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프닝
유선호의 말에 세 사람이 머뭇거렸다.
팽혜리를 모르는 사람이 여기 있을까.
아무리 선글라스를 썼다지만 팽혜리의 얼굴과 몸이 아니었다.
다른 곳이어도 수군거릴 이야긴데 여긴 호텔이다.
다들 우물쭈물하는 사이 김정률이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정문으로 가고 있었다.
네 사람은 누가 먼저 할 거 없이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어쩌죠?”
송석현의 물음에 유선호도 마른 입술에 침만 발랐다.
“일단 좀 있어 보자.”
그때 송석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큰 벨소리에 송석현은 놀라 얼른 전화기를 꺼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김정률이었다.
송석현이 유선호과 김인환을 번갈아 봤다.
“일단 받아 봐.”
김인환의 권유에 송석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음…… 잠깐만.”
“네?”
“잠깐만 기다려 봐.”
“네, 네.”
송석현이 전화기를 붙잡고 숨을 죽인 사이 누군가 불쑥 기둥 뒤로 고개를 내밀었다.
“뭐야. 여기서 뭐 해?”
김정률이 전화기를 든 채 네 사람을 보고 있었다.
* * *
“야, 그 벨소리는 너밖에 안 쓰는데 내가 모를 리 있냐?”
김정률이 웃으면서 송석현의 배를 쿡쿡 찔렀다.
“으이구,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아니 전…… 몰랐죠, 사촌동생분이신지.”
“그냥 물어보면 될 걸 아주 꼬롬하게 말이야. 형도 이상한 생각 한 거예요?”
“호텔에서 남녀가 돌아다니면 그리 볼 수 있지, 뭐.”
“참 나. 여기서 뭐 해요, 네 사람 다?”
“우린 밥 먹으러 갈라 캤다, 밥 먹고 버스 탈라꼬. 니도 같이 갈래?”
“전 먹었어요, 쟤랑 오늘 약속이 있어서.”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고.”
“잠깐만요. 야, 홍예라. 일로 와 봐.”
김정률이 로비에 서 있던 여자를 불렀다.
여자는 김정률이 손짓하자 네 사람이 있는 곳으로 왔다.
“여기 인사해. 다들 알지?”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동시에 네 남자 모두 숨을 들이켰다.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너 석현이 팬이라며. 이럴 때 얼굴 보고 하는 거지.”
“반가워요, 송석현 선수.”
“야 야, 선수가 뭐야, 선수가. 석현이라고 해. 나이 차이도 이모뻘이면서.”
“오빠.”
여자가 눈을 흘기자 김정률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 뭐.”
“사인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 종이가 없네. 같이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죠?”
“네, 괜찮습니다.”
“그럼 우리 사진 한 장 찍을까요? 제가 우리 송석현 선수 엄청 팬이거든요.”
김정률이 여자를 가리켰다.
“얘가 여태 야구 안 보다가 요새 얘 때문에 야구 본다니까. 참 나, 내가 겁나게 던질 때는 관심도 없더니.”
여자는 김정률의 말을 무시하곤 핸드폰을 꺼내 송석현과 사진을 찍었다.
한 방, 두 방, 세 방.
엑스트라로 전락한 유선호, 이지성, 김인환은 부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여자를 흘깃 쳐다봤다.
사진을 다 찍은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요새 경기 정말 잘 보고 있어요. 앞으로도 응원할게요.”
송석현이 여자의 손을 잡았다.
“네, 감사합니다.”
“정말 어리다. 이렇게 어린데 어쩜 그렇게 잘해요?”
김정률은 여자를 보며 말했다.
“가자, 이제. 나도 시간 별로 없어.”
“알았어. 갈 거야. 그럼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다음에 봬요.”
“그럼 다들 이따 버스에서 보자고. 빠빠이.”
김정률이 사촌동생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유선호는 뒷짐을 지더니 떠나는 여자를 아련하게 쳐다봤다.
“정률이 외가 쪽인가. 얼굴이 마이 다르네.”
“그렇죠? 엄청 미인이던데.”
“정률이 형이랑은 달라도 너무 다른데…….”
송석현은 손을 털고선 유선호를 바라봤다.
“식사 안 하세요?”
“해야지. 그래, 가자.”
식사를 하는 내내 이야기의 주제는 김정률과 사촌동생이었다.
