에 두고 승부하는 거로.”

“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번 3연전의 핵심은 황기덕이야. 황기덕 출루를 막아야 해.”

송석현은 전력 분석 보고서에 나와 있는 황기덕의 성적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타율 0.348, 출루율 0.435, 장타율 0.423, 도루 42개, 홈런 8개.

발만 빠른 1번 타자가 아니라 의외로 펀치력까지 좋은 올라운더.

WBC에서 상대 팀 코치들은 황기덕을 트리플 A와 메이저리그 사이의 클래스라 정리했다.

메이저리그로 가기엔 확실하게 내세울 장점은 없지만, 어디 하나 모자람 없는 재능.

소위 쿼드러플 A 실력이라면 용병으로 쳐도 최상위 클래스다.

지금 성적도 체력 문제로 부진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었다.

황기덕 본인이 도루 욕심과 전 경기 출장에 욕심이 많아 여름만 되면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진 성적으로도 리그 1위의 리드오프.

고트에서 상대 클린업보다 황기덕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황기덕…….”

송석현은 황기덕의 성적을 보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도루왕이라는 타이틀이 송석현의 눈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 * *

“안녕하십니까. SBC 스포츠의 캐스터 구동윤입니다.”

“저는 해설 최희동입니다.”

“오늘 주중 3연전. 갈 길 바쁜 리그 2위 스콜피언과 리그 1위 페가수스를 대파한 고트가 만났습니다.”

“고트가 페가수스의 발목을 제대로 잡았죠. 덕분에 스콜피언은 리그 1위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이번 주중 3연전을 잘만 가져간다면 리그 1위가 코앞까지 다가오게 됩니다.”

“하지만 고트가 그리 만만하진 않죠?”

“그렇습니다. 페가수스를 스윕으로 잡아냈단 말이죠. 리그 1위 페가수스를 말이죠. 올 시즌 페가수스의 스윕은 단 두 번입니다. 페가수스는 여간해선 스윕이 없는 팀인데 저번 주 고트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명불허전 KS포가 돌아왔고 여기에 스콜피언에서 트레이드 한 이지성, 유선호 선수도 제대로 자리 잡았습니다. 클린업의 무게만큼은 리그 최고 수준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콜피언이 고트를 잡아내면 리그 단독 1위의 가능성이 커지고, 고트가 스콜피언을 잡아내면 바로 4위가 코앞입니다. 두 팀 모두 이번 3연전이 아주 중요할 듯싶습니다.”

“이제 리그 후반기에 들어갔습니다. 지금부터는 순위를 바꾸는 게 쉽지 않아요. 지키는 것도 어렵지만 바꾸는 건 더 어렵습니다. 리그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더 어려울 겁니다. 순위를 올리려면 최대한 빨리 올려야 해요. 지금이 양 팀 모두 적기구요.”

-플레이볼!

경기가 시작됐다.

마운드에는 고트의 선발 투수 이창훈이 올랐다.

타석엔 스콜피언의 리드오프 황기덕이 들어섰다.

“…….”

송석현은 황기덕의 타격 자세를 훑었다.

스트라이드는 넓지 않다.

약간의 오픈 스탠스.

히팅 포지션도 어깨 높이.

배트 손잡이도 노브에 가깝게 잡았다.

아웃사이드든, 인코스든, 하이 볼이든, 로우 볼이든 다 쳐 낼 수 있는 자세.

다른 사람이 이렇게 섰다면 어정쩡하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지만 다름 아닌 황기덕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중견수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타자.

약점이 없는 타자는 보통 눈에 띄는 강점도 없기 마련이라 투수가 제 공만 던진다면 오히려 더 쉬운 편이었지만 황기덕은 달랐다.

약점이 없지만 강점은 뚜렷하다.

어떤 코스든 쳐 낼 수 있다.

장타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이미 야수들은 전진 수비와 함께 3루 선상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장타를 내줄 각오를 한 시프트.

송석현은 초구로 몸 쪽 속구를 요구했다.

팡!

-스트라이크!

황기덕은 공 하나를 지켜봤다.

몸 쪽 공에 움찔한 기색조차 없었다.

