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
쾅!
배트가 공을 때렸다.
공은 하늘로 높이, 높이 날았다.
밤하늘에 뜬 하얀 별.
관중이 숨을 죽이며 별의 낙하를 지켜봤다.
별은 경기장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담장을 넘은 별은 영영 제 모습을 감추며 사라졌다.
함성은 뒤늦게 터졌다.
“홈런! 홈런! 홈런입니다! 그랜드슬램! 만루 홈런입니다! 잠실의 가운데 담장을, 장외로 넘겨 버리는 어마어마한 홈런이 터졌습니다! 믿기시나요? 이게 보이십니까? 말도 안 되는 홈런이 터졌습니다!”
“제가 본 홈런 중에 역대 최장의 비거리 같습니다. 맞자마자 그냥 다이렉트로 꽂아 버리는 공이었습니다.”
“김인환 선수, 최근에 조금 주춤한다고 했는데 홈런 하나로 완전히 쇄신해 버렸습니다.”
“이건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홈런이에요. 이런 홈런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생기기 어려울 겁니다. 김인환 선수! 전인미답의 경지에 다다랐어요!”
김인환은 베이스를 밟을 때마다 몸이 둥둥 떠다녔다.
관중의 응원 소리가 몽환적으로 들렸다.
실상은 잠실이 터져 나갈 듯 관중이 비명과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우아아아아아아!”
“김인환! 김인환! 김인환!”
“꺄아아아악!”
자지러질 듯 놀라는 사람과 박수를 보내며 순간을 음미하는 사람까지.
들고 있던 맥주 캔가 던져지고 치킨 박스가 인파에 밀려 땅에 떨어졌지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고트의 팬들은 이미 김인환에 깊게 취했다.
짝짝짝짝!
송석현이 박수로 김인환을 맞았다.
김인환은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땠어?”
“죽이는데요?”
팽팽했던 경기 판도를 바꿔 버린 그랜드슬램.
페가수스 감독이 직접 마운드로 나와 김성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다.”
“네.”
김성훈은 말없이 마운드를 내려갔다.
벤치로 돌아온 김성훈에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김성훈도 수건으로 얼굴을 닦을 뿐, 푸념하지 않았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고, 주인공이 있으면 악당이 있는 법이다.
많은 경기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하던 김성훈이었기에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6회 초가 끝났을 때 정용욱이 벤치로 돌아왔다.
“체인지업으로 가자니까, 짜식이.”
정용욱이 김성훈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
김성훈은 아이싱 한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건 제 스타일이 아니잖아요.”
“스타일은 무슨. 그때그때 유두리 있게 가야지.”
“다음에 갚아 줄게요,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정용욱은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결과는 아쉽지만, 그게 김성훈이다.
자존심.
김성훈이 야구공을 꽉 움켜쥐었다.
* * *
“고진석으로 가죠.”
6회 4점 차.
고트의 감독 함성훈은 바로 필승조를 꺼내 들었다.
“고진석 선수가 나옵니다. 오늘 확실하게 잡고 가겠다는 거죠?”
“지금 불펜에 정홍민 선수와 홍대성 선수도 몸을 풀고 있습니다. 오늘 경기는 총력전이네요.”
“그동안 특급 불펜을 데려오고도 활용하지 못한다고 비난을 받았던 함성훈 감독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너무 아꼈죠. 불펜 투수를 아껴 주는 건 좋은데 좀 과하다는 평도 많았습니다. 물론 고트가 큰 점수 차로 진 경기가 많았던 것도 한몫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불펜 투수들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김정률 선수를 제외하곤 필승조 투수들이 전부 대기 중입니다.”
“페가수스 상대로 위닝 시리즈를 가져갈 수 있는 기횐데 이런 기회는 살려야죠.”
송석현이 미트를 팡팡 쳤다.
고진석이 마운드에 올라 연습 투구로 포심을 몇 개 꽂았다.
팡!
팡!
평균 구속 144km/h.
구속은 특별하지 않지만 미트를 파고드는 공 끝이 예사롭지 않다.
고진석이 포크볼을 던지겠다는 사인을 냈다.
턱!
연습 투구지만 송석현은 바운드된 공을 블로킹했다.
공이 일찍 떨어지긴 했어도 각이 날카롭다.
고진석은 송석현의 블로킹을 보곤 박수를 보냈다.
“좋아, 좋아.”
포크볼러에게 블로킹 잘하는 포수만큼 고마운 게 있으랴.
고진석은 타자들에게 제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아웃!