외가 쪽이라고 해도 얼굴이 저렇게 다를 수 있느냐부터, 여태 저런 미인이 있는데도 왜 일언반구 한 번 없었는지 배신감 토로까지.
이들은 당장이라도 김정률을 붙잡아 신문할 기세였지만 유선호, 이지성, 김인환에겐 기회가 없었다.
원정 버스는 서로 다른 버스를 타고 가야 했으니까.
“맛있는 거 먹고 왔어?”
김정률은 같은 버스를 탄 송석현 옆자리에 앉았다.
“네, 오리 먹었어요. 맛있던데요?”
“오리. 오리 좋지.”
“다들 선배님한테 불만이 많아요, 왜 그런 미인을 숨겼냐고.”
“뭘 숨겨, 그냥 사촌동생인데.”
“다들 얼굴이 너무 다른 거 아니냐고…….”
“누가? 선호 형이?”
송석현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약속은 잘하고 오셨어요?”
“아, 그거? 뭐…… 잘한 거 같아.”
김정률은 우물쭈물하더니 대뜸 딴소리를 했다.
“생각해 보니 너한테 많이 미안하네.”
“저한테요?”
“혜리한테 들었는데 너랑 로미, 그때 이후로 별 진전 없었다며?”
“아…… 원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무슨 진전이에요?”
“아무것도 없긴, 저번에 스캔들 터졌을 때 네가 방송국에 과자랑 케이크 보냈다면서. 그것도 로미가 좋아하는 가게에서 샀다는데? 아니야?”
“그때 괜히 저 때문에 곤란해진 거 같아서 사과의 의미에서 보낸 거예요. 그 이후론 따로 연락하고 이런 것도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미안하다는 거야. 괜히 나 때문에 잘될 것도 안 된 거 같기도 하고……. 듣자하니까.”
김정률이 더 목소리를 낮췄다.
“로미가 너한테 마음이 있는 거 같던데.”
송석현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딴생각 안 해요. 그럴 여유도 없구요.”
“그래? 너도 관심 있는 거 아니야? 로미가 네 스타일이 아닌가?”
“스타일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은 다른 데 관심 둘 여유가 없습니다. 이제 1년도 못 채웠는데 딴생각할 짬은 아니죠.”
“그러냐? 하기야. 연애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하겠지.”
“제 걱정 하지 마시고 저 국수 먹여 줄 생각 하세요. 선배님은 빨리 결혼하고 싶으시잖아요.”
“안 그래도 오늘 커플링 보고 왔다.”
“커플링요? 아, 혹시 그럼 약속이?”
“응, 아무래도 여자가 보는 게 나으니까 사촌동생을 호출한 거지.”
“커플링 끼고 다니실 정도면 거의 공표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직 확정은 아니데 얘기는 하고 있어. 올 시즌 끝나면 뭐…… 음…… 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송석현이 작게 손뼉을 쳤다.
“축하, 축하. 축하드려요. 운동선수치곤 늦은 거죠?”
“조금? 이렇게 급전개가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네.”
“인연이라서 그런가 봐요.”
“인연……. 음, 그런가.”
김정률은 턱을 매만졌다.
“아무튼 정말 너 로미한테 관심 없지?”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은요.”
“자꾸 내가 미안해져서 말이야. 로미는 너한테 관심도 있다고 하니까.”
“그냥 좋게, 좋게 말해 주는 거겠죠.”
“아무튼 인연이 되면 어떻게든 만나게 되니까. 나도 혜리랑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
“알겠습니다. 제 걱정은 안 해 주셔도 돼요. 나중에 맛있는 국수 한 그릇 부탁드릴게요.”
“국수가 문제냐. 너는 내가 양복도 맞춰 줄게. 네가 1등 공신 아니냐.”
“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구에 도착하자 유선호와 김인환은 기다렸다는 듯 버스에서 내린 김정률을 에워싸곤 사촌동생에 대해 물었다.
김정률은 손사래를 치면서 두 사람을 피해 호텔로 뛰었다.
그날 저녁.
송석현은 노트북으로 경기 영상을 챙겨 보고 있었다.
전력 분석 보고서를 토대로 하나하나 체크하는 와중에 누군가 노크했다.
“네.”
송석현이 문을 열자 밖에는 유선호와 김인환이 서 있었다.
“그냥 있으려니까 뻑적지근해서 그런데 너도 함 방망이 돌리러 갈래?”
* * *
유선호가 두 사람을 데리고 간 곳은 대구의 한 고등학교였다.