투수의 초구를 보면서 어떻게 대응할지 계획을 세우는 중일 터다.

‘인 사이드, 하이, 포심.’

송석현이 타자의 몸 쪽을 가리켰다.

볼이 되더라도 몸 쪽 하나를 찔러라.

이창훈의 2구는 볼이 아니라 스트라이크로 들어갔다.

“투 스트라이크! 이창훈 선수가 공 두 개를 연달아서 스트라이크로 꽂아 넣습니다.”

“둘 다 몸 쪽으로 꽂아 넣습니다. 상당히 공격적이네요. 이창훈 선수가 칼을 갈고 나온 거 같습니다.”

투 스트라이크를 먹었지만 황기덕의 얼굴에 조급함은 보이지 않았다.

황기덕은 여간해선 삼진을 먹지 않는 타자다.

어떻게든, 어떤 상황에서든 때려 낸다.

송석현이 사인을 냈다.

이창훈은 잠시 고민하다 바로 와인드업 했다.

팡!

공은 미트에 들어갔다.

송석현이 미트를 내민 채 가만있었다.

잠깐의 정적.

심판이 콜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삼진이 나옵니다.”

“저 공은 정말 잘 들어갔죠. 코스가 좋았어요.”

“바깥쪽으로 들어가는 직구였습니다. 꽉 찬 직구죠.”

황기덕은 심판에게 한마디 물었다.

“빠진 거 아니에요?”

“…….”

심판은 대답하지 않았다.

황기덕은 아쉬운 표정을 짓고선 벤치로 돌아갔다.

“짜식이.”

이창훈은 송석현을 보며 웃었다.

바깥쪽으로 공 하나는 빠진 코스였다.

송석현은 공을 잡으면서 미끄러지듯 존 안에 미트를 끌어당겼다.

자연스러워서 미트질을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할 만큼 부드러운 연계 동작.

황기덕의 선구안은 좋았지만 송석현의 프레이밍이 한발 앞서 갔다.

“황기덕 선수가 잡혔지만 강균승 선수도 만만찮은 타자죠. 3할 30홈런만 있는 게 아니죠. 3할 30도루를 책임지는 2루숩니다. 잘 치고 발도 빨라요. 물론 수비도 잘하고요.”

“작전도 참 잘하는 선숩니다. 감독이 가장 사랑하는 유형의 선수예요.”

이창훈은 초구로 슬라이더를 던졌다.

강균승이 가까스로 배트를 멈추면서 볼.

제2구는 존 한복판의 커브였다.

-스트라이크!

“허를 찔렸습니다. 타이밍이 안 맞았어요.”

“빠른 공을 기다렸던 거 같은데 이창훈 선수가 역으로 갔어요.”

송석현이 체인지업 사인을 냈다.

강균승이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다.

황기덕이 아웃으로 물러난 만큼 자신이 출루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할 터다.

공격적으로 나오는 타자에게 좋은 공을 줄 필요는 없다.

탁!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강균승의 배트가 나갔다.

배트 끝에 맞은 공이 유격수로 향했다.

힘을 잃은 공이 통통 튀면서 유격수에게 흘렀다.

유격수가 대시하면서 공을 잡고 1루로 뿌렸다.

강균승이 다리를 쭉 뻗어 베이스를 밟고 지나갔다.

팡.

공이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심판이 외쳤다.

-세이프!

“세이프! 세이프가 나왔습니다. 강균승 선수의 빠른 발이 안타를 만들었네요.”

“지금은 유격수가 더 빨리 나왔어야죠. 주춤거리면서 한 발 늦은 게 화근이었습니다. 정영수 선수가 수비는 참 견실하게 잘하는데 과감함이 부족한 게 흠입니다.”

“이렇게 되면 발 빠른 선수가 1루에 잘 치는 선수가 타석에 있게 됩니다. 작전이 나와도 되고, 안 나와도 되고. 수비하는 입장에선 머리가 아프겠어요.”