-아웃!
-아웃!
“세 타자 연속 삼진! 고진석 선수의 포크볼이 오늘 춤을 춥니다!”
“공 좋습니다. 올해 FA라서 공이 더 좋아진 거 같네요.”
“공 열두 개로 이닝을 끝내 버립니다. 고트에서 고진석 선수를 빨리 올린 보람이 있네요.”
“큰 출혈을 감수하고 트레이드한 이유가 다 있었군요.”
김성훈이 내려갔다지만 페가수스의 불펜은 녹록치 않았다.
6회에 올라온 장지훈은 송석현, 유선호, 최재완을 범타 처리하더니 7회에도 세 타자 연속 범타를 만들었다.
“후우, 페가수스는 구멍이 없네요, 구멍이.”
함성훈이 답답하다는 듯 목을 매만졌다.
배터리코치 김태우가 말했다.
“그래도 오늘 불펜 이렇게 끌어다 쓰면 내일은 더 수월할 겁니다.”
함성훈은 대답 대신 침음을 흘렸다.
장지훈은 페가수스 불펜에서 추격조로 분류되는 불펜이다.
포심과 슬라이더 단 두 가지 구질밖에 없는 전형적인 불펜 투수.
공은 빠르지만 투구 패턴이 단조로워 긴 이닝을 끌어가긴 어려운 투수다.
페가수스 불펜에선 말석에 있는 장지훈이지만 고트에 온다면 서너 번째 불펜 투수는 충분할 거다.
오늘 경기를 이기더라도 내일 경기엔 페가수스 필승조가 총가동될 수 있단 얘기다.
내일은 어떻게 해서든 스위프를 피하기 위해 더 이를 악물 거다.
“혹시 모르니까 상황을 봐서 백찬이도 몸 풀라고 해 주세요.”
“백찬이도요?”
“네, 오늘은 무조건 잡고 갑니다.”
뎁스의 차이는 효율로 차이를 줄인다.
지는 경기에는 전력을 아끼되 이기는 경기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전력을 동원한다.
8회 초.
고트의 타순은 다시 1번 타자 이지성부터 시작됐다.
탕!
“이지성 선수 안타! 안탑니다! 오늘 타격감이 좋은데요?”
“국가 대표 이지성 선수의 클래스는 어디 가질 않네요. 맞추는 건 정말 기가 막힙니다.”
페가수스의 대응은 빨랐다.
“투수 교체 들어가나요? 장지훈 선수가 내려가고 김의기 선수가 올라옵니다.”
“오늘 페가수스도 순순히 질 마음이 없나 봅니다. 4점 찬데도 타이트하게 가네요.”
김의기가 올라오자 고트 벤치에서도 사인이 나왔다.
김의기가 초구를 던지자마자 이지성이 2루로 뛰었다.
설진일은 초구로 들어온 커브를 간신히 건드려 진루타를 만들었다.
“김의기 선수가 초구를 커브로 택했네요.”
“허를 찌른 거죠. 발이 빠른 주자가 1루에 있죠? 타자는 외곽에 빠른 공을 던질 거라고 예측했을 텐데 역으로 커브를 간 겁니다. 저건 도루를 주더라도 안타는 주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던 거 같습니다.”
“도루를 안 줄 방법은 없었을까요?”
“도루를 내주지 않고 아웃 카운트를 올리면 최고죠. 하지만 최성연 감독은 고트가 작전을 걸 거라는 걸 예상한 거 같아요. 번트가 나오든 런 앤드 히트가 나오든 커브가 최선이었던 거죠. 존 하단으로 들어오는 커브는 번트 성공률이 가장 낮은 코스 중 하납니다.”
“그런가요? 보통은 몸 쪽에 빠른 공이 가장 좋다고 하지 않나요?”
“몸 쪽 빠른 공도 번트 대기 어렵지만 낮은 쪽에 들어오는 저런 브레이킹 볼도 번트 성공률이 굉장히 낮습니다. 번트를 대려면 배트를 수평으로 둬야 하는데, 낮은 코스는 배트를 수평으로 두기도 어렵고 회전이 많아서 정확한 코스로 보내기도 어렵거든요.”
“아, 그렇군요.”
“최성연 감독은 도루를 내주더라도 확실한 아웃 카운트 하나를 원했던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다음 타자가 김인환 선수 아닙니까? 김인환 선수 앞에 주자를 쌓아 두는 건 방지하겠다는 거겠죠.”