유선호의 모교이자 지금도 명문 야구팀이 있는 학교로 유명한 곳이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유선호가 나타나자 학생들은 물론 감독, 코치들까지 와서 유선호와 인사를 나눴다.
유선호는 익숙한 듯 이들과 얘기를 나눈 후 김인환과 송석현을 가리켰다.
“같이 운동 좀 할라 카는데 괘안습니까?”
“송석현이랑 김인환이 아이가? 되지, 되지. 안 되겠나. 온 김에 아들한테 사인도 해 주고 기도 팍팍 넣어 주고 가라 캐라.”
“예, 그랄게요.”
학생들과 사진을 찍고 사인을 해 준 뒤에야 이들의 훈련이 시작됐다.
송석현은 원래대로 짧은 훈련을 마치고 쉬었으나 김인환과 유선호는 서로 누가 뒤질세라 스윙하고 또 했다.
송석현은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의 훈련 도우미가 돼 야구공 박스를 채워 줬다.
“이제 좀 쉬까?”
“네, 좀 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유선호와 김인환은 녹초가 돼 자리에 주저앉았다.
송석현은 음료수 두 개를 두 사람에 내밀었다.
“고맙다, 고마워. 아이고, 체력이 훅 딸리네. 시즌 중에는 관리하긴 해야 카는데.”
“선배님 원래 시즌 중에 훈련 많이 안 하시잖아요. 근데 오늘은 너무 많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송석현의 질문에 유선호가 숨을 헐떡이며 답했다.
“체력 때문이면 안 하는 게 맞는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시기가 아이잖아. 컨디션을 빨리 올려야지, 지금은 내가 민폐다, 민폐.”
“민폐라뇨. 선배님 오시고 타선이 확 바뀌었는데요.”
“잠깐이다, 잠깐. 어제처럼은 못해도 하루에 안타 하나 이상은 쳐 줘야 내 면이 서지 않캤나. 어제 잘한 흐름 이어 가려면 오늘 좀 빠따 돌려야지. 그리고 내일은 구일이가 올라온다는데 구일이 보통 빡센 게 아이다.”
“그래요?”
“가 스플리터가 아주 기가 막히게 들어온다. 구속이 줄고 나서 스플리터를 죽어라 연마했다 아이가. 스플리터 살발하데이.”
김인환이 한숨을 쉬었다.
“내일 또 헛스윙 많이 하겠네요, 전.”
“어쩔 수 없다. 좋은 투수들은 다 좋은 체인지업이 있으니까 잘 골라내야지. 아님 저번처럼 떨어지는 것도 쳐 뿌리든가.”
김인환이 송석현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떨어지는 공을 잘 치는 거야? 노리는 거야, 아니면 보고 치는 거야?”
“음…… 반반이죠.”
“후반양반도 아니고 반반은 뭐야?”
“상대가 떨어지는 공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거 의식하고 치니까 반반?”
“그래서 노리고 치는 거야, 보고 치는 거야?”
“타이밍상 변화구 타이밍이면 변화구 타이밍을 재고, 직구 타이밍이면 직구 타이밍을 재는 거죠.”
“변화구 노리다 직구가 오고, 직구 기다리다 변화구가 오면?”
“변화구를 노리다 직구가 오면 밀어치고 직구를 기다리다 변화구가 오면 당겨 치는데요?”
유선호와 김인환이 말없이 송석현을 쳐다봤다.
송석현은 눈을 깜박거리면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왜요?”
유선호가 김인환을 툭툭 쳤다.
“봤제? 참고할 걸 참고해야지.”
“그러게요. 누가 들으면 되게 쉬운 것처럼 말하네요.”
“이래서 내가 할 것만 하라는 거야.”
“네, 확실히 알겠습니다.”
송석현이 말했다.
“왜요? 뭔데요?”
“됐다, 마.”
“됐어.”
다음 날.
스콜피언과의 주중 3연전 첫 경기.
작전 회의는 이례적으로 길어졌다.
이번 주 일정은 스콜피언, 울브스.
함성훈은 회의 시작부터 강조했다.
“이번 스콜피언전은 첫 경기는 무조건 잡고 가야 돼. 오늘 경기는 불펜 총가동할 거야. 저쪽도 우리도 타이트한 경기가 될 거다. 한 점, 한 점이 중요한 만큼 욕심 버리고 기본에 충실하자고.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