“병살이 나오면 이닝이 끝나는 만큼 스콜피언은 어떤 방법으로든 2루로 가려 할 겁니다. 고트는 강균승 선수의 발을 저지해야 돼요. 송석현 선수가 어깨는 좋다지만 강균승 선수도 충분히 빠르거든요. 포수가 한 번이라 뜸을 들이다면 바로 세이프입니다. 과연 신인 송석현 선수가 이런 부담감을 이겨 내고 실책 없이 송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강균승은 야금야금 리드를 넓혔다.

이창훈은 곁눈질로 강균승을 바라봤다.

타석에는 좌타자 정대한이 들어섰다.

이제 갓 스물한 살이지만 이미 리그 최고의 스타 중 하나다.

데뷔 때부터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대구 아이돌로 떠올랐다.

모델을 연상시키는 큰 키에 8등신 비율, 짙은 이목구비와 호리호리한 몸매는 뉴스에도 오르내릴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1년 차부터 유명 여자 연예인을 만나면서 스캔들을 뿌렸고, 방송에도 자주 얼굴을 내비치면서 대한민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미남으로 손꼽혔다.

얼굴만으로도 유명세를 탈 만하지만 실력도 매우 뛰어났다.

데뷔 1년 차에 OPS가 0.9를 넘었고 20홈런 20도루에 1루 수비까지 완성형으로 평가받았다.

발 빠른 올라운더가 황기덕이라면 잘 치는 올라운더가 정대한일 거다.

콕 집을 약점 없는 타자.

어느 코스든 안타를 만들고, 20홈런, 30홈런도 가능한 타자.

성적으로 보자면 황기덕보다 더 조심해야 할 타자는 정대한이었다.

‘포심, 아웃사이드.’

송석현은 초구로 바깥쪽 빠른 공을 요구했다.

스트라이크가 아닌 조금 빠진 공.

이창훈의 공은 조금 더 많이 빠지면서 볼이 됐다.

강균승은 뛰는 대신 귀루했다.

“고트 배터리가 공 하나를 밖으로 빼면서 강균승 선수의 발을 의식했으나 타자나 주자 모두 속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피치아웃을 한 거나 다름없죠. 이러면 공 하나를 손해 보게 되네요.”

스콜피언 벤치에서 사인이 나왔다.

런 앤드 히트.

공 두 개를 연속으로 빼긴 어려우니 도루하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투수도 포수도 고트 벤치에서도 알고 있었다.

웬만해선 주자는 뛴다.

주자가 두려워 빠른 공을 선택하면 타자는 공을 고르기 더 쉬워진다.

알아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게 빠른 주자를 지닌 스콜피언의 저력이었다.

송석현은 고민 끝에 사인을 냈다.

이창훈은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 끝에 고른 이창훈의 공은…… 체인지업이었다.

“주자 뛰었습니다!”

스트라이크존으로 오는 빠른 공.

정대한이 힘껏 스윙했다.

공은 그대로 배트를 향해 오다가 아래로 떨어지더니 송석현의 미트에 박혔다.

송석현은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

송석현이 기합과 함께 2루로 공을 던졌다.

강균승은 이미 반쯤은 온 상황.

2루수도 베이스로 들어왔다.

강균승은 생각보다 빠른 포수의 동작에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베이스에 손을 뻗었다.

팡!

탁!

공을 잡는 소리와 함께 글러브가 손을 쳤다.

강균승의 손은 베이스에 닿아 있었다.

강균승은 흘러내린 헬멧을 들고 심판을 봤다.

심판의 손동작은…….

-아웃!

“아웃! 아웃입니다! 송석현 선수의 도루 저지 성공! 강균승 선수의 발이 빨랐지만 송석현 선수의 송구도 정말 빨랐습니다.”

“송석현 선수의 팝 타임이 이 정도였나요?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2초 안에는 무조건 들어오겠네요.”

“공도 정말 빨랐죠? 구속을 재 봤으면 좋겠네요.”

“이창훈 선수가 체인지업을 던졌는데 강균승 선수를 잡아냈다……. 송석현 선수의 어깨가 정말 무섭네요. 다른 팀에서 도루를 자제하는 이유가 있었네요. 저도 말로만 들었지 이 정도로 빠른 줄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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