“8회 초, 1사 주자 2루에서 만루 홈런의 사나이 김인환 선수가 들어옵니다.”
김인환이 들어서자 그라운드에 묘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야수들은 다 한두 걸음 뒤로 몸을 뺐다.
김인환은 숨을 들이켜곤 타석에 들어섰다.
“변화구만 노려, 변화구.”
타격코치 강연태는 김인환이 대기 타석으로 나가기 전 김인환을 불러 변화구를 강조했다.
“쟤들 정면 승부 안 할 거야. 변화구만 노리고 있어. 좋은 공이 안 들어오면 그냥 거르고.”
김의기의 초구는 떨어지는 커브.
김인환은 그대로 걸렀다.
“김인환 선수, 공 하나를 일단 보냅니다.”
“김인환 선수도 그렇고 김의기 선수도 그렇고 신중하죠? 여기서 점수 차이가 더 벌어진다면 페가수스는 그나마 있는 추격 가능성도 사라지게 됩니다. 반대로 고트가 여기서 추가점수를 낸다면 쐐기점이 되는 거구요.”
정용욱은 김인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떨어지는 공에 반응이 없다.
고른 걸까, 아니면 초구를 거른 걸까?
김성훈의 체인지업에 반응했던 걸 보면 골랐을 확률은 적어 보인다.
그렇다면 역시 또 체인지업.
김의기는 손가락을 OK 모양으로 만들었다.
김인환이 힘은 무섭지만 떨어지는 공에 약하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약점을 보이는데 피할 필요가 있는가.
김의기가 던진 공은 스트라이크존 하단을 향해 가다 아래로 떨어졌다.
김인환의 배트도 돌았다.
고트의 타격코치 강연태는 시동이 걸린 김인환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약점은 극복하지 못하는 건가.
탕!
“우측 담장! 우측 담장! 우측 담장을~ 넘어! 갔습니다! 김인환! 잠실의 우측 담장을 넘기는 투런 포! 페가수스의 추격 의지를 꺾어 버리는 쐐기포를 뽑아냅니다!”
“방금은 거의 골프처럼 쳤죠? 떨어지는 공을 제대로 걷어 올렸습니다.”
“김의기 선수,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습니다. 공이 분명히 잘 떨어졌거든요.”
“떨어지는 공을 저렇게 걷어 올려서 잠실을 넘긴다……. 와, 역시 김인환 선숩니다. 힘은 최고예요. 힘은 말도 안 됩니다.”
페가수스의 최성연 감독이 눈을 감았다.
“오늘 의기로 끝내지.”
“네, 감독님.”
페가수스 불펜에서 몸을 풀던 선수들이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김인환이 벤치로 돌아오자 선수들이 헬멧을 마구 쳤다.
“오늘 날이야? 미쳤어?”
“김인환~ 오늘 한턱 쏴야겠는데~?”
투런을 맞은 김의기는 의기소침해져선 송석현에게 볼넷을 내줬다.
유선호가 뜬공을 치면서 아웃 카운트 하나를 늘렸지만 최재완과 오진영의 연속 안타로 송석현은 홈을 찍고 벤치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경기는 양 팀 서로 추가 점수 없이 7-0.
고트의 완승이었다.
MVP는 혼자 6타점을 싹쓸이한 김인환이었다.
“김인환 선수, 오늘 홈런의 비결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경기 인터뷰에 들어가자 아나운서가 비결을 물었다.
“비결은…… 음…… 인정인 거 같습니다.”
“인정이요? 어떤 인정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제 실력을 인정하고 들어갔습니다. 저는 석현이나 유선호 선배님같이 공도 잘 고르고 잘 치는 타자가 항상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부단히 노력했는데 그것만으론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제 실력이 따라 주지 않았거든요. 그동안 쭉 공을 잘 고르는 데에 집착했는데 그걸 버렸습니다. 못 치는 건 못 치는 거고 제가 칠 수 있는 건 잘 쳐 보자, 이렇게 마음을 먹고 들어간 게 잘 먹힌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칠 수 있는 건 잘 치자, 이런 마음이 오늘의 홈런을 만들었네요. 오늘의 홈런으로 위닝시리즈를 달성했습니다. 팬들도 많이 기뻐하는데요. 팬들에게도 한 말씀 해 주시죠.”
“네. 그동안 제가 많이 모자라서 팬 여러분에게 항상 죄송했습니다. 제가 멘탈도 약해서 주눅도 많이 들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더 답답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에 달라지진 못하겠지만 앞으로 더 열심히 경기에 임하겠습니다.”